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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관복음 강론 30 강도 만난 자의 비유(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부제 : 새 문명의 이웃 사랑
(이웃 사랑에 대해서 율법사의 접근과 주님의 대응이 극단적으로 갈라지는 부분에 초점을 맞춰서 살펴보았다.)
눅 10: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0: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10: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10: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10:29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플레시온)이 누구니이까(에이미/ be)
10: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10: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10: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10: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스플랑크니조마이/ 애타하다, 스플랑크논 : 창자, 애)
10: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10: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10: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기노마이/ become, 완료 부정사)
10: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 질문의 전도
율법사 : Who is my neighbor?
메시아 : Who is his neighbor? (직역 : Who became his neighbor?)
율법사의 질문은 누가 내 이웃입니까 라는 질문이었는데 주님께서는 누가 그 사람의 이웃이 되었느냐 라고 질문을 뒤집으셨다. 이 역질문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하나씩 찾아보았다. 먼저 최근에 해석들 연구 결과들을 보자.
* 최근의 해석들(시노라 보고)
1. 양식비평·전승사 연구를 계승한 Joseph Fitzmyer는 1985년 누가복음 주석에서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가 앞의 율법교사 대화에 2차적으로 결합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했습니다. 즉 “비유가 율법교사의 두 번째 질문을 사실상 직접 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누가가 또는 나중에 필사자들이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다른 곳에 있었는데 그것을 여기다 갖다 붙이는 바람에 율법사의 질문하고 안 맞는 대답을 하신 것처럼 되어 있어서 이것은 편집 오류라고 주장을 한 것이다.
2. 2019년 Journal of Biblical Literature에 실린 M. A. Proctor의 연구는 이 ‘불일치’를 누가의 편집 실패로 보지 않고, 이웃 관계의 상호성과 사마리아인의 자비를 통해 율법교사가 자기 질문을 다시 생각하도록 만드는 장치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 질문을 뒤집어 버린 예수님의 의도가 있다는 해석을 한 것이다.
3. Susan J. Wendel의 2021년 논문 제목은 「Doing Torah, Imitating Yahweh: A Reconsideration of the Good Samaritan Story」입니다. 이 논문은 정확히 “Who is my neighbour?”(10:29) → “Who acts as a neighbour?”(10:36)라는 논리적 변환을 연구의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단순한 이웃 범위 확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동을 닮는 imitatio Dei, 곧 하나님의 긍휼에 참여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더 최근인 2025년 연구도 아예 이 부분을 “Reframing ‘neighbour’ — From identity to action”, 즉 “이웃의 재구성 — 신분에서 행동으로”라고 명명합니다. 이 연구의 표현도 정확합니다. 예수께서 관심의 중심을 “누가 이웃이라는 범주에 속하는가?”에서 “누가 실제로 이웃으로 행동하는가?”로 옮긴다는 것입니다. (끝)
결국 결론으로는 이웃을 사랑하는 선한 행위 자체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율법사는 내가 누구를 이웃으로 규정해야 되는가 라고 질문을 한 것인데 예수님은 실천에 초점을 맞추셨다는 해석이 되는 것이다.
*클레로스의 이중윤리적 해석
클레로스 안에서 형제자매들 간에 하나됨을 지향하는 사랑이 있고, 밖에 나가서는 좋은 진주들을 향해서 진리의 빛을 비추는 사랑이 있고, 좋은 진주가 아직 아닌 것 같은 사람에게 비추는 평화의 빛이 있다. 그래서 우리가 불쌍히 여기면서 친절을 베풀어서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는 세 그룹을 향한 사랑이 있는 것이다.
1. 이웃임을 판단하는 주체의 전도
1) 옛 인류는 언제나 자신이 주체이고 상대방은 모두 객체(타자, 남)임
– 자신만이 소중한 우주의 주인공
(내가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이웃이 누구인가?)
(내가 속한 당의 범주는 어디까지인가?)
