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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물론(new materialism)이란 무엇인가
[개념]
신유물론(new materialism)은 물질주의 입장에서 현재 인류의 위기에 적절하게 대처하자고 역설하면서 세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이론이다. 인류세 담론이라는 말이 종종 쓰인다. 간혹 마르크스 유물론의 새로운 해석 정도로 오해되는 경향이 많으나, 마르크스가 강조한 사적 유물론과는 상당히 다른 개념이다. 물론 연결이 되는 측면은 많다. 마르크스 유물론과 달리 신유물론은 물질의 행위성을 긍정한다. 물질을 세상의 객체가 아니라 주체로 보고자 한다.
과거의 유물론에서는 물질이 수동적이고 무력하다고 보지만, 신유물론에서는 물질이 작용하고 변화하는 것으로 본다. 물질은 스스로 자신의 역량을 능동적으로 발휘하는 특성, 곧 능동성과 창조성을 지녔다. 그에 따라 세계가 형성되며 지속된다고 본다. 이런 물질에 신의 능력이 작용한다고 본다면 유신론적 입장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 신유물론은 신을 전제하지 않은 무신론적 입장을 지킨다.
이로 인해 신유물론은 기존의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인간과 세상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고자 한다. 물질의 중요성을 페미니즘, 생태주의, 문화이론, 과학 연구 등을 통해 강조하려는 특성이 있다. 학제 간의 연구 특성을 지닌다. 신유물론은 스피노자에 기원이 닿아 있으며, 질 들뢰즈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앙리 르페브르와도 많은 관련이 있다고 본다. 현재 유명 학자로는 브뤼노 라투르, 제인 베넷, 마누엘 데란다, 로지 브라이도티, 그레이엄 하먼, 퀑탱 메이야수 등을 들 수 있다.
새로운 존재의 패러다임 신유물론/윤지영(창원대 인문대 철학과)
인간의 존재 조건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던 팬데믹 기간은 아직 우리의 온몸과 기억 곳곳에 깊은 흔적을 드리우고 있다. 이 시간들은 우리에게 한계-경험이었다.
지금껏 과학기술을 통해 자연으로 일컬어지는 비인간 존재자들을 얼마든지 예측, 관리, 통제할 수 있다고 믿어왔었는데, 바로 이러한 인간중심적 신념 체계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한계-경험이자 이 세계를 다시 재정의하도록 만드는 계기가 됐다. 인간은 스스로를 지구상에서 가장 고등한 존재이자 예외적 존재로 파악해오면서 자신의 특권적 위상을 의심치 않았으나, 인간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에 의해 산업 구조, 교육 구조 등이 송두리째 급변하는 현실을 목도해야만 했다. 또한, 기후변화 등으로 몇 개월씩 지속되는 산불과 이상기후 현상 등으로 인하여 인간의 지구 거주에도 경고등이 켜졌다. 이와 같은 급변의 양상들은 더 이상 자연과 물질이 인간을 위한 고요한 배경으로만 머물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려준다. 자연과 바이러스라는 비인간 물질성의 예측하기 힘든 행위성이 본격적으로 대두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기존의 패러다임의 유효성이 그 기한을 다했음을 깨닫고 있는 중이다.
이러한 시기에 지금까지 인간 발아래, 고요하게 머물고 있다고 여겨지던 수동적이고 비활성화된 물질들이 어떻게 이러한 행위성으로 인간에게 반격해오기 시작했는가를 새삼 의아해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고 당혹감 혹은 무력감을 느끼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급변의 양상들을 읽어내는 새로운 인식과 존재의 격자 틀이 신유물론(New Materialism)인 것이다. 신유물론은 지구를 포함하여 비인간 물질성들의 행위성-차이를 만들어내는 내재적 힘-을 인정하고 이를 본격적으로 이론화하고자 한다. 이를 통하여 기존의 인간 중심적 사유체계에서는 포착하지 못했던 이 세계의 여러 입체적 면들과 다양하고 복합적인 존재 양상들을 드러내주고자 하는 사상이다. 인간이 다른 비인간 자연과 동물, 지구와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엄청나게 밀접하게 얽혀있음과 동시에, 인간의 존재와 인식에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자연과 물질의 실재성을 인정하는 것이 신유물론이라는 새로운 사상의 함의인 것이다.
