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나들이
(1) 말과 글의 시작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우리 말 나들이를 가보려 한다. 말과 글은 그 사람과 민족의 사상이나 정신을 담고 있다고 하지 않은가? 또한, 그 사람의 말과 글은 그 사람의 태도나 품위를 나타내기도 한다. 말이 있기 전에 무슨 말이 있었을까? 말씀이 계신(있는) 것인가?
말이 있기 전에 글은 있지 않았다. 말이 태어나고 나서야 겨우 글이 탄생했는데, 그것도 많은 말이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진보와 퇴화를 겪은 후에야 생겨났다. 어쩌면 한동안 글이 문명 시대 이전의 사람들에게는 필요도 느끼지 않았겠고, 또한 글로 기록할 능력도 없었고, 또 문자도 구체적으로 정립된 때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창세기에 나타난 사람들을 보아도 알 수 있고, 역사적 유물을 통해서도 문자와 글이 나중에 만들어지고 형성되고 또 그것을 배우고 익힌 사람들에 의해서 그 시대의 말과 문화가 기록되었다.
창세기 1~6장에 보면 말은 있었지만, 그 말을 기록했다는 흔적은 발견할 수 없다. 우리가 창세기에 나오는 에덴동산 이야기나 노아 홍수 얘기도 모두 BC 15세기 사람인 모세가 기록한 토라(모세오경)를 통해 전해 받고 전해 들었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그의 형상대로 아담을 만들어 에덴동산에 살게 하시며 분명하고 엄숙하게 말씀하셨다. 창세기 2장 16~17절에 보면 이렇다.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개역 개정판)
생사가 달린 중대한 말씀 아닌가! 아마도 아담은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얼마나 놀라고 두려워했을까. 이 말씀에 죽고 사는 문제가 달려있으니 말이다. 세상에 죽고 사는 문제보다 더 큰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 그 당시 문자가 있었다면 이 귀중한 말씀을 돌판에라도 새겨두지 않았을까.
아담이 하나님의 이 말씀을 들을 때에 혼자서 들었다(And the LORD God commanded the man. Genesis 2:16 a).
창세기 2장 18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개역 개정판)(Genesis 2:18 The LORD God said, “It is not good for the man to be alone. I will make a helper suitable for him.”<NIV>)
창세기 2장 18절에 근거해보면 하나님은 생사에 관계된 말씀이자 언약인 이 말을 아담이 에덴에 혼자 있을 때 하셨다. 그 후 아담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며 사랑 고백한 하와에게 잘 전해 주지 않았겠는가. 까딱 잘못하면, 하와가 배고플 때 선악과를 보고 단숨에 따먹고 죽는 일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담은 하나님 주선으로 하와를 만나 맨 먼저 무슨 말을 했을까? 사랑하는 사람 하와를 만나서 다른 무슨 말보다도 먼저 해야 할 말이 무엇이었을까? 물론 사랑 고백을 먼저 하고 나서 할 말이 있다면 생(生)과 사(死)를 가르는 말을 귀에 가까이 대고 말하고 또, 말하지 않았을까.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유대인들에게는 구전(口傳)이 발달했다고 한다. 곧 말을 통해서 후세대들에 전하고 또 전하는 일이 이어지고 발달했다. 그것이 후대에 모여 탈무드가 되었고, 모세도 구전(口傳)에 따라 조상들의 신앙생활상을 많이 전해 듣고 또한 모세오경을 기록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말이 있기 전에 글은 없었다. 말이 있고도 한참을 지나 문자가 만들어지고 그 도구를 가지고 사람들의 언어와 사상과 문화를 기록할 수 있었다. 달리 표현하자면 먼저 문자, 곧 글로 쓰고나서 말이 사람들에게 유행한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문자화된 글과 문자화된 말이 있는데, 문자화된 말은 있을 수 있지만, 문자화된 글이 생활언어가 되는 예는 없다. 혹 있을지라도 그것은 말이 아니라 죽은 글에 지나지 않는다.
그 한 예가 있다면 ‘및’이라는 문자다. 이것은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고 글에서 나온 말이다. 하나의 글자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및’이라는 글자는 생활언어에서 온 것도 아니고 또 현재 생활언어로 사용하지도 않는다. 또한‘및’은 일본식 표현으로 보는 견해가 있고 어감도 썩 좋지 못하다.
평생 우리 말 살리기 운동에 힘써온 이오덕 선생은 “우리 말을 살리는 일이 바로 목숨을 살리는 일임을 모두가 깨달았을 때, 비로소 우리는 이 땅에서 당당하게 살아남을 겨레가 되리라”고 일생의 삶으로 얘기하고 있다(참고: 이오덕, 《우리 글 바로 쓰기》).
~ 김영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