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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구(河口)
이 문 열
흔히 나이가 그 기준이 되지만, 우리 삶의 어떤 부분을 가리켜 특히 그걸 꽃다운 시절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표현하는 수가 있다. 그러나 세상일이 항상 그러하듯, 꽃답다는 것은 한번 그늘지고 시들기 시작하면 그만큼 더 처참하고 황폐하기 마련이다. 내가 열아홉 나이를 넘긴 강진(江盡)에서의 열 달 남짓이 바로 그러하였다.
강진은 이름처럼 낙동강이 다하여 남해 바다와 합쳐지는 곳에 자리 잡은 포구로, 마을 앞을 흐르는 것은 넓은 대로 아직 강의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물은 거기서부터 육십 리 상류까지 이미 소금물이었다. 행정구역으로는 그 무렵 갓 직할시가 된 부산시에 속해 있었는데 대도회의 일부라는 표지는 겨우 잊을 만하면 나타나던 시내버스 정도였다.
내가 그곳에 가게 된 경위나 그때의 내 신세를 생각하면 지금도 약간은 한심하다. 그 열흘 전쯤 나는 어느 낮선 도시의 싸구려 하숙방에서 형에게 길고 간곡한 편지를 썼다. 이것저것 사업에 실패를 거듭하다 그곳 강진까지 밀려나 조그만 발동선으로 모래 장사를 하고 있던, 세상에서 하나뿐이고 또 내게는 아버지나 크게 다를 바 없는 형이었다.
나는 그 편지에서 우선 목적 없는 내 떠돌이 생활의 쓰라림과 서글픔을 은근하게 과장하고, 속절없이 늘어만 가는 나이에 대한 초조와 불안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내 믿음과는 달리 정말로 그때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벌써부터 어른들처럼 머리를 길게 길러 넘기고 어른들의 옷을 입고 술이며 담배 같은 어른들의 악습과 심지어는 그들의 시시껄렁한 타락까지 흉내 내고는 있었지만 나이로는 여전히 아이도 어른도 아니었으며, 정규의 학교 과정은 밟지 않고 있었으나 또한 책과 지식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생활도 아니어서 학생이랄 수도, 건달이랄 수도 없었다. 당시의 내 깊은 우려 중의 하나는 이대로 가다가는 평균치의 삶조차 누리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는데, 나는 그것도 솔직하게 썼다. 그리고 함부로 뛰쳐나온 형의 그늘에 대한 진한 향수를 내비침과 함께, 만약 다시 받아들여만 준다면 지난날의 나로 돌아가, 무분별한 충동으로 턱없이 헝클어놓은 삶을 정리하고, 늦었지만 가능하면 모든 점에서 새로이 시작해보고 싶다고 썼다.
답장은 곧 왔다. 벌써 오래전부터 나에게 비난이나 충고하기를 단념한 형은 지극히 담담하게 쓰고 있었다. 내 앞날에 대해서는 더 이상 간섭하고 싶지 않으나 어쨌든 그쯤에서 삶을 한번 정리해보려고 생각한 것은 잘한 일 같다고.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전만 같지 못해 새로 결정한 일에 대해서 자신은 큰 힘이 되지 못할 것이며, 돌아오는 것은 기꺼이 허락하겠으나 그곳에 오더라도 최소한 내가 필요한 것은 스스로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그리고 많지 않은 나이로 집을 나가 이 년 가까이 떠돌고 있는 혈육에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너무 지나치게 냉정했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난데없이 나를 업고 백 리 길을 걸었다는 6·25에 대한 감상적인 회상과 함께 내가 이 세상에서는 자신의 유일한 혈육이라는 것을 잠시도 잊은 적이 없었노라고 덧붙이고 있었다.
아아, 그리운 형님…… 편지를 읽고 나는 갑자기 콧마루가 시큰해지며 후회와도 흡사한 느낌에 젖어 들었다. 입학한 지 일 년도 못 돼 고등학교에서 쫓겨나기 전만 해도, 그리하여 무분별한 충동 속에 집을 나선 후, 깊은 수렁과도 같은 떠돌이 생활에 재미를 붙이기 전만 해도 나는 정말로 얼마나 사랑받고 기대되던 아우였던가.
거기다가 실은 나도 어지간히 지쳐 있었다. 내가 형에게 편지를 낼 무렵의 일기장을 보면 이런 되다 만 시구가 눈에 띈다.
지상의 모든 방랑자들이
거룩한 안식을 노래하던 저녁도
나는 어둡고 낯선 길 위에서
피로를 슬픔 삼아 울었노라.
형의 답장이 유달리 감격스러웠던 데는 그 피로도 분명 한몫을 하고 있었다.
내가 강진에 도착한 것은 그해 사월 어느 날의 저녁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곳의 첫인상을 강렬하게 만든 것은 우선 안개와 갈대였다. 이제 막 넓은 강수면으로부터 피어오르듯 포구를 자우룩이 덮어오는 저녁 안개는, 그것이 거의 사철 피어올라 아침 햇살에 스러질 때까지 마을을 포근히 감싼다는 것을 아직 모르는데도, 그곳의 한 중요한 특징이 되리라는 걸 대뜸 느끼게 해주었다. 마찬가지로 갈대도 이제 겨우 보리만큼이나 자랐을까 말까였지만, 손바닥만한 논밭을 제하고는 어디든 한없이 펼쳐진 갈대밭과 지난해 미처 베어내지 못한 그루들의 높은 키는 머지않은 여름의 무성함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했다. 그리하여 그 둘―안개와 갈대는, 뒷날 강진을 떠난 후에도 내가 그곳을 생각할 때마다 언제나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기억의 배경이 되었다.
그다음 강진의 인상으로 들어온 것은 그곳의 가난이었다. 선창 쪽으로 통틀어 오십 호 정도의 인가가 몰려 있었는데 대부분은 초가집, 그것도 갈대로 두텁게 이엉*을 엮어 유난스레 낮고 음침해 보이는 세 칸 내외의 한일자 집이었다. 도회의 행락객을 위한 술집인 듯 선 창가 전망 좋은 곳에 몇 군데 멋 부려 지은 양옥들이 있었지만, 그것들은 오히려 원주민들의 가난을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강진의 또 다른 특징인 소주는 형의 일터인 모래장(모래 파는 곳)에서야 느끼게 되었다. 모래 배에서 모래를 부리는 선원들이나 트럭에 모래를 싣는 상차(上車)꾼들은 물론, 그날 내게 형의 이동식 보초막 같은 사무실을 가리켜준 중년 남자의 입에서도 독한 소주 냄새가 났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곳의 소주를 단적으로 느끼게 한 것은 방금 지독한 욕설을 퍼부으며 맹렬하게 싸우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하나는 이미 오십 줄에 접어든 듯한 멀쑥한 대머리였고, 하나는 그보다 몇 해 아래로 보이는 거무튀튀한 땅딸보였는데, 그들이 주고받는 욕설에는 그대로 진한 소주 냄새가 배어 있었다.
“그래, 구체적으로 무얼 어떻게 해볼 생각이냐?”
무언가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 계산이라도 하고 있었던지, 한 평도 안 되는 조그만 이동식 사무실에서 두터운 장부에 정신을 쏟고 있던 형은 나를 알아보자 대뜸 그렇게 물었다. 마치 아침나절에 잠시 나들이 갔다 돌아온 아우를 대하는 것같이 덤덤한 목소리였는데, 그런 형의 숨결에도 약한 소주 냄새가 배어 있었다. 형의 뜻 아니한 덤덤함과 곧바로 아픈 곳을 찔러오는 물음에 오히려 당황한 쪽은 나였다.
“검정고시라도 해서…… 우선은 대학엘 가봐야겠습니다.”
“그게 ― 가능할까?”
“학교를 그만둔 지는 제법 오래됐지만…… 그래도 생판 건달로만 떠돌아다니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그동안 이리저리 떠돌면서도 시간이 날 때마다 닥치는 대로 읽은 약간의 책을 떠올리며 머뭇머뭇 대답했다.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고― 네가 그 일을 해낼 때까지 진득이 배겨낼 수 있겠느냐, 라는 거다.”
“이게 마구잡이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 같으니까요. 믿어주십 쇼.”
“하기야, 그런 말은 더 하고 싶지 않다. 어쨌든 잘 왔다. 다만 네가 무엇을 하든 편안히 그 일에만 전념할 수는 없는 게 안됐다. 보다시피 나는 혼자서 모래 배 부리는 일과 모래장에서 모래 파는 일을 겸하고 었어. 네가 그 일 중의 하나를 맡아줘야겠다. 배 한 척으로는 따로 이 모래장 일을 돌볼 서기를 고용할 형편이 못 돼.”
그리고 형은 곧바로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형의 모래 배는 십 톤 남짓한 나무배로, 거기서부터 몇십 리 상류인 구포(龜浦) 쪽이나 건너편 명지(鳴旨) 쪽에서 모래를 퍼 오는데, 형 이 직접 배를 타고 선원들을 살필 때와 그렇지 않을 때에는 모래의 질이나 양에 차이가 났다. 또 실어 온 모래를 파는 데 있어서도, 형이 모래장에 붙어있는 것과 남에게 맡겨 팔 때에는 매상고나 차에 싣는 물량에서 차이가 컸다. 따라서 형에게는 배를 맡길 선장이나 모래장을 맡길 서기 둘 중의 하나가 필요했지만, 하루 열 트럭 남짓한 모래밖에 팔 수 없는 소규모여서 어느 쪽도 부담이 된다는 설명이었다.
“네가 모래장을 맡아라. 그 일에 필요한 시간을 합쳐봐야 세 시간이 넘지 않을 거다. 그 나머지로 공부를 하든지 해봐라.”
형의 결론은 그러했다. 대입 검정고시가 다섯 달밖에 남지 않아 마음은 한없이 조급했지만, 그 정도의 시간으로 형에게 큰 도움이 된다면 마다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형의 제안에 동의한 나는 이튿날부터 모래장의 보초막* 같은 사무실에 거처를 정하고 서기 일을 보게 되었다. 일이랬자 하루 예닐곱 번 정도로 찾아드는 운전사나 건축업자들을 상대로 모래를 팔고, 그 결과를 수입―지출=잔액 하는 식의 간단한 장부에 적어 넣는 것이었다. 모래는 ‘루베’ 란 단위로 팔았는데, 그게 얼마만 한 양인지 그리고 당시의 값은 얼마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형의 말대로 그 일은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나는 그 나머지 시간으로, 크게 벗어난 삶의 궤도를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해 고등학교 과정을 홀로 밟기 시작했다. 서투른 어른들 흉내나 북구(北歐)의 음울한 소설 나부랭이와 철학도 문학도 아닌 열치기 저작물의 현학적인 감상 따위로 맞바꾼, 또래의 아이들은 이미 다 밟았거나 또는 다 밟아갈 정상적인 삶의 과정이었다.
한동안 삶은 쾌적했다. 나는 고용된 자의 억눌린 기분이나 막일 판의 힘들고 거친 노동에 시달림 없이 생활을 해결함과 함께 지난 이 년 동안 은연중에 나를 괴롭혀온 불안과 초조에서도 어느 정도 해방될 수 있었다. 그리고 차차 자리가 잡히자 강진도 막연한 인상에서 하나의 실체로 내게 접근하여왔다.
그때부터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강진은 나지막한 초가집 여남은 채가 띄엄띄엄 흩어져 있는 쓸쓸한 어촌이었다. 억센 갈대와 소금기 배어 있는 개펄을 개간하여 약간의 논밭을 장만한 경우도 있었지만, 원래의 주민들은 어부라고 하는 편이 옳을 듯했다. 남자들은 대부분 가까운 바다로 나가 연안어업에 종사하거나 거룻배로 강 하류의 숭어와 꼬시래기(망둥어의 일종) 따위를 잡아 올렸고, 여자들은 마을 앞 개펄에 무진장으로 깔려 있는 ‘재첩’ 이란 알이 잔 조개를 삶은 국물을 양동이에 담아 이고 이른 새벽 부산시의 골목골목을 누비며 팔았다.
그러다가, 마치 상류에서 떠내려 온 찌꺼기들이 조금씩 쌓여 하구(河口)에 커다란 삼각주를 만들듯, 이곳저곳에서 흘러든 사람들로 점차 마을이 커지기 시작했다. 초기의 이주민들은 주로 무성한 갈대밭을 은신처로 삼으려는 범죄인들이거나 또는 그 무성한 갈대밭과 가까운 바다를 이용한 밀수꾼들이었다. 그러나 정작 강진에 질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은 이미 한계에 이르렀다 할 만큼 비대해진 부산시였다. 그 부산시에 편입되어 시내버스가 들어오게 됨으로써, 강진은 갑자기 유원지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갈대가 무성한 삼각주와 끝없이 펼쳐진 개펄, 바다에 잇대인 대하(大河)의 넓고 고요한 수면, 금방 잡아 올린 생선의 싱싱한 회 맛과 돛배를 전세 내어 강바람을 맞으며 달리는 기분 같은 것들이 도회지 생활에 지친 사람들을 끌어들인 탓이었다.
그들 행락객들이 뿌리는 돈이 점차 많아지자 주민들은 하나 둘 배에서 그물을 걷어 없애기 시작하고, 어떤 이는 아예 배에서 내려버렸다. 대신 고깃배를 개조해 선유(船遊)⁕를 위한 전셋배로 바꾸거나, 선창가에 올망졸망 술집을 차렸다.
일부의 주민들은 고깃배를 모래 배로 개조했다. 현대 건축의 중요한 자재로서 나날이 느는 모래의 수요는, 애써 그물을 쳐 고기를 잡느니보다 가까운 상류에서 모래를 펴 오는 쪽을 더 유리하게 만든 까닭이었다. 그래서 그 모래 배의 선원이며, 퍼 온 모래를 차에 싣는 상차꾼들, 그리고 형처럼 그 장사가 수지맞는다는 말을 듣고 끼어든 외지 사람들로 강진의 인구는 또 한차례 늘어났다―그것이 도착 첫날의 피상적인 관찰과는 다른 강진의 참모습이었다.
그런 강진의 주민들 중에서 그 무렵 내가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모래 배의 선원들이었다. 그들은 막소주 한됫병에 고추장 한 사발만 있으면 언제나 흥겨울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형편없이 조잡한 '낚싯대라도 드리우기 바쁘게 물리는 꼬시래기를 배만 따서 고추장에 찍어 먹으며, 그들은 작은 스테인리스 밥공기로 소주를 나누었다. 그러고는 이내 거나해져서 상류에서 흘러 내려온 찌꺼기와도 같은 자신들의 내력을 미화하고 과장하며 떠들어댔다. 흉측한 문신을 내보이며 있었던 것 같지도 않은 야쿠자(力士〕 시절을 그리워하는가 하면, 특공대(밀수품 양륙(揚陸) 반)나 국토재건단 또는 복역 경력을 자랑스럽게 떠벌리기도 했다. 그런 이들 가운데는 당장도 범죄의 냄새를 풍기는 이들이 간혹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취해갈수록 자기들의 쓰라린 영락*이 아파와서 끝내는 눈물을 글썽이고 코를 쿨쩍이는 성격파탄형이었다. 그러면 누군가의 제의로 기분 전환을 위한 한차례의 고성방가가 있고, 또 누군가의 한바탕 난투극이 있은 후에 아무 데서나 쓰러져 잠이 드는 것이 그들 술판의 일반적인 순서였다.
