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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인물들에 대한 작은형제회 유수일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주교님의 묵상글 (아담부터 다윗왕) 입니다.
한주에 한 인물씩 올리겠습니다.
성경의 인물들이 우리에게 주는 삶의 교훈
1. 인류의 첫 사람인 아담과 하와
1) 천지창조(창세기 1, 1-25): 우리가 건물을 지을 때 가장 중요한 일은 그 건물의 기초를 바르고 튼튼하게 닦는 일이다. 만일 기초가 허술하면, 그 위에 세우는 건물이 아무리 멋있게 보여도 허물어지거나 뒤틀려 쓸 수 없게 된다. 우리 인생도 아무리 좋은 생활 수단이나 처세술을 많이 갖고 있다 해도, 인생의 기초가 되는 것, 즉 나는 누구이며, 왜 여기 살고 있으며,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 가하는, 인생의 근본에 관한 확신이 없으면 안 된다.
창세기서는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1,1).”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신. 구약 성경 전체의 최초의 말씀이며, 성경을 꿰뚫는 중심선이기도 하다. “한 처음에”란 단순히 시간적인 처음을 말할 뿐 아니라 인생의 기초를 뜻하는 것이며, 인생의 궁극적이고 근본적인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느님은 창조주이시며, 이 세상과 인간은 하느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과 인간을 초월한 참으로 궁극적인 것, 근원적인 것, 즉 창조주를 경외하는 일이야말로 인간에게 제일가는 지식이다. 잠언 1, 7은 말한다. “주님을 경외함은 지식의 근원이다.” 그리고 코헬렛서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말한다. “마지막으로 결론을 들어보자.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들을 지켜라. 이야말로 모든 인간에게 지당한 것이다(12,13).”
창세기 1장에는 하느님께서 엿새 동안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일이 기록되어 있다. 첫째 날엔 “빛”(3-5), 둘째 날엔 “궁창”(6-8), 셋째 날엔 “땅과 바다와 식물”(9-13), 넷째 날엔 “천체”(14-19), 다섯째 날엔 “새와 고기”(20-23), 여섯째 날엔 “동물과 인간”(24-31)이 질서정연하게 창조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천지창조 이야기가 현대 자연과학의 우주론과 모순된다는 점에서 의문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우주의 물질 생성을 증명하는 과학서가 아니라, 우주관, 나아가서는 인생관을 시적으로 표현한 종교 문학인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천지창조 이야기를 현대 과학으로 분석 비판하는 것도, 또 현대 과학으로 반증하려는 것도 무의미한 시도가 된다. 자연과학이 규명하려는 것은, 자연 현상의 생성 과정에 관한 객관적인 사실을 밝히는 것이다. 그에 반해서,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천지창조 이야기는 천지의 기원이라는 인류 공동의 관심사를 주제로 해서 이 세상의 존재나 의미, 인간이 사는 목적에 관해서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이 창조 이야기에는 몇 가지의 기묘한 표현이 있는데, 오히려 그것을 해명함으로써 이 이야기가 나타내려고 하는 신앙의 진리를 밝혀 볼 수 있다.
이 창조 이야기에서 먼저 “빛"이 창조된다(3-5). 잘 주의해 보면, 16절에서 ”하느님께서는 큰 빛물체 두 개를 만드시어, 그 가운데에서 큰 빛물체는 낮을 다스리고 작은 빛물체는 밤을 다스리게 하셨다. 그리고 별들도 만드셨다.“고 하셨으며, 그것은 태양과 달과 별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첫째 날에 처음 창조하신 빛이란, 태양, 달, 별 등의 천체를 비추는 빛과는 다른 빛이다.
역사적 연구에 의하면, 제 1장의 천지창조 이야기가 씌어진 것은 기원전(BC) 5세기 경이며, 그 사상은 그보다 조금 전에 형성된 것이라고 한다. 그때는 이스라엘 민족 역사 가운데서 가장 어두운 시대였다. 나라는 망하고 많은 사람들이 바빌론으로 포로가 되어 잡혀가서 고난을 겪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곳은 이방지역인 동시에 다신교와 우상숭배가 지배하는 “이교도의 땅”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그 어둠 속에서 오직 한 분이신 창조의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은 반드시 자기들을 지키시며, 이 고난에서 해방시키시어 주시리라는 기대와 희망으로 살았고, 거기에서 “빛”을 발견한 것이다. 따라서 이 “빛”은 하느님의 구원의 빛이며, 하느님의 “영광”이라고 하는 빛이었다(이사야 60, 1-3).
