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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도 하순에 접어들었는데 이 코로나19는 언제나 끝나려는지 감감합니다. 이제는 좀, 하고 안심하는 사이 다시 불을 지폈습니다. 그리고 한 달이 되어가네요. 학생들은 개학을 하느니 마느니 하다가 결국 학교에 가기는 했는데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서로 떨어져 있으라는데 그게 그렇게 되겠습니까? 일일이 하나씩 따라붙어 감시하고 간섭할 수도 없는 문제입니다. 아예 학교 오지 말라고 하기 전에는 ‘너희들 서로 떨어져 있어,’ 하는 지시는 그저 희망사항일 뿐이지요. 무시무시한 전염은 아니더라도 으스스한 감염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어디서 어떻게 내 몸에 들어올지 모르고 사는 겁니다. 일단 눈에 보이지 않으니 아이들이 신경을 덜 쓸 수밖에 없습니다.
금년 5월은 여왕답지 않게 채신머리없이 오르락내리락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많이 오는 것 같지는 않은데 예년보다 비도 자주 드나드네요. 파란 오월이라기보다는 회색빛 오월입니다. 여왕도 코로나19를 먹었나봅니다. 마지막 한 주는 날씨라도 활짝 웃으며 지내면 좋겠습니다. 하기야 덩달아 몰려나오는 인생들이 걱정이기는 합니다. 눈으로 보는 기분이라도 상쾌하기를 바라서 하는 말이지요. 한 달만 지나면 금년 반이 지나는 셈인데 2020년이 글자처럼 빵빵합니다. 그래도 세계 열방보다는 꽤나 잘 이겨내고 있습니다. 그나마 위로가 되고 힘이 됩니다. 수고하는 우리 의료진과 보건 당국 관계자들 정말 감사합니다. 기꺼이 동참하는 우리 국민도 많이 성숙해졌습니다. 자랑스럽게 여길 만하지요. 요즘 아파트 갑질 외에는 말입니다.
아무튼 웃으며 오월의 여왕을 보내고 싶습니다. 희망을 담아 손을 흔들어봅니다. 모두 건강하게 한 주를 지내기 바랍니다. ^&^
2020년 5월 23일 김종우 목사
첨부 : 20-05-17주일설교(자녀 된 증거)
<나의 청춘은 너의 것>
사랑은 매우 이기적이고 배타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키워준 부모도 밀어낼 수 있습니다. 그렇게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죽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그 사람을 놓아줄 수 있을까요? 이게 말이 되는 말입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기꺼이 보내줍니까? 사랑하니까. 되는 말입니까? 오히려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 아닌가요? 아니면 본인이 아직 자기가 사랑하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대부분 그렇습니다. 흔히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통용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헤어지면 못살 것 같았지만 살다보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차츰 멀어지는 것이지요. 그러고 싶지 않아도 그렇게 됩니다. 왜냐하면 살아야 하니까요. 일단은 본능이 우선합니다. 웬만한 의지와 속된 말로 미치지 않고서는 넘어가지 않습니다. 앞뒤를 가릴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감정으로 치닫기보다는 생명의 본능이 먼저입니다. 비록 상처를 오래 간직하며 살지라도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쩌면 인생의 교훈으로 삼으며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경험이지요. 그리고 추억이라는 그릇에 보관합니다.
어려서의 친구가 연인이 된다는 것, 그리 흔한 일이 아닙니다.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자라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경험합니다. 학교도 여러 번 바뀝니다. 초등학교를 지나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 그 사이 친구도 바뀔 수 있습니다. 하기야 학교가 달라져도 친구 관계를 이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성과 이성이 좀 다를 것입니다. 특수한 경우가 있을 수 있지만 이성과 친분을 이어간다는 것은 쉽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사춘기 청소년 때는 동성 친구와 교제가 깊어지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면서 친구를 만들고 싶은 욕구가 생기기도 하지만 동성의 친구는 호기심이나 욕구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형성되는 기간입니다. 이때의 친구가 가장 깊고 오래 갑니다. 평생을 갑니다.