선원은 아니지만 그때 모래장에서 만난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재미있게 보았던 것은 최광탁과 박용칠이었다. 바로 내가 처음 강진에 도착하던 날 지독한 욕설을 퍼부으며 싸우던 두 사람으로, 대머리 쪽이 최광탁이었고 땅딸보가 박용칠이었다. 이미 크고 작은 다섯 척의 모래 배를 가지고 동업을 하던 어엿한 선주인 그들을 내가 선원들과 함께 기억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약간 성공을 했다는 것을 제외하면,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전형적인 모래 배 선원들의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최광탁과 박용칠은 다 같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마셔대는 술꾼이었고, 마셨다 하면 열에 아홉은 폭음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곧 언쟁을 시작하고, 자주는 아니지만 난투를 벌였으며, 난투가 아닐 때는 사무실의 유리창 따위, 값은 크게 나가지 않아도 부서지는 소리만은 요란한 기물들에 화를 풀기 일쑤였다. 내가 보기에 그 무렵 마을의 소동은 태반이 그들 탓이었다. 그것도 상대는 언제나 일정하여, 최광탁으로 보면 박용칠이었고, 박용칠로 보면 최광탁이었다.
한때는 그런 그들의 싸움을 이웃이 말려보려고 든 적도 있는 모양이었지만 내가 모래장에서 일을 보게 되었을 때는 이미 그곳의 일과로 굳어 있었다. 한번 싸움이 시작되고, 그래서 앞뒤 없이 격분한 그들이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날뛰면 실은 그 누구도 속수무책이었다. 세상의 가장 흉측한 욕설이 다 동원되고, 온갖 끔찍한 저주가 서로의 머리 위에 떨어지고, 심하게는 박용칠의 눈두덩에 멍이 들거나 최광탁의 콧등이 터졌다.
일이 되려고 그런지 그들 두 사람은 모래 장사를 동업하는 것 외에도 아낙들이 경영하는 술집까지 나란히 붙어 있어 눈만 뜨면 마주 보게 되어 있었다. 속내를 모르는 사람들은 우선 동업이라도 그만두면 될 게 아니냐고 말할 테지만, 도대체 누가 크고 작은 다섯 척의 배를 수리(數理)에 어두운 그들 둘이 다 만족하게끔 나눌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그들의 싸움은 동업자 간에 흔히 있는 이익 다툼과는 거리가 멀었다.
내가 자주 본 그 싸움의 전개는 대개 이러했다. 시작하는 것은 대개 박용칠이었다.
“행임, 거 참 이상타 말이라예.”
해 질 무렵 여기저기서 걸친 술로 얼큰해진 박용칠이 고개를 기웃거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면, 역시 그 정도로 취해 있던 최광탁이 삐딱하게 그 말을 받았다.
“뭐가, 일마.”
“우리 큰놈아가 와 행임을 닮았을꼬예?”
그러면 대뜸 최광탁의 입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야, 이 쎄(혀) 빠질 눔아 또 그 소리가? 그래, 그라몬 니는 우리 둘째 년이 왜 니맨쿠로 짜리몽땅한지 안 이상하나?”
그쯤 되면 일은 거지반 다 된 셈이었다. 지금까지 형님, 어쩌고 하던 말투는 간 곳도 없이 박용칠은 상대보다 더 심한 욕설로 맞받는 것이었다.
“그카문 이 씨발늠아, 내가 냄새 나는 느그 마누라 호박(확)에 절구질이라도 했단 말가?”
“요 뽁쟁이(복어) 같은 놈이 뭐라카노? 일마, 그라몬 난 먼 재미로 니가 떠먹다 나뚠 쉰 죽사발에 은숟가락 집어넣겠노? 바람 먹은 맹꽁이맨치로 배만 뽈록해 가지고…….”
“니는 만판* 하곤도 남을 놈이라. 이 대가리가 뻔질뻔질 까진 × 대가리 같은 새끼야.”
그때부터는 삿대질이 시작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삿대질은 드디어 멱살잡이로 발전하고, 멱살잡이는 주먹다짐으로 변했다. 심한 때는 젊을 때 한가락 했던 최광탁의 주먹이 박용칠의 눈두덩을 퍼렇게 만들었고, 박용칠의 장기인 헤딩이 최광탁의 콧등을 받아 입 언저리를 온통 피 칠갑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그들의 싸움이 그 격렬한 겉모습과는 달리 오래 끌거나 뒤를 남기지 않는 점이었다. 미처 코피가 멎기도 전에 그들은 다시 ‘형님’ ‘아우’ 하며 어울렸고, 어떤 때는 한창 싸우는 중에도 모래를 사러 오는 사람이 있으면 나란히 웃으며 달려 나갔다. 얼핏 들으면 꾸며낸 얘기로 여길 수밖에 없는 그들의 행태였다. 따라서 강진 사람들은 차츰 그들이 사이가 나쁜 것이 아니라 다만 나쁜 습관, 곧 매일 싸우는 버릇이 있는 좋은 친구들이라고 여기게끔 되었다. 싸우는 것은 길어야 삼십 분 남짓이지만 싸안을 듯 붙어 다니는 것은 나머지 하루의 대부분인 까닭이었다.
더욱이 모래를 사러 오는 운전사나 건재상, 또는 건축업자들에 이르면 그들의 사이는 전혀 의심할 바조차 없었다. 트럭을 모래장에 대기 바쁘게 웃으며 달려 나오는 두 사람을 보면, 눈두덩의 멍이나 콧구멍을 틀어막은 솜이 가끔씩 이상하기는 해도 조금 전까지 격렬한 싸움을 벌이다 나왔다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 고객의 대부분은 박용칠과 최광탁을 오히려 이상적인 동업자로만 여기고 있었다. 내막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나에게도 어떤 때는 그들이 한갓 놀이나 심심풀이 삼아 그렇게 싸움을 벌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모래장에서 만난 몇몇 건축업자들도 기억하면 재미있다. 그들은 예외 없이 모두 사장이었는데 특히 재미있는 것은 강금이(姜金李) 사장이었다. 강금이란 강 아무개, 김 아무개, 이 아무개를 합쳐놓은 이름으로 그들 셋은 동일한 회사의 사장이었고 또 나이나 인상도 비슷했다. 그 때문에 내가 거래하는 데 편리해 사용하기 시작한 공동명칭이었는데, 나중에는 전 모래장에 일반적으로 통용되게 되었다. 근년 들어 전국을 열병처럼 휩쓴 부동산 투기와는 달랐겠지만, 부산처럼 급작스레 팽창하던 도시에는 그때도 이미 짭짤한 경기가 있었던 듯, 그들 셋은 모두 복덕방으로 돈을 모아 건축 회사를 함께 차린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저마다 사장이 된 것인데, 그들 세 사람이 사장으로 있는 회사의 직원이라고는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계집아이 하나가 전부였다.
그 밖에 그 모래장에서 겪은 일로 쉽게 잊을 수 없는 것은 어쩌다 형을 대신하여 내가 모래 배를 타게 되었을 때 겪은 일이었다. 남으로 탁 트인 바다를 아득히 바라보며 끝없는 갈대밭을 지나 명지 쪽으로 갈 때도 그렇지만, 봄바람에 머리칼을 날리며 넓고 잔잔한 강물을 거슬러 구포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나는 자신도 모르게 낯설고 먼 세계에 대한 동경과 떠도는 삶에 대한 유혹에 다시 빠져 들고는 했다. 그 때문에 그런 날 밤은 거세게 나를 몰아대는 출발의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 만사를 제쳐놓고 강소주*에 취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던 게 몇 번 기억난다.
하지만 나는 대체로 나의 길, 즉 무분별한 충동에 이끌려 떠돈 이 년 때문에 늦어진 진학의 길을 꽤나 진지하고 성실하게 걸었던 것 같다. 자칫 흐트러지기 쉬운 자신을 단속하기 위한 노력이 당시의 일기장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자기에게 끊임없는 성찰의 눈길을 던지는 것, 자신을 정신적인 무위*와 혐오할 만한 둔감 속에 방치하지 않기 위해 노력할 것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너는 지금 어떠한 일의 와중에 있으며, 그 의미는 무엇이며 또 그러한 네가 현재에게 지불해야 할 것은 어떤 것들인가에 대해 항상 눈떠 있어야 한다.
일체가 무의미하다는 것, 혹은 우리 삶의 궁극은 허무일 뿐이라는 성급한 결론들의 비논리성에 유의하라. 근거 없는 니힐리즘*은 조악한 감상주의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저급한 쾌락주의, 젊음의 일회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 따위, 일상적인 삶의 과정을 경멸하도록 가르치거나, 그것을 위한 성의와 노력을 포기하도록 권하는 모든 견해에 반역하라. 그것들은 대개, 피상적 체험이나 주관적인 인식만으로도 사물의 핵심을 꿰뚫어 알 수 있다는 지난날의 네 믿음처럼 자기류(自己流)*의 사변을 현학적으로 진술한 것에 불과한 것이므로. 또 너는 무엇이건 지나간 것은 모두 가치 있고 아름답게 만드는 기억의 과장을 경계하라. 지난 이 년이 감미로운 방랑의 추억으로 되살아나 너를 충동질하게 방치하는 것은 네 삶을 또다시 떠돌이의 비참에 맡기는 것과 같다…….’
‘값싼 도취에 대한 갈망을 포기하라. 독한 술은 무엇보다도 네 기억력을 급속히 감퇴시키고, 원활한 사고를 방해하며, 의지력과 극기심을 현저하게 저하시킬 것이다.
무지하고 단순한 이웃에 대한 네 정신적인 우월을 인정하는 데 인색하라. 그 터무니없는 우월감은 너를 천박한 자기 만족에 빠뜨리고, 네 성장과 발전에 심각한 장애가 될 것이다……’
열아홉의 과장된 어법과 미문(美文) 취향을 그대로 보여주는 문장이긴 하지만, 그리고 그 모든 완곡한 금지 뒤에 있다는 게 고작 검정고시와 대학 진학이라는 것이 우스꽝스렵긴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진지함과 성실성만은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도 그 무렵 내 공부는 상당히 진전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대로 자족하여 쾌적했던 모래장에서의 나날은, 그러나 그리 오래 계속되지는 못했다. 무슨 일이건 그렇지만 최초의 균열은 내부로부터 온 것이었다. 공부를 시작한 지 한 달도 안 돼 나는 차츰 처음의 자신을 잃어갔다. 내가 헛되이 떠돌아다닌 이 년은 제도 교육으로 돌아가기 위한 학습에는 치명적이었다. 나는 너무 오래 학교를 떠나있었다. 거기다가 지도해줄 선생도 없이 책으로만 공부해야 되고 보니 수학 같은 것은 아예 중학교 과정부터 새로 시작해야 할 지경이었다. 입시 학원에 나가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으나, 만만찮은 수강료에다 부산까지 왕복에 걸리는 두 시간이 그것조차 불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절망적인 사태는 뜻 아니한 발병(發病)이었다. 그럭저럭 오월도 다 가는 어느 날 오후 나는 불쾌한 오한과 두통을 느끼며 일찍 모래장에서 돌아왔다. 무슨 흥에서인지 전날 밤샘을 한 탓에 몸살이나 난 게 아닌가 싶었지만, 밤이 되자 심한 열과 함께 온몸이 쑤셔대기 시작했다. 그래도 여전히 그게 몸살이라고 여긴 나는 막일 판에서 흔히 해오던 식으로, 뜨겁고 매운 안주에 독한 고량주를 두 홉이나 비우고 잠이 들었다. 어지간한 몸살이나 감기 따위는 그렇게 해서 이튿날 늦게까지 푹 자고 나면 거뜬히 일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튿날 열두 시 가까이 일어났지만 몸은 오히려 더 무겁고 괴로웠다. 생각 같아서는 하루쯤 푹 쉬고 싶었으나 모래장이 비어 있어 어쩔 수 없이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괴로움을 억누르며 거기서 서너 시간 무리를 하고 돌아오니 다시 전날보다 한층 심하게 열이 나고 온몸의 마디마디가 쑤셔댔다. 할 수 없이 나는 강진의 유일한 의료 기관인 선창 부근의 약국으로 갔다. 젊은 약제사는 내 증세를 몇 마디 듣기도 전에 대뜸 당시에 유행하던 무슨 독감이라고 말했고, 빨리 나을 생각만 한 나는 ‘독해도 좋으니 세게’ 약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하루만 먹으면 딱 떨어질 겁니다”란 장담과 함께 그 약제사가 지어준 약을 먹고 나니 이튿날 정말로 한결 나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저녁이 되자 다시 상태가 안 좋아 약국을 찾고, 다음 날은 또 모래장에 나가고―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갔다. 나중에는 나 자신도 무언가 큰 무리를 하고 있는 듯이 느껴졌지만 공교롭게도 그 무렵은 모래장이 가장 바쁠 때여서 편안히 몸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가 여드레째 되는 날 기어이 일은 터지고 말았다. 이젠 정말 더 견딜 수 없다는 기분이면서도 어쩔 수 없이 모래장에 나간 나는 그날 오후 끝내 혼수상태가 되어 병원으로 업혀 가는 신세가 되고만 것이었다. 장티푸스*였다. 당시만 해도 이미 그리 대단한 병은 아니었으나 너무도 무리에 무리가 겹쳐 입원하던 첫날밤은 간호원이 삼십 분마다 한 번씩 맥박과 체온을 체크해야 할 정도로 위급한 상태였다.
꼬박 일주일을 병원에서 치료받고 고비를 넘긴 나는 형의 골방으로 병실을 옮겼다. 그리고 그때부터 강진에서의 내 삶은 갑작스럽고도 속절없는 유적(流謫)*같이 되어버렸다. 고비를 넘겼다고는 하지만, 그 뒤로도 상당 기간 치료받지 않으면 안 되었고 치료가 끝난 후에는 또 치료 기간의 몇 배가 되는 회복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참으로 음울한 나날이었다…… 조그만 음식물의 부주의에도, 몇 시간 정신 쏟아 책을 읽거나 연탄 몇 장 나르는 정도의 가벼운 노동으로도, 그날 밤은 신열에 들떠 지새워야 했다. 어느 정도 회복된 후에도 나는 하루의 대부분을 자리에 누워서 보내야 했고, 기껏해야 마을을 한 바퀴 도는 정도의 가벼운 산보가 유일한 운동이었다.
형의 어두운 눈길을 대하는 것은 그대로 커다란 괴로움이었다. 치료비의 부담도 부담이지만, 혼자 몸으로 이리 뛰고 저리 뛰다 어두워서야 지쳐 돌아오는 형을 보면 견딜 수 없이 죄스러웠다. 그러나 그 사이 몇 번인가 그런 형을 도우러 모래장에 나갔다가 증세가 재발하여 혼이 난 형은 나를 모래장 근처에는 얼씬도 못 하게 했다.
시작부터 엉망이 되어버린 나의 진학 계획도 자리에 누운 지 두 달로 접어들면서부터는 그야말로 번민과 고뇌가 되어 내 영혼을 짓씹었다. 대학이 인생의 전부이겠냐는, 상식적이긴 하나 건강한 형의 충고도 내게는 전혀 위로가 되지 못했다. 오히려 그 때문에 더 다급해져 억지로 휑한 머리를 가다듬어 몇 시간 책이라도 읽고 나면, 그날 밤은 또 늦도록 두통과 신열에 시달려야 했다.