이 빛이 비출 때, 이 세상을 덮고 있는 어둠은 사라지고 모든 것이 뚜렷하게 보이게 되며, 그 존재의 의미가 밝혀지는 것이다.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2).” 이러한 혼돈 상태에서 “빛이 생겨라.”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빛이 창조되고, 모든 것이 질서 정연하게 모양을 갖추어 갔다. 이 빛은 그 뒤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9,5).”라고 선언하신 예수님에 의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비추고 있는 것이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날이 지났다.” 이 기묘한 표현은 매일의 창조를 매듭짓는 말씀으로 여섯 번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보통 하루가 아침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했는데, 유대인들은 하루는 저녁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하였다. 왜 이런 독특한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바빌론에서의 포로 생활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본다. 그들은 인간적 구원이 전혀 없는 고난 속에서 오직 “주님을 기다리는” 믿음으로 희망의 아침을 대망한 것이다. “나 주님께 바라네. 내 영혼이 주님께 바라며 그 분 말씀에 희망을 두네. 파수꾼들이 아침을 기다리기보다 내 영혼이 주님을 더 기다리네(시편 130, 5-6).”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이 창조 이야기에 반복해서 사용되는 특징적인 표현은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는 구절일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창조하신 만물을 보시고 “좋다”고 하셨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간의 눈에 그것이 아무리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보일지라도 하느님께서 창조하셨으며, “좋다”는 축복을 받은 것이다. “오늘 서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마태 6, 30)”라고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처럼, 모든 것은 하느님의 축복 가운데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인간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자연사물이나 동물을 함부로 파괴하지 말도록 가르치고 있다.
동시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무리 훌륭하고 놀라운 것일지라도 그것을 신성시하거나 숭배하는 대상으로 삼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느님의 “피조물”이며, 유일한 것,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체나 자연, 동물이나 식물 등 이 세상의 만물에는 하느님께서 “좋다”고 하신 깊은 의미와 동시에 하느님의 피조물로서의 유한함이 있음을 배울 수 있다.
2) 하느님의 모습으로: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1,27).”
그리스 신화에 “스핑크스의 수수께끼” 이야기가 있다. 에디프스가 데바이 마을에 왔을 때, 인간에게 수수께끼를 거는 괴물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밤마다 바위 위에 나타나는 괴물은 지나가는 사람에게 수수께끼를 물어 그것을 풀지 못하면 잡아 먹는데, 이제까지 아무도 그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였다. 그 이야기를 들은 에디프스는 곧 달려가 그 괴물을 만났다. 얼굴은 인간(여자)이고 몸집은 사자, 그리고 날개를 가진 이 괴물이 수수께끼를 걸었다. “아침에는 네 발, 낮에는 두 발 그리고 밤에는 세 발로 걷는 것이 무엇이냐?” 에디프스는 곧바로 “그것은 인간이다. 인간은 어려서는 두 손과 두 발로 기고, 더 자라서는 두 발로 걸으며, 늙어서는 지팡이를 짚고 걷는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이 괴물은 영의 힘을 잃고 바위에서 떨어져 죽었으며, 그것이 스핑크스가 됐다는 이야기가 있다.
창세기는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1, 27; 5,1). 하느님의 모습이 무엇인가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그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표현이 사용된 역사 상황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1장의 창조 설화가 나온 것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기원전(B.C) 5세기 중엽이며, 이스라엘 민족의 바빌론 포로 생활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고대 동방 세계에서는 “하느님의 모습”은 “왕”의 칭호로 사용되었으며, 보통 인간은 신들에게 봉사하기 위한 존재라고 생각되었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포로들이었으니, 인간이하의 존재로 취급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은 왕에게만 사용되는 “하느느님의 모습”이라는 칭호를 자기들에게 적용했던 것이다. 왕이건 노예건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이며, 남자와 여자의 구별 이외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고,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인류의 가장 오랜 “인권선언”이라 할 수 있으며, 이 선언은 포로로서의 암흑의 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인간으로서의 자부심을 깨닫게 하고 희망을 갖게 하는 힘이 되었으며, 반대로 바빌론 왕이나 통치자들에 대해서는 그 정치적 지배에 대한 도전장이 된 것이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다는 의미는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어 하느님의 “특별한 피조물”로서 축복받았음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내용은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리라(1,28).”는 것이다.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자연이나 동물을 다스리고 관리할 특권과 지혜와 능력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이 함부로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자연과 생물을 정복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라 하느님께서 좋다고 여기시는 이 지상 모든 것을 바르게 관리할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이나 생물을 신으로 숭상하는 물신 숭배나 미신을 쫒아버리고 합리적인 생활을 갖게 하는 진리이다.