특별한 경우라면 한 동네에서 가까이 지내며 늘 보는 것입니다.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나아가 고등학교까지 함께 같은 학교를 다니며 본다면 아주 드문 경우이고 그만한 이점이 있습니다. 어렵지 않게 자주 보며 지냅니다. 동성 못지않은 친구가 될 수 있겠지요. 사실 그런 친구 사이가 연인 사이로 발전하기는 쉬우면서도 어렵습니다. 이성에 대한 묘한 감정을 가진다 해도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거리낌 없이 지내는 친구인데 이성의 감정이 들어가면 조금 어색해질 수 있습니다. 그것을 본인 스스로 어색하게 느껴서 감정을 억압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상대방이 어색하게 될까봐 두려워서 억제할 수도 있습니다.
‘린린’은 활달하고 남 도와주기를 잘하는 소녀입니다. 어쩌면 동네 유명한 말괄량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악하지 않습니다. 그 덕에 새침데기 ‘팡위커’가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 사내아이는 참하고 공부나 하는 샌님이고 소녀는 온 동네를 휘잡으며 싸다니는 왈패입니다. 말은 없어도 샌님인 팡위커의 마음에 린린이 자리합니다. 일찍부터 평생의 반려자로 점지한 것입니다. 내가 너를 지켜줄게. 물론 경쟁자가 있기는 합니다. 공부 잘하는 팡위커를 선망하며 바라보는 소녀들이 가까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꽤나 예쁘고 공부도 잘하는 소녀도 그에게 눈이 갑니다. 다행히(?) 전학을 가지만 불행히(?) 대학에서 다시 만납니다. 그리고 셋 사이에 사랑 게임이 이어집니다.
누가 누구를 좋아하고 사랑하는지 오락가락합니다. 흔히 사랑을 시소게임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두 사람 사이에서도 그런데 하물며 세 사람이 되면 묘한 게임이 되지요. 사랑은 아픔이면서도 기쁨이고 슬픔이면서도 즐거움이라는 것을 경험한 사람들은 압니다. 세상이 다 내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고 세상에 홀로 팽개쳐진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사랑은 사람의 감정의 폭을 최대한 증폭시킵니다. 그래서 그 힘으로 예술이 생기지 않을까 싶습니다. 초점은 팡위커가 누구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린린에게는 단순히 친구입니다. 그러나 본인의 감정은 갈피를 잡지 못합니다.
그리 흔하지 않은 경우를 들어서 사랑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마지막 한방을 위해 이야기가 그렇게 구성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끝에 가서 실타래 풀듯이 풀어 보여줍니다. 사실 고등학교까지는 그렇다 치고 대학 그것도 같은 학과로 함께 입학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과장하여 말한다면 로또 당첨만큼이나 어려운 일 아니겠습니까? 그런 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소위 사랑의 힘입니다. 그야말로 동화이지요. 본래 동화는 어린이들 이야기인데 때로는 ‘어른 동화’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야말로 ‘청춘 동화’입니다. 꿈같은 이야기입니다. 영화 ‘나의 청춘은 너의 것’(Love The Way You Are)을 보았습니다. 대만 영화입니다.
<미 비포 유>
내가 생각하는 선행을 상대방이 거부한다고 해서 상대방이 이기적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이것 또한 매우 상대적이 아닐까 싶습니다. 상대방은 또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은 자기 나름대로 이쪽을 위한 선행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에게 삶의 재미를 느끼게 해줌으로써 살고 싶은 마음을 불러 일으켜 줍니다. 그래서 혹 죽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 해도 다시 살려는 의지를 일으켜주려 합니다. 그러나 상대방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앞이 창창한 사람을 붙잡아 그 사람의 한 평생을 불행으로 몰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서로 상반된 마음을 서로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요?
한 사람의 고통을 임의로 상상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우리는 그 고통이 어떠한지 당하지 않고는 알 길이 없습니다. 눈앞에서 평상의 일과처럼 행한다고 상대방의 모든 것을 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그렇게 알고 행합니다. 그래서 오해들이 쉽게 생기기도 합니다. 그것을 풀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일이 다 말해주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알아서 말해주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강제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자식이 부모에게도, 아니 서로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하루 생활을 일일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마치 보고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하기야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대단한 부잣집 청년이 어느 날 오토바이에 치입니다. 그리고 목 이하 전신마비가 됩니다. 속된 말로 인생 종친 것이지요. 그래도 그러한 장애도 이기며 평생을 나름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하면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문제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따른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마비, 그래서 차라리 고통이라도 없다면 견디며 살아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극심한 고통이 수반된다면 죽느니만 못하다는 것이지요. 게다가 툭하면 폐렴까지 걸려 사경을 헤매기도 합니다. 가족들이 매일 마음 졸이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곁에 일상적 삶을 위해 도울 사람과 간병인을 두지만 늘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항상 대기 상태이니까요.
