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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맥문학 10월호에 게재된 기행문 [아! 金剛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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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 金剛山
一 松 韓 吉 洙
“願生 高麗國 一見 金剛山” 이 말은 당나라의 문호 李白과 송나라 시인 蘇東坡(소동파)의 소원이었다고 하나 이것은 중국사람 모두의 일생일대의 꿈이요, 소원이요, 발원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지금에야 중국에도 바위와 소나무가 잘 어우러진 삼청산이 있고 천문산 아래 도원경인 원가계, 장가계와 천하의 명산이라는 황산도 있으며 옥빛 물 세상인 구채구, 운대산의 홍석협이나 강과 어우러진 山봉우리의 낙원인 계림과 지질공원이라는 칠채산 등이 있어 중국 사람들도 탐을 낼만한 볼거리가 많이 있다. 그런데도 금강산 타령을 한 것을 보면 그 당시에는 중국내의 관광꺼리가 아마도 교통이 불편한 오지에 있거나 미개발로 명성이 들어나지 아니했기에 등잔 밑이 어두웠나 보다. 아니 사실은 그게 아니고 이 모두를 아우른 것보다도 우리 금강산의 경치나 산수가 빼어났기에 그리 목이 메도록 외쳤는지도 모르겠다. 금강산의 명성이 대내외에 널리 알려진 것은 7세기 전후부터라고 한다. 중세로부터 현대초기에 이르는 오랜 동안 많은 관리들과 시인 묵객들, 승려들이 금강산을 찾아 그 좋은 풍경을 보고 들은 뒤 황홀감과 신비경을 나타내는 많은 詩歌와 그림, 그리고 기행문을 지어서 널리 자랑하였기에 금강산은 중국과 일본, 유럽지역에도 널리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본다. 19세기말 영국의 세계적인 여행가 이사벨 이쇼프는 “금강산의 아름다움은 세계 어느 명산의 아름다움보다 능가하고 있다.” 라는 글을 남겼다. 금강산을 탐승한 일본의 한 화가는“금강산의 절승은 100개의 묘기산, 1000개의 야바계곡을 합친 것 보다 낫다”라고 감탄하였고 1930년 대 초 한 외국인은 “미국의 국립공원인 요세미티, 그랜드캐니언이나 알프스, 곤륜산 줄기에 가보지 못한 사람들과는 산수를 논할 수 없다고 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가고 오늘은 조선의 금강산에 오르지 못한 사람과는 山水를 논할 수 없다고 하는 새 시대에 들어섰다”고 칭송을 아끼지 아니했던 산이 바로 이 금강산이다. 1998년 9월부터 남북 분단 50여 년 만에 오매불망하던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었다. 동해항에서 북한의 장전항까지는 배로 분단선을 넘고 외금강 온정리에서 관광이 시작되도록 계획되어 구룡연코스와 만물상코스, 삼일포코스가 개방되었다. 지금으로부터 꼭 15년 전에 우리는 천재일우의 이 기회를 놓칠세라 여기에 편승하려고 한 발을 드려놓았다. 우리 내외는 1960년 10월 30일에 100년을 함께하는 가약을 맺었기에 그 40주년 기념으로 2000년 10월 28일에서 30일까지 2박3일 간 운 좋게 중국 사람들을 비롯 세계 사람들이 그렇게 염원했다던 금강산을 탐승하는 기회를 얻었으니 이는 큰 돼지꿈을 꾼 덕택이리라. 10월 28일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여장을 챙겨 짊어지고 잠실 석촌 호수 변에 이르러 대원관광버스에 오르니 04시30분이다. 버스도 설레는 가슴을 진정시키려는 듯 힘차게 새벽을 열며 어둠속을 달려 구절양장의 아흔 아홉 고개, 대관령을 잘도 넘어 08시30분에 동해항에 우리 일행을 내려놓았다. 근처 식당에서 늦은 아침식사를 하려는데 죽마고우 최동석 내외가 부근 여관에서 1박하고 왔다기에 같이 합류하였다. 북쪽으로 가는 선박을 타기 전에 여행사에서는 일행을 모두 모아놓고 북한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행동지침이라 할까 주의사항을 이야기하기에 귀담아 듣고 외국에 나갈 때와 같은 출경수속을 밟았는데 모든 서류나 준비사항이 완벽한 사람에게는 여권에 가름하는 명찰을 내주어 목에 걸고 다니도록 했다. 북한에서 지켜야 할 사항으로 첫째는 핸드폰을 배 안에 맡겨라. 인민군이나 북한 사람들에게 접근하는 것은 물론 말도 걸지 말고 사진도 찍지 말라. 그곳에 설치한 시설물이나 글을 비방하거나 흉보지 말라.