그런데 흔히 “하느님의 모습”이라는 것을 손발을 가진 육체 형태로 생각하기 쉬운데, 성경에서는 하느님께서 창조주이심과 그분은 “볼 수 없는 분이심”이 강조되고 있다(신명 4,12;15,23;23,5). 라틴어 성경에는 Imago(영어로는 “image")로 번역되어 있으므로, 그것은 인간이 하느님을 닮았으며, 하느님과의 깊은 ”관계“에서 창조되었다는 의미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거기에 ”응답하는 자“로서 ”책임 있는 주체“로서 창조되었다. 이것이 ”인격“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으로써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어(26)”, 인간끼리도 서로 “응답하는 자”로서 인격적으로 사귀도록 명령하고 있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1,26).“의 ”비슷하게“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좋은 것을 만듦으로써 하느님의 창조에 동참할 수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창세기서는 하느님께서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이렛 날에 쉬셨다(2,1-2).”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소중히 여기는 “안식일 규정(출애 20,8-11)”의 기원이다. 율법에 충실한 유대인들은 이 규정을 글자 그대로 지킨다. 오늘 전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가 시행하는 제도인 6일 일하고 하루 쉬는 제도나 5일 일하고 이틀 쉬는 제도 등은 사실 성경의 이 규정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교회에서 성직자나 수도자가 갖는 안식년 제도도 여기에 기원한다. 우리에겐 일과 휴식(여가) 간의 균형이 필요하다. 휴식 없이 일에만 매달리는 것도 육신과 정신의 건강에 해가 되지만, 반대로 일을 소홀히 한 채 휴식에만 집착한다면, 육신의 건강은 나아질지 몰라도 게으름에 빠져들어 정신도 피폐해지고 현실의 삶은 비참해진다. 일 중심 자세도 문제이지만, 여가를 빙자한 게으름은 패망의 지름길로서 하나의 대죄가 된다. 우리 한국인들이 거의 공통적인 장점 중의 하나가 일을 열심히 하는 “근면성”이다. 제 눈시울을 언제나 적시어 주는 이야기의 하나가, 온갖 역경을 겪으면서도 자녀들을 위해 또 가정을 위해 땀 흘려, 병이 들 정도로 일하는 한국의 아버지 어머니들의 이야기다.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2,3).”는 것은, 이 날을 육체의 휴식만이 아니고 일상생활에서 떠나 창조주를 기억하고 그분께 찬미와 감사의 예배를 드리면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친교를 가져 “하느님의 모습”을 새롭게 자각하고 그에 합당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 되는 날로 삼기 위함이다.
3) 아담과 하와의 창조(2, 4-25) 및 그들의 범죄와 추방됨(3)
우리가 자세히 살펴보면 창세기 1장과 2장에는 두 가지의 창조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곧 1, 1-2, 3까지 한 개의 창조 이야기가 나오고 2, 4-25에 두 번째의 창조 이야기가 나온다. 이 두 부분은 모두 창조 이야기이지만, 1장의 첫 마디가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반면, 2장 4절은 “주 하느님께서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느님의 호칭이 “하느님”과 “주(야훼) 하느님”으로 서로 다르고, “하늘과 땅”이 “땅과 하늘”로 다르고, 1장에서는 인간이 맨 마지막에 창조되었는데 2장에서는 맨 처음에 창조되었다. 이렇게 기록된 것은 무슨 이유일까?
구약성경의 처음 다섯 개의 성경인 창세기,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는 전설에 의하면, 모세가 기록하였다고 하여, 지금도 “모세 5경”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역사 연구에 의하면, 사실은 그렇지 않고, 성립된 시대나 저자가 다른 몇 가지 자료가 모아져서 그것이 현재의 것과 같은 성경이 되었다고 확인되고 있다.