본인이 그러한 가족, 부모의 고통을 모를 리 없습니다. 자기도 아프지만 옆에서 고생하는 부모를 보는 것 또한 마음에 짐입니다. 이미 난치병도 아니고 치료 불가능 진단이 내려진 상태입니다. 하루하루 사는 것이 그야말로 고행보다 더 힘듭니다. 그래서 부모님과 합의했습니다. 6개월로 한정하자고. 그 기간은 최대한 아들 ‘윌’의 삶을 보장해주려 합니다. 경제적으로는 거리낄 것 없는 부자이니 무엇인들 못해주겠습니까? 그 몇 년 지내며 윌의 성질은 아주 까다로워졌습니다. 하기야 몸도 맘도 보통사람이 아닙니다. 모든 삶을 타인에게 의존해야 하니 자존심도 망가질 대로 망가졌을 것입니다. 앞서 간병인들이 있었지만 그들조차 견디기 힘들었으리라 짐작합니다.
돈이 급한 처녀가 구인광고를 보고 응합니다. 간병인, 여태 그런 경험이 없어도 무조건 열심히 성실하게 일하자는 마음으로 찾아갑니다. 가릴 시간이 없습니다. 일단 취업부터 해야 하니까요. 그래서인지 그 마음을 보고 면접 당일부터 일을 합니다. 하기야 그 부모님도 급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성실하게 해보겠다니 맡겨보는 것이지요. 그렇게 윌과 ‘루이자’가 만났습니다. 꼼짝도 하지 못하는 환자이지만 전동휠체어로 이동은 합니다. 그리고 힘든 일은 남자 트레이너가 또 있습니다. 문제는 부모가 원하는 것처럼 친구가 되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고 관리도 하지 않아 덥수룩합니다.
돈이 급해서 취업한 일이기는 하지만 사람이 돈 때문으로만 일하는 것은 아닙니다. 근무시간이 정해져 있지만 환자를 돌보는데 정해진 시간을 지키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시간은 자연스럽게 흘러갑니다. 그리고 어느덧 대화도 나눕니다. 같이 정원 산책도 나갑니다. 부모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집니다. 시간이 흐르며 둘 사이에 보이지 않게 마음이 흐릅니다. 무엇은 못해요? 외출도 합니다. 멀리 여행도 다녀옵니다. 윌의 애인이었던 여자와 단짝이었던 친구의 결혼식에도 루이자와 함께 참석해서 축하해줍니다. 그 때는 윌의 마음도 한결 넓어지고 부드러워진 듯합니다. 루이자 덕에.
그러나 길지 않은 시간은 흘러 정해진 때가 되었습니다. 루이자는 실망과 낙담을 합니다. 자기가 그렇게 삶의 즐거움을 누리게 해주면 마음을 바꾸어 살고자 하는 의지를 가져주려니 기대했던 것입니다. 더구나 둘 사이에는 어느덧 사랑의 마음도 심어져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윌의 마음은 그들이 만나기 전 이미 정해져 있었습니다. 돈도 필요 없다고 뛰쳐나온 루이자는 집에 돌아와 일어난 일에 대해 동생과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동생의 말대로 다시 생각해봅니다. 윌이 아니라 자신이 이기적일 수도 있구나, 깨달은 것이지요. 그래서 윌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해줍니다. 영화 ‘미 비포 유’(Me Before You)를 보았습니다. 2016년 개봉작입니다. 다시 보니 또 새롭군요.