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말고 관광 중에는 담배를 피우지 말라. 수목이나 바위 등 자연을 훼손하지 말라. 그곳에서 섬기는 시설이나 글을 찍지 말라, 만일 이를 지키지 아니하면 카메라의 필름을 압수하거나 상당한 벌금을 내야 한다는 등 이해가 잘 안 되는 내용 들이 많았다. 마침내 커다란 고급 유람선인 현대 봉래호 라는 여객선에 승선하여 동해항을 출발한 것은 11시이었다. 북으로 선수를 돌려 망망대해를 거침없이 달리고 있었으니 이 얼마만인가? 아! 금강산, 내나라 내 땅인데 그 누가 왕래를 못하도록 족쇄를 채워서 가둬놓았나? 옛날의 시인 묵객들은 말 할 것도 없고 악랄한 일제의 폭정 속에서도 자유로이 왔다 갔다 했던 이 강산을 어느 누가 제 맘대로 선을 그어 놓고 못 다니도록 했느냐 이 말이다. 이제야 그리웠던 땅을 밟아 본다는 생각을 하니 만감이 교차하면서 눈앞에 전개될 미래에 대한 기대가 컸다. 왼쪽을 바라보니 설악의 붉고 노랗고 파란 소나무와 어우러진 단풍이 마지막 기염을 토하며 우리들에게 보란 듯이 뽐내고 있다. 우리 배가 속초를 지나니 이승만 대통령 별장과 김일성 별장이 있다는 화진포가 그림엽서처럼 다가온다. 이제부터는 북한 지역이다. 벼를 베어서 볏단을 논두렁에 세워놓았는데 영양분인 거름이 부족했는지 벼의 기리가 짜리 몽땅 하다. 그리고 그 곁에 총을 들고 서 있는 병사의 모습도 볏단과 도나 개나 난형난제의 초라한 모습이었다. 우리가 탄 배는 시원한 바닷바람을 가르며 달리는데 모두 갑판에 나와서 미지의 땅을 밟는 다는 호기심을 안고 호연지기를 기르며 심호흡을 하는 동안 마침내 북한의 장전항에 도착했다. 장전항은 금강산 바로 동쪽에 있는 군항이란다. 북한의 강원도 고성군 고성읍에 위치한 이 항구를 북한에서는 고성 항 이라고 부른다. 이 고성 항 안쪽에는 금강산해수욕장이 있는데 우리가 갔다 온 얼마 뒤 관광객 중 박왕자 라는 여인이 그곳이 한국 땅으로 착각을 했는지 건강을 위하여 아침산책을 한다고 밖으로 나가서 아무도 없는 해수욕장모래를 밟으며 루루랄라 하다가 북한군의 총격으로 피살되었다. 이 사건 뒤 금강산관광이 막을 내린 이래 지금까지 요지부동으로 문을 굳게 걸어 잠가 놓았다. 금강산은 군사분계선에서 불과 20 여km 떨어진 북측의 군사 요충지이다. 이곳은 비록 돈을 받고 우리에게 관광을 허용한 땅이지만 남과 북이 서로 만나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학습하는 곳이기도 하다. 잘 발전한다면 남북 교류의 장이 될 수도 있고 서로 이질적인 것을 다듬어서 동질성을 회복하는 마당으로 활용할 수도 있는 곳이다. 고교시절에 정비석 선생의 [산정무한]을 배우고서 오금이 저리도록 가보고 싶었던 금강산은 북한의 동해안 태백산줄기 북부에 있는 산으로 강원도 고성군과 금강군, 통천군에 걸쳐 남북 길이 60km, 동서 길이 40km에 530㎢면적의 광대한 지역을 포괄하고 있다. 높이1639m의 비로봉을 주봉으로 12000 봉우리가 솟아 있다. 분단이전에는 淮陽(회양)· 通川(통천)· 高城· 麟蹄의 4개 군에 걸쳐 있었다. 이은관의 배뱅이 궂에 나오는 사설에 “강원도 금강산 12000봉 8만9암자, , . .” 라는 가사와 같이 기묘한 봉우리들이 여기저기 솟아있고 외금강, 내금강, 해금강 등 기묘한 돌 뿌리를 비롯한 천태만상의 기암괴석인 거대한 岩塊(암괴) 岩板(암판) 등으로 변화무쌍한 계곡을 이루어 조화를 부리고 있는 곳이 이곳이다. 수많은 계곡 곳곳에는 폭포 소 여울을 이루는 맑은 물이 흘러 독특한 절승경개로 펼쳐져 있어 세계적인 관광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한반도에는 뛰어난 명승지들이 수없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금강산은 지구상에 둘도 없는 자연경관을 가지고 있는 명산이자 세계적인 보물 창고라고 자랑할 만하다. 금강산에는 각양각색의 크고 작은 폭포들이 많은데 그중 4대 폭포로 구룡폭포와 비봉폭포, 옥영폭포, 12폭포 등이 있다 또 관동팔경의 하나로 이름난 삼일포를 비롯하여 영랑호 감호 등 자연호수들도 있다. 예로부터 우리민족은 자신들의 지혜와 예술적 재능을 다 바쳐 수많은 사찰과 불상 조각, 그리고 탑과 비 부도를 비롯한 문화재들을 만들고 전설과 시, 노래 그리고 글씨와 그림 등 수많은 유작을 남겨 금강산의 아름다운 역사를 널리 전해주고 있다.금강산은 천태만상의 다양한 모습과 웅장함이 수려하면서도 기이한 자연경관을 이루고 있어 예로부터 한국의 5대 명산으로 치부해 왔고 조선8경과 3신산의 하나로도 알려져 있다. 