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방송통신대학 인문학부 중문과 2008학년도 1학기 [중국현대사]
보충학습 제3회(5-6강)
중국의 근대화과정(2)
지난 번에 ‘근대화’란 서구문물을 배우고 모방하고 도입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 목적은 물론 자기네 국가를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다. 바꾸어 말해 보자. 모든 비유럽인 국가들은 자신들을 발전시키기 위해 서구 또는 유럽 문물을 배우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유럽문물의 핵심은 영국, 프랑스 등의 서부유럽, 즉 서구이었다. 유럽국가들은 서구에 근접하고 있어서 일찍부터 그 영향을 받았다. 그리하여 서구문물은 유럽문물로 확대되었다. 하지만 통상적으로는 ‘서구문명’이라고 말한다.
서구문명은 인류역사를 통 털어서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 나는 개인적으로 전체 인류 역사의 변화에서 가장 중요한 의를 가지는 2가지는 농경문명과 서구문명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농경문명은 인류가 짐승과 똑같은 생활을 끝내고 문명생활을 하게 된 출발점이었다. 서구문명은 인류의 욕망 수준과 그것을 만족시키는 물질소비수준을 급격하게 높였다. 서구문명은 여타지역의 문명에 비해 압도적인 수준이었다. 흔히 말하기를 중국문명이 원래 서구보다 앞섰으나 명청대에 이르러 그것에 뒤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중국을 기준으로 삼아 말한 것이다. 서구를 기준으로 삼아 말해 보자. 서구문명은 원래 7-8세기에 성립하여 중국문명은 물론 여타 모든 아시아 문명에 뒤떨어져 있었다. 그러다가 15세기부터 발전을 거듭하여 18-19세기에 이르러는 이들 모두를 완벽하게 제압할 수 있게 되었다. 서구문명이 발전하기 전까지는 중국문명과 이슬람문명이 서로 비슷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럽국가들은 그들의 문명수준이 이슬람과 중국 문명 수준에 도달하기 훨씬 이전부터 유럽지역을 제외한 여타지역을 침략, 약탈하기 시작했다. 문명 수준이 한찬 뒤떨어진 아프리카 서부와 아메리카 전 지역( 얼마나 넓은가?)이 이들의 희생물이 되었다. 잉카, 마야문명이 모두 스페인에게 박살이 났다. 그리고 점차 그들의 수준이 모든 아시아 문명을 앞지르게 되자 마자 아시아를 개항, 점령하기 시작했다.
서구문명과 아시아 문명과의 격차는 매우 커서 그것이 아시아 각국을 개항 점령하는 데는 별로 힘이 들지 않았다. 아시아 국가들과 아편전쟁 등 몇 차례의 전쟁을 치루기는 했지만 유럽국가들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아시아 각국은 유럽국가들의 전쟁능력이 엄청 강한 것을 실감하고 그들에게 주눅이 들어 버렸다. 군사적으로 감히 덤빌 엄두를 내지 못하고 꼬리를 내렸다. 서구문물을 배우는 도리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모든 비유럽국가들에서 모두 서구문물을 배워야겠다는 근대화를 위한 의식이 발생한 것이 아니다. 이런 의식이 전연 발생하지 않은 지역도 있다. 호주와 아프리카 그리고 중남미가 그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을 제외한 아시아 국가와 지역에서도 언제 어떤 강도로 발생하고 어떤 순서로 배웠으며 그것을 어떻게 실제로 도입했는가?는 국가에 따라서 서로 엄청 다르게 나타났다. 이슬람 지역은 그들 이슬람 종교에 대한 열정과 기독교에 대한 역사적인 반감으로 인해 이런 의식은 동아시아에 비해 매우 늦게 나타났다. 동아시아는 중동지역보다 유럽국가들과의 접촉이 늦었으나 서구문물을 도입하는 데에는 종교적인 장애는 없었다. 유럽 국가들에 대한 역사적인 반감도 별로 없었다. 말하자면 세계적으로 보더라도 19세기 중후반 이후에 이루어진 동아시아의 근대화는 여타 아시아 지역보다 결코 늦은 것이 아니고 오히려 빨랐다고 말할 수 있다. 중동지역은 20세기에 들어서도 왕정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국가가 많았던 것이다. 이 사실은 동아지역이 현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서구국가들을 경제적으로 추격하고 있는 원인을 설명해주는 것이다.