성경 베드로전서 1 : 23 2020년 5월 17일
설교 : 자녀 된 증거 김종우 목사
옛날에는 여자가 남편과 헤어지고 나면 한 반년 정도인가 재혼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지금이야 그런 일은 없습니다. 없어도 될 정도의 환경이 되었기 때문이지요. 문제가 될 것이라면 즉각 조사해보면 알게 됩니다. 간단하지요. 물론 시간과 돈이 좀 들기는 하지만 아무튼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전 남편의 소생인지 현 남편의 소생인지 유전자 검사만 하면 되니까요. 아무리 키운 정이 크다 하지만 자기 씨라는 사실 앞에는 무력해지기 쉽습니다. 아주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는 너, 나가 없습니다. 때로는 내 것 네 것도 구별하지 않으려 합니다. 부모님도 마찬가집니다. 서로가 상대방의 부모님을 자기 부모님 대하듯 합니다. 친구의 부모님이라 할지라도 서슴없이 아버님 어머님 부르지요. 그러나 아무리 친하다 해도 그래서 설령 어머니 아버지 하고 불러도 정작 아주 냉정하게 구별되는 때가 있습니다. 언제일까요? 부모가 유산을 상속해줄 때입니다. 그 때는 아무리 친하고 어머니 아버지라고 부르며 좇았다 할지라도 부모가 유산을 자식의 친구에게 물려주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유는 간단하지요. 친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이 사실을 우습게 알면 안 됩니다. 얼마나 대단한 일인 줄 압니까? 과연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면 어떤 일이 생깁니까? 하나님 나라가 내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갈 4 : 6 - 7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그렇습니다. 아들이면 즉 자녀이면 유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 말은 아버지 나라 즉 하나님 나라가 바로 내 재산이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왕이시니 그 뒤를 이어 왕의 권세를 누리게 된다는 말이지요. 이게 보통 일입니까? 그러므로 반대로 생각해서 우리 하나님이 아무나 자식이라 정하여 당신의 나라를 유업으로 주시겠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어봅니다. 내 사랑하는 자식의 아주 친한 친구가 나를 아버님, 아버님 하면서 내 자식보다도 더 나를 잘 따랐다고 해봅시다. 그런 일이 가끔 있잖아요. 설령 그렇다고 해도 막상 내 죽음 앞에서 내 유산을 물려준다면 그 아들 녀석의 친구에게 주겠습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그런 일은 없습니다. 좀 못나고 모자라도 내 자식에게 주지 그 친구 녀석에게 주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부모 자식의 관계입니다.
문제는 우리는 아버지라고 찰떡같이 알고 믿고 있었는데 혹시 그 아버지라는 분이 ‘아냐, 너 내 자식 아니야,’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얼마나 기막힐 일입니까? 여태 아버지라고 믿고 살아왔는데 정작 가장 중요한 때 이런 일을 당한다면 속된 말로 환장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오로지 자기네만이 선민이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생각 정도가 아니라 확고하게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네 아버지라는 것이지요. 그것은 그들에게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요 8 : 41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대답하되’ 했는데 누가 대답한 겁니까? 유대인들입니다. 지금 예수님과 유대인 사이에 말싸움이 붙은 것입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유일하신 하나님이 자기네 아버지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44절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길게 말씀하셨지만 한 마디로 요약하면 너희 아비가 누구다? 마귀다, 그겁니다. 이해가 됩니까?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자기네 아버지라고 여태 믿고 살아왔는데 하나님은 ‘아니야, 나는 너희 아버지가 아니야,’ 하시는 겁니다.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자, 중요한 것은 이런 일이 오늘날 우리에게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요 1 :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 말씀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믿고 삽니다. 옛날 유대인들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네만이 하나님께로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라고 찰떡같이 믿고 살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교회를 다니기 때문에 세상에서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과는 구별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지요. 이 믿음에 흔들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의 아버지시라는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너는 내 자식이 아니야,’라고 하신다면 어쩌겠습니까? 세상에서도 이런 일이 생깁니다. 왜요? 다른 것이 아니라 유산 상속 문제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쩌지요? 옛날 같으면 힘들었지만 이제는 방법이 있습니다. 뭣만 하면 되지요? 예, 유전자 감식만 하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거지요. 즉 씨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아버지와 자녀 관계인가 아닌가, 무엇으로 판별합니까? 씨가 있느냐 없느냐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씨가 무엇인가 알아야 하겠지요. 눅 8 : 11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씨가 무엇이라고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도 동일합니다. 벧전 1 : 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거듭남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지요. 요 3 : 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예, 거듭나야만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식으로 말한다면 거듭나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거듭나려면 ‘썩지 아니할 씨 곧 하나님 말씀’으로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하나님의 씨 곧 하나님의 말씀이 있느냐 없느냐 그것으로 판별이 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이것 모르는 신자가 있을까요? 믿음도 없이 교회만 다니는 교인이라면 모르되 하나님을 믿는 신자라면 다 알겠지요. 바로 성경입니다. 요즘 교회 다닌다고 하면서 성경을 안 갖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기야 가지고는 있는데 읽고는 있는지 그냥 가지고 있는 것인지 그것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우리 아버지 입장에서 과연 자식이라면 그 씨를 즉 말씀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가지고 있는 자를 자식이라고 인정하실까요? 성경책을 집에 잘 가지고 있는 사람일까요, 그 성경책을 읽는 자일까요? 사실 그 성경이 내 집에 있다는 것은 의미가 전혀 없습니다. 그 말씀이 내 집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있어야 하겠지요. 그러면 배 째고 성경을 집어넣을까요?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씨 곧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확실하게 보장되는 것이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구원과 영생이고 둘째는 하나님 나라 상속입니다. 이 둘은 사실 연관된 것이지요. 구원과 영생이 없이 어떻게 천국을 상속하겠습니까? 그렇죠? 그러므로 하나님 자녀라면 영생이 보장되어야 하나님 나라도 상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영생은 어떻게 얻는가 하는 것입니다. 요 17 :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아멘! 간단하지요.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랍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인데 ‘참 하나님’이라는 말씀에 주의해야 한다는 것을 전에 말씀드렸습니다. 왜요? 자칭 하나님이 세상에 있기 때문이지요. 아무튼 지금 그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랍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요 5 :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니까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 영생을 얻는 길을 알게 됩니다. 이 성경은 누구에 대해서 말씀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알면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됩니다. 간단하지요?