금강산은 하늘을 찌를 듯 톱날처럼 늘어선 봉우리들과 각양각색의 모양을 한 기암들, 거대한 층암절벽과 서로 다른 깊은 계곡들, 그리고 여기에 이루어진 수많은 담소와 못들, 절벽과 바위들을 감돌아 흘러내리는 구슬 같은 맑은 물, 무지개를 그리며 쏟아져 내리는 많은 폭포들이 서로 어울려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아름다움의 하모니를 보여주는 극치의 정점이다. 이토록 금강산은 산악미, 계곡미, 멀리에서 바라보는 원경미와 호수경치, 바다와 해안경치 등을 두루 갖추고 있어 단순한 하나의 경승이 아니라 하늘이 지상에 있는 모든 명승을 이곳에 모은 아름다운 경관의 복합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처음으로 미답의 땅에 발을 디디니 감개가 무량하였다. 이것이 얼마만의 소원풀이인가. 북쪽 미녀들의 서비스가 살살 녹는 온정각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고급유람선을 개조해서 만든 숙소에 들었는데 뜻 깊은 북한 땅에서의 첫날밤은 조용한 가운데 지나가고 있었다. 2000년 10월 29일. 호텔에서 뷔페로 아침식사를 마치고 북한의 미녀들과 남쪽의 현대 직원들이 도열하고 있는 온정각 앞으로 가서 대기하고 있는 현대 버스에 승차했다. 가을의 풍악산! 이미 그 유명하다는 단풍은 한물가버렸으나 山발치에 있는 개울가의 단풍 몇 구루가 맛보기로 보여 주는 것인지 아니면 원래 금강산의 단풍은 이러했노라 라고 자랑하려고 끝까지 버티고 남아 있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우리가 도저히 올 수가 없는 분계선 넘어 머나먼 떵에서 온 귀한 손님임을 알아보고서 잘 대접하려고 지금까지 기다렸던 단풍이 마지막 가을을 불태우고 있었다. 우리를 마지하려고 길옆에 도열해 있는 금강산 赤松, 쭉쭉 뻗은 각선미를 자랑하는 미인송의 모습이 미스 코리아 다리처럼 아름다웠다. 갈지자로 구불구불한 외길을 버스는 잘도 달리더니 만물상 입구에 우리들을 내려놓는다. 막 버스에서 내리고 보니 만물상 윗도리에는 살짝 안개가 걸쳐있고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서커스를 하고 있어 마치 정선의 진경산수화를 보는 중에 김삿갓의 시 한수가 생각이 나는 곳이다. 我向靑山去(아향청산거) 나는 청산을 향해서 가고 있는데 綠水爾何來(녹수이하래) 녹수야 너는 어데서 오는 것이냐? 만물상 코스는 층암절벽과 괴암괴석으로 이루어져 산행의 진미를 느끼는 코스라고 할 수 있다. 망상정 뒤 높고 높은 벼랑사이로 만물상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있다. 그 입구는 마치 문짝과 지붕이 없는 대문과 같아서 만물상 대문이라고도 한다. 이 만물상 대문에서 오른쪽 산 능선을 올려다보면 만물상을 지키는 수문장 같아 보이는 갑옷 입은 무사의 반신상을 연상케 하는 바위가 있으니 이것이 무사바위이다. 만물상입구에 들어서면 곧 왼쪽에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있는 바위 세 개가 늘어서있는데 이것이 여러 전설이 깃든 삼선암이다. 좀 더 가노라면 왼쪽으로 삼선암에 오르는 급한 벼랑길이 있는데 여기가 바로 정성대이다. 이곳에서 무릎이 아픈 안식구에게 내가 짚고 있던 지팡이를 주면서 이 부근에서 만물상을 구경하고 있으라고 당부하고 나는 동석 내외와 함께 만물상 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정성대에 올라서면 서남쪽으로는 상등봉(1,227m)의 산줄기들과 계곡이 시원하게 바라다보이고 동북쪽으로는 오봉산과 세지봉 줄기에 촘촘히 늘어선 만물상의 기암괴석을 조망하게 된다. 정성대 눈앞에 다가서있는 삼선암은 더욱 거창하여 보는 사람들을 위압하는듯하다. 그 건너편에 바위 하나가 벼랑위에 외따로 솟아있는데 이것이 독선암이다. 이 바위는 옛날에 네 신선이 금강산에 내려와서 장기를 두었는데 그중 한 신선이 훈수를 너무 많이 하다가 미움을 받고 밀려나서 외로이 떨어져있는 왕따 당한 바위이다. 삼선암 서북쪽에 둥그런 돌 하나를 이고 선 바위 하나가 우뚝 솟아있는데 그 얼굴모양이 귀신같아서 귀면암 이라고 한다. 이 부근의 바위 돌은 지질변화로 기둥모양으로 우뚝우뚝 솟아나 있는데 만고풍상을 다 겪는 동안에 기기묘묘하게 깎이고 터지고 다듬어지고 무너지고 하여 온갖 형태의 모양으로 변화된 것 들이다. 삼선암, 귀면암의 바위틈에도 소나무 산 벚나무 진달래 등이 억세게 뿌리를 내려 봄이면 꽃이 피고 가을이면 단풍지면서 돌산의 경치를 한결 더 부드럽게 장식하여 천하의 명산 만들기에 일조를 하고 있다. 