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에 베데스다라는 못이 있었습니다. 이 못에는 특별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가끔 천사가 이 못에 내려와서 물을 휘저어 놓아서 물이 움직이곤 하는데, 그때 제일 먼저 못에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는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널리 퍼져있던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병자들,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중풍병자)들이 못 주위에서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수많은 병자들 중에 38년 된 병자가 있었습니다.
38년 동안 병으로 고통당하던 이 병자가 한 순간에 고침 받은 기적의 이야기가 요한복음 5장1-9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데스다 못에 들어가서 고침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고쳐주셨습니다. 성경은 이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지금도 베데스다 못가에서 일어났던 역사가 동일하게 일어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38년 동안이나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자라도, 38년 동안 태산과 같은 문제에 짓눌려 있는 자라도, 38년 동안 습관적인 죄에 묶여 비참한 인생을 사는 자라도, 예수님을 만나면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당시 베데스다 못가에는 수많은 환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유독 38년 된 이 병자만을 고쳐주셨을까요? 38년 된 이 병자가 다른 병자들보다 의로웠기 때문일까요? 착했기 때문일까요? 1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병에서 고침 받은 이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이 사람이 38년 동안 병으로 고통당한 것은 죄의 심판이었습니다. 어떤 죄를 지었는지는 모르지만 이 정도의 심판을 받을 정도라면 결코 작은 죄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베데스다 못가에 있었던 다른 병자들보다 의로웠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찾아가신 것은 분명 아닙니다. 어떤 학자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이 병자를 찾아오신 또 다른 중요한 이유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이 병자가 38년이 지나도 여전히 흔들리지 않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못 가에 누워있는 이 환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쓸데없는 질문 같습니다. 38년 동안이나 병으로 고통당하고 있으니 당연히 낫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베데스다 못 가에 누워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결코 그렇지 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병에 걸리면 처음에는 누구나 병에서 고침 받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래서 이렇게도 해 보고 저렇게 해 보면서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병이 호전되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의심하게 됩니다. ‘병에서 낫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닌가?’ 의심에 붙잡히면 간절함이 약해집니다. 낙심이 그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그렇게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면 ‘그냥 이렇게 사는 거지 뭐’ 하면서 병 낫기를 포기합니다. 체념하는 것입니다. 물론 병에서 낫고 싶은 마음이야 있지요.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병원에도 가고 약도 먹습니다. 그러나 병에서 반드시 낫겠다는 간절한 소망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약도 먹고 계속해서 치료도 받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두렵기 때문입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자기에게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면 좋겠지만 그것은 천에 한 명, 만에 한 명 있는 일이지 자기 같은 사람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겠느냐고 생각합니다. 육신이 죽기 전에 마음이 먼저 죽는 것이지요.
베데스다 못 가에 수많은 병자들이 있었지만 그 가운데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병 낫기를 소망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수많은 병자들 가운데 38년 된 이 병자보다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있었던 자는 없었을 것입니다. 38년이 지나도 흔들리지 않고 병에서 고침을 받겠다는 소원을 붙잡고 있었던 사람은 이 한 사람뿐이었을 것입니다.
마가복음 5장25절 이하에 보면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통당하고 있던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많은 의사를 찾아다녔습니다. 12년 동안이나 의사를 찾아다녔으니 이스라엘에서 소문난 의사는 모두 만났을 것입니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 가지고 있던 모든 재산을 다 허비했습니다. 그런데 병이 낫기는커녕 더 심해졌습니다. 그런데도 이 여인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 여인은 12년이 지나도 흔들리지 않는 소원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댑니다. 믿음과 소망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소망의 사람이 됩니다. 소망이 있는 사람은 믿음으로 행동합니다.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순간 병이 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돌아서서 말씀합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30) 이 때 제자들이 말합니다.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31) 이런 말입니다. ‘예수님,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붙잡고 늘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예수님께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시면 어쩌십니까? 보십시오.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 예수님의 옷자락 이곳저곳을 붙잡고 있습니다.’ 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에워싸고 있었습니까? 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고 있었습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에게도 믿음이 있었습니다. 믿음이 없었다면 무엇 때문에 수많은 무리들에 속에 끼여서 예수님의 옷을 만졌겠습니까? 그러나 이들 안에는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인과 같은 온전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온전한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조금의 의심도 없는 믿음입니다.