이제 다음 문제는 그러면 얼마큼 알아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성경을 얼마큼이나 알아야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안다고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지요. 성경 66권 총 1189장, 절 수로는 31173절을 다 외워야 하는가? 1년 한번 읽기도 힘들어 하는 신자가 많은데 그렇다면 지레 기겁을 하는 사람들 많겠습니다. 아 - 나는 하나님 자녀 되기는 진작부터 글렀나보다, 포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알아야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하기야 이 성경을 다 외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성구 암송한다고 발버둥 쳐도 하루 하나 둘 외워서 기억하기가 어려운데 다 외운다니 얼마나 부럽습니까? 자 그렇다 해도 오늘은 외웠는데 1년 후에 일부분 잊어버렸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다시 하나님 자녀로서의 자격을 상실하는 겁니까? 이거 정말 어렵네요. 아니면 한 구절이라도 제대로 알면 되겠습니까? 사실 안다는 것은 행한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약 2 : 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그러므로 한 구절을 안다 해도 그것을 행하지 않으면 역시 거짓 믿음입니다.
점점 힘들어지는 것 같군요. 자 이야기를 좀 바꾸겠습니다. 성경을 아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영생과 직결되고 하나님 자녀 되는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과 논쟁하던 유대인들이 성경을 몰랐을까요? 그 당시는 오늘 우리처럼 한 사람이 성경을 한두 권씩 가지고 있던 때가 아닙니다. 일반 백성은 성경을 구경하기도 쉽지 않은 때입니다. 그러니 성전에서 또는 회당에서 가르치고 들려주는 것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자꾸 듣고 나름 기록하든지 외워야 합니다. 율법에도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신 6 : 6 - 9 “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찌니라”
그래서 그들은 나면서부터 성경을 듣고 암송하며 자랍니다. 말씀을 여기저기 붙이고 달고 다닙니다. 율법대로 살려고 발버둥 칩니다. 아마 오늘 우리 신앙생활과는 너무 비교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정말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던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외식에 치우쳐 문제가 되었을 뿐이지요. 그 노력만큼은 가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 너희 아버지는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라고 질타하셨을까요? 얼마나 무섭고 기막힐 일입니까? 그렇게 말씀을 알고 그렇게 말씀대로 살려고 했는데 하나님이 내 자식 아니다, 선포하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런 일이 없으라는 법 있습니까?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했지요. 다시 오셔서 우리에게 너희 아버지는 하나님이 아니다, 그러시면 어쩌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무엇을 근거로? 우리 모두 심각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속된 말로, 평생 어렵게 신앙생활 한 것이 몽땅 도루묵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제 마지막 때 구원이 이루어질 때의 광경을 보겠습니다. 계 14 : 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자 예수님과 십사만 사천의 성도들이 시온 산에 섰습니다. 3절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 인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그들이 하나님 보좌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데 어떤 노래를 부른다고요? 새 노래를 부른답니다. 이 장면이 15장에 이어집니다. 계 15 : 2 - 3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여기 보니까 새 노래를 달리 표현합니다. 무슨 노래라고요?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입니다. 이기고 벗어난 자들 곧 십사만 사천의 성도들이 새 노래 곧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부릅니다.