특히 기후 위기와 같은 인류세 시대는 신유물론 사상의 필요성을 더욱 부각시킨다. 그렇다면 인류세란 무엇인가? 인류세는 홀로세(Holocene)와 구분되는 새로운 지질시대이자 “고공부터 심해까지” (Purdy, 2015: 2) 지구 공간을 재배열하는 공간학적 균열로 작동하고 있다. ‘인류세’라 함은 이제 인간이 쓰나미와 화산, 지진 등과 같은 지질 물리학적 힘으로 작동하여 지구 시스템에 교란을 가져옴과 동시에, 이러한 지구 시스템의 급변이 다시 인간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을 뜻한다. 인류세의 징후들은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다. 비교적 안정적인 기후 조건을 유지해오던 홀로세에서 벗어나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지표면이 물로 뒤덮이고 이상 기후 증상으로 몇 달째 지속되는 산불로 대기질이 악화되고 있다. 그리고 1945년 원자폭탄 투하 이후 “해양과 호수층, 암석과 빙하 얼음층에서 포착되는 방사능 핵종(radioactive isotope)” (Waters et al., 2015: 47)이 지질층을 구성하는 요소가 되었다. 인류세라는 새로운 지질시대에 진입했음에 대한 주요 표식으로 캐나다 온타리오에 위치한 “크로퍼드 호수 바닥의 진흙은 우리 인간 종이 지구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에 대한 가장 정밀한 기록 중 하나를 담아내고 있으며 이러한 변화들은 핵무기 군사 실험으로 인해 남겨진 방사능 원소, 즉 플로티늄의 증가를 포함” (ScienceNeesExplore, 2023)하고 있다. 즉 이는 “지구 시스템의 대전환이자 티핑 포인트에 대한 설득력 있는 증거”(The Guardian, 2023)이며 인간 활동이 생성해낸 합성 물질의 지문이 지구의 퇴적층에 기록되는 전지구적 사건에 해당한다. 또한 플라스틱과 암석이 화학적으로 결합하여 새로운 종류의 “플라스틱-암석 복합체”(Liuwei et al., 2023)가 나타남으로써 인위적인 물질과 자연적 물질의 경계마저 흐려지고 있다. 이렇게 인위적 물질성과 자연적 물질성이 서로 작용력을 가하며 지구 생태계를 변모시키는 상황에서, 물질의 행위성과 작용력을 인정하는 신유물론 사상은 새로운 시대의 존재와 인식 패러다임으로 부상하고 있다.
브뤼노 라투르, 행위자-연결망 이론
그렇다면 이러한 신유물론 사상 중에서 브뤼노 라투르의 Actor-Network Theory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브뤼노 라투르는 프랑스에서 태어난 철학자이자 사회학자, 인류학자, 과학기술학자로 그를 수식하는 명칭들이 많다. 그 이유는 그가 철학박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민족지학(ethnography)이라는 참여, 관찰의 방법으로 과학기술에 대해 인류학적으로 연구해 1979년 <실험실 생활: 과학적 사실의 사회적 구성>이라는 책으로 펴내기도 했기 때문이다. 민족지학의 참여관찰의 방법은 기존의 전통적 인식론에서의 주체와 객체 간의 객관적 거리두기를 붕괴시켜버리는 방법론이다. 관찰자가 관찰 대상과 함께 살아가며 관찰 대상의 삶의 방식 자체에 흡수되어 관찰 대상에 동화, 체화되는 연구 방법론을 가리킨다. 또한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의 학문적 경계를 뛰어넘는 연구주제와 연구 방법론으로 인하여 그를 수식하는 여러 명칭이 있는 것이다.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은 평평한 존재론(flat ontology)을 지향한다. 평평한 존재론이라 하는 것은 인간만 아니라 이제 비인간 동물, 비인간 사물, 비인간 식물 등에게도 행위성(agency)이라는 차이를 만들어내는 내재적 역량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수평적 존재론이라 할 수 있다. 평평한 존재론은 초월적 항을 전제하지 않는 것으로서 초월적 항이란 다른 것에 영향력을 가하되 자신은 그 어떠한 것에 의해 영향력을 받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초월적 항을 전제하는 기존의 전통적 존재론은 존재의 대사슬의 형태를 가진다. 즉 피라미드 맨 꼭대기에 신이 있고 그 아래에 천사, 그 아래에 신의 모사물인 인간, 그다음에 동물, 식물, 광물 순으로 엄격한 위계가 지어져 있었다. 이러한 수직적 존재론의 위계와 비대칭성을 해체해버리는 것이 평평한 존재론이다. 평평한 존재론에서는 인간만 아니라 비인간도 행위자(actor)이며 이 사회는 인간과 비인간 간의 이질적 집합체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더 이상 행위성이 의도성과 목적성을 가진 인간 주체를 상정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이 비인간 사물, 비인간 동식물, 비인간 기계에게 영향력을 일방적으로 미치는 존재가 아니라, 이제 비인간 물질성들이 인간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변형을 일으키는 내재적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만 아니라 비인간을 동등한 존재로 보는 것을 일반화된 대칭성의 원리라고 한다.