온전한 믿음에 대해서 야고보 1장6-8절에 말씀합니다.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믿고 구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마치 바람에 밀려서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그런 사람은 주님께로부터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그는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이요, 그의 모든 행동에는 안정이 없습니다.”(새번역)
이 여인 외 모든 사람들은 두 마음을 품고 예수님의 옷을 만졌던 것입니다. ‘낫게 될지도 몰라, 예수님은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으니까. 그런데 낫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그래도 손해 볼 것은 없잖아. 혹시 모르니까 그래도 한 번 만져보자.’ 이것이 두 마음입니다. 베데스다 못 가에 있던 수많은 병자들은 두 마음을 품고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38년 된 병자처럼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있었다면 예수님께서 그들을 그냥 지나치셨을까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들도 소원을 가지고 있었지만 온전한 소원이 아니었습니다. 흔들리는 소원이었습니다. 이것이 두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 이야기를 해 봅시다. 여러분은 오늘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오셨습니다. 그분께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귀신에 들린 딸을 고치지 위해 예수님 앞에 나온 가나안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마15:28)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나오는 자는 ‘주님께서 반드시 내 소원을 이루어 주실 거야’ 이런 기대를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러 나오는 것이지 무엇을 받으려고 나오는 것인가?’ 어찌 들으면 아주 고상하고 차원 높은 믿음 같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우리 인생의 목적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무 좋아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이 너무 감사해서, 그분의 은혜로 살고 있기에,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시기에 우리는 그분을 예배합니다. 이것이 예배의 목적입니다. 예배가 축복의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 무엇을 받으려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을 신령과 진령으로 예배하는 자들에게 풍성한 축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 앞에 나오는 자들은 하나님을 예배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전심을 예배하는 자들 하나님을 간절하게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분이심을 기대하며 나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주님 앞에 나올 때 이런 기대를 가지고 나오셨습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시145:19) 할렐루야!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어주십니다. 지금 여러분 안에는 간절한 소원이 있습니까? 그 소원을 하나님께 이루어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왔습니까?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소원을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그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면서도, 소원이 이루어지는 축복을 경험하지 못하고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에게 꼭 이루고 싶은 간절한 소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 물으십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왕상3:5) 그때 솔로몬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리고 자신이 왜 그것을 구하는지 그 이유까지 말하면서 지혜를 구합니다. 솔로몬의 간절한 소원은 지혜였습니다. 만약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꿈에 나타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말씀하신다면 여러분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확신 가운데 ‘주님, 내게 이것을 주십시오.’ 라고 구할 수 있습니까? 왜 그것을 소원하는 지 그 이유까지 말할 수 있습니까?
소원을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으면서도, 불가능하게 보이는 소원을 현실로 만드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그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안에 간절한 소원, 꿈에서도 망설이지 않고 구할 수 있는 그런 간절한 소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간절한 소원은 무엇입니까?
솔로몬의 소원이 하나님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즉시 솔로몬의 소원을 이루어주십니다. 솔로몬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소원을 성취하는 중요한 원리를 보게 됩니다. 먼저 간절한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소원이 하나님 마음에, 하나님의 뜻에 합당해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간절한 것 하나만으로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주신다면 우리 인생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옥과 같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되 진정으로 우리에게 유익한 것,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합당한 것만 들어주시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우리에게 간절한 소원이 있습니다. 이 소원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소원이라는 확신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분명한데 1년이 지나고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소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좌절이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낙심이 있습니다.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소원을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앞의 두 가지 외에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소원이 38년이 지나도 흔들리지 않는 소원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간절한 소원이 있습니까? 그 소원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까? 그렇다면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베데스다 못 가에 있던 이 병자처럼 38년이 지나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38년,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아니 너무나 긴 시간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주시는 분입니다. 모세는 무려 40년 동안을 광야에서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은 모세의 소원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해방되었습니다.
※ ‘주께 하듯 하라’는 책을 쓰신 채의숭 장로님이 계십니다. 자동차의 심장부 역할을 하는 인스트루먼트 판넬이라는 부품을 만들어 국내는 물론 세계에 수출하고 있는 대의그룹의 회장입니다. ‘한국을 빛낸 자랑스런 기업인’ 상을 받을 정도로 인정받는 기업인이며, 화양감리교회 장로님이기도 합니다.
