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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제사로 드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로마서의 핵심 주제는 인간은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서 스스로는 의에 이르지 못하며, 오직 택함을 입은 자들이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에 이르게 됨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그 의가 무엇인지? 그 믿음이 무엇인지를 먼저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자기의 그 어떤 종교적인 열심을 믿음으로 착각하게 되고, 스스로 속아서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종교인으로 전락함으로써, 사실상 하나님의 의와 믿음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바리새적인 무신론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대체 무엇입니까?
새벽기도 와 금식의 스펙을 많이 쌓은 것입니까?
성경을 많이 읽고 성경공부를 함으로서 그 지식이 상당하거나 성경 박사 학위를 가진 것입니까?
아니면 오랜 기간 동안 교회를 다닌 연조입니까?
아니면 목사, 장로, 권사, 집사 직분입니까?
“믿음”이란 동사입니다. 명사가 아닙니다. 움직임씨, 곧 삶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피스티스” 라는 말로 “신뢰를 가지고 의뢰하다, 합의하다, 동의하다, 삶에 법을 삼아 따르다”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 확증 사건인 십자가에서 보이시고 새 계명으로 주신 하나님사랑의 삶, 곧 이웃사랑의 삶을 법으로 삼고 행하여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최고한 법은
약2:8/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대로 네 이웃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했습니다.
그 사랑의 방법을 일러주심이 무엇입니까?
약2:14~17/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아무 이익, 곧 넘치도록 얻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내 작은 사랑의 삶을 의로 여겨주시고 넘치게 주시는 그 은혜의 복 즉 영광구원을 스스로 버리는 어리석음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이익. 곧 의로 여겨 주시는 그 은혜의 영광구원, 완성구원을 받는 길은 크고 거창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삶에 필요를 사랑으로써 공급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니라”했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소자에게 필요를 나누어 주고 베풀어주고 사랑함으로 돌아보고 섬기는 삶인 것입니다. 그 믿음과 삶은 하나인 것입니다./할렐루야!
그러므로 이르기를
약2:20~26/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행함이 없는 믿음이란 허탄한 것이요 헛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온전”이란 “카탈티조/ 위골 난 벼를 제자리에 맞추다, 찢어진 그물을 깁다, 맑게하다, 잿물”이라는 뜻입니다.
옛 사람의 가치를 좇지 아니하고 도리어 십자가에 다 못 박아버리고 오직 그 자녀 된 자로서의 요구인 십자가의 도, 서로 사랑하는 삶을 가치 삼고
믿음으로 곧 십자가의 사랑을 중심으로 (레바=동기) 좇아 이웃을 돌아보고 섬기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여기 “좇다”라는 말은 “아콜로데오/ 동행하다, 함께 그 길을 가다, 선택하다, 지정하다, 참가하다”라는 뜻입니다.
~~ 이로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9믿음과 삶은 하나이니라)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함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했습니다.
주님 가신 그 길, 우리에게 명하신 새 계명 적인 삶을 행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와 동행하는 삶이요, 함께 그 길을 가는 삶이며 그 천국영광을 바라고 선택하는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도 이르시기를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막8:34) 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주신 새 계명이 무엇입니까?
요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입니다.
왜 입니까?
요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했습니다.
이 삶의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하시고, 이 삶이 율법의 완성이요 선지자들을 통하여 주신 율법의 중심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롬13: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하였고,
주님도 이르시기를 하나님사랑의 삶은 곧 이웃사랑의 삶인데 이는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 했습니다.
마22:37~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 그와 같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13:10/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우리가 드릴, 곧 하나님이 찾으시고 기뻐하시고 받으시는 영적예배요 거룩한 산제사인 것입니다.
“거룩”이라는 말은 “하기오스/ 피조물과 구별되다, 성도”라는 뜻입니다.