(이처럼 중국의 근대화 과정을 세부적으로 보기 전에 전체 동아시아의 근대화 과정과 여타 지역의 그것을 비교하는 것을 ‘巨視的 觀點’이라고 말할 수 있다. )
( !!! 참고로 이번 기말시험 출제를 하면서 교재의 목차에서 출제하는 것을 깜빡 잊어버렸다)
일본의 근대화는 명치유신이라는 단일한 구호가 있었다. 이 사실은 근대화를 위한 전체적인 청사진 또는 요즘 유행하는 영어로 마스터 플랜이 있었다는 점을 가리킨다. 그것은 쇼군체제가 붕괴하면서 중앙집권체제를 갖추는 것을 중점으로 하여 일사불란하게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미국 페리제독의 배가 온 이후 15년 지나서 진행된 것도 지적하자.
대조적으로 청말 중국의 근대화 과정은 아편전쟁 발발 이후 21년 만에 시작되었으며 종합적인 청사진이 없이 진행되었다. 중국의 근대화가 진행된 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은 1860- 94년까지의 洋務運動, 1898년의 戊戌(무술)變法, 1901-1911년까지의 新政의 3가지이다. 이 3개 사건은 모두 청말 청정부에 의해 위에서 아래로 진행된 개혁이었다. 이들을 각기 살펴보기로 하자.
洋務運動의 ‘洋’은 ‘海’보다 큰 바다를 가리키는 뜻인데 청말에는 주로 유럽인 국가, 즉 구미국가를 가리켰다. 중국어 사전에는 ‘외국’을 가리킨다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서양 열강만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洋房’은 서양식 주택을, ‘洋鬼子’는 서양인을 비하하여 사용하는 말이다. ‘東洋’은 중국어에서 일본을 가리킨다.
洋務運動에는 ‘中體西用’이라는 구호가 따라 다닌다. 이것은 ‘中學爲體, 西學爲用(중국의 학문을 체로 삼고 서양의 학문을 용으로 삼는다)’의 준말이다. ‘體’란 여기에서 중심이 되는 사상과 정치체제의 뜻이며 ‘用’이란 그보다 차원이 낮은 지엽적인 물질의 사용을 가리킨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中體’는 중국의 전통적인 사상과 정치체제를, ‘西用’은 서양의 과학기술을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洋務運動의 ‘中體西用’이란 중국의 전통적인 사상과 정치체제는 그대로 둔 체로 서양의 과학기술만을 도입하겠다는 뜻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 뜻에는 중국이 과학기술면에서는 서양에 뒤떨어 졌으나 사상과 제도 면에서는 뒤떨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내포하고 있다. 이를 좋게 말한다면 서양의 학문을 배우는 입장이 되어서 체면이 깎이기는 하지만 자존심을 지켜 나가겠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나쁘게 말한다면, 이것은 주로 양무운동에 대한 서양 학자들의 평가인데, 사상. 제도와 과학기술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모른다는 사실을 나타낸 것이다. 여하튼 이런 중체서용을 나타내는 일화가 있다. 청국에서 총명한 학생들을 뽑아 미국에 유학을 보냈는데 감독관을 붙여 보냈다. 그런데 학생들이 점차 미국의 자유로운 습관에 물들어 가자 중국의 전통이 훼손될까봐 염려되어 모두 귀국시켰다는 것이다. 여하튼 여전히 유교경전을 암기해야만 관리가 될 수 있는 과거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누가 과학기술에 매진할 수 있겠는가?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청정부는 영불군을 참전시켰다. 이때 영불군이 대포로 쉽게 승리를 거두는 것을 보고 양무운동을 시작하였다는 설이 있다. 서양 과학기술을 도입하는 목적이 반란의 진압에 국한되었는지 또는 궁극적으로 유럽인 국가들을 중국에서 몰아내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따져 보아야 한다.
중체서용으로 대변되는 양무운동은 당시 청정부의 안목이 일본의 그것에 비해 짧았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일본은 서양의 과학기술과 제도, 사상을 한꺼번에 들여왔던 것이다.
참고로 현재 중국에서는 ‘西洋’이라는 말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에 ‘西方’을 사용한다. 이것의 반대말도 ‘東洋’이 아니라 ‘東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