1장의 창조 이야기는 기원전 5세기 경 포로가 된 땅 바빌론에서 씌여진 것이고 “제관계(P)사료”라 부른다. 2장의 창조 이야기는 더 오랜 것이어서 기원전 9세기에 가나안 땅에서 기록되었다고 추정되며, “야훼(J)사료”라고 부른다. 이렇게 두 가지 창조 이야기는 시대와 저자가 다르기 때문에 표현이나 문체도 다르지만, 인간이 무엇이며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근본적으로 공통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오히려 그 표현의 차이로 인해서 보다 풍부한 입체감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 에덴동산은 어디 있었나? “에덴”이라는 명칭은 오히려 제임스 딘이 출현한 영화 “에덴의 동쪽”으로 더 유명해졌다. 이 영화 보았는가? 추억에 남는 영화중의 하나이다. 창세기 2,8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주 하느님께서는 동쪽에 있는 에덴에 동산 하나를 꾸미시어.” 이는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고 있는 가나안에서 동쪽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곳을 흐르는 강의 이름들(11-14)로 판단하건데, 그 장소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임을 알 수 있다. 그 지방은 예전에 이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들이 살던 곳이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이다.
그러나 우리는 “에덴동산”을 특정한 장소로 한정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다. “에덴”이란 기쁨이나 즐거움이라는 뜻이며,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본래 있어야 할 기쁨에 넘치는 인간의 모습 또는 삶이나 세계를 뜻한다고 이해하면 된다. 우리는 2장의 창조 이야기에서 본래 있어야 할 인간의 모습을 세 가지 관계, 즉 하느님과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로 생각해 보기로 한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그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되었다(7).” 인간은 흙( 새 번역 성경은 “흙의 먼지”로 번역함)으로 지어졌으며, 다른 동물들도 흙으로 지어졌다(19절). 이것은 인간이 물질적인 면에서 보자면, 다른 동물과 공통성을 갖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흙” 혹은 “흙의 먼지”라는 표현에는 인간의 덧없음과 연약함이 드러나고 있다. 결국 인간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며(3, 19), 죽어야 할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의 “생명의 입김”으로 “산 자”가 되었다. 사실 인간은 하느님의 특별 은혜로 다른 동물과는 다른 자유의지를 부여 받은 존엄한 인격으로 창조되었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입김으로 “생명을 받은 삶”인 것이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달리 자유의지를 지닌 존엄한 인격으로 사는 피조물이라는 것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어서는 안 된다(17).”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의무에서 드러난다. 하느님께서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17).”라는 무서운 경고의 말씀까지 하시는 데서 이 자유의지를 소유한 존엄한 인격성이 더욱 더 부각된다. 즉, 스스로 판단하는 힘인 자유의지가 없다면 하느님께서 이런 경고를 내리실 필요가 없다. 예를 들어, 짐승에게 이런 경고를 해 봐야 소용이 없다.
하느님의 이 명령, 경고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왜 하느님께서는 이 열매(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만드셨는가? 그리고 인간이 그것을 범했다고 해서 왜 인간을 벌하시는 가? 처음부터 그런 것을 만들지 않고, 인간으로 하여금 범하지도 않도록 만들었어야 하지 않은가?
그러나 우리는 이 열매가 인간에게만 주어졌다는 사실로 인간이 “자유의지를 지닌 인격”으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은 인형도 동물도 아니며, 또한 노예가 아니라, 자유의지를 지닌 인격체인 것이다. 인간은 주어진 자유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도록 요구되고 있다. 인간은 그 자유를 가지고 하느님을 따르거나 등질 수 있으며, 이 사실은 인간이 자유롭고 책임 있는 주체임을 가리키고 있다.
이제 사람 간의 관계에서 보자: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흙으로 들의 온갖 짐승과 하늘의 온갖 새를 빚으신 다음, 사람에게 데려가시어 그가 그것들을 무엇이라 부르는 지 보셨다. 사람이 생물 하나하나를 부르는 그대로 그 이름이 되었다. 이렇게 사람은 모든 집짐승과 하늘의 새와 모든 들짐승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인 자기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 위로 깊은 잠이 쏟아지게 하시어 그를 잠들게 하신 다음, 그의 갈빗대 하나를 빼내시고 그 자리를 살로 매우셨다. 주 하느님께서 사람에게서 빼내신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시고, 그를 사람에게 데려오시자, 사람이 이렇게 부르짖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사람과 그 아내는 둘 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하지 않았다.”