지금에 와서는 그리움으로 떠오를 때도 있지만 그 무렵의 내 하루는 거의 참담했다. 나는 토굴 같은 내 방에 홀로 누워 가벼운 읽을거리와 얕은 잠과 우울한 몽상으로 긴긴 해를 보냈다. 그러다가 해거름이 되면 골방을 나와 갯가의 갈대밭 사이에 난 둑길을 천천히 걸어다녔다. 어느새 여름이 깊어져서 볕이 뜨거운 대낮에는 나돌아 다닐 수 없기 때문이었다. 매우 느린 걸음이어서 그 산보가 끝날 때쯤은 완전히 해가 지고, 나는 피어오르는 저녁 안개와 함께 돌아오곤 했다. 그다음은 괴롭고 긴 밤이었다. 바다가 가까운 탓인지 강바람 탓인지 강진의 여름밤은 그리 덥진 않았지만, 일단 밤의 요기(妖氣)에 휩싸이고 나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낮 동안 무슨 축복처럼 간간 찾아들던 잠도 밤이 되면 마치 낮의 선심이 화가 난다는 듯 무정하게 나를 외면했고, 유일한 위로였던 책도 어둠이 찾아들기 무섭게 깊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다만 낮의 우울한 몽상만이 혹은 무성한 번민의 수풀로, 혹은 치열한 고뇌의 불길로 나의 밤을 지배할 뿐이었다.
추억하기조차 가슴 서늘한 강진의 풍경 중의 하나는 그런 불면의 밤 내가 늦도록 배회하던 갯가의 둑길이다. 으스름한 달빛과 안개 자욱한 포구, 끝없이 출렁이는 갈대의 바다와 그 위를 스쳐 가는 바람 소리, 이름 모를 새들의 구성진 울음소리…… 나는 그러한 것들 사이를 마치 몽유병자처럼 늦도록 거닐었다. 그리고 그때 나를 지배하는 것은 어두운 방 안에서의 번민과 고뇌 대신 울고 싶도록 철저한 외로움이었다.
여기서 다시 그러한 밤을 온전히 새우고 난 후의 일기를 살펴보자.
‘……그리하여 무섭도록 길고 괴로운 나의 밤은 하얗게 밝아온다. 끊임없이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소슬대던 갈잎과 이름 모를 야조(夜鳥)*의 울음소리는 새벽 빛과 함께 사위어가고,* 까맣게 드러난 창살 틈으로 건강한 아침의 소리가 새어 든다. 멀리 강심*에서는 첫 일을 떠나는 모래 배의 발동 소리, 새벽 그물을 걷으러 가는 어부들의 웅얼거림, 가까운 수로를 따라 포구로 내려가는 거룻배의 삐걱이는 노소리, 조용한 물결 소리…… 그러면 부끄럽게도 내 베갯잇은 눈물로 흥건히 젖고 만다.
아아, 처참한 유적이여, 그 밤을 할퀴고 지나가는 잔인한 세월의 바람 소리여. 폭군처럼 군림하는 불면이여. 내 영혼은 지식으로 상처 입기를 갈망했으나, 책들은 머리 깎인 삼손 곁을 뒹구는 당나귀의 턱뼈처럼 버려지고, 예지의 말씀들은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결국 이 땅에는 없게 되어 있는 벗들과 여인을 향한 편지, 지금까지는 누구도 불러보지 못한 곡조의 노래, 때로 나의 밤은 그것들로 빛났지만, 편지들은 끝내 부쳐지지 않았고 노래들은 불려지지 못했다. 고독은 내 충실한 방문객, 그는 무료히 앉았다가 생각난 듯 고약한 벗
들―채찍 같은 후회와 음흉한 불안과 날 선 비애를 불러들여 나를 가학했다. 그리고 채무의 기억이 없는 채권자같이 나를 찾는 번민과 고뇌, 그들은 항상 내 영혼에게 병든 육신보다 더 많은 고통을 요구했다.
이제 날이 밝고, 세상은 무거운 잠을 털고 일어선다. 제국(帝國)의 군대들은 점호를 하고, 관리들은 백성을 다스릴 궁리를 시작할 것이다. 상인들은 점포를 열고 학자는 책을 펴고―모든 이들이 무언가 쓸모 있고 건강한 일을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내게 있어서는 이제야 유적의 해가 지고 있다. 얕은 잠과 긴 휴식, 간단없는* 정적과 무위 속에 나는 다시 새로운 심장을 만들고 찢어진 가슴을 기워야 한다. 저 코카서스 산정의 프로메테우스*처럼, 밤의 독수리들이 다시 찢고 쪼아먹을 수 있도록…….’
그때 내가 그토록 괴로워했던 것이 무엇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상태는 꽤 심각했던 것 같다. 어떤 날의 일기는 죽음에 대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설교만으로 가득 차 있다.
‘히포크라테스는 많은 병을 고친 뒤 스스로 병에 걸려 죽었다. 칼데이의 박사들은 많은 죽음을 예언했지만 이윽고 운명은 그들도 삼켰다. 알렉산더, 폼페이우스, 시저 등은 저와 같이 빈번하게 여러 대도시를 파괴하고, 전쟁에서 몇십만의 기병대를 종횡무진 죽이다가 이윽고 그들 자신도 삶에서 떠났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우주의 화성설(火成說)*에 대해서 그처럼 많은 사색을 한 뒤, 물로 배를 채우고 흙으로 전신을 칠한 채 죽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이(蝨〕는 데모크리토스를 물어 죽였고, 또 소크라테스는 다른 이에게 물려 죽었다.
이러한 일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너는 이미 승선하고 있다. 너는 이미 항해를 하고, 너는 이미 피안에 접근하고 있다. 이제 하선하는 것이 좋다. 만약 (죽음이) 참으로 또 하나의 다른 세상의 생활에 들어간다고 하면 거기에도 신들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무감각한 상태로 돌아간다면, 너는 이미 고통과 쾌락에 번거로워하지 않게 되고, 또 (너는) 너의 형체에 사로잡힌 노예가 아닐 것이다. 생각건대, 형체라는 것은 그것이 간직하는 것(영혼)의 우월함에 비한다면 지극히 저열한 것이다. 즉 영혼이 지혜요 신성 이라면, 형체는 흙이요 부패이기 때문에.
……즉, 죽음이란 만약 그것이 상상력에 나타나는 모든 위협과 허세를 버리고 적나라하게 본다면 다만 자연의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발견된다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그 회복기의 뒷부분에, 내가 아무런 선택의 기준이나 구별 없이, 그리고 때로는 거의 비굴하게까지 그곳의 사람들과 친해지려고 애쓴 것은, 아마도 그런 심리 상태에서 오는 어떤 위기의식 때문이 아닌가 한다.
어느 정도 마음 놓고 마을에 나다닐 수 있게 되고부터 나는 닥치는 대로 마을 사람들과 사귀기 시작했다. 어떤 마을에나 서넛은 있게 마련인 내 또래의 건달들과는 자청하여 인사를 나누었고, 낯모르는 사람들의 바둑판이나 장기판에도 서슴없이 끼어들었다. 어떤 때는 어렵게 타낸 용돈으로 자신은 먹지도 못하는 술을 사가며까지 그곳 사람들의 환심을 사려 한 적도 있었다.
과연 그 방법은 효과가 있었다. 나는 오래잖아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고 친구도 몇 생겼다. 하나는 변두리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조개껍데기 가루(대개 사료나 비료로 썼다) 공장을 하는 아버지 덕택에 놀고먹던 김성구란 건달로, 그는 나중 건강을 회복한 나와 가끔 좋은 술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서동호란 친구로 강진의 유일한 대학생이었는데, 차차 알게 되겠지만 그는 친구로서보다는 선생으로 내게 매우 귀중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무렵에 만난 사람으로 가장 인상 깊은 사람은 별장집 남매였다. 별장집이란 갯가 전망 좋은 산기슭에 자리 잡은 조그만 일본식 가옥에 마을 사람이 붙인 이름이었다. 전에도 나는 몇 번 그 집 앞을 지난 적이 있었지만,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내가 병줄에서 조금 놓여날 무렵 해서 먼저 그 집의 독특한 외양이 내 흥미를 일으켰다. 집은 작고 낡았어도 이름처럼 그 용도는 한때 누군가의 별장이었음에 틀림없었다. 발아래 갈대밭과 넓은 강물을 두고, 멀리 푸른 바다가 보이는 산기슭, 유난히 유리창을 많이 쓴 건물 구조며 좁은 뜨락의 등나무 넝쿨과 벤치―그런 것들은 강진의 일반적인 가정집과는 너무도 달랐다. 특히 그 등나무 넝쿨은, 그걸 받쳐주고 있는 나무 시렁*이 썩어 여기저기 무너져 내리고는 있어도 멋진 그늘을 만들고 있었고, 그 아래 벤치도 칠은 벗겨지고 등받이 나무가 부러졌지만 아직은 사람이 앉을 만했다.
그러나 정작 내가 그 집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느 날 우연히 그 집 앞 둑길을 지나다가 젊은 여자가 벤치에 앉아 있는 것을 보게 된 후였다. 유행에 무관심한 것 같으면서도 세련된 옷차림이었는데, 유난히 흰 얼굴과 손에 든 두툼한 책 같은 것들은 한눈에 그녀가 강진의 주민이 아님을 알아볼 수 있게 했다. 나는 문득 그런 그녀에게서 받은 원인 모를 감동으로 걸음을 멈추고 한동안 멍청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도 그런 나를 느꼈던지 책을 덮고 잠깐 나를 노려보더니 이내 성난 얼굴로 일어나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도 무안해서 곧 그 자리를 떴다. 잠시 후에 언뜻 돌아보니 창틀에 두 사람이 붙어 서 있었다. 방금의 여자와 웬 젊은 남자였다.
집에 돌아온 나는 곧 그들 남녀에 대해 알아보았다. 내 짐작과는 달리 그들은 부부가 아니라 남매간이었다. 그 밖에 나는 그들이 부산의 어떤 부잣집 자식들이라는 것과 둘 다 폐를 앓고 있으며 벌써 일 년째 거기서 요양 중이라는 것 등도 알아냈다.
“택없이 너무 열 내지 마라이. 우리 같은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별종들이 잉까.”
그게 그들 남매에 관한 정보 대부분을 알려준 김성구의 귀띔이었지만, 왠지 나는 처음부터 그들에게 어떤 동료 의식을 느꼈다. 나와 마찬가지로 병을 앓고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무언가 그들 주위를 감싸고 있는 영락과 유적의 분위기가 더욱 그랬다. 하지만 내가 그들에게 접근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별장집 자체가 마을에서는 좀 떨어져 있는 데다, 또 그들 남매는 그들대로 마을 사람들과 전혀 교류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기껏 그 집 앞 둑길을 주된 산책로로 삼아 일없이 그 집 주위를 배회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따라 안개가 옅어 반 넘어 이운 달 주위에 달무리*가 곱던 밤이었는데,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던 나는 또 그 외로운 밤의 배회를 나섰다. 갈잎에 맺힌 이슬 때문에 옷깃을 적시며 걷다가 별장집을 지나 한참 거리인 거북바위 부근에서 문득 사람의 기척을 느끼고 걸음을 멈추었다. 벌써 새벽 두 시가 넘어 그 시각에 그런 곳을 배회하는 사람은 자신뿐이라고 생각하던 나는 놀라 상대를 살펴보았다. 맞은편에서 가볍게 숨을 헐떡이며 다가오는 것은 바로 그― 별장집 남매 중에 오빠가 된다는 청년이었다.
흠칫하는 나와는 달리 평온한 기색으로 다가온 그는 문득 처음 대하는 사람 같지 않은 어조로 말을 걸어왔다.
“그쪽도 무척 밤이 괴로운 모양이오. 그렇지 않소?”
“네, 조금은 그런데……?”
나는 얼결에 대답해놓고 약간 긴장하여 그를 쳐다보았다.
“나 황(黃)이라고 합니다. 그쪽은 성씨가 이(李) 던가요?”
희미하게 웃는 것인지 찡그린 것인지 모를 표정이었으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다. 먼빛으로 볼 때보다 훨씬 단아한 귀공자풍의 얼굴이었는데, 까닭 모를 내 짐작대로 어딘가 짙은 비극의 그늘 같은 게 느껴졌다.
“그렇습니다만…… 어떻게 아십니까?”
“얼마 전부터 우리 집 주위를 맴도시기에 나도 알아보았소. 그런데 ㅡ 아직 도 몸이 많이 나쁘시오?”
“별로 아픈 곳은 없는데, 이렇게 회복이 더디군요.”
“어쨌든 다 나았다니 다행이오. 오늘은 너무 늦고一내일 볕이 따갑지 않은 때를 골라 집으로 놀러 오시오.”
내 마음속을 다 알고 있다는 듯 그는 전혀 개의함이 없는 투로 말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런 일방적인 어조가 조금도 내 마음에 걸리지 않았다. 원인 모를 부끄러움 속에서도 다만 그의 초대가 반가울 뿐이었다.
“조용히 지내시는데 혹 폐가 되지 않을까요?”
“실은 그 때문에 누이와 약간의 논란이 있었소. 누이는 성치 못한 사람끼리 모인다는 게 싫은 모양이오. 그래서 누이와 내기를 했는데, 지금 확인한 결과 내가 이겼소. 즉, 이 형은 적어도 병자는 아니니까. 큰 환영은 기대할 수 없겠지만, 무안을 당하지는 않을 거요.”
그 역시 듣기에 따라서는 몹시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이었지만, 여전히 내게는 아무런 자극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이렇게 덧붙였을 때는 그 때 아닌 영광에 감사할 뻔했다.
“이곳 사람으로는 이 형이 우리들의 첫 손님이 될 거요.”
당시 내가 강진 사람들과 친하기 위해 ‘때로 거의 비굴하기까지’ 했다는 앞서의 술회는 바로 그런 경우를 말했음이리라.
다음 날 나는 야릇한 기대에 들떠 별장집을 찾았다. 그러나 실망스렵게도 가까이서 본 그들 남매의 생활도 내가 밖에서 대강 들은 것과 별 차이가 없었다. 다시 말해서, 병을 앓고 있다는 것과 이웃으로부터 격리된 것 같은 주거를 빼면, 그들의 삶도 나처럼 유적과 같으리라는 추측의 근거는 별로 찾을 수 없었다. 우선 그들의 살이부터가 집 밖에서 보기와는 많이 달랐다. 부족한 것 없이 갖추어진 살림 집기며 그들이 마시는 외제 음료에 이르기까지 한눈에 여유가 넘쳐 보였다. 거기다가 벽 한 면을 가득 채운 장서와 잘 갖추어진 스테레오 시설은 그들의 상당한 교육 수준과 함께 정서적인 윤택을 드러내는 것들이었다.
황은 스물셋, 그 누이동생은 감히 나이를 물어보지 못했지만 내 또래로 짐작되었다. 나는 먼저 황과 급속히 친해졌다. 황에게는 환자 특유의 예민한 감수성과 일종의 냉소벽 (冷笑癖) 외에 이렇다 할 지적 특성은 눈에 띄지 않았다. 오랜 요양 생활의 부산물로 이것저것 읽은 책은 많았으나, 산만하고 체계 없기는 나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오히려 나야말로 황에게는 특이한 존재로 비쳐지는 모양이었다. 그는 내 지난 이 년의 얘기를 즐겨 들었고, 건강한 몸으로 떠돌며 쌓은 대단찮은 이력과 자질구레한 모험들에 은근한 흥미와 동경을 감추지 않았다. 언젠가 나는 그가 나보다 네 살 위임을 부담스럽게 여겨, 말을 낮추라고 한 적이 있는데, 그는 완강히 거부했다.
“아니, 정신적인 나이는 오히려 이 형이 위인 것 같소.”