피조물과 구별 된 곧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는 삶이요, 구속함을 입어 자녀가 된 우리의 삶의 가치요 중심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오늘 롬12:1~2을 상고하면서 주목해 보아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러므로”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1장부터 11장에 이르기까지 예수를 믿음으로서 구원을 받게 되는 “이신득의”에 대하여 소상하게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구속함을 얻어 영생구원을 바라보는 자의 소망이 무엇인지, 그 기쁨이 무엇인지, 구속 얻은 자의 확신하는 믿음이 무엇인지 가슴이 뜨겁게 교훈하여 가르쳐 주었습니다.
오늘부터 상고하는 12장에서는 복음을 듣고 구속함을 얻은 자의 삶이 어떠해야 천국영광, 그 기업을 상속 받는 자리에 나아가는지에 대하여 증거합니다.
곧 구속 얻은 자는 반드시 그 십자가의 도를 가치 삼고 중심으로써 좇아 행해야 그것이 구원 받는 믿음이요 우리의 산 소망이 될 수 있음을 교훈합니다.
즉 믿음은 곧 삶이요, 하나임을 교훈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받았으면 이제는 그 말씀에 순종하여 좇아 살아가려는 몸부림, 애씀, 수고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화입니다. 현재구원,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가는 구원인 것입니다.
그날의 영광은 이 땅에 살아 숨 쉬는 날 동안만 준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준비의 삶, 십자가의 도를 좇는 삶, 자기부인과 자기십자가를 지고 좇는 삶은 크고 거창한 것을 요구하심이 아닙니다. 지극히 적은 소자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 대접하는 사랑입니다. 이것과 천국영광을 맞바꾸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속이 은혜라면 완성구원은 은혜 중의 은혜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여러분!
구속과 구원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수단과 목적으로 풀면 이단입니다. 원인과 결과로 풀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
구속은 거저 주신 은혜, 곧 선물입니다. 거저 값없이 공짜로 얻은 것입니다.
아무런 의나, 공로나, 선이나, 자격이나 조건도 없는, 조건이 있다면 다만 죄의 조건 곧 지옥심판만이 기다리는 죽었던 우리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으로써 그 아들을 대신 화목제로 삼으시고 우리 죄 값을 십자가에서 담당시킴으로써 하나님과 끊어져 원수 되었고, 마귀의 종이요 소유로서 영원한 지옥심판을 피할 수 없던 우리를 건져내 주시고, 다시 한 번 영원한 천국기업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구속은 은혜인 것입니다.
이를 구속, “리트로시스” 라고 합니다. 칭의, 과거구원(하나님의 예정에 따라), 은혜구원, “말미암아”의 구원 이라고 합니다.
그 무조건적인 사랑하심에 의한 은혜로 말미암아 지옥심판 대상에서 천국소망의 기회를 얻은 자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속함이 완성구원이 아닙니다.
그 은혜로 마귀의 종이요, 소유요 심판의 대상에서 하나님의 자녀요 소유요, 천국을 다시 받을 기회를 얻은 자 되었다는 확신 곧 믿음이 있다면
“이제는” 그 자녀 된 자로서의 요구하심을 붙좇아야 그 영광나라를 상속 받는 자리에 나아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를 성화, “소조” 현재구원, 생활구원,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가는 구원, 이제는 의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삶의 결과로써 그날에 그 앞에서 위로함을 얻고 (곁으로 부르시다) 그 영광나라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소테리아” 영광구원, 상급구원, 완성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이미” 와 “아직” 사이의 긴장인 것입니다.
이미 그 은혜로 자녀가 되었지만 이 십자가의 도를 좇는 믿음, 곧 그 사랑의 삶을 중심으로 좇아 행하지 아니하면 그 영광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이미 와 아직 사이의 긴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그렇게 값싼 싸구려가 아닙니다. 반드시 댓가를 지불해야 하는데 그 댓가가 지극히 작은 소자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 대접하는 사랑하는 삶이라는 사실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 내가, 내게 주신 그 모든 것으로, 소자를 향하여 사랑으로서 섬기는 것이 거룩한 산제사요, 하나님이 찾으시고 기뻐하시고 받으시는 영적예배라는 것입니다./할렐루야!