귀면암을 보고 되돌아 내려와 천녀봉 줄기와 세지봉 줄기사이에 흐르는 천선계곡을 따라 오르면 오른쪽 세지봉 줄기에는 곰, 독수리 등 여러 가지 모양의 바위들이 보이고 왼쪽에는 칠층암이 있다. 칠층암은 7층으로 된 바위인데 그 맨 위층 벼랑 끝에 앉아있는 사람모양을 한 바위가 불거져 나와 있는 것이 신통하다. 좀 더 오르면 오른쪽에 절부암 이라는 기묘한 바위가 있다. 절부암은 바위중턱에 도끼로 깊이 찍은 자리 같은 흠이 있는 바위이다. 이 바위에는 이곳에 내려와 금강산절경을 바라보는 선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매혹된 한 나무꾼 총각이 그 선녀를 만나고 싶은 안타까운 심정을 하소연 할 길이 없자 도끼로 바위를 찍어놓았다는 전설이 서려있는 곳이다. 절부암을 지나면 가파른 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잠간 서서 동쪽 세지봉 줄기를 바라보노라면 이름을 지어줄 만한 壽石 같은 기묘한 바위들이 수도 없이 많다. 오리 두더지 병아리 닭 토끼 등, 보는 사람 마음대로 이름 부치는 각종 모양을 닮은 바위들이 연이어 나타난다. 아마도 동물농장이나 동물원의 여러 동물들을 한곳에 모아 놓은 듯하다. 그러면서도 하나의 기암이 보는 위치에 따라 이렇게 보였다가 저렇게도 보이니 그 신기함은 이루다 말 할 수 없는 요술세상이었다. 다시 발걸음을 옮겨 한참 올라가노라면 급한 오르막이 앞을 가로막는다. 여기가 만물상의 안사자 목이다. 그 정상이 안심대 인데 벼랑 같은 바위여서 정신이 아찔할 지경이지만 벼랑 턱이 마치 말안장 같은 안부가 있어 몇 사람이 앉아 노닥거릴만하다. 그러기에 여기에 올라서면 마음이 놓인다는 뜻에서 安心臺라고 하였나 보다. 자! 여기에서는 사람들이 이름 짓는 모든 물상들을 거의 다 찾아 볼 수 있는 곳이다. 그리하여 옛날사람들은 만물상을 두고 하늘이 만물을 창조할 때 시험 삼아 밑그림을 그려본 것이라는 뜻에서 만물초라고 불렀다. 그만큼 만물상은 천하명승 금강산 절경 중에서도 기묘한 바위의 집결지로 이름이 났다. 옛날 이곳을 찾았던 어느 한 선비는 만물상의 절경을 두고 “바위가 날카롭고 가파르기 그지없다. 올라갈수록 기괴한 봉우리와 놀란 바위가 무리로 사람에게 덤벼든다. 경쾌한 놈은 날듯하고 뾰족한 놈은 꺾일듯하고 빽빽이 선 놈은 서로 친밀한듯하고 살진 놈은 둔한 것 같고 여읜 놈은 민첩한 것 같은 그 천태만상을 이루다 형언 할 수 없다.“고 감탄하였다고 한다. 이곳에서 굽어보면 골자기 마다 소나무, 잣나무들이 듬성듬성 서있고 그 사이사이에는 넓은잎나무들이 섞여 자라는데 봄철에는 온갖 꽃이 만발하고 가을에는 온 산을 붉게 물들이는 단풍 속에 흰 바위들이 우뚝우뚝 솟아있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운 화폭을 펼친다. 여기에 흰 구름과 안개가 서로 조화를 부릴 때에는 그야말로 별천지 같아서 그 광경이 더욱 신기하고 신비로워진다. 안심대에서 돌계단을 내려 오른쪽으로 갈라진 길로 한참 가면 주봉대가 있다. 여기서 뒤로 돌아서서 천선대와 천선계곡을 전망하고 계단으로 된 협곡으로 한참 오르면 동해가 바라보이는 천해관에 이르게 되며 조금만 더 가면 망양대의 제1전망대에 이르게 된다. 훠이훠이! 깊은 숨을 몰아쉬며 마침내 望洋臺에 올라섰다. 동해의 푸른 물이 눈부시게 파란 하늘과 맞닿은 곳! 이곳에서 심호흡을 깊이 하고 마음을 다시 가다듬는다. 보라! 산 중의 산이요, 경승 중의 경승을 자랑하는 산, 천하의 금강산 12000봉이 내 발 밑에 엎드려 있다. 참으로 오랜만에 별러서 온 보람을 오늘 이 자리에서 느끼게 되었으니 마음이 우쭐 해 져서 혼자 소리 지르고 싶다. <천하의 대중들이여! 나 보다 더 기분 상쾌한 사람 있으면 나와 봐라> 망양대에서는 동남방향으로 뻗은 세지봉 줄기에 있는 온갖 물상을 닮은 기암괴석과 아름다운 경관을 나타내고 있는 천선대와 천선계곡을 바라보는 것도 좋지만 글자 그대로 만경창파를 이룬 푸른 동해바다를 바라보는 것도 이에 못 지 않는 좋은 풍광이다. 그렇다고 마냥 이곳에서 동해만 바라 볼 수는 없는 노릇, 시간이 너그럽게 봐주지를 않는다. 망양대에서 오던 길로 내려오다가 왼쪽으로 해서 계속 오르면 깎아지른 듯한 바위벽이 나타난다. 이 바위벽은 그리 높지도 않은데 어떻게 된 조화인지 바위중턱의 틈사이로 맑은 물이 졸졸 스며 나와 옹달샘을 이룬다. 이른바 망장천이다. 천하의 약수라고 관광객이 수도 없이 줄지러 늘어서 있기에 바싹 가서 보니 준비된 바가지가 없어서 플라스틱 물컵 하나로 그 많은 사람들이 돌려가면서 약수를 마시고 있었다. 나는 마침 준비해 간 나무바가지가 생각나서 배낭에서 꺼내 물을 마시고 났더니 내 뒤로 사람들이 금방 몰렸다. 