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복은 자기중심이다. 나를 강화시켜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 복. ‘나를 강하게 하시면 이 강한 힘을 가지고 주를 위해서 일하겠다’고 하면 나쁘게 생각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강해지고 채워지고 강화돼야 한다는 자기중심적인 것이 기복이다.
팔복은 주어가 하나님으로 바뀌는 것.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모든 복을 말한다. 하나님 중심. 하나님의 은혜가 많이 임하면 좋은 것인데 오히려 약할 때 더 잘 임한다. 기복은 내가 강화되는 것이지만 팔복은 내가 죽어야 한다. 그래서 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이 이루시는 것. 내가 무엇을 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이 날 이끌어 가시고 나를 존재하게 만드시는 것이다
기복은 내가 발전하고 똑똑해져서 무엇을 이루는 것이다. 나도 잘되고 하나님도 잘 되는 복. 우리는 본능적으로 기복에 강하다. 기도 대부분이 나를 강하고 건강하고 부유하고 인기 있게 해 주세요 하고 기도한다.
주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따르고 순종하는 것이 팔복이다. 다른 차원에서 이야기하면 조건적인 것이 아니다. ‘심령이 가난하게 해 주세요’ 그럼 천국이 이루어진다. ‘애통하겠습니다. 애통하게 만들어 주십시오’ 그럼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다. 이런 식의 조건으로 생각하는데 그럼 행위가 된다. 애써야 한다는 것이 강조된다. 그건 내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예수님이란 선물을 우리에게 주시면 심령이 가난한 것을 좋아하게 되고, 애통하는 것을 좋아하는 존재가 된다. 그래서 천국이 임하고 하나님의 위로를 받게 된다.
인생을 살면서 가장 큰 고통은 가족들이 죽는 것인데 그중에 제일 큰 고통이 어린 자녀가 죽는 고통이다. 본문에서의 애통(펜데오)은 최상급의 애통이다. 그런데 어떻게 최상의 애통이 복이 될 수 있나? 성령께서 애통하는 마음을 주신다. 애통할 때 성령께서 오셔서 위로해 주신다.
부흥할 당시 한국 교회는 애통하는 교회였다. 전쟁과 가난으로 인한 아픔이 극심했다. 그러니 교회 오면 다 우는 사람밖에 없었다. 가족과 떨어져 홀로 이산가족이 된 사람들도 많았다. 다 아픔이다. 애통하는 모습이 한국 교회의 힘이었다.
요셉을 잃은 야곱의 애통(창37:34-35). 형들이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았다. 아버지가 찾으니까 염소를 죽여서 요셉의 옷에 발라서 갖다준다. 요셉이 찢겨 죽었구나 하고 자기 옷을 찢는다. 굵은 배를 허리에 묶고 오래도록 그의 아들을 위하여 애통했다. 누가 와서 위로해도 위로가 안 된다.
하나님을 만나는 모든 깊이는 애통에서 나온다. 십자가를 통과하면 그 안에 애통이 있다. 그때 깊이가 있다. 영적인 게으름이 있으면 말씀이 안 들린다. 자기 방식으로 현상만 놓고 이야기한다. 현상이 바뀌는 것을 응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앙은 하나님의 성품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 성품에 뿌리를 두는 것이 깊이. 현상의 좋고 나쁨은 상관이 없다.
오병이어를 경험하고도 말씀이 어렵다고 다 떠난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 했더니 생명의 말씀이 여기 있는데 우리가 어디로 갑니까? 병이 낫고 난 후에도 다 믿는 것이 아니다. 돌아간 사람들이 많다. 현상에 뿌리를 둔 건 얄팍한 믿음이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다. 깊이를 통해 십자가를 만나게 된다.
어떤 부자에게 목사님이 기도 제목이 무엇이냐 했더니 없다고 한다. 나이스하고 고상하게 믿는 분들은 기도 제목이 고난이라고 생각한다. 돈도 많고. 건강하다고 걱정이 없으니 기도할 것이 없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면 현상에만 얽매여 산다. 국민소득 5만 불 넘어가면 예수 안 믿을 사람들 많다. 깊이 있게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애통하는 자의 복이 있어야 한다.
애통이라는 '펜데오'는 유월절이라는 '패싸흐'에서 나왔다. 유월절은 장자가 다 죽는 날이다. 어린 양의 피가 없으면 다 죽는다. 애통은 어린 양의 피가 없어 죽음을 겪는 고통이다. 자녀를 잃은 슬픔이 패싸흐(passover). 장자의 죽음 앞에 속수무책, 무기력하다. 내 의지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경험하는 것이 복이다. 그때 비로소 ‘주님 나는 nothing입니다. 하나님께서 호흡을 걷어 가시면 끝나는 인생입니다’라는 고백이 나온다. 그때부터 깊어지기 시작하고 신앙이 생기고 관념이 아닌 진짜 하나님을 바라본다. 거기까지 가야 한다. 내가 죽어야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가 된다. 죽지 않고 예배를 드리니까 힘든 것이다. 레위기는 전체가 예배다. 내가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거기 나오는 제물들이 나다. 내가 죽어야만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롬12:1,2).
내가 죽어야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죽는 것이 얼마나 힘들면 레위기라는 성경 하나를 주셨을까? 자기 부인, 자기 죽음이 없으면 기도하고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들이 다 자기만족이 된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열심히 했는데 자기가 강화되고 바리새인처럼 괴물이 돼서 나타난다. 신앙이 종교가 되면 괴물이 된다. 인간성도 피도 눈물도 없는 신앙인들이 많다. 그런데도 형식은 다 갖췄다.
자기 부인이 없으면 자기만족으로 간다. 제일 힘든 것이 자기 죽음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했다. 자기 죽음은 애통하는 순간에 깨닫는다. 자기에게 가장 귀한 것이 죽었을 때 속수무책, 무기력, I'm nothing임을 안다.
나를 알아야 내가 죽는다. 나를 아는 순간은 하나님과 교제가 있을 때, 예배를 깊이 드리면 나를 안다.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뵈면 나를 보게 된다. 그래서 깨지게 된다. 그때 은혜를 구하고 축복을 구한다. 이후부터는 자기 힘으로 사는 인생이 아니다. 하나님의 복이 없으면 살 수 없다. 그 상태가 애통하는 자의 모습인데 이것을 모르면 자꾸 자신이 강해지려 한다. 물에 빠진 사람이 힘이 남아 있으면 도와주는 사람도 위험하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축 늘어져 있어야 끌고 나올 수 있다.
애통하는 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다(요3:16). '이처럼 사랑하사'는 이중의 아픔,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래서 참된 위로가 있는 것.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게 교회와 성도의 모습이다. 살면서 애통하는 자의 복이 떠나지 않고 하나님의 위로가 항상 함께하는 성도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