- 본회퍼의 “타자를 위한 삶” (a man for others)(for himself))
자신만이 소중한 우주의 주인공인 것이다. 따라서 이 율법사의 질문에는 두 가지가 들어 있는 것이다. 내가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이웃이 누구입니까? 하고 물어보는 의미가 있다. 즉, 내가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인간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속한 당의 범주는 어디까지 입니까? 라고 물어보는 것이다. 이방인은 이웃 사랑의 대상이 아니고, 그러면 이스라엘 유대인은 전부 사랑해야 되는 겁니까? 아니면 또 유대인 안에서 어떤 카테고라이징이 있는 겁니까? 이런 의미의 질문인 것이다. 즉 질문을 하되 누가 이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자기가 결정하는 것이다.
본훼퍼의 타자를 위한 삶도 주인공인 내가 남들을 위해서 사는 삶이 예수를 따르는 삶이라고 논리를 전개하는 것이다.
2) 새 인류에게는 상대방도 자신과 같은 소중한 존재 -
그런데 새 인류에게는 자기만 소중한 게 아니고 상대방도 자신과 같은 소중한 존재라는 그런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역질문은 누가 이웃이라고 판단하는가? 에서 율법사는 자기가 판단한다고 했는데, 예수님은 강도 만난 자가 판단하는 것이다. 그 세 명 중에 누가 내 이웃인가? 에서 이웃을 판단하는 사람이 사랑한 사람이 아니고 사랑을 받은 사람이다. 사랑을 받은 사람이 사랑한 사람을 이웃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사랑할 대상이 누구인가? 에서 사랑받은 사람이 누구를 이웃으로 생각하느냐? 로 바뀌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사의 질문은 누가 나의 이웃이 누구입니까? 였는데, 주님께서는 그 사람의 이웃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그 의미는 뭐냐 하면 내가 사랑할 사람과 사랑할 필요가 없는 사람을 내가 주체적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을 위해서 내가 이웃이 되어주는 것이다. 그래서 주체가 다르다는 것이다. 이웃이 누가 이웃인지를 판단하는 주체가 뒤집히는 것이다.
2. 이웃 사랑의 동기
1) 옛 인류에게 이웃 사랑은,
- 자기 감정에 충실함(측은지심)(돌아누우면 남)
자기가 우주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는 옛 인류에게 있어서 이웃 사랑은 자기 감정에 충실한 것이다. 맹자가 말한 측은지심처럼, 어떤 사람을 보고 측근이 여겨지는 자기 감정이다. 그런데 자기 감정에 충실한 것이기 때문에 수시로 뒤집힌다. 사람의 감정은 일정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이 측은지심이라는 것은 순간적으로 생겼다가 순간적으로 뒤집히고 제 멋대로인 것이다. 이것은 신실함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 자기 가치관에 충실함(관계 형성까지 가지 않음)(내 코가 석 자)
두 번째는 자기 가치관에 충실한 것이다. 불쌍한 사람들은 도와줘야 되 라는 가치관이다. 그런데 이것의 문제는 관계 형성까지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냥 집어 던져주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친절을 베푸는 대상들과 인격적인 관계를 형성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는 것이다. 그냥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다. 그들은 끝까지 남이다. 그런데 그것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자기가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자기는 우아하고 고상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받을 삶을 사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종교를 가진 자들은 자기가 믿는 신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다. 충성한다고 복종하는 자도 있고, 지옥에 갈까 봐 두려워서 복종하는 자도 있고, 상급을 받을 욕심에 충성하고 지옥에 안 가려고 형벌을 받지 않으려고 충성하는 것이다.
세계 4대 종교를 도덕 종교라고 규정을 한다. 그러니까 도덕적인 행위를 하거나 휴머니즘적인 행위를 하는 것은 신과의 관계에서 노림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 가치관에 충실해서 이웃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그 대상과 인간 관계를 맺지 않는다.
2) 새 인류에게 이웃 사랑은,
- 하나님의 마음과 그리스도의 사고에 따른 생리현상(스플랑크니조마이)
그런데 새 인류에게 이웃 사랑은 자기 감정이 아니고 하나님의 마음과 그리스도의 사고에 따른 생리 현상이다. 그냥 우러나는 것이다.