내가 있는 그곳이 제단이요, 내게 주신 그 모든 것이 제물이요, 내가 이웃을 향해 사랑으로 섬기는 삶이 제사라는 것입니다.
히13: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권고하기를
갈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치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하였고,
야고보 사도도 이르기를
약4:17/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둘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했습니다.
죄는 “하말티아/ 하나님을 떠나다, 탈선하다, 과녁을 빗나가다, 미끄러지다, 선을 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함으로써 그 의를 이루지 아니하고 여전히 세상적 가치를 좇는 마귀의 종노릇함이 죄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예배니라”했습니다.
이는 완성구원을 향한 “이제는” 의 삶을 말씀합니다. 그 영광구원을 향한 구속함을 얻은 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증거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를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이에 대하여서는 이미 위에서 다 말씀드렸습니다.
즉 중심으로 그 십자가의 도를 좇는 사랑의 삶을 행하여 좇을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즉 모든 것이 주의 기뻐하심, 그 영광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롬14:7~8/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우리 몸을 산제사로 드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거룩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처럼 거룩해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쓰시기 위하여 구별해 놓은 것이 거룩한 것입니다. 피조물과 구별 된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하여 쓰시기 위한 것입니다.
즉 구속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구별하여 떼어놓으신 우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드시 구별 된 자로서의 요구에 합당한 삶을 살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쓰시기 때문입니다. 그때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적 가치, 곧 옛 사람의 가치를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다 버려야 합니다. 다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즉 다 그 사랑의 삶을 위한 선의 재료로 여기고 선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 삶의 전 분야에서, 그 모든 것으로 오직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도모하여 중심으로 좇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산제사가 되어야 합니다.
구약제사는 죽은 동물제사였습니다. 이는 형식적인 제사였으며, 오실 메시야 곧 구속 주 되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죽음의 예표였습니다.
그러므로 형식적인 종교인의 예배, 삶을 버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최고의 삶으로써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산제사,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 곧 삶이 되도록 몸부림을 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영적예배입니다.
육적인 것은 ‘세상적인 옛 사람의 가치요’ 영적인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현재의 삶으로서의 증거’ 라고 이해하시면 쉬울 것입니다.
영적인 것은 그 어떤 뜬구름 잡듯 하는 추상이나 관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지금 여기서 요구하시는, 이루어가는 십자가의 삶이 영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요구하심의 합당한 삶은 다 버리고, 형식적인 예배와 새벽기도와 금식과 성경공부에 열심을 내는, 마당만 밟는 자들을 향하여 관념적이고 형식적이며 추상적이고 지식적인 믿음을 버리라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깨닫고 그 요구에 응답함으로 그날의 소망을 견고히 부여잡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영적예배”라는 말은 “합당한 섬김과 나눔, 돌아 봄”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합당하다”는 말은 “악시오스/ ~~과 비교할 수 없는 동등한 가치를 지니다. 충분히 좋다, 칭찬 받을만하다”라는 뜻입니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는 칭찬과 나 보기에 좋았다. 내가 기뻤다. 영광을 상속 받으라’고 하시는 자리에 나아가려면 그 사랑의 돌아봄과 돌봄, 섬김과 나눔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행복해야 합니다.
왜요?
하나님은 반드시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고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옥에서 천국으로 거저 옮김을 받았습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주신 사랑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런즉 내게 있는 것으로 서로 사랑해야 함은 마땅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교훈합니다.
요일3:16~19/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서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의 그 삶은 그날에 충분히 칭찬 받을만한 일이요, 이 땅의 그 어떤 영광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일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절절한 심정으로 교훈합니다.
롬8:12~18/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했습니다.
