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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편안히 앉아 안개를 밑자락에 깔고 있을 때는 의젓하다. 허리에 구름을 두르고 있는 경우에는 아름답게 보인다. 구름 위에 정상을 살짝 드러낸 산은 얼마나 신비로운가. 높이 솟아 한여름에도 빙하에 구름옷을 두르고 있으면 장엄해진다.
구름 한 점 없이 다 벗은 산도 본다. 그런 산이라면 그냥 걸어 들어가 안기고 싶다. 산은 그렇게 나에게 다가온다. 또 같은 미인이라 할지라도 옆모습 다르고 뒷모양 다르듯이 보는 방향에 따라 전혀 새로운 모습을 보여 주는 게 산이다.
아시니보인에서 두번째 산행하던 날 원더 패스(Wonder Pass)를 지나 산 동쪽으로 들어갔다. 전날 서편으로 갔던 일본팀들이 합류해 많은 사람들로 무리를 이루었다. 로키에서 산행할 경우 일본팀들을 심심찮게 만난다. 안내자를 앞세우고 일렬로 줄을 서서 질서정연하게 걸어가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일본사람들이다.
일본 사람들의 줄서기는 우리보다 앞서 있는 것 같다. 캐나다에 와서 살면서 내가 얼마나 캐나디언화 되었는지 살펴보는 기준이 하나 있는데, 은행이나 쇼핑센터에서 긴 줄을 서서 기다릴 경우 얼마나 느긋한가를 스스로 생각해 보면 된다.
한국팀과 산행할 때도 있다. 한국 사람들은 산에서도 돌격 앞으로다. 누가 먼저 고지를 점령하느냐, 누가 시간을 단축하였느냐 등에 관심이 많고 주위 경관이나 볼거리는 뒷전이다. 산업을 일으키고 잘 살기 위하여 앞만 보고 죽자 사자 뛰어온 우리 조국 근대화 운동과 무관치 않은 것 같다.
여기 사람들은 처음 보는 꽃 한 송이 곤충 하나에도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고, 골짜기 아래 계곡의 곰도 망원경으로 살피고 앉아 있다. 한국 사람들에게 진귀한 곰 구경을 시켜 주고 싶어 찾아보면 벌써 멀리 앞서 가 있다. 소리를 질러 부를 수도 없다. 곰이 도망가 버리기 때문이다.
고개 넘자 계곡 열리며 산들이 어깨동무
우리 일행은 일본사람들 틈에 끼어 줄을 이루었다. 오늘 산행 안내자는 앤드류로, 로지 주인의 아들이라고 한다. 식당에서 음식을 나르고 시중을 들던 키 큰 중년인데, 천천히 걷는 게 느껴질 정도로 산행을 잘 인도해 갔다.
들판의 꽃들은 가을에 밀려 사라지고, 대신 노란 단풍이 가득한 산길이다. 로지를 떠나 0.5km에 네이셋(Naiset) 캐빈이 있고, 바로 옆에 국기가 걸려 있는 공원 본부 건물도 보인다. 캐빈을 지나 또 다시 0.5km 걸으면 조그마한 호수를 만나는데 고그(Gog) 호수다.
호수를 배경으로 잘 생긴 바위산이 하나 있다. 네이셋 포인트(Naiset Point)라 했다. 이 산속에 모여 있는 ‘오그(Og)’, ‘마곡(Magog)’, ‘고그(Gog)’라는 호수 이름들은 구약시대의 전설적인 거인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하는데 얼른 생각이 나지 않는다.
조그마한 폭포가 있는 계곡을 비켜가 완만한 산길을 따라 가면 나무가 사라지고 시야가 열리는 평원에 들어선다. 그 평원 비탈이 끝나는 곳, 로지에서 3km쯤 거리에 원더 패스가 있다. 로지에서 동쪽으로 보이던 고개가 바로 원더 패스였던 것이다.
원더 패스는 정말 원더 패스다. 계곡이 열리면서 산들이 어깨동무하고 춤을 춘다, 큰 산들의 잔치다.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창조주는 어찌하여 심산유곡에 이런 경치를 숨겨 놓으신 걸까. 뒤를 돌아보면 북쪽으로 아득한 평원이 멀리 35km 저편 선샤인 스키장 언덕까지 시원히 열려 있다.
이 고개는 비시(브리티시컬럼비아)주와 앨버타주 경계이자 밴프 국립공원과 아니시보인 주립공원의 갈림 고개이기도 하다. 또 여기에는 아시니보인이 세계자연유산지역이라는 표시판도 세워져 있다.
