설 명절-‘우리를 즐겁게 (기쁘게) 하는 것들’
생각 나름이다. 세상엔 우리를 즐겁게 하는 일도 도처에 있기 마련이고 기쁘게 하는 일도 수시로 만나게 된다. 그대 지금 밀린 일은 하나도 없는가. 그렇다면 나이 한 살 확실하게 더 먹게 되는 설 날이지만 어쨌든 사흘 연휴의 휴식만은 우리를 즐겁게 한다-고 생각하도록 하자. 우리의 삶에서 無爲의 일상도 참으로 소중하다는, 새삼스런 깨달음이 우리를 기쁘게 하지 않겠는가.
'우리를 술(酒)푸게 하는 것들’이라는 제목으로 써 올린 뒷메의 횡설수설 에세이를 보고나서 안톤 슈나크의 산문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전문 그대로 상재해 준 우리 친구 추동의 순발력이 우리를 즐겁게 한다. 화동시절 국어시간에 공부한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의 그 영롱한 어휘와 문장은 우리의 순수한 감성에 얼마나 속속들이 스며들었던가. 그러나 이제 나이 들어 그 구절들을 거꾸로 패러디 해 볼 수 있는 여유가 우리를 즐겁게 한다.
안톤 슈나크의 산문은 사실상 첫 구절부터 잘못됐다. 왜 우는 아이로 부터 슬픔의 연상 작용을 풀어갔는가. ‘웃는 아이는 우리를 즐겁게 한다’ 로 글을 시작했으면 되는 게 아니었던가. 그렇지 않은가. 웃는 아이의 그 천진한 모습이야 말로 가장 빛나는 축복인데 그 아이가 우리의 손자 손녀라면 더 말 할 나위가 없다. 고운 한복을 앙증스럽게 차려입고 설날 아침에 애비 에미와 함께 찾아와 할아버지 할머니 품에 뛰어들며 깔깔대는 우리 아이들, 이윽고 세배 돈을 달라며 내미는 그 놈들의 새하얗게 작은 손바닥이 우리를 얼마나 기쁘게 하는가.
안톤 슈나크는 어째서 동물원 철책에 갇힌 범의 초조- 불안만을 눈여겨보고 슬픔을 말하는가. 작년에 순산한 새끼를 거느리고 느린 발걸음으로 어슬렁거리는 어미 범의 자태에서 생명의 영속성을 확인하는 기쁨을 느낄 수도 있는 게 아닌가. 서울 대공원 나들이 길에, 데리고간 다섯 살 짜리 손자의 손을 잡고 이미 늙어버린 아내와 함께 동물원을 둘러 보았던 몇년전 어느 이른 봄 날의 하오를 기억하시는가. 그 때 그대의 기쁨은 얼마나 컷던가.
喪家에서 상주가 들려주는 고인의 ‘善終’ 모습이 우리를 기쁘게 한다. 고인의 享年은 95세, 그 분은 운명하시던 전날 저녁까지 거실에서 TV로 ‘지붕 뚫고 하이킥’을 웃으시면서 시청하셨다는 것이다. 선친의 인생과 그 마지막 길을 조용히 설명하는 맏 아들의 낮은 음성은, 부족했지만 그런대로 자식된 도리를 했다는 안도감에서 나오는 게 아니겠는가. 문상 온 친구들로부터 소주 한잔을 받아 마시고 다시 빈소로 돌아가는 그의 묵직한 뒷모습이 우리를 기쁘게 한다.
웨딩드레스를 곱게 차려 입은 딸을 데리고 주례 앞으로 다가가는 회색 머릿결 친구의 ‘늙은 발걸음’과 흐뭇한 표정- 똑 소리 나게 영민하고 눈부시게 예쁜(예뻐 보이는) 딸이 나이 서른 넘도록 결혼 할 생각을 안 한다고 그 친구는 그 동안 얼마나 투덜대곤 했던가. 혼례가 끝난 뒤 딸과 사위를 대동하고 하객 친구들의 식탁을 순회하며 싱글벙글하는 그의 벗겨진 이마, 거기에 희미하게 맺힌 땀방울이 우리를 즐겁게 한다.