또
롬8:28~30/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했습니다.
“합력하여”라는 말은 “쉬네르게오/ 돕다”라는 뜻입니다.
“선을”이란 “아가도스/ 적합한, 옳은 것, 완전한”이란 뜻입니다.
“이루느니라”하는 말은 “에이스/ ~~을 향하여, ~~에게로, ~~안으로”라는 뜻으로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 삶의 사람은 모든 것을 도우심으로 천국영광을 이루도록 곧 그 안으로 들어가도록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삶이 없이는 천국영광의 자리에 나아가지 못한다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새벽기도 열심히 하고 봉사하고 금식하며 성경 읽고 예배시간 안 빠지고 잘 나오면 모든 것에 형통케 하시고 복을 바가지로 준다고 가르쳤고 그렇게 인본주의적이요 세상적으로 알고 있으니 기가 막히는 노릇입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흥정이요 거래인 것입니다. 믿음도 신앙도 아닌 가지인 것입니다.
자 잘 보세요!
“형상”이란 말은 “에이콘/ 하나님의 형상 곧 사랑”을 뜻하며,
“본받다”는 말은 “쉼모르포스/ 같은 모양을 가진”이란 말로 하나님의 성품인 그 사랑의 삶을 살아감을 가리킵니다.
“맏아들”이란 말은 “프로토토코스/ 장자”를 뜻하는 말로서 곧 천국상속자를 가리킵니다.
즉 그 십자가 사랑의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함으로써 천국상속의 장자로 받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르시기를
마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했습니다.
이것이 믿어져야 비로소 그날의 소망 가운데 견고히 선 믿음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믿음, 이 소망이 우리 양무리교회 성도들의 것이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지니라”했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함이 무엇입니까?
이는 영적예배입니다./할렐루야!
영적예배는 우리가 앞에서 살핀 예배입니다.
중심으로서 곧 그 십자가의 사랑으로 곧 주신 새 계명에 순종하여 지금, 내가, 여기서, 내게 주신 그 모든 것으로, 내 이웃을 사랑하기 위하여 선용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영적예배를 요구하시고 반드시 그 예배성공 자들이 되어야 합니까?
답은 간단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란 말은 “델레마/ 하나님의 의로우신 요구, 결정, 선택, 열망, 기뻐하심, 원하심”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 “의”는 무엇입니까?
“디카이오쉬네/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용서함, 반사체로부터의 빛”이라는 뜻입니다.
곧 십자가에서 주께서 담당하시고 행하시고 이루신 하나님의 뜻, 곧 서로 사랑하는 삶인 것입니다.
이 뜻인 그 의를 이루어야 천국영광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했습니다.
이는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가치 변화의 삶을 가리킵니다. 자기부인, 자기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는 삶인 것입니다.
“분별”이라는 말은 “코데쉬/ 곧은길을 가다, 자르다”라는 뜻입니다.
이제는 새 사람, 하나님의 자녀로서 옛 사람, 세상적인 가치들을 버리고 오직 곧은 길, 곧 천국영광을 받는 그 길, 주로 말미암는 그 길, 그 십자가의 도인 서로 사랑함을 가치 삼고 중심으로 좇는 그 삶을 도모하여 달려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꾸 유혹하는 옛 사람의 가치들을 날마다, 순간마다 자꾸 내려놓고 비우고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분별하는 삶인 것입니다. 그렇게 살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화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를 주목하시고 천국영광과 맞바꾸어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 되시는 분이십니다./할렐루야!
사랑하는 여러분!
영적예배의 성공 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날에 의로 여겨주심을 받고, 그 소망의 영광나라를 상속 받는 자리에 다 나아가는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를 위해서 그 기뻐하심을 위하여 돌아보고 나누고 섬기며, 의를 이루는 몸부림으로 하나님의 주목하심을 받고 행한 대로 갚아 주심의 복을 받는 우리 모두가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읾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