내 바가지를 빌려달라는 것이다. 한도 없고 끝도 없을 것 같아서 미안하다는 양해를 구하고 인심 사납게 배낭에 다시 넣었다. 이것이 한번 마시면 지팡이를 짚고 왔던 사람도 기운이 솟아나서 지팡이마저 잊고 간다는 忘杖泉이다. 망장천의 시원한 물을 마시고 힘을 얻어 왼쪽으로 난 가파른 벼랑길을 난간을 붙잡고 한발 한발 오르면 천일문(하늘 문), 일명 만물상 금강문이라고 하는 자연으로 된 돌문이 나온다. 이름 그대로 하늘에 오르는 첫 번째 문으로서 금강산 자연 돌문가운데 제일 높은 위치에 있다. 너비는 사람하나 들어갈 만하고 높이는 두길 가까이 된다. 왼쪽에 있는 하늘문과 천선대를 향하여 오르는 중에 우연히 안식구를 만났다. 우리가 내려오기를 기다리다가 살살 스틱을 짚어가며 망장천의 물을 마시지 못 하고도 여기까지 올라왔다는 것이다. 지난해에도 66향우회 모임에서 제주도를 여행했는데 한라산을 오르려고 영실에서 출발하여 윗 새 오름에서 쉬면서 안식구에게 근방에서 왔다 갔다 하라고 일렀더니 내가 백록담 안 분화구에 물 고인 곳까지 갔다가 올라와 보니 인식구가 산 정상에 무엇이 있나 궁금해서 올라 왔다고 이번과 똑 같이 정상까지 올라온 일이 있었다. 다리가 아프고 허리가 아프다는 것이 꾀병이었나? 아니면 명산의 정기를 받아 기가 왕성해 졌나 하여간 기적이었다. 천일문의 서쪽 벽에는 금강제일관이라는 글자가 새겨져있어 마치 이 돌문이 천하절경인 금강산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라고 알리는 듯하다. 천일문을 나서면 하늘이 손에 금방 잡힐듯하고 온몸이 금시 하늘로 둥둥 올라가는 것 같은 기분인데 앞이 탁 트인 발밑에는 또 다른 절경이 펼쳐진다. 하늘문을 지나 왼쪽으로 꺾어진 벼랑길로 굽이돌아 마루턱을 넘어 오른쪽으로 있는 2개의 쇠사다리를 오르면 마치 왕대 죽순 같이 뻗은 4개의 기둥바위가 둘러선 가운데 10여명은 능히 들어 설수 있는 곳이 있다. 이것이 금강산의 경치가 하도 좋아 하늘에서 선녀들이 내려와 놀았다는 天仙臺(천선대)이다. 맨 앞에 있는 기둥바위에 천선대라는 글자가 새겨져있다. 만물상 한복판의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천선대에서 만물상을 굽어보노라면 세상의 모든 만물이 여기에 와서 자기모양을 돌로 깎아놓고 간 듯 천만가지모양의 돌 바위들이 꽉 들어차 신비경을 이룬다. 천하의 내로라하는 돌들이 전부 이곳에 모여 누가 누가 잘 났나 경쟁을 하는 장소인 듯하다. 깜직하고 앙증맞은 천태만상의 만물상이 마치 요지경속을 들여다보는 듯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리하여 옛날부터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이곳에 찾아와서는 그저 감탄만 할뿐 어떻다고 표현 할 말을 잊어서 감히 시를 짓거나 화폭에 담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기에 옛사람들은 천선대에서 바라보는 만물상을 참진 자 眞 만물상 또는 신 만물상이라고 불렀다. 자! 여기까지는 출발 전 동해항에서 교육받은 대로 질서를 지키고 유의사항을 이행하여 즐거운 관광을 잘 해 왔다. 그런데 어쩌다가 깜박 잊고 친구 최동석이 너무 피곤한 나머지 그만 김일성 어록을 새겨놓은 돌 위에 앉아서 잠간 쉬고 있었다. 이때 어디에선가 조그마한 키의 북한병사가 잽싸게 나타나더니 무조건 목에 건 명찰을 뺏어 가 버렸다. 일종의 여권격인 이 명찰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할 뿐 아니라 돌아갈 때 승선도 불가하다. 결국에는 200$인가 400$를 벌과금을 납부하고 명찰을 찾아왔다. 갑자기 당한 어처구니없는 황당함에 얼이 빠진 이 친구 그 얼마 뒤에 하늘나라로 이 부당함을 호소하려고 가 버렸으니 너무나도 애석하고 허무하다. 명석한 두뇌에 컴퓨터도 도사요, 글씨도 명필이요, 주식투자에도 귀재여서 팔방미인격인 친구다. 나하고는 틈 날 때 마다 그의 승용차로 전국방방곡곡을 다니며 역사유적이나 명소를 탐방하였던 둘도 없는 고향 친구였는데 어찌 그리도 황황히 떠나버렸는지 생각만 해도 먼저 간 벗이 그리워 눈시울이 젖는다. 경쾌하고 시원하게 떨어지는 폭포와 일거양득 사시사철 푸른 담과 소를 관광 할 수 있는 구룡연 코스는 외금강을 대표하는 곳이다. 북측 음식점인 목란관에서 약 30리쯤 되는 신계천의 위쪽 구역에 있는데 관광코스는 절경으로 널리 알려진 구룡폭포와 구룡연, 상 8담, 비봉폭포를 비롯하여 연주담, 옥류담 등 유명한 폭포와 연못들이 집중되어 있는 곳으로서 계곡의 아름다움이 뛰어난 곳이다. 