팬데믹 시대에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라는 반 생물체에 의해서 인간의 삶 전체가 송두리째 영향을 받게 될 것이라고 예상한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처럼 비인간 물질성의 영향력과 행위성은 더 이상 부인할 수 없는 것이 되었으며 이것을 그 누구보다 잘 포착한 것이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이다. 인간이 지구의 주인이며 인간만이 다른 여타의 동물과 구분되는 정신적 존재라는 오만을 깨뜨리게 만드는 갖가지 생태 문제와 기후변화 문제들은 이제 인간과 지구, 인간과 동물, 인간과 인공지능 등의 다양한 비인간 물질성들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직조하길 요청하고 있다.
공생적 실재와 사물 민주주의
나아가 인간은 비인간(nonhuman)과 존재론적으로 명확히 구분되는 실체적 단위라기보다는 이미 비인간과의 이질적 복합체에 가깝다. 린 마굴리스에 의하면 “우리 각자는 미생물의 거대한 군집체” (Margulis, 1989, p. 83)로서 우리 몸 자체가 비인간적인 것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인간 개체는 자신의 세포보다 더 많은 미생물을 체내에 포함하고 있으며, 이는 주로 우리 소화 기관의 생물 다양성이 풍부한 미생물 군계 내에서 발견” (Ellis, 2018, p. 140)되고 있다. 이러한 미생물 군계는 인간의 면역체계의 핵심 키이자 인간의 정신적, 신체적 건강 역시 인체 내 미생물 군계의 균형에 달려 있기도 하다. 다시 말해,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라는 단일 종의 매끈한 경계 안에서만 머무르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은 이미 항상 인간 그 이상”(Neimanis, 2017, p. 2)의 것이자 “상호의존적인 다양한 종들의 집합체라는 더 넓은 세계 안에 심겨져 있는”(140) 존재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숱한 비인간 행위자들과의 “공생적 실재(symbiotic real)”(Morton, 2017, 2018, p. 141)의 양상을 띠는 것이다.
