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utiful People
2004. 6.
Harold Hongju Koh - 예일 로스쿨 학장 | Ph.D
Harold Hongju Koh - 예일 로스쿨 학장(2004.7~ 2009.7) | Ph.D
"Gerard C. and Bernice Latrobe Smith Professor of International Law in Yale Law School"
미국 예일대 법대 학장으로 선임된 재미교포 고홍주씨는 이렇게 말한다. “흔히들 미국 주류사회에 들어가려면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다고들 하지만 난 그런 건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스스로 완벽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학장이 됐다. 내가 할 수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나는 매일 일상에서 실패한다. 하지만 아버지께선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이 가르침을 평생 마음에 새기고 산다. 그래서 실패하지 않으면 성공으로 갈 수 있는 기반도 없다고 믿는다.” 또 한해가 시작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한해의 목표와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천이다. 매일 실패하는 사람이 되자. 그것이 계획만 세워놓고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것보다 백 번 낫다. 매일의 실패는 분명 성공을 향해 가는 길이다. 지금 실패를 거듭하면, 5년 후 내 인생은 분명 달라져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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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고홍주 차기 예일대 법과대학원 학장
"늘 겸손 가르치신 부모님…
내 인생목표는 봉사"
한국계 미국인 고홍주(48·미국명 해럴드 고) 예일대 법대 석좌교수는 내년 7월 세계 최고로 평가받는 예일대 법과대학원 학장에 취임한다. 국제법·인권문제·국가안보법·국제경제법 등 분야의 전문가인 고 교수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마셜 장학생으로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했고 하버드 법과대학원을 졸업했다. 로펌 변호사, 법무부 법률 고문 등을 거쳐 1985년 예일대 법대 교수로 임명된 그는, 미국 변호사 잡지가 선정한 ‘미국 공공분야를 이끄는 45세 이하의 젊은 변호사’45명 중 한 명으로 뽑혔고, 2000년에는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아시아계 미국인 100명’중 한 명으로 선정됐다. 1998년부터 2년간 국무부 인권담당 차관보로 활동했다. 변호사인 매리 크리스티 피셔와 결혼해 에밀리와 윌리엄 남매를 두고 있다.
고 교수는 장면 정권 때 주미대사관 외교관으로 근무 중 5·16 쿠데타가 발생하자 미국으로 망명한 고(故) 고광림 박사의 3남. 부친과 모친 전혜성(뉴헤이븐의 동암문화연구소 이사장) 박사를 비롯해, 고씨를 포함한 4남2녀가 모두 미국의 최고 명문대학인 하버드와 MIT, 예일대학 등을 졸업한 것으로 유명하다.
고 교수를 코네티컷주 뉴헤이븐에 있는 예일대 법대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대학원생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동안(童顔)인 그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저는 변호사이자 교육자이며 학자입니다. 이 모든 역할을 다 즐겁게 할 수 있으니 행운이지요.” 그리고 나서 그는 마치 수업을 시작하듯 빨리 질문하라고 재촉했다.
*일류대 진학 그 자체가 성취는 아니다
-당신은 하버드대와 옥스퍼드대 등 세계 최일류 교육기관을 거쳐 미국 최고 법과대학원의 학장이 됐다. 좋은 대학, 최고의 교육기관에 진학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학생시절에 많은 사람들이 내게 큰 성취를 했다고 칭찬을 해주었다. 그런데 누님이 이 이야기를 듣고, ‘어떤 학교에 들어간 것 그 자체가 성취가 아니라 그 교육을 받고 무엇을 했는가가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훌륭한 교육을 받고도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는데도 위대한 성취를 이루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예일대 법대 학장이 되어 기쁜 이유는 예일대 법대 출신들이 훌륭한 일을 할 수 있고, 실제로 사회에 진출해 큰 차이를 만들어왔기 때문이다. 내가 법대학장으로서 할 일은 학생들이 세상에 나가 훌륭한 일, 사회발전에 기여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법대 학생들에게 특별히 공직 진출을 권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예일대 법대에 진학할 수 있다는 것은 미국사회에서 큰 특혜를 받았다는 뜻이다. 그들은 이 사회에서 가장 많은 혜택을 누린 사람들이므로, 자신들에 비해 혜택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
*돈 때문에 직업을 택하지는 마라
-그러나 미국에서 학생들이 법대에 진학하는 동기는 대부분 보수가 높고 안정된 직업인 변호사가 되기 위해서가 아닌가.