주요 경로는 목란관→수림대→양지대→삼록수→금강문→옥류담→구룡폭포→상 8담 코스이다.이 폭포는 설악산의 大勝瀑布(대승폭포), 개성 大興山城의 朴淵瀑布(박연폭포)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폭포 중 하나로 웅대하고 장엄한 경치가 뛰어나 볼거리 중 가장 으뜸으로 꼽히는 곳이다. 폭포길이 가 50m나 되며 폭포 밑은 1장의 커다란 반석인 암반으로 되어 있는데 이 돌바닥에 쏟아지는 물줄기에 의해서 크고 작은 9개의 구멍이 생겨났는데 이 구멍이 마치 용이 빠져나간 듯한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하여 구룡연이라는 이름이 생겼으며 구룡연에 떨어지는 폭포인지라 구룡폭포라고 했다는 설과 9마리의 용이 구룡연 밑에 숨어있다고 해서 구룡폭포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설이 있다. 하늘과 땅을 뒤흔드는 듯한 장엄한 폭포소리, 천 갈래 만 갈래로 부서지는 물갈기, 천봉만학에 걸쳐놓은 무지개, 웅대하고 장쾌한 그 모습은 말과 글로 다 형언키 어려운 장관이다. 아름답고 신비로운 금강산을 지키기 위하여 먼 옛날 아홉 마리의 용이 못에 내려와 의좋게 살면서 불의를 막았다는 유래도 있다. 폭포가 쏟아져 내리는 모습은 마치 거대한 용이 살아 움직이면서 온갖 조화를 부리고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듯하다.금강산의 동쪽인 외금강 지역에서 장관 중의 장관이라고 일컬어지는 구룡폭포는 화강암 절벽에 기다란 珠簾(주렴)처럼 이어져 구룡연까지 이르는 폭포를 이름이다. 폭포들이 떨어지는 절벽과 그 아래에 형성된 연못이 단 하나의 화강암 바위로 이루어져 있는 독특한 지형이다. 폭포 옆 전망대에서 바라보면 여덟 개의 보석이 늘어선 것 같은 상팔담과 금강산을 지키는 아홉 마리의 용을 일컫는 구룡담이 보인다.폭포 앞 넓은 암반에는 신라 말 최치원 선생이 시를 새겨놓은 곳이 있고 거대한 화강암 절벽에는 1919년에 서예가 김규진(1866~ 1933년) 선생이 彌勒佛(미륵불)이라는 세 글자를 새겨 넣었는데, 그는 大字(큰 글씨)를 잘 쓰는 명필로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이은)의 스승이었다. 금강산의 4대 폭포 중 하나인 비봉폭포 근처에 있는 폭포들은 줄무늬가 있는 암석 절벽을 지나 139미터를 떨어져 내리는데, 그 모습은 보기만 해도 아찔하다. 폭포에서 떨어지는 깃털처럼 하얀 물기둥을 보고 있으면 마치 하늘로 비상하는 봉황의 형상 같다. 상 8담은 옛날에 하늘에서 8선녀가 내려와서 목욕하던 목욕탕이었다. 은사류 삼거리 갈림길에서 허공다리를 건너 상 8담 쪽으로 오르기 시작한다. 비록 산길, 10여리 길을 걸어와 다시 가파른 길을 오르노라면 땀이 줄줄 흐르지만 어렸을 때부터 들어왔던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가 스며있는 상팔담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그저 마음이 설레는 곳이다.상 8담의 절경을 내려다보기 위해서는 구룡대 정상까지 올라가야 하는데 길목에 "주체사상만세~!"라는 구호가 붉은색으로 음각되어있는 바위를 만난다.주요 길목마다 남녀 한 쌍으로 조를 이룬 북한 안내원 동무들이 서서 안내를 하면서 담배를 피거나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이 있는지 감시하고 있다. "참으로 금강산은 조선의 기상입니다."라는 김정일 위원장의 친필이 새겨진 바위가 눈앞에 펼쳐지면서 드디어 상 8담을 내려다볼 수 있는 구룡대 정상에 올라왔다. 가파른 길을 오르느라 발은 고생을 많이 하였지만 빼어난 금강산 풍광을 내려다보는 눈은 호강을 하고 있다. 공기도 바위도 나무도 하늘도 물도 너무너무 깨끗하고 맑다. 왼쪽으로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이 펼쳐져 있고 절벽 아래로는 8개의 선녀탕, 상 8담의 仙景이 “나 여기 있소” 하고 누워있었다.너무나 아름다워 이승이 아니고 별세게라는 느낌이 든다. 상 8담 네가 거기에 누워 있었구나. 고맙다. 정말 아름답다 우리말의 어휘가 세계에서 제1많다는데도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아니하고 그저 고맙다는 말만 연속하여 쏟아진다.구룡대에서 내려다본 상 8담의 풍광은 감탄의 환호성을 100번을 질러도 모자랄 만큼 아름다워서 땀을 흘린 보람이 있었다. 