브뤼노 라투르는 인간 너머의 민주주의를 “사물들 자체로 확장된 민주주의” (Latour, 1991, p. 194)로 정의한다. 그리고 이를 기획하기 위해서는 representation이라는 용어가 내포한 이원성-정치적 대표성/과학적 표상성-의 분할 구조를 넘어서야 함을 주장한다. 지금껏 오직 인간만이 특정 시민의 몫을 대표할 권리를 위임받아 그들의 목소리를 대신해서 내는 것을 정치의 영역으로 여겨왔었다. 이에 반해 과학자들은 비인간 사물, 비인간 동물 등을 수치와 도표, 이미지 등으로 그저 재현하고 표상하는 것을 사물에 대한 진리를 객관적으로 추출하는 방식으로 인식해 왔었다. 그리하여 과학은 비정치적인 것이자 정치적인 것의 바깥에 위치하는 것으로 구획되었으며, 정치는 인간들만의 의회-인간의 목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인간의 권익만이 고려되는 장-으로 한정되어온 것이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이미 “자연의 이름으로 말하는 그들(자연들)의 대표자/대변자”(197)인 바 있다. 과학자들은 “사물들이 말할 수 있었더라면 그들 스스로 말하였을 바로 그것”(195)을 대변하는 자들, 즉 사물의 목소리를 대신해 울려 퍼지게 하는 자이다. 그렇다면 사물의 목소리를 대변/대리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사물의 실재성을 드러내는 일만 아니라 사물의 권리를 위임받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사물 민주주의에서는 이제 과학자들이 비인간 사물은 물론 비인간 동물, 식물, 기계 등의 목소리를 대표함과 동시에, 그들의 몫과 권리를 요구하는 위임자/대리자가 됨으로써 정치의 영역에 참여함을 뜻한다. 이는 인간만이 아니라 비인간을 포함하는 정치의 조건이 재확립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사물 민주주의는 인간-비인간 집합체의 정치이자 더 이상 자연과 사회,비인간과 인간, 과학과 정치의 경계가 명확하게 구분되고 분리될 수 없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사물 의회의 대표적 예로는 2010년 볼리비아의 어머니 대지법(The Guardian, 2011/04/10)과 2008년 에콰도르의 권리 있는 강(江)헌법 (Akchurin, 2015)이 있으며 이는 강과 산이라는 자연에 법인격을 부여한 사례에 해당한다. 이제 더 이상 인간 개인이나 법인이라는 회사만이 법인격을 가진 주체로서 권리를 지닌 존재가 아니라 자연 역시 인간과 동등한 권리를 지니며 이를 대표/대리하는 자가 있어야 함을 뜻한다. 그리하여 인간에 의한 자연 착취가 인간 이득의 관점에서만 논변, 수호되는 일방성을 막고 비인간 존재의 권리에 대한 고려가 법리적, 정치적으로 반드시 논해지고 셈해져야 할 몫으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나라는 인간 존재는 인간성으로만 말끔하게 이루어진 존재자가 아니다. 나의 신체 속 내장을 비롯하여 많은 신체 기관에는 박테리아 등과 같은 미생물들이 있기에 여러 신체적 균형성이 유지되고 있다. 이미 나라는 존재자는 인간-비인간의 얽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나라는 존재는 인간 타자와의 공존만이 아니라 비인간 타자들인 동물, 식물, 곰팡이, 기계, 인공지능, 사물, 자연, 지구 등과의 연결망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존재이다. 이러한 얽힘의 존재론을 통하여 지금은 인간이 지구의 주인이라는 오만 대신, 지구에서 살아가는 공생자로서 새로운 존재론-인식론-윤리학의 패러다임을 모색해나가야 할 시점이다. 신유물론이라는 새로운 삶의 향한 초대장이 여러분들에게 잘 도달하기를 희망한다.
[창원대신문, 2024. 06. 03]
셋집
이은봉
내 몸에도 세 들어 사는 놈들 있구나
그렇구나 내게도 세 내어줄 집 있구나
발가락에, 사타구니에, 겨드랑이에 빌붙어 마음대로 번식하는 박테리아야 바이러스야 자잘한 세균아
내 몸 이곳저곳을 떠돌며 온갖 질병을 일으키는 녀석아
위장에, 간장에, 허파에 멋대로 터 잡고 불쑥불쑥 증식하는 박테리아야 바이러스야 쪼잔한 병균아
몸 이곳저곳을 떠돌며 각종 질병을 일으키는 자식아
내 피는 탁하다 칙칙하다 더럽다
별별 욕망이 다 녹아 있는 공중변소의 변기처럼 역겹다
수도 없이 피 맛을 보아온 너희들도 잘 알리라
너희들 역시 생명이기는 하잖니
셋돈 한 푼 받지 않고 살 집 내어주었으니 주인치고는 인심 한번 좋구나
셋집 주인의 권리쯤은 제발 좀 인정해 주거라 행여 집주인까지 쫓아낼 생각은 말거라
내 몸에도 세 들어 사는 놈들 있구나
아싸, 내게도 세 내어줄 집 있구나.
―이은봉, 『걸레옷을 입은 구름』, 실천문학사,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