“아버지는 ‘절대로 돈 때문에 직업을 택하지 말라’고 하셨다. 직업을 선택하는 유일한 이유는 자신이 그 일에 대해 얼마나 관심을 갖는가이다. 좋아하지도 않는 일을 오로지 돈 때문에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법대생들이 법률회사 두 군데를 놓고 ‘연봉을 5000달러 더 많이 주는 쪽으로 가야 하나’ 하고 고민할 때, 나는 ‘그 중 어느 법률회사가 네가 관심있고 좋아하는 일을 주로 하느냐’고 묻는다.”
-한국 학생들에게 직업선택 기준에 대해 조언한다면.
“형식이 아닌 실질적인 내용을 중시해야 한다. 중요한 일을 하면, 돈은 따라오게 돼 있다.”
*부시 행정부 북핵정책, 2년 만에 올바른 방향으로
-당신 형제들은 대부분 하버드와 예일 등 일류대를 졸업하고 박사학위를 받는 등, 미국에서도 가장 성공한 가정교육 사례로 연구대상이 되었다. 부모님의 특별한 가르침이 있었는가?
“ ‘열심히 공부해라, 겸손해라, 다른 사람을 도와라, 우리의 지금 처지는 대단한 행운임을 절대로 잊지 말아라, 인생의 목표는 단순히 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였다. ‘열심히 일하라’는 것 외에 다른 비결이 있을 수 있는가.”
-전임 클린턴 행정부에서 국무부 인권담당차관보로 일한 경험에 비추어볼 때, 북한 인권문제 해결을 위한 부시 행정부의 정책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지난 2년 동안 잘못된 방식을 추구하다가, 마침내 다자간 협상과 법적인 틀을 만드는 데 집중하는 올바른 방향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한다. 북미 간의 제네바 합의와 햇볕정책을 포기한 것은 오로지 나쁜 결과만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다시 협상 테이블로 돌아가 논의를 계속하는 전략이 지속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북한이 제기하는 위협을 먼저 해결하지 않고는 인권문제를 개선시킬 수 없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그들을 다시 협상 테이블로 데려와서 논의하는 것이고, 그 안에는 인권문제가 포함되어야 한다.”
*부시 행정부의 선제공격론, 정당화될 수 없다
-한국의 이라크 파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한국정부는 제한적인 참여를 약속한 것으로 알고 있다. 상황이 유동적이므로 나중에 보완할 필요가 있을 테니,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은 자국의 국익을 위해 움직이고, 한국 역시 국익을 기반으로 대응하면 된다. 두 나라의 국익이 반드시 같을 수는 없지 않은가. 이라크 전쟁은 미국 혼자만의 힘으로 세계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북한 핵문제는 미국이 제재 위협 등을 통해 단독으로 한반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가르쳤다. 부시 행정부는 그래서 6자 회담이라는 다자간 협상방식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문제를 해결할 장이 없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국제법학자로서 부시 행정부가 주장하는 선제공격·예방차원의 전쟁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보는가?
“정당화될 수 없다. 그것은 대단히 위험한 원칙이다. 자기방어와 선제공격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만일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예방전쟁’으로서 남침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어떻게 ‘침략’과 ‘자기방어’를 구분할 수 있는가.”
-인권문제 전문가 입장에서 볼 때, 지금 세계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인권문제는 무엇인가?
“AIDS(후천성면역결핍증)는 테러보다 더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다. 또한 민주주의의 부재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인권문제다. 민주주의 사회가 아닌 북한이 가장 심각한 사례다. 아시아의 다른 지역에서도 민주주의가 약하기 때문에 인권문제가 심각하다. 중동지역에서도 사람들이 자신들의 의사를 표시할 통로가 없어서 문제다.”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사람들이 내게 한국인인지 미국인인지 물어볼 때마다, 나는 ‘100% 한국계 미국인’이라고 대답한다. 나는 한국인이냐 미국인이냐를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나는 한국인으로서 교육과 가족의 역할을 중시하고 노인을 존경하고 근로정신을 높이 사는 한국의 가치를 따르고, 미국인으로서 민주주의와 인권, 평등한 기회를 사랑한다. 두 사회의 공통점은 둘 다 낙관적이라는 점이다. 만일 한미 간의 가치가 충돌한다면, 나는 인간의 존엄성을 좀 더 중시하는 쪽을 택한다.”
워싱턴=강인선특파원
조선 03.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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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국 대통령 여섯명 중 네명은 예일대 출신이었다. 이런 명문 예일대 안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단과대가 법대다. 예일대 법대 차기 학장으로 선임된 고홍주(48)교수를 만났다. 강의를 마치고 학생들과 정담을 나누며 강의실을 나서는 高교수는 밝고 친근한 모습으로 미국의 중심에 서 있었다.