인간은 다른 이와 함께 사는 존재이며, 그것은 다른 이와의 사이에 “너와 나의 만남”이라고 하는 인격적 친교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최후만찬” 때 당신 제자들에게 남기신 계명이 바로 “서로 사랑하라.”이다. “사랑”은 바로 관계성, 곧 “친교”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서로”라는 말씀을 먼저 하신 것이다.
저희 사부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복음서에서 내/외적 가난과 더불어 사랑의 다른 이름인 “형제애”라는 카리스마를 얻어냈고, 이를 1회 수도자 형제들과 2회 수도자 자매들에게 먼저 그리고 3회원들에게 그리고 세상의 모든 이에게 이 카리스마를 자신으 표양과 가르침으로 전파했다. 물론 형제애는 그리스도인들이 공통으로 추구해야 할 덕이지만, 성 프란치스코는 “만인의 형제, 만물의 형제”라 일컬어질 정도로 “형제애”의 탁월한 실천가요 스승이다. 그가 가르치는 형제애는 여러 요소들을 담고 있지만, 그 중의 하나가 “친교”이다. “친교”는 서로 만나 시간을 가지면서 대화와 표정으로서 형제애를 나누고 즐기는 것이다. 또 물리적으로 만나지 못한다 해도 전화로, 편지로, e-mail로, 심지어는 기도로써 친교를 나눈다. 우리 수도회의 생활을 하려면 이 형제애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친교를 가질 줄 알아야 한다.
영화 수입업자도 사람들도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흥행 성공”을 한 영화가 최근에 한국에 소개된 “위대한 침묵”이다. 프랑스의 알프스 산 1400m 고도에 세워진 가톨릭 수도회 중 가장 엄격한 수도회인 “카르투시안 수도승”들 삶을 있는 그대로 찍은 영화이다. 이 수도회의 창립자는 13세기에 산 성 부루노인데, 그는 기도-침묵-독거-봉쇄를 누구보다 우선시했지만, 공동체로서의 형제들 간의 친교 역시 소중히 여겼다. 그래서 자기 형제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독방에서 홀로 기도하고 홀로 개인 노동(작은 농장 혹은 노동)을 하게 했지만, 성무일도와 미사전례를 함께 거행하고 때때로 식사도 함께 하고 공동 휴식 시간을 갖도록 했다. 인간 간의 친교는 바로 창조주 하느님의 뜻이다.
우리 주 예수님을 보라. 죄 없으신 하느님께서 인간인 여자 마리아의 몸을 통해 탄생하시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고, 기도와 휴식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늘 제자들 및 사람들과 함께 지내시지 않으셨는가! 예수님은 바로 친교의 삶을 사셨다.
여기 성경 저자가 “그에게 알맞은(혹은 ”비슷한“) 협력자를 만들어”라는 표현을 쓰는데, “협력자”라는 말은 상호성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니까 “서로 함께”라는 친교의 상호성 의미를 지닌다. 동물과 식물 등 자연사물은 인간에게 위안을 줄 수는 있을지는 몰라도 “협력자”가 될 수는 없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아담) 홀로”, 곧 사람의 고독을 원치 않으셨다. 그래서 협력자를 만들어 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여자이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아담)을 잠들게 한 후 그의 갈빗대를 빼내시어 여인을 창조하셨다. 누가 농담으로 “단순히 잠들게 한 후 갈빗대를 꺼내면 사람이 고통으로 괴로워했을 것이기에, 아마 하느님께서 외과 의사처럼 마취제를 사용하셨을지 모른다고.” 말한 일이 있다. “갈빗대를 빼내시어 여인을 만드셨다.”는 것은 남자와 여자 간에 상존하는 결합 욕망의 근원을 말해준다. 그러니까 남녀 간의 결합 본능은 하느님 친히 주신 것임을 말해 준다. 예수님께서는 혼인과 이혼에 대해 말씀하시면서(마태 19,1-9), 창세기의 이 부분을 인용하신다(2,24).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 것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사람(아담)과 여자(하와)가 창조된 직후 그들은 둘 다 벗은 몸이었지만, 마치 간난 아기처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사람과 그 아내는 둘 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여기 창세기서는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또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 두 사람이 범죄하고 난 후 벗은 것에 대해 부끄러워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세 번째로 자연과의 관계에서 보자: 하느님에 의하여 최초로 창조된 인간을 “아담”이라고 부른다(5,3). 이 아담은 흙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아다마”에서 나왔다.“ 그리고 인간은 결국 ”흙“으로 돌아간다(3,19). 이것이 인간이 흙, 곧 자연과 얼마난 깊은 관계에 있는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사람을 데려다 에덴동산에 두시어, 그 동산을 일구고 돌보게 하셨다(2,15.” 에덴동산은 낙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놀고 자고 먹기만 하는 낙원은 아니다. 아담에게 에덴동산을 일구고 돌보게 하셨는데, 일구고 돌본다는 것은 관리를 말하며, 관리란 곧 일이다.