그런데 사실을 말하면, 내가 진작부터 강한 호기심을 품은 쪽은 그의 누이동생이었다. 어쨌든 그녀는 내 또래의 처녀였고, 얼굴도 화려한 아름다움은 없었으나 무엇에든 반하기 쉬운 열아홉의 열정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충분한 개성을 갖추고 있었다. 역시 환자 특유의 창백한 안색에 날카로움과 쌀쌀함이 묘하게 조화된 어떤 아름다움이었다. 하지만 가벼운 알은체나, 어쩌다 커피를 끓여 내오는 것 외에 그녀는 전혀 내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황도 어쩐 일인지 나와의 대화 가운데 그녀 얘기가 나오면 피하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언젠가 내가 그녀 얘기를 의식적으로 꺼내본 일이 있었다.
“학교엘 나가십니까?”˛
그날따라 여대생 같은 차림으로 두터운 양서(洋書) 한 권을 끼고 별장집을 나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내가 물은 말이었다.
“아뇨, 저 애는 들고 있는 책이 무슨 내용인지도 모를 덴데요.”
이상하게 악의가 번득이는 황의 대답이었다.
“대단한 미인이시던 데ㅡ”
“기괴미(奇怪美) 취향이시구먼. 관심 가질 필요 없어요. 그 애는 이 형에게 아직 남아 있는 질병의 냄새를 아주 싫어하니까.”
결국 나는 무참해져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또 한번은 이런 적이 있었다. 그날도 내가 별장집을 찾아갔을 때 황의 누이동생은 화사한 새 옷 차림으로 막 집을 나서고 있었다. 나는 황이 앉아 있는 등나무 아래 벤치에 걸터앉으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정말 아름답군요.”
“스미드⁕의 모순이지.”
황이 그 말을 받아 비꼬듯이 말했다.
“스미드의 모순?”
“그렇소. 여자야말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가 전혀 비례하지 않는 예가 될 것이오. 즉 물, 공기 등은 그것 없으면 인간이 당장 살 수 없지만 값은 거의 없거나 없는 것과 비슷하게 싼 대신, 여자는 보석 따위와 마찬가지로 별 쓸모도 없이 값만 비싸단 말이오. 그걸 위해 돈과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고, 이름을 더럽히고 몸을 망치고 심지어는 생명까지 바치는 것들이 숱한 걸 보면……”
그러고는 힐끗 나를 보더니 독특한 직설적인 화법으로 말했다.
“이 형이 저 애를 아름답게 보아주는 것은 고마우나, 거기에 비례하는 가치가 저 애에게 있는지는 의문이오. 더군다나, 이미 저 애에게는 비싼 값을 치르고 있는 얼간이가 있소.”
내가 그렇게 눈부시게 그녀를 바라보면서도 무분별한 열정에 빠져들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친누이동생에게 대한 황의 그런 혹평에 힘입은 바 컸다. 그러나 더욱 결정적인 것은 바로 그 김성구란 건달이었다. 그는 내가 별장집을 드나든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 돌연 그녀에게 열중해져 공공연히 으르렁 거렸다.
“그 가시나는 내가 점찍었다. 언 놈이든 손만 대믄 가만 한 둘 끼라.”
나는 그런 그가 두렵다기보다는 불쾌하고 또 약간 가소롭기도 해서 말해주었다.
“걱정마시오. 내 김 형의 충실한 배달부가 되어드리지.”
그러고는 짐짓 철자조차 엉망진창인 그의 편지를 몇 번인가 그녀에게 전해주었다. 그녀는 무표정하게 그 편지들을 받더니 어느 날 나를 통해 그에게 만나자는 전갈을 보냈다. 시내의 어느 다방이었는데, 그날 그녀가 어떻게 했던지 그 뒤 성구 녀석은 일절 그녀에 대한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그러나 어쨌든 그 일을 통해 나는 그녀에 대한 미묘한 감정을 깨끗이 청산하게 되었고, 그녀 역시 의심이 풀렸다는 표정으로 스스럼없이 나를 대하게 되었다. 나는 다만 그녀의 오빠인 황의 말벗일 따름이었다.
그러저럭 건강이 회복되어 내가 어느 정도 일할 수 있게 된 것은 팔월에 접어든 후였다. 그러나 건강이 회복되었다고 해서 내가 당장에 유적과 같은 삶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질병을 핑계로 내게 직접적인 부담 없이 유예되고 있던 여러 문제들이 한꺼번에 나를 덮쳐왔다.
그 하나는 형과의 관계였다. 몸은 충분히 모래장 일을 해나갈 수 있었으나 뜻 아니한 발병으로 석 달 가까운 시간을 빼앗긴 나로서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검정고시가 어느새 석 달 후로 다가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형은 물론 공부에만 전념하는 나를 침묵으로 지켜보고 있었지만, 침묵이란 때로 그 어떤 맹렬한 비난이나 질책보다 더 괴로운 수가 있다.
거기다가 더욱 나를 괴롭히는 것은 공부 자체였다. 나는 자신도 없고 확실한 계획도 없이 이 과목 저 과목을 허겁지겁 쫓아다녔다. 그러나 수학과 과학에 이르면 거의 질망적이었다. 특히 수학은 병이 나기 전 간신히 중학 과정을 정리하고 막 고등학교 일학년에 접어든 상태 그대로였다. 그렇지만 해보는 도리밖에 없었다. 이미 말한 대로 적어도 내게는 그게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기회였다. 생일이 빠른 나는 이듬해에 징병검사를 받게 되어 있었고, 그렇게 되면 대학에 진학할 기회는 영영 없어지저나 잘해야 대학 입학과 동시에 입대해야 되기 때문이었다.
그럴 때 내게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이 서동호였다. 처음 친구로서 사귀었던 그는 그런 내 어려움을 듣자 자원하여 수학 지도를 맡아주었다. 명문은 아니지막 그래도 공대에 적을 두고 있는 탓에 고등학교 수학 정도는 가르칠 만했다. 거기다가 내게 더욱 다행이 된 것은 그 무렵이 그의 여름방학 중이었던 점이다.
강진에서 또 하나 유적된 삶을 잇고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은 내가 그런 경위로 드나들게 된 서동호의 집에서였다. 서동호의 가족은 얼핏 보면 전형적 인 강진의 원주민이었다. 그들은 갯벌에 일군 몇 마지기 논에서 기본적인 양식을 얻고 나머지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재첩국(재첩 속살로 끓인 국) 행상으로 메웠다. 그 재첩국 행상은 물론 농사일까지 혼자서 억척스레 해내는 서동호의 어머니는 그곳에서 나고 자란 순수한 강진 사람이었다. 서동호 역시도 그가 대학생이란 것만 빼면 강진의 다른 주민들과 별 차이가 없었다. 강 낚시에서 투망까지 못하는 게 없었고, 팔을 걷어붙이고 모래장에라도 나타나면 영락없는 상차꾼이었다. 그의 어린 동생들도 이렇다 할 특징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단 한 사람 그의 부친인 서 노인만은 유별난 데가 있었다. 비록 독한 술로 새카맣게 타들어 가고는 있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어딘가 오랜 지적 연마의 흔적이 있었다. 나는 왠지 서 노인을 처음 대하는 순간부터 서동호를 강진의 유일한 대학생으로 만든 것은 직접이든 간접이든 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항시 술에 취해 건들거리고는 있어도, 그는 분명 문화와 도회의 사람이었다.
그런 내 관찰이 옳았음은 오래잖아 확인되었다. 내가 그의 집에 드나든 지 열흘 만인가 나는 동호가 한 무더기의 일본 책들을 뒤지며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중의 한 권을 집으며 무심코 말했다.
“일본어 실력도 상당한 모양이군.”
“아니, 아부지 책이다.”
“아버님?”
“일본 유학까지 했다카데. 나는 몬 믿겠지만…….”
“그래? 그럼…….”
어느 정도 짐작은 했어도 막상 동호에게 그 말을 들으니 충격이 컸다.
“더는 묻지 마라. 나도 그밖에는 모르잉까.”
내가 호기심에 차서 무언가를 더 물으려 하자, 동호는 문득 얼굴이 굳어지며 그렇게 말허리를 잘랐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그 뒤 내가 여러 가지로 알아보아도, 서 노인에 관해서는 몇 가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 말고는 강진 토박이들조차 별로 아는 게 없다는 점이었다. 몇 가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란, 그가 강진에 나타난 것이 6·25 전후란 것과 몸이 아파 휴양 중에(병명은 아무도 몰랐다) 마을 처녀인 동호 어머니와 눈이 맞아 그곳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 뒤로는 별로 하는 일 없이 줄곧 술에만 절어 지내왔다는 것 등이었다. 서동호는 분명 무언가를 더 알고 있었겠지만, 나의 궁금증이 그의 감정을 건드려가면서까지 그 아버지의 숨겨진 내력을 캐낼 정도로 크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다시 우연한 기회에 나는 서 노인의 남다른 과거를 추측할 수 있는 사건과 마주치게 되었다. 건강이 거의 회복되어 마음 놓고 술잔까지 들게 된 구월 어느 날, 나는 멀리서 찾아온 옛 친구 하나와 선창가 술집에 앉아 있었다. 한때는 둘도 없이 친하던 사이로, 나도 그 밤만은 공부를 포기하고 그의 술 상대가 되었던 것인데 술에 취하자 그 친구는 버릇대로 신세타령에 들어갔다. 나에게는 익숙한 신세타령 ―좌익 활동을 하다 산에서 죽은 부친에 대한 원망과 험구*였다. 자신의 삶을 서른 몇의 한창 나이에 비참하게 끝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젊은 아내와 어린 남매를 형극* 같은 세월 속으로 내동댕이친 부친에 대한 그 친구의 원한은 사실 듣기조차 섬뜩한 데가 있었다.
“내 소원은 국군 장교가 되어 빨갱이를 때려잡는 것이었어. 그런데 그 잘난 애비 덕택에 그마저도 잘 안 됐어……”
그때만 해도 연좌법*이 엄격할 때였다. 그 친구는 자신의 말대로 무슨 사관학교인가를 지원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날도 무슨 후보생 시험인가를 쳤다가 또 면접에서 미끄러진 후 나를 찾아온 길이었다.
“지원 입대를 할 거야. 그러고는 말뚝을 꽝꽝 박겠어.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한번은 빨갱이들이 내려오겠지. 설령 그가 살아서 함께 내려온다 해도 용서하지 않겠어. 맨 먼저 그를 쏘겠어. 어머니가 어떻게 돌아가신지 알아? 누님이 어디서 무얼 하는지 알아?”
그 친구는 거의 광란 상태였다. 취해서 온 줄 모르고, 과음을 말리지 않은 탓이었다. 뒤늦게 알아차린 내가 달래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우리 자리로 다가오더니 힘껏 그 친구의 뺨을 때렸다.
“이 노옴―”
얼큰해져 있던 나까지도 정신이 확 들 만큼 높고 우렁찬 목소리였다. 놀라 쳐다보니 서 노인이 삼엄한 얼굴로 서 있었다. 구석진 자리에는 그가 마시려다 둔 것인 듯 맥주잔에 가득 부은 소주와 작은 안주 접시가 손을 대지 않은 채 놓여 있었다.
“어디서 온 쇠쌍놈이 이렇쿠롬 방자하노? 아무리 막돼먹은 자식이로니, 죽은 애비를 그렇쿠름 욕비는 수가 어디 있노? 참말로 눈 뜨고 몬 보겠구나―”
난데없이 호된 따귀에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그 친구가 멀거니 그런 서 노인을 올려보았다. 잠시 가쁜 숨을 가다듬은 서 노인은 그 친구에게 별다른 반항의 기미가 없자, 약간 노기를 거두었다.
“바라, 젊은 친구야. 사람은 죽으믄 모든 기 다 그만이다. 빨갱이가 나쁘다 캐도 이미 죽었으믄 그 사람도 맹 희생잔 기라. 죄는 우리가 힘 없고 가난한 것뿐이다. 그리고―바라, 젊은이, 자손 되어 그리 내놓고 조상 욕을 내놓고 해서는 안 되는 법인 기라. 역적한테 항복한 조상을 멋도 모르고 욕해놓고두 김삿갓은 평생 죄인 시늉을 안 했나? 하기사 젊은이 속도 짐작은 간다. 어메는 고생시럽게 살다 죽었고 누부는 뭐 잘못된 모양이제? 글치만 그게 와 느그 아부지 죄겠노? 다 잘못된 세월 죈 기라. 느그들사말로 또 그런 세월 만들지는 안 해야 될 거 아이가? 젊은이사 좀 벨난 이유기는 하다마는, 어느 쪽이던 서로 미워하고 원수 갚을 마음 길러서는 못쓴대이. 그라믄 언젠가는 또 그 몹쓸 세월이 오게 된대이―”
서 노인도 어디선가 먼저 마신 술이 있는 모양이었다. 얘기의 끝부분은 이미 호령이라기보다는 간곡한 타이름이었고, 목소리도 약간 떨리고 있었다. 다행히도 내 친구가 그때 갑자기 쿨쩍이기 시작해 소동은 그쯤에서 끝났다. 그러나 그날 밤 서 노인이 한 말은, 처음의 그 엉뚱하리만큼 맹렬한 분노와 함께 내 기억에 깊은 인상으로 남았다. 숨겨진 그의 과거에는 무언가 이념과 관계된 어두운 부분이 있음에 틀림없었다……
몸이 회복되고 시간에 쫓기기 시작하면서 좀 드물어지기는 했지만, 나는 변함없이 별장집을 드나들고 있었다. 그 무렵에는 떠돌이 시절이 중심이 된 내 얘기 밑천도 거의 동난 상태여서, 화제는 주로 책이나 자신들의 몽상에 가까운 사색에서 나온 것이긴 해도 황과 나는 여전히 유쾌한 말벗이었다. 하지만 그때 우리가 나눈 대화를 떠올려보면 황당하다 못해 낯이 화끈해질 때마저 있다. 하나는 이제 막 대학에 가기 위해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는 처지에, 그리고 다른 하나는 몇 년 전에 겨우 대학에 입학했다가 한 학기도 못 마치고 신병*으로 휴학한 처지에, 우리는 엄청난 주제들을 잘도 떠들어댔다. 절대적인 가치란 존재하는가? 영원은? 신은?―우리는 그런 것을 떠들며 갈대숲 길을 걷다가 포구로 흘러드는 조그만 개울에 오줌을 누고는 과장스럽게 외쳤다.
“태평양은 분명히 불었다!”라고.
김성구의 일 이후 스스럼없이 된 황의 누이동생과도 점점 가까워졌다. 첫인상의 쌀쌀함과 날카로움은 나에 대한 지나친 경계 탓이 아니었던가 싶다. 가까이서 본 그녀는 약간 비뚤어진 데가 있긴 해도 대체로는 평범한 여자였다. 나이로는 나보다 한 살 위였으나 생일로는 겨우 대여섯 달 빨랐고, 학교는 그 전해에 여고를 졸업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녀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나를 당황케 하는 것은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그녀의 희로애락이었다. 어떤 때 그녀는 다정한 오누이처럼 되어 곧잘 지치고 절망하는 나를 위로해주고 격려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때는 마치 질투 많은 여인처럼 내가 은근히 마음 설레어 하는 마을 처녀를 혹평했다. 그러나 어쩌다 내가 약간 미묘한 기분이 들어 그런 방향으로의 접근을 조금이라도 드러내면 그녀는 새파랗게 화를 내어 며칠간은 얼굴조차 대하지 않으려 했다. 나는 그런 그녀 때문에 몇 번 혼란되고 당황한 적이 있었으나, 이윽고는 무관심하게 되었다. 그 집을 드나드는 것은 그녀가 목적이 아니었고, 또 그때 나는 시간에 몹시 몰리고 있던 터여서 턱없이 감정을 희롱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던 탓이었다.