고갯마루에서 열린 경치에 취해 커피를 한 잔씩 하고 계곡을 따라 내려간다. 오른쪽으로 절벽을 이룬 타워(The Tower·2,846m)산에 산양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부지런히 살피는데 낮잠을 자고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산양과 산염소는 절벽에서 산다. 천적인 쿠거나 늑대들을 피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바위절벽을 뛰어다니지 않으면 소화가 되지 않는 동물이어서 평지에서는 살 수가 없다. 또 이 지역은 불곰이 사는 지역이라 땅굴다람쥐들을 잡아먹으려 땅을 파헤친 흔적이 여기 저기 널려 있다.
정수리에 하얀 눈 인 아시니보인
원더 패스에서 1.8km를 내려가면 마블 호수(Marvel Lake)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이른다. 550m 아래 계곡을 따라 길게 누운 호수다. 이 호수는 밴프 국립공원에서 여섯 번째로 크고, 그 깊이가 67m라 한다. 호수 건너편으로 큰 산들이 진을 치고 있다. 글로리아(Mount Gloria·2,908m), 이언(Eon·3,310), 아이(Aye·3,243m) 등 3,000m급 산들이 줄을 서 있다. 누가 이 심산에 머무는 산들에게 속세의 이름을 붙여 놓았을까. 그냥 산이면 족할 것을…. 山, 山, 山이다. 모두가 큰 산들이다.
마블 호수를 왼편으로 내려다보면서 산비탈로 들어섰다. 굽이굽이 돌 때마다 나무 사이로 산들이 달려든다. 거기쯤에서 사건이 발생했다. 사진을 찍느라 후미에 처져 가고 있는데 앞서가던 집사람이 산닭이 있다고 빨리 오라고 한다. 그래서 후닥닥 뛰어가는데 그만 왼쪽 다리 장딴지가 엉키고 말았다. 딴딴하게 경직돼 버린 것이다.
산닭 사진을 몇 장 찍고 주저앉았다. 야단이다 산중에서 다리에 고장이 났으니. 산행에서 늘 조그마한 사고들이 나지만 제일 큰 문제는 다리다. 팔이 부러졌다면 보조목을 대고 붕대로 감고 내려오면 되는데, 다리를 다치면 큰 일이다. 얼마나 더 가야 될지 모르지만 걷기가 무척 힘들다. 우선 압박붕대로 감고 아픈 다리를 끌고 올라간다. 그래도 끝장을 보고 싶다.
마지막 등성이를 오르는 산비탈이다. 하얀 눈을 이고 선 아시니보인 정상이 살짝 보이는 지점이니 안 갈 수 없다. 몇 번을 쉬면서 등성이에 올라서니 이거야말로 신천지다.
편안히 흘러내린 비탈계곡 저편으로 글로리아 산이 솟아 있고, 그 빙하에서 녹아내린 물로 이루어진 조그마한 호수도 있으니 글로리아 호수다. 오른편으로는 흰 눈을 이고 우뚝 솟은 아시니보인이 전혀 다른 모양으로 단장하고 우리들을 반긴다. 날카로운 등성이를 드러내고 손짓하는 듯하다. 빙벽이라고는 한 번도 해본 일이 없는 산꾼이지만, 한 번 붙어보고 싶은 생각이 문득 든다.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서둘러 먼저 떠났다. 쉬면서 걸어야 하니 같이 떠나온다면 뒤에 처질 것이 걱정됐기 때문이다. 혼자만의 산길이다. 산길을 따라 빈 마음을 끌고 간다. 그 비워진 자리를 산(山) 기운으로 가득 채우는 시간이다.
원더 패스에 이르러 쉬고 있는데 일행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을 빛으로 흠뻑 물든 배낭을 하나씩 둘러메고 온다. 일행 중 힘들게 오르는 일본사람이 한 분 계셨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면서 오르는 걸 내게 보이기 민망했던지 묻지도 않았는데 나이가 77세라 한다. 대단한 노익장이다. 산을 안고 살아온 인생길의 관록이 땀 속에 묻어난다. 산과 호수에 취하고, 바람에 반하고, 땀에 젖은 산중의 하루가 또 그렇게 지나갔다.
아시니보인과 사귀고 떠나는 날 새벽은 신기하리만치 조용했다. 곤한 잠을 흔들고 달아나던 산바람은 다 어디로 갔나. 계곡에 들어앉아 꿈을 꾸고 있는가. 오늘은 좋은 사진 몇 장을 얻을 것이란 예감이 든다. 산의 다른 모습을 보고 싶다. 또 다른 얼굴을 만나고 싶다.