#가장 좋아하는 직업은 교수
高교수가 지난 클린턴 정부에서 국무부 차관보를 지낸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 하지만 그는 알려진 것보다 훨씬 다양한 경력을 갖고 있다. 하버드대에서 학부를 마치고 영국 옥스퍼드대 등에서 학위를 받은 그는 대법관 서기로 사회에 첫발을 디뎠다. 이후 법무부 법률고문을 지낸 高교수는 워싱턴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이번 학장 선임건과 함께 '교수로 사는 재미'에 대해 물어봤다.
-학장 선임을 축하한다. 소감은.
"예일대 강단에 선 지 거의 20년이 됐다. 이번 학장 선임은 동료들로부터 최고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기쁘다."
-다양한 경험을 가진 '행동주의자'로 평가받으며 법대의 변화를 이끌 것으로 기대되는데.
"이미 예일대 법대는 최고이기 때문에 급진적인 개혁을 하진 않을 것이다. 다만 유능하고 젊은 교수들을 채용, 활기를 불어넣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여러 직업을 가져봤는데 그중 가장 선호하는 것은.
"역시 교수다. 물론 다시 기회가 온다면 국가를 위해 즐겁게 봉사하겠지만 그래도 젊은이들과 생각을 교류하면서 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교수라는 직업이 나에겐 가장 잘 맞는다."
#'高패밀리 신화'는 한국식 교육 덕
高교수의 가족은 미국 내에서도 유명하다. 그의 부친은 주미공사로 근무하다 5·16 군사쿠데타가 발생하자 망명한 고광림 박사로 1989년 작고 전까지 코네티컷주립대 교수로 재직했다. 어머니인 전혜성 여사는 현재 예일대 동암문화연구소장이다. 큰 누나 경신씨는 중앙대 화학과 교수고, 두 형 경신씨와 경주씨는 각각 하버드대와 매사추세츠주립대 교수다. 동생인 경은씨도 高교수와 같은 예일대 교수다.
-집안에서 학장은 처음인가.
"큰 누님이 한국에서 중앙대 자연과학대 학장을 지내셨고 큰 형님도 하버드대에서 공공보건대 부학장을 지내셨다. 집안 내에서만 따져도 내가 '학장 서열' 3위인 셈이다. 우리 집안에서 무엇이든 '첫째'가 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어떤 가정 교육을 받았나.
"아버지께선 많은 가르침을 주셨다. '실천 없는 이론은 생명력이 없고 이론 없는 실천은 경솔하다'는 것부터 '늘 자정 전에 잠자리에 들고 새벽에 일어나라'는 것까지.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 6남매가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은 말은 '항상 친절하라'와 '가족을 최우선에 두라'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한국의 전통 사상을 현대화한 교육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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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홍주 예일 법대 학장 NYT 인터뷰
"세계는 빛과 어둠으로 나뉘어 북한은 어둠, 한국은 빛의 세계"
최근 미국 예일 법대 학장으로 지명된 한국계 미국인 고홍주(미국명 해럴드 고·48) 예일 법대 교수는 11일자 뉴욕타임스(NYT)와의 인터뷰에서 “세계는 빛과 어둠으로 나뉘어 있으며, 클린턴 행정부 말기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부 장관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 국무부 차관보로 동행하면서 이를 느꼈다”고 밝혔다.
고 교수는 “내가 분명히 기억하는 순간은 우리가 북한 상공을 지나 한국으로 들어설 때 우리는 어둠의 땅을 뒤로하고 갑자기 모든 불빛들이 나타났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한국 상공에 들어서자 환하게 불빛이 밝아오면서 사람들의 활기찬 모습을 보았을 때 나는 속으로 ‘이것이 민주주의구나’라고 혼잣말을 했다”면서 “남북한은 같은 문화를 공유한 한민족이고, 불과 40~50㎞ 떨어져 있으나, ‘어둠의 세계’와 ‘빛의 세계’가 다른 점은 단지 그들이 선택한 정부의 형태였다”고 주장했다. 고 교수는 “어둠이 아니라 빛을 비추고자 하는 정부는 반드시 법치의 원칙에 바탕을 둬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부터 쌍둥이 빌딩이 무너진 2001년까지는 글로벌 낙관주의의 시대였으며, 9월 11일 우리는 세계화 시대에 빛에서 나와 어둠으로 빨려들어갔다”고 설명했다.
그는 하지만 “9·11 테러는 미국인들에게 세계의 어두운 세력들의 존재를 일깨워줬지만, 이러한 혼란에서 빠져나오는 길은 세계의 상호의존”이라고 주장했다.
NYT는 고 교수가 한국 최초의 민주정부인 장면 정권의 주미 외교관으로 근무하다 5·16 쿠데타가 발생하자 미국에 망명한 고(故) 고광림 박사의 아들이라면서 그의 이력과 가족사 등을 소개했다.
뉴욕=김재호특파원
조선 03.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