그들 남매의 생활에 대해서 어느 정도 자세히 알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황의 본가에서는 일주일에 한 벋 꼴로 별장집에 차를 보내왔다. 회색의 고급 승용차였는데 그 차로 본가에 돌아가는 것은 언제나 황의 누이동생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돌아가면 대개 하룻밤을 본가에서 묵은 후, 그다음 날 오전쯤에 그들에게 필요한 여러 가지 생활필수품을 승용차 트렁크에 가득 싣고 돌아왔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그런 날 홀로 별장집을 지켜야 하는 황의 태도였다. 누이동생이 떠날 때부터 침울해지던 그는 홀로 남으면 거의 히스테리 상태로까지 떨어졌다. 대수롭지 않은 농담에도 벌컥 화를 내어 사람을 무안하게 만드는가 하면 어떤 때는 자기가 앓는 병에 해롭다는 술을 몇 잔이고 비웠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어서 한번은 그 까닭을 넌지시 물어본 적이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이 무엇인지 아시오?”
그는 대답 대신 차가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질문에 어리둥절해 있는 나를 대신하여 스스로 대답했다.
“삶이오. 그게 인내하지 못하는 고통은 없소. 나는 저 애가 그놈의 차를 탈 때마다 나 스스로가 능욕당하는 기분이오. 하지만, 살기 위해 저 애를 보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오……”
자조 섞인 그의 목소리로 보아 그는 본가에 대해 깊은 원한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다시 적당한 때를 보아 황의 누이동생에게 그 내막을 물어 보았다.
“오빠가 열일곱일 때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젊은 계모가 들어왔죠. 오빠는 그 계모를 싫어했어요. 그리고 그 때문에 아버지와도 거의 남남처럼 되었죠. 그렇지만 어떻게 해요? 결국 필요한 것은 거기서 얻어 와야 하지 않겠어요? 더군다나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병자들이니 ㅡ”
황과는 달리 지극히 담담한 그녀의 어조였다. 나는 그녀의 설명에 비해 황의 원한이 너무 치열하고 뿌리 깊어 보이는 것이 약간은 이상했지만, 그때는 이미 한가하게 남의 사생활이나 들추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그 사이 어느새 여름이 다 가고, 대학 진학의 첫째 관문인 검정고시가 한 달 앞으로 바짝 다가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한 달을 회상하기에 앞서 언제나 내게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은 어느 날 밤의 꿈이다. 그날 밤도 나는 새벽까지 책과 씨름하다가 책상에 앉은 채로 곯아떨어졌는데 그 꿈속에서 맹렬한 불꽃을 보았다. 그것은 책상이며 책이며 이불을 태우고, 산과 들을 태우고 나를 태웠다. 놀라 깨어난 후에도 그 불꽃들은 한동안 내 눈시울 속에서 빨간 혀를 널름거리고 있었다. 바로 그랬다. 그 무렵 이미 내가 준비하는 시험이나 대학 진학은 그 본질이나 그것이 내 삶에 대해 가지는 의미와는 별 상관 없이, 그대로 크고 뜨거운 불꽃이었다. 그리하여 그것은 내 낮과 밤을 사르고 육신을 사르고 영혼을 살랐다. 그때의 내 노력이 얼마나 치열했던지 뒷날 형수는 이렇게 술회했다.
“나는 도련님이 미쳐 방금이라도 고함을 지르고 뛰쳐나오지 않을까 걱정했어요.”
따라서 그 한 달간의 일로 기억나는 것은 다만 항시 백열등이 켜져있던 내 골방과 흐트러진 책과 과로로 무겁던 몸, 그리고―서동호뿐이다.
뜻하던 대로 대학을 가고, 그 뒤 갖가지 우여곡절을 거쳐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내 삶이 굳어지게 된 게 잘된 일인지 못된 일인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 시험에 대해서만은 지금도 서동호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참으로 내게 더할 나위 없는 선생이었다. 겨우 대학 일 학년이면서도 그는 내가 걱정하던 수학을 석 달 남짓한 기간에 거뜬히 해결해주었다. 수학이 과목 낙제를 면할 정도가 되자 남은 것은 예의 그 치열한 불꽃―무슨 앞날의 대가를 위해서라기보다는 현재의 번민과 고뇌에서 벗어나기 위한 그 필사적인 노력에 나를 맡기는 일뿐이었다.
그러다가 다시 강진의 사물들이 내 의식 속에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무사히 그 시험을 치르고 다시 꼬박 사흘간 심한 몸살을 앓고 일어난 후였다. 약간 허망하기는 했지만 막상 시험을 치르고 나자 의외로 기분은 담담했다. 아니 그 이상, 짜낼 수 있는 마지막 한 방울의 힘까지 다 쏟았다는 일종의 자부심과 함께 내 정신의 키가 한 길이나 더 높아진 듯 원인 모를 성취감까지 느껴졌다. 이전과는 달리 내가 꽤 느긋한 마음으로 결과에 대한 준비까지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런 느낌 때문이었으리라. 시험에 합격하면 그 뒤는 변화에 맡긴다. 만약 불합격이면 지금껏 해온 것보다 더 철저하게 떠돌면서 한 세상을 보낸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운명이 내게 원하는 역할 같으므로―그것이 당시의 내 결정이었다.
내가 다시 한 번 서 노인의 숨겨진 과거와 연관을 맺게 되는 것은 바로 그런 기분으로 발표를 기다리던 어느 날이었다. 초저녁이었는데, 무엇 때문인가 서동호의 집을 찾아간 나는 전에 없던 이상한 분위기를 느꼈다. 언제나 시끌벅적하던 집 안이 무거운 정적에 빠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건장하던 서동호의 어머니가 머리를 싸매고 안방에 누워 있었기 때문이었다. 평소 제집처럼 드나들던 터였으므로 거리낌 없이 문을 연 나는 멈칫하며 어디가 편찮으시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대답 대신 깊은 한숨을 쉬고 돌아누웠다. 낙천적이고
활달하던 그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나는 그만 돌아갈까 하는 기분이 들었으나 이왕 온 김이라 다시 서동호의 방문을 열었다. 조용한 방 안에는 사람이 셋이나 앉아 있었다. 서 노인과 동호, 그리고 웬 낯선 사람이었는데 그의 얼굴을 쳐다본 순간 나는 아, 하고 탄성이라도 지를 만큼 놀랐다. 서 노인의 삼십대가 바로 그러하였으리라고 추측될 만큼 서 노인과 닮은 탓이었다.
무엇인가 수군수군 얘기를 주고받던 그들은 내가 들어서자 갑자기 굳어진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가 서동호가 약간 성가신 얼굴로 일어서더니 나를 대문께로 데리고 갔다.
“집에 일이 쫌 있어. 급하잖으믄 내일 보자.”
그가 어딘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인데?”
“손(손님)이다.”
“아까 그 사람? 네 아버지와 많이 닮았던데.”
“사, 삼촌이다. 지금 되게 중요한 이바구 중이다.”
내 볼일이란 게 그리 급하지 않았던지 나는 그가 바라는 ˙대로 해주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무심코 그 얘기를 했더니 형이 이상한 듯 고개를 기웃거렸다.
“거참 이상하다. 여기 온 지 삼 년이 다 되도록 서 노인에게 동생이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그 말을 듣자, 문득 그 여름에 술집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르며, 서 노인에 대한 호기심이 되살아났다 그래서 이튿날 동호를 만나자마자 어찌된 일이냐고 물어보았다.
“오래 왕래가 없었기 때메 강진 사람들은 잘 모를 끼라.”
“그런데 왜 갑자기?”
“그쪽 문중에 무슨 일이 있는 갑더라.”
그런 동호에게는 무언가 꾸며대고 있는 기색이 있었다. 그러나 내가 그걸 지적하자 동호는 왈칵 짜증을 냈다.
“니야말로 참말 이상한 놈이다. 남의 집안일이 뭐 그리 궁금하노?”
다행히도, 정말 다행히도 나는 검정고시에 합격하였다. 대학을 향한 첫 관문을 무사히 통과한 셈이었다. 합격을 확인한 날 자축의 술에 취해 보낸 하루가 지금도 선연하게 떠오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걸로 내 유적이 끝난 것은 역시 아니었다. 대학의 본고사가 다시 석 달 앞으로 촉박해 있는 데다 나는 또 형의 다급한 요청에 의해 모래장으로 끌려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겨우 여섯 달 사이인데 모래장은 여러 가지로 많이 달라져 있었다. 내가 앓아눕기 전만 해도 모래 장사랬자 기껏 박용칠과 최광탁이 좀 큰 규모였을 뿐 나머지는 모두 고만고만한 영세업자들이었다. 곧 형처럼 십 톤 내외의 배 한 척에 대여섯 명의 선원과 상차꾼 두엇을 거느린 강진의 주민들이었다.
그런데 골재 장사가 재미있다는 소문이 나돌자 부산의 몇몇 시답잖은 자본가들이 그 장사에 덤벼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원래 모래장 위에 있던 하천 부지를 빌려 그보다 몇 배 넓은 모래장을 만들고. 한꺼번에 열 트럭분 이상을 실을 수 있는 대형의 모래 배를 몰고 왔다. 또 상류의 모래 채취장에는 중기(重機)를 띄워 임금과 경비를 절약했다. 그리하여 대량으로 펴 온 모래를 소규모의 배 한두 척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싼값으로 내놓았을 뿐만 아니라 모래장에도 중장비를 동원하여 상차꾼 두 사람이 삼십 분이나 걸려야 실을 수 있는 모래를 단 삼 분 동안에 차에 실었다.
이익에 민감하고 또 늘 바쁜 도회의 건축업자들은 너나없이 그 새로운 모래 장수들에게서 값싸고 간편하게 모래를 사 갔다. 그 바람에 원래의 소규모 모래 장수들은 속수무책으로 망해 들어갔다. 쌓아놓은 모래는 비바람에 반나마 유실되도록 팔리지 않는 대신 선원들과 상차꾼들의 임금은 밀리기만 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모래 배를 부산에서 온 대규모의 업자들에게 넘기거나 그 그늘에 흡수당하는 것뿐이었다.
형도 처음에는 그들 대규모 업자들과 정면 승부를 피하고 어떻게든 그들에게 빌붙어 살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내세우는 조건은 너무 가혹했다. 배를 팔 경우에는 권리금은 전혀 무시된 채 뱃값이나 겨우 받을까 말까였고, 배를 가지고 그들의 그늘에 들어가려 해도 겨우 좀 나은 선장 봉급 정도의 분배를 약속할 뿐이었다.
거기서 화가 난 형은 한번 그들과 정면으로 부딪쳐볼 마음을 먹게되었다. 사실 대규모의 업자들이라고 해서 전혀 약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중에 가장 큰 것이 스스로도 적자를 감수하면서까지 낮취버린 모래 값이었다. 얼마간만 그렇게 끌어가면 마침내 과독점* 상태가 오리라는 것이 그들의 계산이었지만 거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대형 모래 배와 중장비에 엄청난 자본을 묶어둔 채 언제까지고 계속하여 적자를 볼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형은 그 약점을 노려 버틸 수 있는 때까지 버텨보기로 작정했다.
형이 기어이 나를 모래장으로 끌어낸 것은 바로 그 싸움에 대비해 최대한 임금과 경비를 절약하기 위해서였다. 형은 선장과 선원 한 명을 해고하고 스스로 그 두 사람 일을 떠맡은 대신 나에게는 몇 가지 까다로운 주문과 함께 다시 모래장 서기 일을 맡겼다. 덕분에 나는 그전처럼 한가하게 앉아서 책이나 보며 찾아오는 손님을 기다릴 수만은 없게 되었다. 모래장에 트럭이 들어오기 바쁘게 달려 나각야 했고, 어쩌다 낯익은 건축업자나 운전사라도 있으면 소매를 잡다시피 끌어와야 했으며, 조금이라도 상차 시간을 줄이기 위해 상차꾼들 이상으로 열심히 모래를 펴 담아야 했다. 그리고 때로는 당시 가장 고급이던 신탄진*을 몇 갑이고 사두었다가 낯모르는 운전사며, 심지어는 여드름도 벗어지지 않은 조수 녀석에게까지 내키지 않은 선심을 쓰기도 했다.
공부는 다만 밤과 비 오는 날뿐이었다. 그렇게도 중요하게 생각하던 대학 입시가 채 석 달이 안 남았는데도.
그런데 모래장에 온 지 며칠 안 돼서 나는 앞서의 모든 변화보다 더 크게 눈에 띄는 변화 하나를 발견했다. 바로 모래장의 오랜 일과 중의 하나였던 최광탁과 박용칠의 그 요란한 싸움이 없어진 일이었다. 알고 보니, 최광탁은 내가 다시 모래장에 나오기 한 달쯤 전부터 위암으로 입원 중이었다.
최광탁이 없는 박용칠은 왠지 초췌하고 침울한 모습이었다. 죽을 둥 살 둥 마시던 술도 짐짓 멀리하늠 눈치였고, 선원들이나 상차꾼들을 향해 지르던 그의 독특한 고함 소리도 전혀 들을 수 없었다. 대신 그는 매일 최광탁의 병실에 들렀는데, 거기서의 언행은 세상의 그 어떤 동생보다 더욱 공손하다는 게 보고 온 사람들의 전언이었다. 거기다가 또 하나 감탄할 만한 것은, 이미 모래장의 경기가 형편없이 된 후인데도 최광탁의 몫만은 전과 다름없이 셈해주는 일이었다.
나는 그런 박용칠의 돌변이 얼른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와 최광탁의 독특한 관계에 대한 얘기를 이것저것 듣게 되면서부터 차츰 그것은 돌변이 아니라 당연한 일일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그들이 강진에 나타난 것은 휴전 직후의 혼란 때였다. 약간의 시차는 있였지만 그들은 대개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경위로 오게 되었다. 최광탁은 제5부두 뒷골목에서 주먹깨나 쓰던 건달이었는데, 친구가 노름판에서 잃은 돈을 힘으로 빼앗아 돌려주었다가 특수강도로 몰려 숨으러 왔고, 박용칠은 의붓아버지의 금고를 털어 일본으로 밀항하려다가 사기를 당해 돈만 뺏기고 그곳에 버려진 것이었다.
최광탁이 나중에 우스개 삼아 얘기한 것이지만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의 상황은 재미있었다. 그해 여름 어떤 새벽 불안한 마음으로 갈밭 속 움막에 잠들어 있던 최광탁은 갑자기 요란스레 갈대숲을 헤치는 소리에 눈을 떴다. 밀림과도 같은 갈대밭을 천방지축 헤치고 나타난 것은 바로 박용칠이었다. 그때 박용칠이 맨 처음 한 말은 이러했다.
“고찌라와 도꼬데스까(여기가 어딥니까)?”
그때껏 속고 있던 그는 거기가 일본 땅인 줄 알고 준비해 간 일본말로 그렇게 물었던 것이다. 밤새도록 어두운 바다를 달린 데다 선원들은 한결같이 그곳이 하카다(博多〕 남쪽이라고 일러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속은 것을 알게 된 후에도 박용칠은 한동안 최광탁의 움막에서 함께 지냈다. 밀항을 기도한 것과 의붓아버지가 경찰을 풀어 자기를 쫓구 있으리란 불안 탓이었다. 필요한 물품을 사러 나가는 것 외에는 몇 달이고 무성한 갈대밭 속에서 함께 지내다 보니 그들은 곧 다정한 친구가 되었다. 최광탁이 세 살 위여서 그가 형님이 되고 박용칠은 아우가 되었지만 그것은 의례적인 호칭일 뿐이었다.