어떤 이는 노는 것은 즐거운 것이고, 일은 괴로운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 일의 목적을 정하면, 기쁘게 열심히 일해야 한다. 영어로 문화를 culture라고 하는데, cultivate 곧 경작한다라는 어원에서 온다. 그러니까 “문화”라는 말은 경작하고 개발한다는 원어에서 온다. 따라서 이 자연세계를 경작하고 개발하는 것을 문화적 사명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동참하는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내 쫓김:
창세기 3, 1-24
“주 하느님께서 사람을 부르시며, ‘너 어디 있느냐?(3, 9)’”
프란치스코 제 3회(재속프란치스코회) 회원이었던 토마스 모어(1477- 1535)가 저술한 유토피아(Utopia)는 우리 말로 이상향(理想鄕)이라는 뜻이다. 인류는 오랜 옛날부터 여러 가지 이상향을 그리면서 살아왔는데, 이것은 현실 사회가 많은 모순과 불합리로 가득 차 있으며,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고통 받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리스어 “U(없다)"와 ”topos(장소)“의 합성어로서 ”아무데도 없는 곳“이라는 뜻이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기쁨에 넘치는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3장에서는 그들이 죄를 범하고 에덴에서 내쫓기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에덴동산’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미래에 있을 인간의 이상을 축소한 것이며, 그것은 하느님과 인간과 세계와의 올바른 관계를 갖고 사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낙원상실”은 죄에 빠진 인간의 모습, 현실에 사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것은 하느님과 인간과 세계의 올바른 관계가 깨어지고 모순과 불합리로 고통 받고 있는 인간의 모습이다.
에덴동산에서 기쁜 생활을 하는 아담과 하와에게 뱀이 나타났다. 뱀은 먼저 하와에게 그럴듯한 이야기를 걸어 왔다. 하와는 그 금단의 열매를 먹고 아담에게도 주어 그도 먹고 말았다(1-6절). 인간이 유혹에 빠지는 과정, 특히 미묘한 심리 상황을 이토록 예리하게 관찰한 문학은 아마 또 없을 것 같다. 사람이 금단의 열매를 먹어 죄를 지은 것은 뱀의 유혹에 의해서였다. 그런데 하느님으로부터 추궁을 당했을 때, 남자는 여자에게 그리고 여자는 뱀한테 책임 전가를 했다(13절). 하지만,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을 지닌 채 창조되어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자유의지와 책임을 지닌 존재다. 그런데 사람은 하느님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자유의지를 하느님 의지에 거역하는 데에 사용하고 말았기에, 이 범죄는 사람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금단의 열매, 곧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는 “지식전부”, 곧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에게만 속해 있는 영역을 침범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었다는 것은 무엇보다 사람이 자신을 하느님으로 여기는, 곧 자신을 신성화하는 죄를 범했다는 의미를 지니며, 또 사람이 하느님께서 최고의 선물로 주신 의지를 자기 것으로 해버리는 죄를 범했고, 이것이 바로 죄의 근원임을 말해준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이 후자의 관점을 강조하고 있다. 성 프란치스코의 말을 들어 봅시다. “주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먹으면 안 된다(창세 2, 16-17참조).’ 아담이 순종을 거스르지 않았을 때까지는 죄를 짓지 않았으므로, 동산에 있었던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을 수 있었습니다. 사실 자기 의지를 자기의 것으로 삼고 자기 안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선을 자랑하는 바로 그 사람이 선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열매를 따먹는 것입니다. 결국 악마의 꾐에 빠져 계명을 거슬렸기 때문에, 먹은 것이 악을 알게 하는 열매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벌 받아야 마땅합니다.”
사람은 하느님에 의하여 “만들어진 생명”인데도, “하느님처럼”(5절) 되려고 했다. 그래서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얼굴을 들고 사는 자(anthropos)”에서 “주 하느님 눈에 뜨이지 않게 동산 나무 사이에 숨어 사는 존재”(8절)가 되었다.