이분이 고등학교 때 세 가지 소원을 마음에 품었습니다. 그 첫 번째는 박사 학위를 가진 교수가 되는 것이고, 둘째는 회사 사장이 되는 것이고, 셋째는 100개의 교회를 건축하는 것이었습니다. 가난한 시골 소년에게는 말 그대로 꿈같은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소원을 하나 하나 이루어주셨습니다. 첫 번째 소원은 25년 만에 이루어졌고, 두 번째 소원은 28년 만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소원은 이루어지고 있는 과정에 있습니다. 2007년까지 60여개의 교회를 건축했습니다.
채 장로님의 간증을 읽으면서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며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채 장로님은 간절한 소원을 품었습니다. 그 소원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했습니다. 그리고 채 장로님은 어떤 고난과 시련이 와도 그 소원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창업 직후 100년 만의 홍수로 전 재산이 떠내려가기도 하고, 5년 후 새로 지은 공장이 대형화재로 소실되고, 대금으로 받은 어음이 IMF 여파로 휴지 조각이 되고, 기적 같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위기를 넘기자 이번에는 뇌졸중으로 쓰려져 반신불수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채 장로님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반신불수에서도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뇌졸중으로 쓰러지기 전에 당뇨를 앓고 있었고 고혈압 때문에 13년 간 혈압 약을 먹고 있었는데, 뇌졸중에서 회복되면서 원래 있던 당뇨와 고혈압까지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장로님의 주치의가 이것을 보고 ‘장로님, 이 병은 의사가 고친 게 아니라 하나님이 고치셨습니다.’ 할 정도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런 고난 없이, 위기 없이 한 순간에 소원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없습니다. 어느 때에는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상황이 너무나 절망적이어서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을 것 같은 순간도 있습니다. 모든 꿈이 물거품이 되어 버리는 것 같은 아픔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주십니다. 25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28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38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일평생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38년이 지나도 흔들리지 않고 소원을 붙잡아야 합니다.
38년 동안 흔들리지 않고 소원을 붙잡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세 가지 있습니다.
1. 소원이 더디 이루어지는 상황에서도 기뻐해야 합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시37:4) 소원이 더디 이루어지는 하루 하루를 보내는 것은 분명 우리에게 힘든 시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그것으로 인하여 기쁨을 잃어버리고 불평에 붙잡히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소원이 더디 이루어지는 상황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예배하는지, 아니면 하나님이 주시는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예배하는지를 알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소원이 더디 이루어질 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교회를 섬기는 사람은, 소원이 더디 이루어지는 상황 속에서 기쁨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교회를 섬깁니다. 그러나 어떤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교회를 섬기는 사람은, 소원이 더디 이루어지면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교회를 섬기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이런 성도에게는 소원을 이루는 것보다도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을 회복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고백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7-18)
우리의 소원이 이루어지기 까지 25년이 걸릴 수 있고, 38년이 걸릴 수 있고, 일평생이 걸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꿈꾸는 그 어떤 소원과도 비교할 수 없는 존귀하신 주님이 바로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2. 계속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우리의 소원을 끝까지 지켜주는 힘입니다. 뿐만 아니라 기도를 통해 우리의 소원은 더욱 구체적이 됩니다. 우리가 소원을 품게 되는 계기는 여러 가지입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다가, 설교를 듣다가, 간증을 듣다가, 어떤 사건이 계기가 되어서 … . 소원을 품게 되는 계기는 여러 가지이지만 품은 소원은 반드시 기도를 통해서 자라나게 됩니다. 기도가 간절해지면 간절해질수록 우리의 소원도 간절해집니다. 기도가 무르익을 때 우리의 소원도 무르익습니다. 그러나 기도가 식어지면 식어지는 만큼 소원에 대한 간절함도 식어집니다. 기도가 막히면 우리의 소원도 질식합니다. 기도가 사라지면 소원도 사라집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히5:7) 예수님은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하나님께 올려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이 주신 소원을 품고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다면 우리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소원을 이루어주시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습니까? 채 장로님의 간증을 함께 나누었는데, 장로님은 이 소원을 품은 날부터 날마다 이 소원을 위해 기도했다고 합니다. 기도할 때는 세 가지 소원 중 어느 것 하나도 만만한 것이 없었는데 결국은 하나님께서 기도를 통해 자신의 소원을 이루어가셨다고 고백합니다. 1년에 자동차로 7만 킬로미터를 달릴 정도로 차를 많이 탄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여섯 개의 회사를 요일별로 돌아다니면서 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차에 오르면 기도하고 찬송 부르고 말씀을 읽으면서 매일 예배를 드리는데, 하루 중 가장 행복하고 충만한 시간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기도 없이 이루어지는 소원은 하나도 없습니다.