그 후 어느 정도 체포의 위험이 사라진 뒤에도 그들은 강진에 그대로 눌러앉았다. 어떤 때는 고기잡이배의 선원으로 함께 일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밀수품 양륙반원이나 그곳을 출발지로 삼는 밀항선의 브로커 노릇을 함께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들을 쫓는 사람이나 공소시효*가 완전히 없어졌을 무렵 약간의 돈을 모은 그들은 힘을 합쳐 조그만 배 한 척을 장만했다. 처음에는 고깃배로 시작했으나 오래잖아 그 배는 강진의 첫 모래 배가 되었다.
그다음은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부근의 지형과 물길에 똑같이 밝고, 또한 둘 다 서른 이쪽저쪽의 건장한 일꾼들이고 보니 따로 돈 드는 선장이나 선원을 쓸 필요가 없었다. 발동기를 볼 줄 아는 선원 하나와 허드레 일꾼 하나만 있으면 그들은 하루에 다섯 번까지 질 좋은 모래를 모래장에 부려놓을 수 있었다.
그림 같이 붙어 다니던 그들이 늦은 대로 결혼을 생각하게 된 것은 이듬해 다시 새로운 배 한 척을 모을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생긴 후의 일이었다. 먼저 손위인 최광탁이 마을의 색시와 결혼을 했고, 이어 강요와도 같은 그의 권유에 박용칠도 아내를 맞았다. 신부는 역시 마을의 처녀로 최광탁의 아내와는 단짝이던 사이였다.
그런데 좀 유별난 것은 결혼 후에도 몇 년간 계속된 그들의 공동생활이었다. 무슨 생각에선지 그들 두 쌍의 부부는 한집에서 같이 살았을 뿐만 아니라 한솥에다 밥을 짓고 한상에서 그 밥을 먹었다. 일에 있어서도 남편들이 바깥에서 동업하고 있는 것처럼 아내들은 아내들대로 안에서 함께 일했다. 함께 재첩을 건지고, 함께 연료로 쓸 갈대를 쪄 날랐으며, 저녁에는 함께 몸을 씻고 함께 화장했다.
나중에 그 요란한 싸움이 된 문제의 원인은 아마도 그 무렵에 있었던 것 같다. 서로서로 절친한 사이인 데다, 오래 한집에서 뒤얽혀 산 그들이고 보면 남편이나 아내가 혼동될 가능성은 있었다. 특히 아내들은 갯가 여자들이 정조에 헤프다는 일반적인 의심 외에도, 한창 살림 모으는 재미로 일에 지쳐빠져 초저녁부터 곯아떨어지는 수가 많았고, 밤늦게 고주망태가 되어 들어오는 남편들은 오래 총각으로 지낸 탓에 창녀들에게 익숙해 있었다.
최광탁과 박용칠의 싸움에 언제나 발단이 되는 아이들도 약간은 이상한 데가 있었다. 국민학교 사학년인 박용칠의 맏아들은 키가 작달막하고 얼굴이 둥근 아버지와는 달리 가는 몸매에 기름한 얼굴이었고, 반대로 국민학교 삼학년인 최광탁의 둘째 딸은 키가 훌쩍하고 기름한 얼굴을 가진 아버지와는 달리 통통한 몸매에 둥글넓적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 일로 말다툼을 시작하게 된 것은 순전히 일없는 동네 사람들의 쑤군거림 탓으로 여겨진다. 각기 두셋씩 아이를 가지게 되고, 차차 네것 내것도 가리게 되어 그들 두 쌍의 부부는 분가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숟가락 하나까지 똑같이 가를 만큼 사이좋게 헤어졌다. 처음 동네 사람들의 그런 쑤군거림이 그들 귀에 들어갔을 때도 그들은 다 같이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겼다. 내가 보기에도 그 아이들이 아버지를 닮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상대방의 아버지를 닮았다는 근거는 전혀 없었다.
그러다가 그 일을 먼저 시빗거리로 삼은 것은 박용칠이었다. 동네사람들은 아이가 자랄수록 최광탁을 닮아갔기 때문이었다고 했으나, 왠지 내게는 그게 다만 싸움의 구실에 지나지 않는 것 같은 인상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박용칠은 그걸 구실로 무언가 풀리지 않는 삶의 응어리를 최광탁을 상대로 풀려고 했고, 최광탁은 최광탁대로 기꺼이 그를 맞아 자신의 몫까지 겹쳐 풀었던 것 같았다. 그들의 싸움이 비교적 짧구 뒤를 남기는 법이 없다는 점과 또 마땅히 책임을 나누어야 할 집안의 여자들에게는 결코 그 불똥이 튀는 법이 없었다는 점이 내 그런 추측의 근거였다. 그리고―그렇게 볼 때, 최광탁이 회복하지 못할 병으로 쓰러진 이상 그들에게 남는 것은 온전히 함께 고생스레 걸어온 긴 세월뿐이었다. 확실히 박용칠은 최광탁의 불행을 진정으로 슬퍼하고 있었다.
별장집 남매가 돌연 강진을 떠난 것은 내가 다시 모래장으로 나간지 얼마 안 되는 시월 말의 일이었다.
어느 날 저녁 함께 밥상을 받고 있던 형이 불쑥 물었다.
“너 저쪽 별장집 남매와 친하게 지냈지?”
“네, 조금.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뭐 이상한 게 없디? 일테면 가정환경 같은 거 말이다.”
“별루요. 그저 어머니가 계모라는 정도였어요. 무슨 일이 있습니까?"
“실은 오늘 동(洞)에 갔다가 박 서기한테 이상한 얘기를 들었다. 오빠라는 청년이 며칠 전에 혼자 주민등록을 옮기고는 극빈자 증명을 떼달라고 사정을 하더란다.”
“극빈자 증명을요?”
“그래, 뭐 국립요양소에 가겠다던가…….”
그러자 나는 계모와 부친에 대한 황의 유별난 증오를 떠올렸다.
“기어이 부모와 손을 끊을 모양이군요.”
“그런데 박 서기 말로는 그런 감정적인 것이 아니라, 정말로 사정이 다급한 것 같더라는 거야. 어쨌든 이곳을 곧 떠나려는 모양이더라.”
그러고 보니 나는 꽤 오랫동안 별장집을 찾지 않은 셈이었다. 시험 전에는 공부에 바빴고, 그 후에는 모래장에 나가게 되어, 근 두 달 동안에 그들 남매와 만난 것은 합격 발표 직후의 한 번뿐이었다.
나는 저녁술*을 놓기가 바쁘게 별장집으로 가보았다. 현관 입구에 황의 누이동생이 멍하니 서 있다가 나를 보더니 매달리듯 팔을 끌었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제발 부탁이에요. 오빠를 촘 말려주세요.”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빠르고 다급하게 말했다.
“오빠는 거기 가면 죽고 말 거예요. 오빠는 지금 중태란 말이에요. 아시겠어요? 꼭 좀 말려'주세요.”
“네, 그래보죠.”
나는 일의 진상도 정확히 모르면서 얼결에 대답하고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황 혼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소문대로 떠날 작정인 듯 그런 황 곁에는 크고 작은 트렁크 두 개가 나란히 놓여있었다.
“어딜 가시려고 이러십니까?”
“진작부터 내가 있었어야 할 곳으로 갈 작정이오.”
“있었어야 할 곳이라니 ― 어딜 말이오?”
“국립요양소의 요구호자(要求護者) 병동이오. 어쨌건 그 얘기는 그만두고 이별주나 나눕시다. 못 보고 떠나는가 걱정했소.”
그는 애써 화제를 돌리며 내게 술잔을 건넸다. 나는 몇 번이고 원래의 화제로 돌아가려 했으나 허사였다. 결국 그와 지난여름의 일이나 하릴없이 추억하고 있을 때 황의 누이동생이 들어왔다. 눈 주위에 운 흔적이 있었다.
“오빠, 꼭 가셔야겠어요?”
“그래 .”
황이 차갑게 말했다. 그러자 냉정을 가장하려고 애쓰던 그녀가 엎드러지듯 황의 무릎을 싸안으며 애원했다.
“오빠는 그곳을 모르세요? 이번에 가면 죽어요. 오빠, 제발 마음을 돌려주세요. 우리는 반드시 살아남아야 해요. 살아남아서 一우리가 받은 것을 모두 되돌려주어야 해요……”
그런 그녀의 눈에는 줄줄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황의 차가운 눈길은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나도 살고 싶다. 살기 위해 그리로 간다.”
“아니에요. 절대 그렇지 않아요. 거기로 돌아가는 것은 자살이에요…… 그들이 보기 싫으면 못 오게 할게요. 내가 일해서 벌게요. 제발 거기만 가지 마세요…….”
그러는 그녀가 애처로워 나도 거들었다.
“내 생각에도 여기가 더 좋을 듯한데 생각을 돌리시죠. 무슨 이윤 지는 모르지만…… 동생도 저렇게 애원하지 않습니까?”
“이 형, 나중에 속은 것을 분하게 여기지 말고, 내 말을 새겨들으시오. 내게는 부모가 없소. 내가 여기서 사는 것은 하루하루가 그대로 치욕이요. 지금 나를 죽이고 있는 것은 결핵균이 아니고 바로 그 치욕이란 말이오.”
“잘은 몰라도…… 기른 것도 어머니라 하지 않습니까?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아버님을 보아서…….”
나는 계모 이야기를 그 자신에게 직접 들은 것이 아님을 상기하며 더듬거렀다. 그러자 황이 갑자기 벌컥 성을 냈다.
“시끄러워요. 뭘 안다고? 그리고― 도대체 이 형은 남의 사생활에 너무 깊이 관계하려 드는 게 아니오? 이만 돌아가쇼. 곱게 이별주나 나누려 했더니……”
그러고는 싸늘한 얼굴로 나를 외면해버렸다. 황의 누이동생이 다시 흐느꼈다.
“오빠 ―”
“너도 시끄럽다. 기어이 내가 여기 이 형에게 이것저것 다 털어놓아야 시원하겠어?”
황이 매서운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쏘아붙였다. 그러자 왠지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말리던 기세가 알아보게 꺾였다.
“알겠어요. 알겠어요, 오빠·…….”
잠시 후 그녀는 탄식처럼 그렇게 뇌까리더니 나를 보며 나직이 재촉했다.
“그래요, 이건 우리 남매의 일이에요, 죄송하지만 이만 돌아가 주세요.”
나는 한편으로 무안하고 한편으로는 슬며시 화가 났지만 말없이 자리를 뜨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현관을 벗어나기도 전에 오래 참다 터진 듯한 남매의 흐느낌 소리가 처량하게 들려왔다.
이튿날 그들 남매는 별장집을 떠났다. 세간을 고스란히 두고 각기 커다란 트렁크 하나씩만 든 채.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며칠 후 우연히 모래장에 들른 김성구의 말이었다. 내가 측은한 기분으로 그날 밤의 일을 전하자 그는 대뜸 말했다.
“그 가스나, 뭔가 니가 모르는 기 있을 끼다. 우짜믄 놀랍고도 더러븐 일이.”
그리고 이상히 여긴 내가 캐묻자 그는 씹어뱉듯이 말했다.
“내가 그때 당한 기 너무 이상타 카이. 니가 내 편지 전해조가(주어서) 그 가스나하고 광복동에서 따로 만났을 때 말이라. 첫째로 그 가스나 너무 노숙하더라. 끽해야 우리 나인데, 이건 뭐 나를 알라(어린애) 취급이라. 난또(나도) 놀았다 카믄 논 놈 아이가? 그런데 그 가스나한테는 택도 없드라 카이. 그다음에 이상한 거는 ‘불새’라 카는 놈이라. 충무동에서 유명한 깡팬데, 그 가스나가 그날 오빠라 카미 데리 나왔드라꼬. 그런데 지 말 안 들으믄 꼬붕들도 손가락을 짤라뿐다 카는 고 독종이 그 가스나한테는 여간 공손한 기 앙이라. 그라면서 배미(뱀) 같은 눈으로 나를 째리보는데 참말로 식겁⁕ 묵었다. 거다가 그 가스나 요상한 기 어디 그거뿌이가. 패션모델 같은 옷하고, 영화배우 같은 화장하고―암만 캐도 뭔가 앞뒤가 잘 안 맞는다 카이 .”
나로서는 참으로 이해 못 할 일이었다.
그런데, 모래장을 중심으로 형이 벌이고 있던 힘겨운 싸움은 생각지도 않은 시기에 뜻밖의 방향으로 끝이 났다. 그 계기는 위암으로 입원해 있던 최광탁이 기어이 숨져버린 일이었다. 그 때문에 전의를 잃어버린 박용칠이 무너지자 형의 다른 동맹군들도 도미노 현상을 일으켜 형 홀로는 더 버틸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런데 모래장을 중심으로 벌여온 싸움의 결말을 말하기 전에 먼저 얘기해두어야 할 일이 하나 있다. 최광탁과 박용칠의, 거의 반생에 걸친 싸움의 결말이 바로 그것이다. 직접 그들과 교류한 적은 없지만, 이왕 그들의 기묘한 싸움이며 지나온 자취를 길게 얘기한 일이 있으니, 그 결말까지도 들은 대로 전해두는 편이 옳을 것 같다.
최광탁이 숨을 거둔 것은 그해 십 일월 초순이었다. 죽기 사흘 전부터 어떤 예감이 있었던지 최광탁은 정신만 들면 박용칠을 찾았다. 박용칠도 어쩐 일인지 모래장은 제쳐놓고 최광탁의 병실에 붙어살다시피 했다. 몇 번이고 박용칠을 불러놓고 무슨 말을 할 듯 할 듯 하다가는 입을 다물곤 하던 최광탁은 숨지던 전날 밤에야 이야기를 껴냈다.
“동상―니 참말로 나를 의심하나?”
“아임다, 행임, 아임다. 그냥 행임한테 한분 엉구렁(어린양) 떨어 본 거라예. 사는 기 심심키도 하고 또 같이 몰리댕기며 고생하던 옛날이 그립기도 해서.”
“난또(나도) 대강 그래 생각했다마는, 암만 캐도 엉구렁만 가지고는 그래 안 되는 기라. 뭔동 미심쩍은 기 있제?”
“아임다. 맹세하겠임다. 내가 행임을 의심하다이요.”
“인자 거진 막판 같다. 내한테 거짓불할 거 엄는 기라. 나도 짚이는 게 있다.”
“뭘 말씸임꺼? 지팼당이요?”
“그해 말따. 우리가 한집에 살 때 무슨 태풍인가로 느그 방구들이 내려앉았잖나? 그때 우리 두 내외가 한방을 쓴 적이 있제?”
“예, 그건 와예?”
“그때 우리가 얼마나 퍼마실 때로? 또 예펜네들은 집칸 장만는다꼬 얼매나 뼈 빠지게 일했노? 그래서 잠들믄 띠메고 가도 모르는 예펜네들한테 고주망태가 된 사나이들이 새벽에 기어 들어간 기 어디 한두 분이가? 낭패가 있었으믄 그때 있었을 기다.”
“암만 카믄 즈그 예펜네도 몬 알아봤을라꼬요?”
“나는 니가 그 문제를 들고 나설 때마다 퍼뜩퍼뜩 그때가 생각나드라. 아아들 나이도 대강 글코. 그란데―”
“……?”
“참말로 글타믄 그기 그케 분하고 원통하겠나? 밭 바뀌고 씨 바뀐 거 말이따.”