인간관계의 파괴: 에덴동산에서는 “사람과 그 아내는 둘 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않았다(2, 25).”고 기록되어 있다. 이 두 부부 사이에는 아무 감출 것이 없었으며, 모든 것을 서로 나누고, 모든 것을 서로 털어 놓고 사는 기쁨을 누렸다. 부부가 인간 사회생활의 기본 단위라고 한다면, 에덴동산에서는 사람과 사람이 자유와 기쁨과 평화의 사귐을 가졌던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를 자기 것으로 해버려 죄를 범하고, 하느님과의 바른 사귐을 깨뜨리고 스스로 하느님이 되려고 했을 때, 새로운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눈이 열려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다(3,7).” 이것은 인간이 성적으로 눈이 떴다는 표현으로 볼 수도 있지만, 보다 깊은 뜻, 즉 사람과 사람의 사귐이 깨어졌음을 뜻한다. 사람은 누구나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비밀을 가지고 있으며, 무엇인가도 그것을 숨기고 꾸미지 않고는 남과 사귐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를 조금이라도 좋게 보이려고 옷을 차려 입고, 또는 학벌이나 지위 따위의 여러 가지 가면을 쓰고 남과 사귀려고 한다.
사람은 죄를 지으면 숨고 피하려든다. 사람과 그 아내 하와는 주 하느님께서 저녁 산들바람 속에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들었을 때, 하느님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하느님께서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셨을 때, “동산에서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3,10).”라고 말했다. 죄를 짓기 전에는 알몸 상태가 부끄러운게 아니었으나 이제는 부끄러운 것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하느님으로부터 그 죄를 추궁당했을 때, 사람은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3,12).” 그는 자기 책임을 아내에게 전가했을 뿐만 아니라, 그 말에는 자기에게 아내를 준 하느님에게도 책임은 있지 않느냐는 항의의 뜻이 암암리에 숨어 있다. 그리고 “뱀이 저를 꾀어서 제가 따 먹었습니다(3,13).”라고 핑계를 댐으로써 그래도 자기를 정당화하려 하고, 자기 보신책을 썼다. 그것이 점점 더 사람의 관계를 깨뜨리는 것이었다. 사람 관계에서 어려움을 주는 것들이 책임전가, 자기 정당화 혹은 자기 합리화 그리고 보신책 등이다.
죄를 저지른 “사람과 아내” 그리고 그들을 유혹한 “뱀”에게 하느님의 책벌이 선고되었다(3,14-19). 먼저 뱀에게 책벌이 선고된다. 뱀이 동물 가운데서 천대를 받을 뿐만 아니라 뱀으로 대표되는 전체 동물과 여자의 후손인 전체 인류 사이의 다툼이 있게 되리라는 것이다.
여자에게는 “나는 네가 임신하여 커다란 고통을 겪게 하리라. 너는 괴로움 속에서 자식들을 낳으리라. 너는 네 남편을 갈망하고 그는 너의 주인이 되리라(3, 16).”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1,28).“ 하신 축복 받은 출산이 여기서는 사랑과 고통의 불합리한 갈등으로 변한 것이다.
그리고 사람(아담)에게는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었으니, 땅은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사는 동안 줄곧 고통 속에서 땅을 부쳐 먹으리라. 땅은 네 앞에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돋게 하고 너는 들의 풀을 먹으리라(3, 17-18).” 고 선언하신다. 이것은 농경시대만의 모습이 아니라 현대사회의 노동도 뜻하는 것이다.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1,29).” 는 책임을 받은 사람이 자기중심적으로 자연을 지배하려 했을 때, 자연과의 조화가 깨어지고, 자연을 파괴하였으며, 반대로 사람은 괴로움을 당하는 현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3,19).”는 사람의 일(노동)이 죄의 결과로 생겨나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흥미로운 아이러니는 일이 비록 죄의 결과이기는 하지만 사람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고 발전을 이루게 한 근원도 된다는 사실이다. 오늘의 경제적 발전은 바로 사람들의 땀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까?