3. 소원이 이루어지기까지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합니다.
베데스다 못 가에 있던 38년 된 병자는 도와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물이 동할 때 제일 먼저 들어가는 사람만이 병이 낫습니다. 그래서 병자들마다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맹인은 물이 동하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 물이 동하는 것을 보고 맹인을 못가로 인도해 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다리 저는 사람이나 중풍병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물이 동하는 것을 보더라도 자기 힘으로는 못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들을 부축해주거나 엎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병자에게는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7절 말씀을 보십시오.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베데스다 못 가에 누워있던 이 사람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물이 움직입니다. 그 순간 베데스다 못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다섯 개 행각에 누워있는 자신들의 병자를 부축하고 또는 엎고 또는 안고 물가로 뛰어갑니다. 가장 빠른 사람이 못에 들어갑니다. 한 발 차이로 못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의 탄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옵니다. 그러나 38년 된 이 병자에게는 한 발 차이가 아닙니다. 도와주는 사람 없이 혼자 힘으로 가니 도무지 다른 병자들과 경쟁이 되질 않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자신을 도와줄 사람을 구하든지, 그것이 불가능하면 낫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도와주는 사람 없이는 절대로 다른 병자보다 먼저 못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환자는 계속해서 물이 동할 때마다 못에 내려갑니다. 아무 소용없는 일입니다. 결과는 뻔합니다. 그런데도 38년 된 이 병자는 계속해서 내려갑니다.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며 얼마나 비웃었을까요? 소용없는 짓이니 그만 두라고 충고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리석은 노력입니다. 아무 쓸데없는 노력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38년 된 병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노력이었습니다. 비록 내려가는 중간에 다른 병자가 먼저 못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이 병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했습니다. 무려 38년 동안이나.
누가 그것을 보셨을까요? 바로 하나님께서 보셨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쓸데없는 노력이었지만, 어리석은 노력이었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의 노력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소원을 이루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뿐 아니라 우리의 노력도 보십니다. 기도 없는 노력은 스스로의 힘으로 소원을 이루어보고자 하는 교만입니다. 노력 없는 기도는 아무 것도 심지 않고 거두려고 하는 요행입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요행을 바라는 자를 축복하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소원을 이루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동도 보시는 분이심을 명심하십시오. 더 좋은 기회, 더 좋은 환경을 기다리지 마십시오. 현재의 상황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하십시오. 그럴 때 우리의 소원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소원을 품으십시오. 아직까지 일생을 걸만한 소원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먼저 성령의 충만을 구하십시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욜2:28) 성령이 임하면, 꿈이 생깁니다. 소원이 생깁니다.
소원을 품었습니까? 그렇다면 간절하게 기도하십시오. 예수님처럼 때로는 통곡하며 때로는 눈물 흘리며 기도하십시오. 아울러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하십시오.
환경이 아무리 어렵게 변하더라도, 도무지 우리의 소원이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절대로 포기하지 마십시오. 소원은 우리의 힘과 우리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소원을 주신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반드시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주십니다. 그러니 포기하지 마십시오. 낙심하지 마십시오. 대신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기뻐하십시오. 주님을 바라보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생명까지 주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38년이 지나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소원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우리 모두 이 기적 같은 축복의 주인공이 됩시다. 주께 영광!
첫댓글 오늘 목사님의 말씀 너무감동 받앗습니다 , 저두.38년, 아니50년 이라두 기다릴겁니다, 그대신 아주 더 열심히 주님께 찬양하며, 더 열씸히 예배드리겟습니다 그리고 채의숭 장로님 의 책 저두 신청 해주세요 꼭 부닥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멘 ,,,
주님께서 이 성도님의 그 귀한 마음을 기뻐 받으셨으리라 믿습니다. 이 성도님과 이 성도님의 가정을 통해 주님의 크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을 기대합니다. 그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고 기뻐하며 기도하며 더욱 믿음으로 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