“……”
“내가 니캉 싸워도, 호역 아아들이 듣고 맴에 끼(끼어)하까 봐 우선 니 입 막을라꼬 그랬제, 속은 암치도 않더라. 니 씨라꼬 생각해도 딸아 귀키는(귀엽 기는) 똑같드라.”
“실은 행임, 지도 그랬임다. 내 언제 그 일로 우리 아 구박하거나 예펜네 닦달칩디꺼? 참말로 그냥 해본 소림더. 원망이 있었으믄 다른 기라예.”
“다른 기라꼬? 뭔데?”
“우선 행임을 만난 그 자체라예. 그때 행임을 만나 여다 주질러앉지만 않았으믄 나는 어떻게든지 일본에 갔을 끼라예. 그라믄 내 인생은 지금카모는 많이 달라졌을 끼라예…….”
“그거사 나도 글타. 나도 니하고 정부쳐 여기 안 처박혔으믄 지금쯤 많이 다를 끼다. 옛날에 내 밑에서 빌빌거리던 것들이 지금은 모도 한몫 잡아 시내서 사장질 하더라, 그 꼴난 주먹 가주고.”
“거기다 또 먼다꼬(뭐한다고) 장가는 가라 캐가지고― 사람을 이래 생으로 꼽새 (꼽추) 만들어놨으이―”
“그래도 자식 농사는 지어야 할 꺼 아이가?”
“다 소용없임더. 기집이건 자식이건 다 짐일 뿐이라예. 귀하믄 귀한 대로 짐이고 미우믄 미운 대루 짐인 기라예. 어디 훨훨 떠나고 싶어도 그것들이 걸려 안 되고, 분이 나 속이 뒤집히도 그것들 때매 참아야 되고…… 인자는 나이를 묵어 그란지 좀 덜하지만 요중간에는 우옜는지 아심니꺼? 다 때리치앗뿌고 천장만장 달라 빼고 싶은 맴이 하루에도 열두 번이던 기라예.”
“그거사 우야노? 그런데― 참말로 그것뿐이제? 내한테 주먹 울러매고 달라(덤벼) 들어도 속마음은 참말로 그것뿐이제?”
“맞심니더.”
“그라믄 됐다. 설마 죽는 사람 앞에 놓고 거짓불이야 하겠나? 실은 죽기 전에 닐 부른 거는 그 때문이다. 그랬을 리도 없지만, 니 맴에 정 걸린다믄 아아들 서로 바꽈 올라꼬 생각했다.”
“아이구 행임, 벨말씀 다 하심더, 팔수는 틀림없이 내 아들이라요.”
“됐다. 지숙이도 내 딸 맞다. 내 죽은 후에라도 허뿌 딴소리하지마라.”
―대강 그렇게 결말을 짓고 최광탁은 새벽녘에 숨졌다는 소문이었다. 그 자리에 있었던 게 누군지, 그 소문의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단언할 수 없으나 내가 보기에는 앞뒤가 맞아떨어지는 결말이었다.
그런데 이미 말했듯, 그와 같은 최광탁의 죽음은 모래장의 판도를 크게 바꾼 계기가 되고 말았다. 그 뒤 모래장 일에 흥미를 잃은 박용칠이 모래 배를 도회에서 온 업자들에게 헐값으로 넘겨버린 탓이었다. 가장 배짱 좋고, 힘 있던 최광탁과 박용칠이 그렇게 무너지자 나머지도 따라서 힘 없이 무너져 버렸다. 그래도 형은 마지막까지 버틴 덕으로 과독점 체제에 조급해 있는 도회지 업자들과 다소 유리한 거래를 한 쪽이었다. 배를 넘긴 돈으로 그럭저럭 덤프차 한 대를 구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형은 그 일로 재산의 절대량이 다소 줄긴 했으나 오랜 적자를 메우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게 됐고,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모래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처음 목표보다 대학을 낮추고 과를 바꾸기는 했지만, 이듬해 내가 그런대로 꼴사납지 않은 대학에 무사히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대개 그 돌연한 변화 덕분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다시 한 달 남짓한 모래장 서기 일을 끝내고 책상 앞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생활이 내 목적에 일치하고 그걸 추구하는 여건이 얼마간 나아지기는 했지만 정신적인 유적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두 달도 채 남지 않은 대학 입시가 무슨 넘지 못한 거대한 산맥처럼 나를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얼마만 한 무게로 내 영혼을 짓눌렀는지는 역시 그 무렵의 일기로 잘 알 수 있다.
‘이미 이 시험은 유희가 아니다…… 진작도 나는 그렇게 말해왔지만, 이제야말로 이 시험은 내가 이 삶을 이어가려면 반드시 풀어야 할 과제이며, 뛰어넘어야 할 운명의 장벽이다. 내 정신을 학대하는 압제자이며 나를 가두는 감옥이며―이것을 극복하지 않고는 결코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없는 사슬이다. 지난날의 무모와 광기를 변명하기 위해, 낭비된 시간에게 진 무위(無爲)의 빚을 갚기 위해, 그리고 앞날의 비참과 통한을 피하기 위해, 나는 반드시 이 강력한 적을 쓰러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내 영혼의 해방을 위해, 비뚤어지지 않은 삶을 위해, 진정한 인식을 위해, 영원한 예술을 위해 이 거대한 장애물을 뛰어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시험은 너무 깊이 들어와서 되돌아갈 수 없는 미로(迷路) 이며 나는 도망칠 권리조차 없는 필사의 전사(戰士)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체의 잡념은 버릴 것이다. 상상력의 과도한 발동은 억제할 일이다. 음과 색에 대한 지나친 민감을 경계할 것이다. 언어와 그것의 독특한 설득 형식에는 완강할 것이다. 감정의 분별없는 희릉, 특히 그것의 왜곡이나 과장은 이제 마땅히 경멸할 일이다…….’
한낱 대학 입시에 그처럼 무거운 의미를 부여하게 된 경위는 지금으로서는 역시 잘 이해되지 않지만, 그런 글은 일기장 도처에서 눈에 띈다.
‘시계의 초침 소리를 듣는 데 소홀하지 말아라. 지금 그 한순간 순간이 사라져 이제 다시는 너에게 돌아올 곳 없는 곳으로 가버리고 있다는 것을 언제나 기억해라. 한번 흘러가 버린 강물을 뒤따라 잡을 수 없듯이 사람은 아무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떠날 수 없다. 더구나 너는 이제 더 이상 그 초침 소리에 관대할 수 없으니. 허여된 최대치는 이미 낭비되고 말았으니.’
그리고 더욱 심하게는 이런 구절도 있다.
‘너는 말이다, 한 번쯤 그 긴 혀를 뽑힐 날이 있을 것이다. 언제나 번지르르하게 늘어놓고 그 실천은 엉망이다. 오늘도 너는 열여섯 시간분의 계획을 세워놓고 겨우 열 시간분을 채우는 데 그쳤다. 쓰잘 것 없는 호승심(好勝心)*에 충동되어 (바둑을 말함인 듯) 여섯 시간을 낭비하였다.
이제 너를 위해 주문을 건다. 남은 날 중에서 단 하루라도 그 계획량을 채우지 않거든 너는 이 시험에서 떨어져라. 하늘이 있다면 그 하늘이 도와 반드시 떨어져라. 그리하여 주정뱅이 떠돌이로 낯선 길바닥에서 죽든 일찌감치 독약을 마시든 하라.’
따라서 밤낮 없는 무리에 빠져 있던 내게 그 무렵의 강진은 그저 몽롱한 추억의 배경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 유일한 예외가 서 노인의 일이었다.
서 노인의 동생이라는 그 사내가 다녀간 이래 서 노인의 가족들은 조금씩 변해갔다. 때로 바보스러울 만큼 단순하던 동호는 이상하게 침울하고 사색적으로 변했고, 언제나 막소주에 취해 허허거리며 동네를 돌아다니던 서 노인은 말없이 집 안에만 박혀 있었다. 동호의 어머니도 겉으로는 전과 다름없이 보였지만 자세히 살피면 중병이라도 앓는 사람처럼 힘없고 허탈한 표정이었다. 나 자신의 일 이외에는 감각이 무디어질 대로 무디어진 때였지만, 그런 내게도 그들 가족은 무언가 엄숙하고 중대한 일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더군다나 그 일 속에 포함된 어떤 맹렬한 폭발과 붕괴의 예감은 입시 마지막 총정리를 위해 이따금씩 동호를 찾아가던 나까지도 까닭 없이 조마조마하게 했다.
그러다가 내가 대학 입시 원서를 접수한 날 밤 그 일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그날 망설이고 고른 끝에 서울의 명문대지만 좀 만만한 학과에 입시 원서를 접수한 나는 뒤숭숭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동호를 찾아갔다. 그런데 동호의 집 앞 좁은 골목에 그때까지만 해도 흔치 않았던 자가용 승용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전에 없던 일이라 나는 약간 이상한 느낌으로 동호네 대문을 들어섰다. 그때 집 안에서 벼락같은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글쎄, 돌아가라니까.”
놀라서 살펴보니 마루에 엎드린 사람을 향해 서 노인이 성난 얼굴로 서 있었다. 바로 몇 달 전에 보았던 동호의 삼촌이라는 삼십 대 후반의 남자였다.
“아버님, 그럼 임종만이라도 보아주십시오.”
“이 고얀 놈. 누가 네 애비냐? 여기 있는 것은 다만 이십 년 전에 죽은 서창길(徐昌吉)의 못다 썩은 시체라고 하지 않더냐?”
서 노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방으로 들어가며 소리 나게 문을 닫았다. 그러자 사내는 꼼짝 않고 엎드려 있었다. 그리고 울먹이는 소리로 말했다.
“아버님, 임종이 가깝습니다. 평생의 한을 풀어드리십시오.”
“닥쳐라. 죄 짓고 총살당한 시체, 지금 와서 그 사람에게 보여 무엇하겠느냐?”
문 안에서 여전히 호통을 치고 있었지만 서 노인의 목소리는 처음보다 한층 힘이 빠져 있었다. 그때 누군가 그들이 주고받는 뜻밖의 대화에 어리둥절해져 서 있는 내 어깨를 쳤다.
“가자, 여서 뭐 하노?”
동호였다. 그런 그의 입김에는 약간의 술기운이 서려 있었다.
“국문과로 정했다며? 니한테 맞을 끼다. 여기 앉자. 오늘은 니하고 이바구 좀 하고 싶다. 혹 아나? 니가 이담에 소설가라도 되문 좋은 소재가 될 끼다.”
마을을 벗어나 차가운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갯가 바위에 자리를 잡으며 동호가 말했다. 만약 그때 동호가 한 말이 가정이 아니라 한 예언이었다면, 그 예언은 지금 훌륭히 맞아떨어지고 있는 셈이다.
“벌써 니가 알아뿌랬으니 참말을 하지만, 아까 그 사람은 삼촌이 아이고 내 이복형이라. 철이 들면서부터 이 세상 어딘가는 있을 끼라고 막연하게 추측했던 그 사람이라. 와 그렇노 하면 아부지가 엄마를 만났을 때 서른아홉이었거든…….”
“그렇다면 아버지께서 스스로를 죽었다고 말하는 그 이십 년 전이겠군.”
“그래, 내 다 말해주지, 울 아부지가 바로 그 무시무시한 빨갱이였던 기라. 한번은 아부지가 옛날에 구경한 적이 있다는 공산 폭동을 얘기하더라꼬. 조그만 읍의 경찰서를 습격하고 유지들을 처형하고, 피, 불길, 끔찍한 사형(私刑)⁕ 뭐 이런 것들이었는데, 인자 가만 생각해보이 그게 바로 자기가 지휘했던 폭동이 아잉가 몰라. 우쨌든 국군 토벌대가 반격하자 한 패는 지하로 숨고 한 패는 산으로 도망쳤어. 그런데 나중에 전멸한 입산자 가운데 아부지로 오인될 만한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라. 아부지가 구차스럽구로 숨어 사는 동안도 그쪽에서는 공비 토벌 때 총살당한 걸로 처리됐거덩. 그쪽 가족들도 아부지가 안 죽은 줄 알면서도 뒤탈이 무서바서 모르는 척 남의 시체 갖다가 무덤까지 만들었능기라. 아부지가 이십 년 전에 죽었다고 자칭하는 건 바로 그 얘기라. 우짜튼, 실지로도 진짜 아부지는 그때 죽은 기나 마찬가지지마는…….”
거기서 들떠 있는 것 같던 동호의 목소리가 우울하게 가라앉았다.
“그란데― 내가 와 이리 울적한지 아나? 니는 울 아부지가 끔찍한 죄를 지은 빨갱이라 카는 기나, 이복형 맨치로 뭔가 부도덕하고 불결한 내미를 풍기는 존재가 갑자기 나타났기 때문일 기라고 생각하겠지만, 절대 그기 아잉기라. 내가 이래는 거는 갑자기 초라해진 울 아부지 때문이라. 결국은 씻지 못할 죄인으로 낙착을 본 아부지의 허무한 일생 때문에 이리 울적하단 말이다. 니 뭔 말인동 알아듣겠나?”
“글쎄·…….”
“울 아부지가 여기 온 거는 그 당시 이 근처에서 뜨는 밀항선이 흔했기 때문이다. 아부지는 갈밭에 숨어 그걸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만 병이 났뿌랬다 아이가? 그걸 울 어무이가 구해준 기라. 그기 어울리는 데라고는 한 군데도 없는 울 아부지 어무이가 만난 인연이다.
그 뒤 같이 살게 되문서, 울 아부지는 다는 아이라도 얼매쯤은 자기 얘기를 어무이한테 해준 모양이라. 어무이도 무식하기사 하지만 얼마큼은 알아들었던지 내게만은 어릴 때부터 아부지 얘기를 했지. 바까 말하믄, 나름대로 윤색해가지고, 뭔 독립투사나 박해를 받는 영웅맨쿠로 말이다. 우짜믄 어무이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르제. 자기보다 더 나은 계층에 속한, 보다 많이 배우고 인물도 잘생긴 남자에 대한 시골 처녀의 호기심과 동경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 울 아부지에 대한 어무이의 순종과 헌신이었능기라. 굶주림과 열에 떠갈숲에 쓰러져 있는 아부지를 처음 발견한 순간부터 삼남매를 낳고 기른 지금까지 변함없는 그 순종과 현신 말이라.
덕분에 나도 어북(제법) 철이 들 때까지 울 어무이와 비슷한 환상을 품게 되었제. 국민학교 때 담임선생이 아버지의 직업을 묻는데 독립투사라고 대답했을 정도잉까. 여러 가지 반공 교육을 받고, 결국 아부지가 한 일도 건국 초기의 처참한 공산 폭동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한 담에도― 내 그런 환상은 계속됐는 기라. 왜냐하믄 반역이나 혁명이라 카는 말은 뭔가 충성보다는 더 낭만적이고 매력 있는 거 앙이가? 일본에서는 지금도 글타 카데. 학생 때 빨갱이 아인 놈 하나또 없다꼬. 또 어른이 되믄 빨갱이 좋다 카는 놈 하나도 없다꼬…….”
평소 말수가 적은 편이어서 동호에게 그토록 긴 얘기를 듣기는 처음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게 이상하다고 느낄 수 없을 만큼 그의 얘기에 빨려 들어갔다. 겨울 바다에서 불어온 쌀쌀한 바람 탓인지 동호의 목소리가 차츰 떨리기 시작했다.