가끔 심한 가슴 통증을 유발하던 부정맥 증상이 비교적 간단한 시술로 치유되어 나흘 동안의 병실 침대를 떠나 귀가 하던 날, 집 거실을 환하게 비추는 오후의 햇살이 우리를 기쁘게 한다. 그리고 며칠 후 가까이 사는 동문 친구와 단골 음시점에서 만나 다시 마시는 막걸리 한잔의 시원한 맛이 우리를 즐겁게 한다.
56회 졸업 50주년 기념행사를 계기로 여기저기에서 나오는 화동언덕 시절, 그 추억의 사진들이 우리를 즐겁게 한다. 그 시절 우리들의 모습은 얼마나 밝고 영혼은 얼마나 순수했던가. 오랜 세월동안 앨범첩이나 책갈피에 묻혀 빛 바랜 그 사진들을 꺼내어 들여다 보는 동안 잔주름진 입가에 그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떠오르는 잔잔한 미소가 우리를 즐겁게 한다.
우리들의 개인적 개별적 즐거움이나 기쁨뿐만이 아니다. 대한민국이 우리를 즐겁게 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망국으로부터 100년, 동족상잔의 전쟁으로부터 60년, 우리의 친구 박동훈을 떠나가게 한 '독재타도' 의거로부터 50년- 시련과 도전으로 이어진 험난한 ‘역사의 능선’을 숨 가쁘게 달려와 신생 독립국 가운데 유일하게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한 조국의 현대사가 우리를 즐겁게 한다. 땀 흘리며 일했던 우리의 50여년-보람으로서 되돌아 볼 수 있는 우리들의 '과거'가 우리를 기쁘게 한다.
대한민국의 산하가 우리를 즐겁게 한다. 추동의 어린 외손녀가,아뻐와 함께 주파하고 나서 카페에 사진으로 올리는 백두대간의 장엄함, 장항선 열차의 차창으로 내다뵈는 서해안 지방의 非山非野, 설악- 지리- 한라산으로 이어지는 우리 땅의 靈峰들, 홍도와 독도와 한려수도- 그 뛰어난 경색의 산하를 통해 애국을 가슴으로 느끼는 순간이 적지 않다는 56 산우회 친구의 조국예찬이 우리를 즐겁게 한다.
김연아가 우리를 기쁘게 한다. 밴쿠버에서 다시 보여 줄 연아의 그 아름다운 모습, 그리하여 또 한 번 국민에게 전해 줄 그 아이의 승전보를 기다리는, 소년 같은 설레임이 우리 모두를 즐겁게 한다. 경기 시작 첫날부터 금메달을 국민에게 안겨 준 쇼트트랙 선수들의 절묘한 경기 모습 , 예상치 못한 은메달을 목에 건 이승훈의 환한 미소가 우리를 실로 눈물겹도록 기쁘게 한다. 올림픽과 월드컵을 개최한 국민적 역량, 그에 대한 긍지로서의 회상이 우리를 새삼 즐겁게 한다.
G20 정상회의 서울 개최 결정, 두바이 원전 수주 성공, 삼성전자-LG-현대차의 수출 증가, 포스코 용광로에서 쏟아지는 쇳물, 우리 친구 민계식의 주도로 세계 1위의 조선국이 되게 한 현대 중공업 공사장, 거기서 진수하는 대형 컨테이너선의 위용이 우리를 기쁘게 한다. 컴퓨터 자판위 한글 자음과 모음의 편의성, 뉴욕에서도 인기라는 김치와 불고기와 비빔밥, 韓流의 확산, 쎅시 미녀 김혜수와 야수 같은 유아무개의 연애 소식, ‘소녀시대’의 현란한 춤, ‘야동’을 즐겨보는 늙은 탤런트 이순재의 천진함...이 모든 것들이 우리를 즐겁게 한다.
'인생은 이별연습'이라는 어느 산문집 속 한 구절을 빌어와 인간의 한계가 ‘우리를 술푸게 한다’고 쓴 뒷메의 푸념은 틀렸다. 누구의 유서 구절처럼 죽음도 자연의 한가닥일 뿐임을, 불타는 듯한 황혼이야 말로 서서히 빛을 발하는 日出보다도 오히려 장려하다는 것을 그는 왜 도외시 하는가. 耳順을 지나 從心의 연륜에 이른 오늘까지도 매일 술이나 푸고 세상을 향해 핏대를 올리는 그를 나무랄 수 있는 친구들의 의연함이 우리를 기쁘게 한다.