우선 노래에 대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얼마 전에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간단히 비유만 하겠습니다. 자식이 안 될 일을 자꾸 고집하고 허락해달라고 조르면 엄마가 뭐라고 말하지요? ‘노래하고 있네,’ 그럽니다. 정말 노래하는 겁니까? 자꾸 반복해서 말한다는 뜻이지요. 하나님의 백성은 무엇을 자꾸 말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노래하듯 말해야 합니다. 말씀이 생명이니까. 그렇다면 모세의 노래는 무엇이고 어린 양의 노래는 무엇입니까? 모세는 율법의 대표이고 예수님은 복음의 대표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구약과 신약, 성경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는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을 노래하듯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미 다 지나간 말씀인데 어째서 새 노래일까요?
한 가지 예를 보겠습니다. 신 25 : 4 “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찌니라” 하나님은 당신 백성에게 율법으로 명하셨습니다. 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농사를 지으며 추수할 때 곡식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그들이 어떻게 하였다고요? 망을 씌웠지요. 왜요? 곡식을 떨며 소가 가만 일만 하겠습니까? 주워 먹잖아요. 그러니 먹지 못하게 망을 씌우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뭐라 하십니까? 망을 씌우지 말라 그러십니다. 불평이 나오지만 어쩝니까? 율법인 것을. 하나님이 원망스러웠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순종했겠지요. 2천년의 세월을 투덜대면서도 지켜왔을 것입니다. 이게 모세의 노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다녀가신 후 신약성경에 이 말씀이 새롭게 기록됩니다. 고전 9 : 9 - 11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결국 율법에 기록된 ‘소’가 누구를 가리키는 말입니까? 하나님 말씀을 전해주는 하나님의 종을 뜻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구약시대 그것을 깨달은 백성이 있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예수님 다녀가시고 신약시대 밝혀진 사실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갑니까? 똑같은 말씀인데 다르지요. 무엇이 다릅니까? 해석이 다릅니다. 즉 말씀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율법 시대와 복음 시대의 그 말씀의 의미가 다르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시대를 분별함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습니다. 마 16 : 2 - 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모세 시대, 예수님 시대 그리고 이제 주님 재림 시대입니다. 똑같은 말씀이지만 그 시대에 맞도록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새 노래입니다. 2천 년 전에 본 성경, 오늘 우리가 보는 성경, 성경은 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의미는 다르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것을 누가 알겠습니까? 계 14 : 3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 인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우리는 지금 십사만 사천이라는 수자에 매일 필요는 없습니다. 이 수자로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누구는 구원받은 자들의 수라고 하고 누구는 단지 상징수라고 하고 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 하나는 알고 가야 합니다. 이 수는 구원받은 자의 수가 아니라 이 노래 곧 새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자들입니다. 구원받은 자들의 수는 헤아리기 어렵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계 7 : 9 - 10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여기 흰옷을 입은 무리는 셀 수 없다 합니다. 이들이 구원받은 백성입니다.
다만 새 노래를 배우고 부를 수 있는 자들의 그 수가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왕 같은 제사장들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너도나도 다 왕이면 도대체 누가 백성입니까? 왕 같은 제사장이 십사만 사천이라는 말입니다. 그들만이 새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니 그들만이 이 새 노래를 가르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들이 목자 곧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뜻입니다. 이 ‘십사만 사천’이 실제든 상징이든 셀 수 없는 흰무리와는 구별된 것이 분명합니다. 나머지는 백성이지요. 새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이들을 가리켜 ‘처음 익은 열매라고 구별하기도 합니다. 계 14 : 4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러므로 새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처음 익은 열매와 흰 무리를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 분명히 기록하여 놓았는데 우리가 왜곡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 때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새 노래를 이해하지 못하고 믿지 않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마귀의 자식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재림 때의 새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믿지 아니하면 유대인들과 똑같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고집해도 정작 하나님 아버지가 ‘나 너 모른다,’ 하시면 끝입니다. 어쩌겠습니까? 여태 배운 대로 하면 하나님 말씀을 ‘노래’라고도 하고 ‘양식’이라고도 합니다. 오늘은 ‘새 노래’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전에 배운 대로 하면 ‘때를 따른 양식’이라고도 합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때, 때를 따라 양식 줄 종을 찾는다고 하셨습니다. 마 24 : 45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그러므로 참 하나님과 진리를 찾아 알고 믿어야 하며 지금의 때 배워야 할 노래, 먹어야 할 양식을 제대로 찾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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