“그란데 그 환상은 이복형이 나타나자부터 금 가기 시작했지. 그는 아부지의 공소시효가 만료되자마자 행방을 찾아 나선 기라. 그라고 몇 년 만에 겨우 아부지를 찾은 기 바로 지난 초가을이제. 그는 아부지를 뫼시고 가겠다고 떼를 쓰데. 글치만 아부지는 딱 잡아뗐어. 아까맨치로 자기는 이미 이십 년 전에 죽었다는 기라. 나는 그걸 일찍이 소중하게 품었던 이념에 대한 울 아부지의 신의로 생각했어. 그란데 인자 보이, 그기 아잉 기라. 울 아부지는 지난 이십 년 동안 불안하게 숨어 산 죄인이었을 뿐이라. 말하자면 공소시효가 차도 여전히 남아 있는 죄의식이 귀향을 가로막았을 뿐이었던 기지. 메칠 전에 아부지는 내보고 카더라. 이념이라 카는 거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긴데 우리는 뭔가 잘못돼 그놈의 이념을 위해 인간이 죽고 죽였다고. 그리고 또 카더라. 한번 손에 묻은 고향 사람의 피는 죽기 전에는 절대 씻어지지 않는다꼬. 따라서 자기는 그 피의 임자들이 묻혀 있고 또 그 자손과 친척이 살고 있는 고향 땅을 밟아서는 안 된다꼬.
다시 말하믄 아부지는 법과 국가가 용서해도, 자신은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는 기라. 도덕적으로는 가치 있는 깨달음일는지도 몰라도 나로서는 왠지 허전해. 나는 울 아부지가 초라한 도덕가가 되기보다는 비극적인 반역자이길 바랐거덩…… 이념 따우는 상관없이 그저 한 실패한 영웅으로 죽기를 바랐거덩…… 내 말 니 이해하겠제?”
물론 나는 그 미묘한 감정의 논리를 이해했다. 나는 그와 비슷한 또래였고, 사물은 종종 그 실질보다는 외관으로 우리의 인식을 지배하던 때였으니까. 그러나 한편으로는 서 노인에 대한 깊은 동정도 금할 수 없었다. 그랬었구나, 아아, 그랬었구나.
강진에서의 나머지 날들은 다시 자학과도 흡사한 과로와 불면 속에 열에 들뜬 듯 몽롱하게 지나갔다. 어느새 시험 날이 다가오고, 서울로 올라가 시험을 치르고, 다시 선고를 기다리는 죄수처럼 결과를 기다리고― 그동안의 내 심리적 갈등을 새삼 장황하게 서술하는 것은 자칫 듣기에 지루할 것 같아 피하기로 한다.
행운은 두 번째도 내 편이 되어 나는 그럭저럭 목표했던 대학에 입학을 허가받았다. 일 년쯤 늦어지긴 했지만 그로써 크게 빗나갔던 삶의 궤도는 일단 정상으로 돌아온 셈이었다. 부산 시내에 있는 어떤 신문사에서 합격을 확인한 후, 버스를 탈 생각도 잊은 채 강진까지의 이십 리가 넘는 길을 울고 웃으며 돌아온 일이 지금은 쓴웃음으로 기억 된다. 유적은 끝났다ㅡ 적어도 그때의 내 생각은 그랬다.
하지만 강진에서의 일로 반드시 얘기해야 할 것은 아직도 하나 더 남았다. 그것은 전해 가을 요양소로 떠났던 별장집 남매의 뒷일이다. 새로운 출발을 앞두고 한껏 부풀어 있던 이월 어느 날 나는 동네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통해 별장집에 사람이 돌아온 걸 알았다. 그들이 그립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서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별장집으로 달려갔다.
과연 누군가 돌아와 있었다. 겨우내 굳게 잠겨 있던 현관이 열려있었고 뜨락 여기저기 어지럽게 몰려 있던 낙엽도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그들 남매 모두가 아니라 누이동생 혼자였다. 반가운 김에 손이라도 잡을 듯이 다가가던 나는 전과 달리 싸늘한 그녀의 표정에 주춤했다.
“무슨 일이죠?”
“오랜만입니다. 반갑습니다.”
“반갑다는 것은 제가 살아서 돌아왔다는 뜻인가요?”
“화, 황 형은?”
“오빤 돌아가셨어요.”
그녀는 별로 슬퍼하는 기색도 없이 말했다. 그 말에 콧등이 시큰해지며 목이 메어오는 쪽은 나였다. 불행한 사람……
“그게 언젭니까?”
“한 보름 돼요.”
“요양소에서?”
“네, 원하시던 대로 요구호자 병동에서.”
일순 그와 함께 보낸 여름날들이 눈앞에 떠올랐다. 이제는 내 유적의 날들 중에서 가장 암울했던 부분을 서성이는 추억의 사람이 되고 말았지만, 그때만 해도 황의 죽음은 내게 애틋하기 그지없는 슬픔이었다. 그러나 하마터면 쏟아질 뻔한 내 눈물을 막아준 것은 여전히 냉랭한 그녀의 반문이었다.
“절 보러 오신 건 아닐 테죠?”
“우선 황 형을…… 하지만―”
“하지만, 오빠가 안 계신 이상 우리끼리 만나야 할 일은 없을 텐데요.”
“여기서 계속 호, 홀로 사실 겁니까?”
“걱정마세요.”
그녀는 그 말을 혼자 살게 될 자신을 걱정해주는 것으로 들었던지 그렇게 말하고는 부엌 쪽을 향해 큰 소리를 냈다.
“아줌마, 여기 커피 한 잔 끓여줘요.”
“집에서 식모를 딸려 보냈군요.”
“내가 구했어요. 이제 안심하셨죠? 어쨌든 앞으로는 드나드실 필요가 없어요. 오늘은 문상 오신 걸로 여겨 차 한 잔 대접하는 거예요.”
그제야 나도 슬며시 기분이 상했다. 끝까지 떼쓰는 아이 쫓듯 하는 그녀의 말투 때문이었다. 나는 그렇게 내몰지 않아도 앞으로는 찾아오기 힘들게 되었다는 것을 알림과 함께 약간은 으쓱한 기분으로 그동안 내게 일어난 변화를 말해주었다. 그때 나는 등록을 열흘쯤 앞두고 있었다.
“거참 잘됐어요. 늘 유적, 유적 하시더니 이제 끝난 셈이군요.”
잠깐 선망인지 조소인지를 모를 미소가 그녀의 얼굴을 스치다가 사라졌다.
“아직은…… 뭐가 날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니까요.”
“아무튼 어딜 가시더라도 건강하세요.”
“그쪽도.”
“물론이죠. 나는 오빠처럼 약하게 쓰러지진 않을 거예요. 반드시 살아남아一”
그리고 그녀는 나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눈길에는 갑자기 예사 아닌 광기 같은 것이 뿜어져 나왔다.
“―복수할 거 예요. 모두.”
나는 그 엉뚱한 변화에 긴장했다. 그러나 잠시뿐이었다.
“뭘 말입니까?”
내가 그렇게 되물었을 때, 어느새 처음의 냉정을 회복한 그녀는 대답 대신 서둘러 대화를 끝내버렸다.
“가보세요. 정말 다신 오지 마세요.”
화나기보다는 어이없는 노릇이었다. 두 번씩이나 그렇게 노골적인 말을 듣자 정말로 다시는 그녀를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결국 강진을 떠나기에 앞서 다시 한 번 그녀를 만나야 할 팔자였다. 그로부터 일주일쯤 됐을까. 오늘내일 하며 출발을 앞두고 있던 나를 김성구가 갑자기 찾아왔다.
“야, 니 빨리 별장집에 가봐라.”
대낮부터 취한 듯한 녀석은 나를 보자마자 심술궂은 웃음과 함께 말했다.
“거긴 왜?”
“느그 공주님이 위기에 빠졌다. 니 같은 용감한 기사가 필요하다 카이.”
“공주님이라니?”
“황 양 말이다. 니 그 가스나한테 공깨나 안 들였나?”
아무리 말해도 녀석은 줄곧 나를 그런 식으로 의심해오고 있었다.
“지금 풍전등화, 백척간두다. 빨리 가봐라.”
“도대체 무슨 소리야?”
“암튼 빨리 가보라 카이. 가보믄 안다.”
나는 뭔가 약간 미심쩍은 대로 별장집에 가보았다. 평소 사람의 왕래가 많지 않은 그 집 앞에 몇몇 동네 여자들이 서 있었고, 집 안에서는 무언가 요란하게 부서지는 소리와 악다구니 쓰는 소리가 들려왔다.
황급히 안으로 들어가 보니 웬 중년 아낙네가 헝클어진 모습으로 닥치는 대로 가구를 부수고 있었다.
“아이구, 분해라. 아이구…….”
그 곁에는 식모 아주머니가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나는 황의 누이동생을 찾아보았다. 그녀는 건넌방에 깎아놓은 듯 앉아 있었다.
“저 여자가 누구요? 왜 가만히 보고만 있소?”
어느 정도 짐작은 가면서도 나는 설마하는 기분으로 물었다. 전연 내 이야기를 듣는 것 같지 않던 그녀가 천천히 나를 보며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오지 말라고 그랬죠? 돈 많은 아버지 계모, 그런 건 처음부터 없었어요. 돈 많은 바람둥이가 있었을 뿐이었어요. 이제 본처가 알고 온 거죠. 오빠는 이 꼴을 보지 않으려고 떠난 거예요.”
그리고 그녀는 쓸쓸한 웃음을 지었다.
“다시는 오지 말라고 그랬는데― 이제 이 모든 꼴을 보게 되니 속이 시원하세요?”
나는 무엇으로 호되게 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으로 한동안 망연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마음속으로는 그녀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도망치듯 말없이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오래 있다가는 더욱 참혹한 꼴을 보게 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나중에 들은 것이지만, 결국 그날의 일은 그녀의 끔찍한 자해로 끝이 났다. 과도로 손목의 동맥을 자른 그녀는 곧 이웃에 의해 병원으로 실려 갔고, 그 거센 아낙도 그걸로 어느 정도 분을 풀고는 돌아가 버렸다.
나는 그런 그녀의 불행을 진심으로 가슴 아파 했으나 현실적으로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다. 다만 한시바뼈 강진을 떠나 서울에서의 새로운 생활 속에서 그녀의 일을 잊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나는 그날 밤 서둘러 강진을 떠났다.
그런데 기회가 없을 것 같아 강진의 후일담을 미리 얘기해두어야겠다. 형도 이듬해에 강진을 뜨게 되어, 그 뒤 나는 오랫동안 강진을 찾지 못했다. 따라서 여러 가지 인상 깊던 일들은 차츰 잊혀지고, 강진은 그저 자욱한 안개와 무성한 갈대와 밤새워 울던 구성진 멧새 소리로 이루어진 추상으로 변해갔다.
그러다가 십여 년이 훌쩍 지난 작년 여름에야 나는 다시 강진을 돌아볼 기회가 생겼다. 철새들의 도래지로 유명학 을숙도(乙叔島)에 들렀다가 멀지 않은 강진을 찾아보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내 기억 속의 강진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갈대도 멧새의 울음도 없어진 부산직할시의 일부에 아스팔트와 매연과 소음만이 있을 뿐이었다. 몽환처럼 피어오르던 안개는 남았을 법도 하지만, 그마저도 내가 도착한 한낮에는 볼 수 없었다.
나는 전에 알던 사람들을 찾아보았다. 거의가 강진을 떠나버리고 남아 있는 사람도 김성구 하나만 찾아볼 수가 있었다. 부친이 소유하고 있던 야산이 부동산 투기 봄을 타고 금싸라기 땅으로 변하자 하루아침에 거부가 된 그는 꽤 큰 건설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뜻밖으로 반갑게 나를 맞아주었다.
나는 옛날의 건달기가 완전히 가신 그에게서 내가 떠난 뒤의 강진 얘기를 들었다. 박용칠은 최광탁이 죽고부터는 계속 내리막길을 걷다가 강진을 떠나버렸다. 서 노인은 결국 죽은 뒤에야 고향으로 돌아갔고, 나머지 가족들도 대기업의 중견 사원이 된 동호를 따라 서면 쪽으로 이사하고 없었다. 한때 가슴 설레 했던 또래의 어여쁜 처녀들이나 한두 번 술잔을 나눈 적이 있는 청년들도 대부분 취직이나 결혼으로 강진에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나는 황의 누이동생을 물어보았다.
“그 아주마시라면 지금도 만나볼 수 있제. 마침 잘됐다. 목이 좀 컬컬했는데.”
성구는 내가 그 여자 얘기를 꺼내자 그렇게 말하며 대뜸 자기 차를 불러 나를 태웠다. 새로 난 해변 도로를 삼십 분쯤 달려 도착한 곳은 다대포(多大浦) 쪽의 작으나 깨끗한 요정이었다. 바로 황의 누이동생이 경영하는 요정이었는데 마침 그녀는 있었다.
그녀는 완전히 건강을 회복한 것 같았다. 그러나 잔인한 세월은 그녀를 시들어가는 중년의 요정 마담으로 바꾸어놓고 있었다. 술은 쉽게 올랐다.
“황 마담, 이젠 고마 고백하시지.”
몇 순배 술이 돈 후 성구가 불쑥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고백하라니, 뭘?”
나는 공연히 어색해져 머뭇거리며 물었다.
“이 쑥 같은 친구야, 그때 황 마담이 참말로 좋아한 건 너였단 말이다.”
농담 같지는 않았지만 나로서는 도무지 짚이는 데가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성구는 여전히 짓궂은 웃음으로 그녀를 보며 계속했다.
“황 마담, 내가 대신 얘기해줄까? 만약 그때 두 사람이 사랑하게 되었더라면 둘 다 불행해질 우려가 있었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둡고 부끄러운 부분만은 한사코 너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는 것, 하지만 가끔씩은 잘 빚어서 구우려고 내놓은 도자기 같은 너를 깨뜨려보고 싶은 충동도 있었다는 것…….”
“그만하세요.”
갑자기 그녀가 수긍도 부인도 아닌 쓸쓸한 미소와 함께 성구의 말을 가로막았다.
“낮술에 벌써 취하셨나 봐.”
나는 거기서 방금 성구가 한 말과 일치되는 기억을 찾아내기 위해 잠시 옛날을 더듬어보았다. 세월 탓인지, 취한 탓인지 전에 없이 옛날이 희미해지며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참 만에 겨우 그녀의 말 한마디를 찾아내고 나는 앞뒤 없이 물었다.
“이제는 복수를 하신 겁니까?”
그러자 그녀는 여전히 쓸쓸한 미소로 대답 대신 물었다.
“그럼 이 선생님은 유적이 끝나셨어요?”
“아닙니다. 아직.”
나는 원인 모를 슬픔을 느끼며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저두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조용히 자기 앞의 잔을 잡았다.
『한국문학』 91호(1981. 5); 『젊은 날의 초상』(민음사 2005)
이문열(李文烈)
1948년 경북 영양에서 태어나 서울대 사빔대를 중퇴했다.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소설 「새하곡(塞下曲)」 이 탕선되어 등단했다. 청년기의 고뇌와 방황, 신과 인간의 문제, 예술가의 길, 분단과 이데올로기 갈등, 절대 권력의 허구성 등 다양한 소재와 주제를 해박한 지식과 능란한 솜씨로 다루어왔다. 소설집 『사람의 아들』 『그해 겨울』 『금시조』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구로아리랑』 『아우와의 반남』, 장편소설 『젊은 날의 초상』 『황제를 위하여』 『영웅시대』 『선택』 『시인』 등을 비롯해, 가족사를 바탕으로 한국전쟁 이후의 민족사를 총체적으로 재구성한 대하소설 『변경』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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