어두울 때 일어났다. 산은 회색 하늘을 등지고 깊은 잠을 자다가 조용히, 아주 조용히 눈을 뜨고 동녘 하늘을 향해 얼굴을 드러냈다. 산봉이 새 날을 열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화장의 명수다. 이별의 아쉬움이 있었을까, 잠시 붉은 색으로 짙은 화장을 하고 인사를 마치자 이내 깨끗하게 지우고 본래의 얼굴로 바뀌었다. 그가 금방 화장을 고치는 모습을 창을 통해 엿보았다.
육감이라 할까, 이렇게 바람 한 점 없는 아침에는 산이 호수에 들어와 앉아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카메라 필름 상태를 확인하고 호수를 향해 뛰었다. 이 때는 시간이 급하다. 바람이 시샘하기 전에 만나야 하는 것이다. 3km는 족히 되는 거리다. 보인다. 보인다. 아래로부터 서서히 호수에 몸을 잠그더니 호수 가장자리에 이르러서는 온 몸을 찬물에 모두 담근 채 파르르 떨고 있다. 산은 바람 잔 날 호수에 들어가서 목욕을 한다.
떠나오는 날이다. 마지막으로 나가는 헬기를 예약해 놓고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집사람은 로지 주인을 만나기 위해서 남고, 우리는 서편에 숨어 있는 산들을 보러갔다. 산만이 아니고 큰 산 아래에 자리잡은 예쁜 호수도 3개나 있었다. 선버스트(Sunburst), 시룰리언(Cerulean), 엘리자베스(Elizabeth) 등의 호수를 지나면 선버스트 계곡(Sunburst Valley)으로 이어지고, 그 산길은 로지에서 32km 거리에서 라듐 핫스프링 온천으로 가는 ‘하이웨이 93’을 만난다.
시간이 넉넉지 않지만 우리는 산등성을 향해 길을 헤쳐갔다. 해발 2,748m의 너브봉(Nub Peak)에서 뻗어내려온 등성이에 오르니 새로운 경치가 열렸다. 너브봉까지 가고 싶으나 욕심을 버리기로 했다. 전날 엉킨 장딴지가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아 무리하지 않기로 하고 로지로 돌아왔다.
김삿갓과 단 둘이 막걸리 권하며 오르고파
오후에는 호수 주변을 서성거렸다. 우연히 돌 하나를 주었는데 손에 올려놓고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아시니보인이 내 손 안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다. 이 깊은 산중에 어떻게 좋은 로지를 지을 생각을 하였을까. 그 에너지는 무엇으로 충당하는가 등의 관심이 있어서 로지를 둘러보았다. 산속에서 필요한 에너지는 프로판 가스로 충당한다. 조리나 난방, 그리고 조명까지 무공해 가스를 쓰고 있다. 가스를 헬기로 들여와서 쓰기 때문에 아주 큰 가스통이 여러 개 있었고, 가스관이 각 캐빈으로 연결되어 있다.
단 통신용 에너지는 발전했다. 산 위에서 관을 타고 내려오는 물이 자연 수압을 이루어 수도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그 상수도의 일부분을 이용해 12볼드 직류전기를 발전했다. 아주 조그마한 발전기 하나가 유일한 전원이었다.
오전에 헬기소리가 요란하더니 첫번째 헬기에서 공원 관리들이 들어왔다. 로지 운영을 살피는 검사관들이다. 캐나다는 안전에 관한 한 세계 제일이라고 자부하는 나라가 아닌가. 헬기가 뜨고 등산객들이 드나드는 날이라 온 로지가 활기에 찬다. 나가는 짐에는 빨간 리번을 달아 헬기장으로 나르는가 하면, 새 손님을 맞을 준비에 분주했다. 그리고 모든 세탁물은 헬기로 싣고 나가고 시내에서 세탁된 것들이 대신 들어왔다.
여기는 등산객들만 드나드는 곳이 아니다. 산행을 하지 않아도 산속에서 느긋이 즐기고 싶어 들어온 노인들이 있는가 하면, 지팡이에 의지해 걸음을 힘들게 옮겨야 하는 불편한 분들도 들어와 산중에서 쉬며 즐기는 곳이다. 우리만 보고 가기에는 아까운 경치다. 주위 분들을 모아 한 번 더 오고 싶다.
그런데 쉽게 자리를 잡을 수가 없다. 2004년분은 이미 예약이 다 찼고, 2005년 것을 지금 예약하란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딱 한 사람을 모셔와 단둘이서 산행하고 싶은 사람이 떠오른다. 배낭 대신 괴나리봇짐에 안주 싸고 막걸리 한 초롱 들고 쉬엄쉬엄 원더 패스에 올라 마주 앉아서 권커니 자커니 하며 시 한 수 읊는 걸 보고 싶다. 그는 바로 김삿갓이다.
글·사진 박병준 <아름다운 서부 캐나다> 발행인·www.pcpak@shaw.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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