- 자신만큼 소중한 상대방의 존재적 비극에 대한 변함없는 긍휼
예수님이 애가 탄다고 하신 것(스플라크니조마이)은 존재적인 비참함 때문에 누구를 보든 동일한 사랑이 나가는 것이다. 육교 밑을 벤츠 뒷자리에 앉아서 타고 지나가는 재벌 회장님이나 그 육교 위에서 아이를 얻고 구걸하는 여인이나 존재적인 차원에서는 똑같이 긍휼하고 똑같이 불쌍한 것이다. 그것을 보는 눈이 우리에게 열리는 것이다.
마 9: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스플랑크니조마이)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내팽개쳐지고 흩어져 떠돎이라
37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3. 이웃 사랑의 목적
1) 옛 인류에게 이웃 사랑의 목적은,
- 자기 만족
- 자기 보람
옛 인류에게 이웃 사랑의 목적은 자기 만족, 자기 보람, 그리고 두 가지를 더 추가한다면 이웃의 칭찬, 그리고 신의 보상, 네 가지를 꼽을 수가 있다 목적 자체가, 동기 자체가 그렇다.
2) 새 인류에게 이웃 사랑의 목적은(이중윤리),
- 안에서는 자기 신체를 돌봄과 같음
- 밖에서는 화목함을 이룸
그런데 새 인류에게 이웃 사랑의 목적은 안에서는 자기 신체를 돌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멜로스, 신체 기관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다. 자기 신체를 돌보는 것은 의무감에서 하는 것도 아니고 책임감에서 하는 것도 아니고 신의 명령이어서 하는 것도 아니고 자연스러운 것이고 당연한 것이다.
밖에서는 화목함을 이룬다는 것이다. 불쌍하니까 친절을 베풀게 되고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과 화목한 관계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화목함에는 인간 관계, 인격적인 관계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지나가는 사람 밥 한 끼 사 먹을 돈 나눠 주는 이런 개념이 아닌 것이다.
4. 이웃 사랑의 결과
1) 옛 인류에게 이웃 사랑의 결과는,
- 자기 만족으로 끝남
- 자기 보상으로 끝남
- 주변의 인정 획득으로 끝남
- 언 발에 오줌 누어주기로 끝남
옛 인류에게 이웃 사랑의 결과는 자기 만족으로 끝나고, 자기 보상으로 끝나고, 주변의 인정 획득으로 끝난다, 또는 신의 축복이나 내세에 받을 보상에 초점을 맞춘다. 기적을 행해도 그것은 상급을 받으려고 자기를 위해서 한 것이고, 그 기적으로 인해서 그 사람들에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언 발에 오줌 한 번 누어주고 끝나는 것이다.
종교인이든 아니든, 그들이 생각하는 이웃 사랑은 그 사랑을 받는 사람에게 결정적인 것이 될 수가 없다. 결정적인 사랑을 해 줄 수도 없고 언 발에 오줌 누어주기로 끝나는 것이다. 그것이 옛 사람들이 하고 있는 이웃 사랑의 본질이다.
2) 새 인류에게 이웃 사랑의 결과는(이중 사명),
- 안에서는 나날이 하나가 되어감
(자기를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 있는 궁극의 행복을 누림)
나날이 하나가 되어 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냐 하면, 나를 자기 자신처럼 생각하는 형제 자매들이 나에게 있다는 것이 궁극의 행복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강도 만난 자가 누리는 행복이다.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자와 언 발에 오줌 누기식이 아닌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래서 안에서는 나날이 하나가 되어 가는 것이 궁극적인 해결이 되는 이유는 나를 자기 자신처럼 여겨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강도 만난 자가 누린 행복이다. 나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 주는, 나를 자기 자신 보듯 나를 바라봐 주는 형제자매들이 있다는 것이 궁극의 행복인 것이다.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 한 몸 공동체의 본질이다. 형제자매들을 하나로 여기고 사랑하는 방향이 있고, 형제자매들이 나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 주는 방향이 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게 된다. 그 서로 사랑하는 관계이다. 양방향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행복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형제자매들을 내 몸과 같이 돌봐주고 사랑하는 것도 행복이지만, 더 큰 행복은 나를 자기 자신처럼 여기며 나를 자기 자신처럼 바라봐 주는 형제 자매들이 있다는 것, 그것이 정말 진한 행복이다. 다 같이 보리밥 먹고 배를 쫄쫄 굶어도 그것이 궁극의 행복인 것이다.
