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운門云 도일설倒一說
『벽암록』 14장은 <대일설對一說>, 15장은 <도일설倒一說>이다.
본문은 “승문운문僧問雲門 불시목전기不是目前機 역비목전사시여하亦非目前事時如何
문운門云 도일설倒一說”이다.
한 중이 이렇게 묻는다.
“눈앞에 있는 세계나 눈앞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한 세계가 불교가 아닙니까?”
이때에 운문은 불교의 교敎 자도 모르는 이 돌중에게 돌아가라고 한번 소리를 지른다.
네 정신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얼빠진 소리 좀 작작하고 네 생각을 뒤집어엎으라는 것이다.
도일설倒一說, 세상 사람들이 가진 생각을 뒤집어엎어야 석가의 생각이 된다.
석가는 세상을 떠난 사람이 아니라 세상에 들어온 사람이다.
석가는 이상세계를 사는 사람이 아니라, 현실세계를 사는 사람이다.
물론 이 현실은 이상을 지나온 현실이다.
이상세계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상에서 다시 돌아온 현실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현실을 떠나 이상으로 간다.
시골을 떠나 서울로 올라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일단 이상에 다다르면 현실로 되돌아갈 생각은 안 한다.
한번 이상에 도취되면 이상의 술에서 깰 생각을 안 한다.
이상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가야 이상에 갔던 보람이 있을 터인데
세상에는 학교에 입학만 하지 졸업을 못하는 학생이 얼마나 많은가.
교회에 입교만 하지 졸업 못하는 교인이 얼마나 많은가.
일생 학생이요, 일생 교인이다.
밤낮 낙제만 거듭하여 끝내 졸업할 줄 모르는 낙제생들에게 운문은 도일설이라고
소리를 지른다.
학교도 졸업하고, 교회도 졸업하고, 종교도 졸업하고, 철학도 졸업하고,
아무튼 졸업하라는 것이 석가의 가르침이지,
입학만 시켜놓고 자연에 관하여, 인생에 관하여, 신에 관하여 밤낮 설법만 하고 있는 것이
석가의 가르침이 아니다.
석가란 별것이 아니다.
열반을 졸업하고, 극락을 졸업하고, 영원히 사바세계에서 중생과 같이 신음하고,
중생과 같이 고민하고, 중생과 같이 죽어가는 베 서 근, 그것이 부처이다.
오늘도 졸업하고, 내일도 졸업하고, 죽고 죽어 매일 죽자는 것이 석가의 도다.
살자는 것이 아니다. 도일설,
죽자는 것이다.
입학하자는 것이 아니다.
졸업하자는 것이다.
밤낮 부처가 무엇이냐고 야단들 하지 마라.
부처를 졸업해 버릴 수 없을까?
어떤 사람은 부처라는 말만 들어도 귀가 더러움 탄다고 강물에 가서 씻었다고 한다.
뜻을 알았으면 말은 잊어버리고 말아야지,
밤낮 불교에 붙어 있으려고 하면 옛날 세상에 붙어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쇠사슬로 매어 있는 것이나 금사슬로 매어 있는 것이나 무엇이 다르랴.
모두 매어 있기는 일반이 아니냐.
생生에서 해탈만 해서는 안 된다.
사死에서부터 다시 해탈해야 한다.
생사生死를 모두 초월해야 하는 것이 부처다.
현실을 떠나서 이상으로 가고, 이상을 떠나서 다시 현실로 돌아올 때 참 부처는 형성된다.
석가에 대립하여 이상세계에 올라가는 것을 대일설이라고 하면,
다시 산꼭대기를 떠나서 시냇물이 흐르는 마을로 내려오는 것이 도일설이다.
대일설對一說, 도일설倒一說은 둘이 아니다.
둘이면서 하나다.
서울에 와서 공부하고 다시 시골로 돌아가는 지성인이 많아야 농촌이 깰 수 있는 것처럼
이론의 세계에서 다시 현실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 도일설이다.
대일설이 지혜라면 도일설은 자비이다.
열반부주涅槃不住의 보살이 되어 일체 중생이 성불하기까지는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보살원이야말로 대승불교의 극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을 초월한 세계에 대해서 말해 달라는 중의 물음에 대하여
운문의 도일설은 천지를 뒤집어엎는 대격동이 아닐 수 없다.
설두는 도일설을 한없이 칭찬하여 찬송을 부른다.
“도일설분일절倒一說分一節 동사동생위군결同死同生爲君訣 팔만사천비봉모八萬四千非鳳毛
삼십삼인입호혈三十三人入虎穴 별별別別 요요총총수리월擾擾悤悤水裏月.”
도일설, 네 생각을 뒤집어엎으면 석가의 생각이 분명해질 거야.
이 속세에 살면서 중생과 같이 죽고, 같이 사는 것이 석가의 비결이야.
석가의 제자가 팔만 사천이나 된다고 하지만 그들은 석가의 참뜻을 안 사람들인
봉황새가 아니야.
석가의 참뜻을 안 사람은 가섭 한 사람과 그의 후계자 달마까지 28명,
그리고 중국의 혜가 2조부터 혜능 6조에 이르는 5명과 합하여 33명뿐이다.
그 사람들만이 범을 잡기 위해서 범굴에 들어간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특별할 것도 없지만 하여튼 그들은 하늘에 떠있는 달님이 아니다.
바람소리 요란하고 미친 듯 날뛰는 파도 속으로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주려고
물속에 뛰어든, 물속의 달님들이다.
하늘의 달이 아니다.
대일설을 뒤집어엎은 물속의 달님이다.
석가를 졸업해서 세상으로 뛰어 들어가지 못하고 달을 가리키는 막대기를 쫓아다니는
강아지처럼 밤낮 부처님만 찾고, 밤낮 염불로 세월을 보내는 맹추들이 너무 많다.
그들을 위하여 운문은 이런 소리를 했다.
“세존초생하世尊初生下 일수지천一手指天 일수지지一手指地 주행칠보周行七步
목고사방운目顧四方云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사운師云 아당시약견我當時若見
일봉타살一棒打殺 여구자끽각與拘子喫却 귀도천하태평貴圖天下太平.”
이 말이야말로 진정으로 자유를 사랑하는, 불교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준다.
만약 내가 석가 탄생 시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잘났다고 고백하는 것을 들었다면,
석가를 몽둥이로 박살을 내서 개밥으로 넣어주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세상에 폭언이 있다면 이 이상의 폭언이 없을 것이고,
세상에 불경不敬이 있다면 이 이상의 불경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말이 없었더라면 불교는 영원히 우상숭배가 되고, 내세종교가 되었을 것이다.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은 석가에 한한 것이 아니다.
일체 중생이 실유불성悉有佛性이요, 초목국토가 모두 부처 아닌 것이 없는데
건방지게 조그만 것이 무엇이 잘났다고 손을 들고 야단쳤을까.
월간 思索 제58호 (1975년 8월 1일 발행)에서 발췌.
첫댓글 종지를 잃으면 모든 생각과 주장이 위험하다. 불립문자만을 주장하는 것을 일부 비판한 것은 종지를 잃을까 해서다. 이 공안은 초탈도 세속도 모두 찾을게 못되니 쌍차쌍조해 어디에 집착 없는 마음을 내라는 것이다. 도일설인들 병자에게 약이 않되면 무슨 소용이랴!!! 깨어 있지 못한 자를 깨우는 것이 방이요 할이오 한 주먹이다. 산은 푸르고 물은 흐르는 소식을 아는가!!! 아재아재 바라아재 바라승아재 모지 사바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