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양심 (요 8:1-11)
1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니라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이 시간에 “위대한 양심”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일찍이 철학자들 중에는 신의 존재를 밝히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감사한 것은 그들이 불신자들이었지만 4대 유신논증이라 해서 여러 가지를 종합해 보았을 때 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이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그들의 논증 중 마지막에 도덕적 논증이 있는데 도덕적 논증이란 인간의 양심을 연구해 볼 때 상대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양심의 기능도 신비하지만 양심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 음성을 듣기 때문입니다. 양심 괴롭히지 마세요. 양심 속에 천국도 있고 지옥도 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의 철학자 장자크 루소는 “양심! 신성한 본능이여, 하늘의 소리요, 지성과 자유의 안내자, 선악에 대한 심판자. 인간 본능의 우수성과 도덕성의 근본. 그대가 존재하지 않으면 단지 규율 없는 모성과 원리 없는 이성의 도움을 빌려서 잘못만을 저지르는 특권을 느낄 뿐이며 그 때는 누구나 짐승일 따름이다.”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예수님께서 양심의 승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위대한 양심은 어떤 것일까요?
1. 위대한 양심은 평안한 양심입니다.
2절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성전에 많은 백성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성전은 사랑의 하나님이 계시니 가장 좋은 곳이면서도 반면 거룩하기에 가장 두려운 곳입니다. 성전은 피 공로 확신 없이는 접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기쁨으로 성전에 모여들었습니다. 참으로 부러운 모습입니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평안한 양심입니다. 교회 나오시면서 평안했습니까? 거리낌이 있었습니까? 일주일 동안 하나님 망각하며 살았을지라도 하나님 앞에 나온 이 시간 진실로 회개하는 마음도 좋지만 먼저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사랑으로 용납하시고 예수님께서 내 죄 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4:16에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했습니다. 아버지 사랑과 보혈을 믿고 약간 뻔뻔할 정도로 평안한 마음으로 나오는 것이 바른 믿음입니다. 그냥 뻔뻔스런 것과 보혈을 믿고 뻔뻔한 것은 다릅니다. 하나님 사랑을 믿고 뻔뻔한 것은 마음이 건강하다는 증거입니다.
뉘우침의 회개는 좋지만 정죄감 속의 회개는 좋지 않습니다. 두려워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래서 롬5:1에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했습니다. 평안한 양심이 위대한 것은 평안한 양심이 하나님을 모시기 때문입니다.
2. 위대한 양심은 바른 양심입니다.
3-6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여기서 바르지 못한 양심을 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양심은 무엇이 옳은지 보다 오로지 예수를 넘어뜨리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러 오신 메시야이신 것 그건 관심 없습니다. 무엇이 진리인지도 관심 없습니다. 이것은 종교지도자로서 양심을 떠난 행동입니다.
나아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 예수를 시험했습니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난감한 질문이었습니다. 음행죄는 유대의 율법으로는 사형이지만, 당시 로마의 현행법으로는 사형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율법으로 대답하면 로마법을 위반했다 할 것이고, 로마법으로 대답하면 율법을 위반했다고 할 것입니다. 혹은 놓아주라 하면 왜 율법을 범하느냐 할 것이고, 율법대로 하라 하면 사랑을 전한다하면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 할 것입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이 다가오는 이 시험각에 걸리면 빠져나갈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양심에 호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몸을 굽히시고 손가락으로 땅에 무언가 쓰셨습니다. 무엇을 쓰셨을까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그 성경을 쓰셨을까요? 아니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 였을까요? 저도 모릅니다. 모두의 관심이 거기 집중 되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리고 다시 몸을 굽혀 무엇인가 땅에 쓰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어른부터 돌을 버리고 하나 둘 사라졌습니다. 양심이 회복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의 양심은 율법이었습니다. "간음하다가 잡혔으니까 율법에 따라 돌에 맞아 죽어야 한다." 그런데 이들의 문제는 자기를 제외한 율법이었습니다. 즉 정죄의 율법이었지 사랑의 율법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을 잘못 본 것입니다. 예수님이 쓰신 글이 무슨 글이었는지 알지 못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지혜를 얻게 하고 양심의 가책을 받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쓰신 일은 두 번이었습니다. 하나는 시내산에서 율법을, 신약에서는 본문의 예수님께서 쓰셨습니다. 글을 땅에 쓰셨지만 알고 보면 그들의 양심에 쓰셨습니다. 이것이 신약입니다. 그래서 고후3:3에 “너희는 -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 판에 쓴 것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바른 양심이 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위대한 사람들은 양심이 남다릅니다. 하나님과 약속을 목숨처럼 지킵니다. 가장 심각한 죄는 모르고 지은 죄라고 합니다. 알고 지은 죄는 커도 알기에 고칠 수가 있지만 죄인 줄 모르면 고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죄를 죄로 알지 못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세상을 살리는 양심은 바른 양심입니다. 하나님은 선을 추구하며 아닐 때 아니오 할 수 있는 위대한 양심을 찾고 계십니다.
3. 위대한 양심은 진리의 양심입니다.
9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여인을 떠나갔습니다. 여인을 치려했던 돌로 자기 가슴을 쳤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위대한 양심으로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딤전1:18-19에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했습니다.
예수 공로로 영원한 속죄를 받았으니 죄를 지어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말은 너무 오버한 주장입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예수의 보혈로 자기를 정죄하지 않더라도 죄는 짓지 않아야 합니다. 뉘우치고 회개해야 합니다. 영원한 속죄를 누리더라도 잘못된 길로 나가면 하나님께서 노하시고 아프게 치십니다. 죄인을 죄 없다 하신 하나님의 은혜 감사해서 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지 방종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4. 위대한 양심은 지켜지는 양심입니다.
행23:1에 바울이 예루살렘 공회에서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했고, 딤전3:9에도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 했습니다. 양심은 자신과 하나님만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심이라는 히브리어가 ‘레브’인데 라틴어로 쉬네이데시스라는 단어로 번역했습니다.이 말은 “알다”(scire)와 “함께”(cor)라는 두 단어가 합해져 만들어진 말로 곁에 있는 양심은 속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비밀스런 양심이지만 끝까지 수호되고 지켜질 때 위대하게 됩니다. 서머나 교회의 감독 폴리캅은 86세의 고령으로 화형을 당할 때 그 일을 담당한 집행관은 그를 살려보기 위해 ‘감독님, 비참하게 죽을 게 뭐 있습니까? 예수 안 믿겠다고 거짓말 한마디만 하십시오. 그러면 놓아주겠습니다.’ 그러나 폴리캅은 ‘주님은 86년 동안 나에게 한 번도 거짓말을 하신 적이 없는데, 내가 어찌 구차하게 목숨을 더 부지하겠다고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끝까지 주님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양심이 우리를 위대하게 합니다. 하나님과 약속한 기도시간을 지키기 위해 사자굴에 들어가기까지 믿음을 지킨 다니엘의 그 신앙양심도 그래서 위대합니다. 위대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 위대한 일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이 시간도 양심의 소리는 들려옵니다. “죄 짓지 말라. 하나님 잘 섬겨라. 믿어라. 감사하라. 기뻐하라. 용서하라. 사명을 다하라” 이 음성이 크면 클수록 바르면 바를 수록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우리 모두 뭇 사람의 양심을 고쳐주신 예수님의 은혜로 더욱 온전하고 위대한 양심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