早春의 陽光이 우리를 기쁘게 한다. 매섭던 추위가 한물가고 나면 곧 집 마당 한 쪽에서 보일 듯 말듯하게 드러나는 복수초는 분명히 봄이 다시 오고 있음을 가장 먼저 알려 줄 것이다. 萬像의 생명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한 복수초의 그 가녀린 연두색 잎 새 하나가 해마다 우리를 기쁘게 한다
오늘은 설날 아침! 귀성길이 그다지 혼잡하지 않다는 TV 보도가 우리를 기쁘게 한다. 한복을 일제히 차려 입고 TV를 통해 갖가지 노래와 개그와 몸짓을 보여주는 연예인들이, 그래도 우리를 즐겁게 한다. 설 연휴 동안만은 TV의 프로 편성을 이해해 주기로 하자. 그동안의 '저질'과 '막장'까지를... 온갖 추함과 각박함으로 채워진 세상이지만 그래도 희망은 있다는 '전망'을 긍정하도록 하자. 오늘 이 설날에는...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 왔고 지금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즐거움이고 기쁨이라고 겸허한 마음으로 감사하자. 그렇다. 우리의 喜怒哀樂은 모두 생각하기 나름이다. 謹賀 庚寅新年!!!
첫댓글 몇글자 수정하다가 서툰 컴퓨터 실력 때문에 몇분의 소중한 댓글까지 날려 보내고 겨우 겨우 글을 찾아 다시 올렸습니다. 댓글 쓰신 분들께 정중하게 사과들임!
뒷메의 글을 읽다 보면 안톤 슈낙인가 슈낙크인가는 모르겠지만 그글보다 더좋은걸 왜 고등학교 교과서에 올리지 않지???
그러게 말입니다.'국어 교과서 개정하라'(전교조 구호)ㅋㅋ
ㅎ ㅎ , 몇일 전 술(酒)푸게 하시는 글을 올리시더니, 이젠 즐겁게하는 일들을 . . . ! 庚寅新年엔 즐거운 일들만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謹賀 庚寅新年 !
고맙습니다.
글의 내용이 술(酒)푸게 하던지, 슬프게 하던지, 기쁘게 하던지, 화나게 하던지 가리지 않고, 나는 필자나 친구가 흐믓해하는 모습을 연상시키는 글을 만날 때면 항상 기쁘고 즐거우며 젊어짐을 느낀다오. 금년에도 뒷메의 喜怒哀樂에 관한 글을 많이 기대하오.
허툰 소리 글로 쓴다고 비아냥거릴 사람도 있을텐데요?
초 이틋날 따스한 햇살도 나를 기쁘게하고 앞으로도 계속 맘 조리는 일 없이 초가집 사랑방에서 막걸리 잔을 나눌 수 있다는 뒷메의 전갈도 역시 나를 기쁘게 한다. 뒷메가 소주는 마다하고 약한 술로 돌아서게 되었으니 이제 소주 옹근 두 병을 다 마시게 된 기쁨, 역시 또 하나의 즐거움.
雪白 松愈靑!(두보시 패러디)
燎倒新停濁酒杯, 아니지, 燎倒新停眞露杯~<두보시 패러디>
오늘 여기 위니펙은 아침 온도가 섭씨 영하 20도입니다. ㅎ ㅎ ㅎ ! 그런데도 해가 길어져서 _ 날이 일찍 밝았고 _ (봄이 곧 오려나 ? ), 밝은 햇 빛에 푸른 하늘이 _ , _ , 따뜻한 옷을 입고 걷는 기분 _ , 들이 모두 즐겁습니다. 한반도 금수강산에 사시는 여러분들은 더 즐겁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
겨울 추위가 심한 해일수록 봄 햇살은 비례해서 더 따듯하게 느껴지는 법이지요.오는 5월에 무심헌님의 그 온화한 얼굴 다시 볼수 있게 되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