- 밖에서는 평화롭게 이중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환경을 이룸
(활용의 현장에서는 상대방에게 행복을 누리게 해 줄 방법이 없음)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내고 평화를 이루고 하는 것도 그 사람들에게도 좋은 일이 될 수 있다. 즉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기회를 준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그들과 화목하고 평화롭게 지내면서 우리가 모든 경건함과 존경함 속에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기 위함이다, 즉 우리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는 것이다. 사람들과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과 평화롭게 지내고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그들에게도 좋지만 우리들에게도 좋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한계를 분명히 우리가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는 길에 지나가는 사람 밥 한 그릇씩 먹여주는 방식이 아니라, 그 사마리아인이 그 강도 만난 자와 관계를 맺는 것처럼 우리는 그들과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활용의 현장에서는 상대방에게 행복을 누리게 해 줄 방법이 없다. 우리가 친절을 베풀고 화목한 관계까지 갈 수 있지만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방법이 우리에게 없다. 그저 사이 좋은 관계, 화목한 관계 그것이 끝이다.
도와줄 수는 있어도 그 사람의 존재적인 문제, 본질적인 문제에 우리가 접근할 방법이 없다.
즉 평화의 빛을 비추면서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어서 불쌍히 여기고 친절을 베풀어서 화목한 관계를 맺는다 해도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 한계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딤전 2:1 그러므로 나는 그대에게 권하노니 첫째로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간구하고 기도하며 중보와 감사를 하고
2:2 통치자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도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함과 존귀함 속에서 고요하고 평온한 생활을 하기 위함이며
2:3 이것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우리 주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고(칼로스) 받으실 만한 것이기 때문이라
5. 결론
강도 만난 자의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 한 몸 공동체 클레로스의 새 문명의 시스템에 대한 메시아의 설명임
강도 만난 자의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 한 몸 공동체 클레로스의 새 문명의 시스템에 대한 메시아의 설명이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에 이중 문명 그리고 이중 사명, 이중 윤리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핵심은 사마리아인의 도움을 받는 강도 만난 자의 입장이다. 즉 사랑을 받는, 돌봄을 받는 자가 주인공인 것이다.
안에서는 궁극의 행복이 이루어진다. 물론 불완전하지만 궁극의 행복을 향해서 우리가 출발을 한 것이다. 이미 나를 자기 자신처럼 바라보는 형제자매들이 있다는 것 그것이 궁극의 행복이다. 나도 물론 형제자매들을 향해서 그렇게 바라보고 그리고 밖에서는 좋은 진주들을 만나면 좋은 진주들을 우리가 누리고 있는 궁극의 행복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우리가 온갖 노력을 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활용의 현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한계가 있지만, 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방법은 없지만 그 사람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고 도와줄 수 있는 만큼 도와주면서 그 사람들을 가능한 한 돕고 계속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고 그것이 우리 공동체에도 너무나 좋다는 것이다. 밖에 적들이 없다는 것이 우리들에게도 너무 중요한 일인 것이다. 사도 바울이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질문을 이렇게 뒤집으신 것은 옛 인류인 율법사가 가지고 있는 의문점, 사고 방식, 가치관, 율법적인 가치관, 즉 사람의 계명을 다 뒤집어 버리고, 그리고 이어서 사마리인의 비유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를 보든 잠재적 전도 대상자로 봐야 한다. 그 사람이 끝까지 좋은 진주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질 수도 있지만 그것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일이고, 누구를 보든 잠재적인 전도 대상자로, 누구를 보든 저 사람도 어느 날 갑자기 좋은 진주로 하나님께서 바꾸실 수 있다는 그 가능성을 우리가 누구를 보더라도 그것을 열어 놓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친절을 베풀면서 화목한 관계를 맺고 살아갈 때 그 안에서 어떤 사람이 좋은 진주로 변하게 되면 그 사람이 클레로노모스가 되는데 굉장히 좋은 기회가 되는 것이다.
2.공지사항
다음 주 기도는 강민지 자매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