여기에서 [그리운 금강산 노래]가 생각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누구의 주제런가 맑고 고운 산 그리운 만 이천 봉 말은 없어도 이제야 자유 만민 옷깃 여미며 그 이름 다시 부를 우리 금강산 수수 만 년 아름다운 산 떠나간 지 몇몇 해 오늘에야 찾을 날 왔나 금강산은 부른다.(2절은 생략) 설악산 12선녀탕 계곡처럼 금강산에도 상 8담이라 부르는 8선녀탕이 있는데 이 상 8담을 거친 청정옥수가 아래로 쏟아지면서 구룡폭포의 비경을 이룬 명경지수이다.옛날 금강산에 마음씨 착한 총각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사냥꾼에게 쫓기는 사슴 한 마리를 구해주었다. 사슴은 그 은혜를 갚기 위하여 8담에 목욕하러고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의 날개옷을 감추었다가 총각에게 주었다.지상에 내려온 8선녀 중의 한 선녀가 여덟 개의 연못 중, 네 번째 연못에서 목욕을 하다가 옷이 없어지니 이 선녀는 하늘로 올라갈 수 없게 되었다. 할 수 없이 선녀는 총각과 인연을 맺었다. 총각은 사슴이 시킨 대로 아들딸 3형제를 본 다음에 선녀의 날개옷을 내주었어야 했으나 인정이 많은 이 총각은 아이 둘을 낳았을 때에 날개옷을 내 주고 말았다. 그래서 선녀는 두 아이를 양쪽 팔에 끼고 하늘로 올라갔다. 그러자 이 총각 날마다 하늘을 향하여 눈물로 빌었다. 이때 하늘에 올라갔던 선녀는 순수하고 정이 많은 총각의 정성에 감동된 한편 금강산이 그리워서 다시 하늘에서 내려왔다. 그 후 이 부부는 아들딸과 함께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한다. (이 구룡폭포와 상 8담 이야기는 필자보다도 먼저 금강산을 관광한 산수회의 다송 서병각회원의 기록을 필자가 넘겨받아 다듬어서 여기에 붙였음을 말씀 드리오니 많은 혜량 있으시기 바란다.) 이름부터 따뜻한 샘이 솟는 다는 곳, 온정리 온천에 가서 옵션으로 12$씩 지불하고 몸을 담그고 나니 피로가 조금은 가신다. 저녁은 금강산 산채비빔밥으로 해결했는데 10달라 가치의 맛은 아닌듯했다. 앞에서 냉면을 시켜먹었던 사람들은 냉면 맛은 더 엉망이었다고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어대는 걸로 보아 시장이 반찬은 아닌 듯하다.밤에는 25$씩 지불하고 <모란봉 교예단>에서 공연하는 서커스 현장을 관람했다. 4인조 공중 곡예, 장대 재주부리기, 공중 2인 회전 공연, 봉 재주 부리기, 공중회전 그네, 공중 비행 그네, 장대 재주 등 아주 어린 소녀들이 벌리는 재주에 손바닥에서 진땀이 났고 아슬아슬하여 간이 졸아드는 곡예를 보면서 손바닥에서 열이 나도록 격려했으나 그 애들이 너무나 불쌍하고 안쓰러웠다. 곡예가 끝나고 나니 출연자들은 한복으로 곱게 갈아입고 나와서 정중히 하는 인사를 받음으로서 오늘의 행사를 모두 마쳤다. 10월 30일 오늘은 우리 결혼 40주년인 홍옥일이다. 06시30분 호텔 내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오늘은 삼일포로 향했다. 삼일포는 3000년 전에는 바닷물이 드나드는 만이었는데 남강에서 날아온 모래가 바닷물의 작용을 받아 쌓이게 되어 만 앞이 막히자 금천의 물이 들어가 고인 潟湖(석호)이다. 삼일포와 해금강 코스는 삼일포· 연화대· 봉래대· 해금강으로 이어지는데 버스와 도보로 왕복 3시간이 소요된다. 삼일포는 면적 0.79km2. 둘레 5.8km인 관동팔경의 하나인데 溫井里에서 12km 가량 가면 북쪽 언덕 너머에 있다. 삼일포는 남북방향으로 긴 타원형이며, 휴양관광지로 가꾸어 천연기념물 제218호로 지정되었다. 수면이 맑고 기괴한 암석과 36봉이 호수에 비치어 절경을 이룬다. 예로부터 우리나라 호수 중 제일 경색이 아름다운 호수로 꼽고 있다. 삼일포는 북서쪽에 거암이 솟아 있고, 남쪽 호안에는 기암이 많은 구릉이 있다. 신라시대에 永郞 ·述郞 ·南石郞 ·安祥郞 등 四國仙이 뱃놀이를 하다가 절경에 매료되어 3일 동안 돌아가는 것을 잊었기 때문에 3일포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호수 내에 있는 4개의 섬을 四四仙 舞仙臺(무선대) 鳳樂臺(봉락대) 石臺라 이른다. 호수 북쪽 석면에는 永郞徒南石行(영낭도남석행)이라 새겨져 있고 그 중 2자는 붉은 글씨(丹書)로 되어 있어 단서석이라고 부른다. 인근에는 四仙亭과 夢天庵(몽천암) 이 있다. 삼일포에는 장군대와 봉래대, 연화대, 금강문, 몽천, 와우도, 단서암, 무선대, 사선정토, 매향비 등 명소들이 즐비하여 많은 볼거리가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명소이다. 