성 아우구스띠노는 사람의 죄가 큰 곳에 내린 하느님의 큰 사랑을 묵상하면서 다음과 같은 모순인 것처럼 보이는 말을 했다. “오, 복된 탓이여!” 언뜻 보면 “탓” 곧 “죄”를 복을 받는 근원으로 칭송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사람의 죄에 대해 하느님이 베푸신 은혜의 위대함에 탄복하는 하나의 표현이다. 이 유명한 말은 부활대축일 밤미사의 Exultet에 나오고 있다. 사실 성 아우구스띠노의 이 표현은 사도 성 바오로가 쓴 로마서 5, 20장에서 그 영감을 받고 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 5, 20에서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혹시라도 자신의 말을 오해할까봐 바오로 사도는 곧 이어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은총이 많아지도록 우리가 계속 죄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죄에서는 이미 죽은 우리가 어떻게 여전히 죄 안에 살 수 있겠습니까?(6, 1-2).”
여기서 또 성경저자는 사람의 최대 고뇌(고통)인 육신의 죽음이 죄의 결과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 이 구절에 익숙해 있는데, 바로 “재의 수요일”에 사제가 재를 머리에 뿌리면서 외우는 말 “사람아, 너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임을 기억하라.”가 이 구절에서 오기 때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 역시 육신의 죽음을 맞게 되어 흙으로(먼지로) 돌아가지만, 여기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 부활하여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그분을 뵙게 될 것이다. 이래서 흙으로 돌아가는 “허무”와 함께 흙에서 다시 영적인 몸으로 다시 일어나는 “영광”을 체험하게 된다. 여하튼 “ 흙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은 우리가 삶을 진지하게 바라보고 창조주 하느님께 대한 의탁의 자세를 더 굳게 해준다.
가죽 옷(3, 21)-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과 그의 아내에게 가죽 옷을 만들어 입혀 주셨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 주 하느님께서는 가죽 옷을 만들어 사람과 그의 아내 하와에게 입혀 주셨습니다. 그들이 금단의 열매를 따 먹었을 때, 스스로 허리에 둘렀던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만든 두렁이”를 대신한 것이다.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만든 두렁이”는 그들을 보호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쉬이 떨어지고 마는 임시방편의 옷에 지나지 않았다.
하느님께서 “가죽 옷”을 만들어 그들에게 입히신 것은, 죄를 짓고 그 벌로써 동산에서 쫓겨나는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에 나온 보호체의 표지였다. 하느님께서는 비록 아담과 에와가 중대한 죄를 범하여 평화의 땅 에덴동산(낙원)에서 쫓아내셨지만, 그래도 그들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시고 이렇게 자비를 베푸셨다. “자식이 미워도 완전히 내치지 않는” 부모의 사랑을 여기서 본다. 특히 “가죽 옷”은 더 따뜻한 옷일 뿐만 아니라 추위와 위험에서도 보호해 줄 수 있는 튼튼한 옷, 곧 보호체로서의 옷이다. 그러니까 이는 “하느님의 변함없는 보호”라는 약속을 상징하고 또 “언젠가 너희를 다시 부르겠다.”는 희망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보호해주시면서 언젠가는 낙원으로 다시 부르시겠다는 희망을 보여주고 계시는 것이다! 낙원을 회복하는 가능성이 암시되어 있다. 희망을 주시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른다. 바오로 사도는 말한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이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로마 5, 1-2).”
그리고 여기에 눈여겨 볼 또 한 가지의 표현이 나온다. 바로 “입혀주셨다.”라는 표현이다. 아직 제 몸도 가누지 못하는 아기를 어머니가 붙들고 옷을 입혀주듯, 하느님께서는 죄로 인해 비틀거리고 자신들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아담과 하와를 마치 아기에게 옷 입히시듯 이 가죽 옷을 친히 입혀주시는 것으로 되어 있다.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의 자세인가!
“너 어디 있느냐?(9절)” 하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은 죄를 지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준엄한 꾸짖음인 동시에 그 인간을 찾으시는 사랑의 부르심이기도 하다. 창세기 2장과 3장을 통해서 묘사된 “낙원”, “낙원 상실”, “낙원 회복”이라는 하느님과 인간의 드라마이다. 이 드라마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에서 반복해서 나타나며, 신약성경으로 넘어 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 3장은 훗날 우리 교회에 “원죄의 발생”이라는 우리 그리스도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를 낳게 했다. 바오로 사도는 이 원죄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로마 5, 12).”
첫댓글 귀한 묵상 나누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시간내서 찬찬히 읽어 보겠습니다^^
잘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