바위산인 봉래대는 삼일포 호수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대이다, 봉래대 앞에는 봉래 양사언이 휘갈긴 초서가 너럭바위에 각석되어 있다. 필자도 봉래대위에 올라가서 주변을 살펴보며 잠간 쉬는 여유를 가진바 있다. 택리지를 저술한 이중환의 삼일포에 관한 기록을 보자. [고성의 삼일포는 지극히 맑고 묘하면서도 화려하고 그윽하며 고요한 중에 명랑하다. 마치 숙녀가 아름답게 화장한 것 같아서 사랑스러우면서 공경할 만하다. 강릉의 경포대는 한나라 고조의 기상 같아 활발한 중에 웅장하고 아늑한 중에 조용하여 그 형상을 무어라 말할 수 없다. 흡곡의 시중대는 맑은 가운데도 엄숙하고 까다롭지 않으면서 깊숙하다. 마치 유명한 정승이 관청에 좌정한 것 같아 가까이할 수는 있어도 가볍게 여길 수는 없다. 이 세 곳의 호수가 조선에서 으뜸가는 경치를 갖춘 호수이다. 다음 간성의 花潭(화담)은 달이 맑은 샘에 빠진 것 같고, 영랑호는 구슬을 큰 못에 감추어둔 것과 같으며, 양양의 청초호는 경대와 거울을 펼쳐놓은 것 같다. 이 세 호수의 기묘하고 빼어난 경치는 앞에 말한 세 호수의 다음이다.] (이하 생략) 필자도 올라가서 잠시 주변의 경치에 취한바 있는 정자 비래정에도 비화가 있다. 옛날에 봉래 양사언이 호숫가에 정자를 짓고 飛來亭(비래정)이라는 세 글자를 크게 써서 벽에 걸어두었다. 하루는 걸어둔 ‘飛’ 자가 갑자기 바람에 휘날려서 하늘로 날아갔는데, 그 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 날아간 그날 그 시각을 알아보니 곧 양사언이 세상을 떠난 그날 그 시각이었다. 어떤 사람은 ‘양 봉래의 한평생 정력이 이 飛 자에 있었는데, 봉래의 정력이 흩어지니 비자도 함께 흩어졌다’며 실로 이상한 일이라고 수근 거렸다. 삼일포는 고성군 삼일포리 남강 하류에 있는 석호로 금강산 근처에 있는 여러 호수 중 경치가 가장 아름답다. 이 호수는 백두산 자락의 삼지연, 통천의 시중호와 함께 북한의 3대 관광 호수이다. 삼일포는 무성한 송림과 푸른 물결로 금방 화장을 끝낸 해맑은 우리나라 아리따운 처녀 같은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김삿갓이 읊은 시 한 구절이 걸맞다. 松松栢栢岩岩廻(송송백백 암암회) 소나무와 소나무, 잣나무와 잣나무는 바위와 바위를 돌고 도니 水水山山處處奇(수수산산 처처기) 물과 물, 산과 산아 곳곳마다 절경 이로다. 오며 가며 지나노라니 차창 밖으로 神溪寺 터가 보인다. 신라 때 普雲(보운)조사가 창건하였다는 신계사는 楡岾寺(유점사) 長安寺(장안사) 表訓寺(표훈사)와 함께 금강산의 4대 사찰로 꼽힌 큰 절이었으나 6·25전쟁 때 모두 불에 타 삼층석탑과 절터만 남아 있던 것을 대한불교 조계종과 현대아산이 북한 측 조선불교도연맹과 합동으로 대웅전부터 복원한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 만주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 洪範圖(홍범도)장군이 이끄는 독립군이 대승을 거두었는데 이는 홍범도 장군이 이 절에서 승녀생활을 할 때에 주지스님으로 부터 왜국을 타도하고 나라를 되찾는 독립운동에 대한 교육을 철저히 받았기에 왜놈들에 대한 큰 적개심의 승리라고 한다. 이로써 도포자락 휘날리는 나리들과 시인묵객들이 즐기고 사랑했던 그 유명한 關東八景인 통천 총석정 고성 삼일포 간성 청간정 양양 낙산사 강릉 경포대 삼척 죽서루 울진 망양정 평해 월송정 중 필자의 눈으로 직접보지 못한 곳은 오직 총석정뿐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그 총석정이 지척에 있는데도 들리지 못하고 그냥 발길 돌리기가 너무나 아쉽고도 서운했다. 대망의 금강산 관광을 끝내고 버스에 올라 온정리로 돌아와서 서둘러서 휴대품 검사를 마치고 봉래호에 승선한 후 12시 정각에 남쪽으로 출항했다. [중국인들도 탐을 냈다는 일견 금강산, 평생 염원했던 금강산이어! 走馬看山格으로 대강 훑어보고 오는 것이 미안하다마는 이다음에 다시 상봉할 명분과 구실을 쌓기 위함이니 너도 나도 변치 말고 건강하게 잘 있다가 반갑게 다시 해후하자구나. 꼭 반가운 만남을 약속하자고.] 선내에서 비빔밥으로 점심을 들고 동해항에 도착한 것은 저녁 7시였다.
아하! 구경 한번 잘 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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