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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하느님의 종 47위] 야뽁 강가에서 하느님의 종 지 타대오(1819-1869)
야곱은 하느님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챈 뒤 줄곧 피해 왔던 형 에사우를 만나기 전, 그는 야뽁 강가에 홀로 남아 밤을 지새우며 하느님과 씨름합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지낸 지난 20년의 처가살이 동안, 그는 소유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어 내며 살아왔습니다. 첫눈에 사랑에 빠진 라헬을 얻었고, 열두 아들의 아버지가 되었으며, 수많은 가축을 거느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하느님을 붙들고 축복을 청합니다. 모든 것을 건너보낸 뒤 홀로 남은 강가의 밤, 야곱은 벌거벗은 영혼의 목마름을 마주합니다.
밤새 이어진 씨름 끝에 하느님께서 그의 이름을 묻자 그는 “저는 야곱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형의 뒤꿈치를 붙잡은 자’, ‘속이는 자’라는 뜻을 지닌 그의 이름은 그가 어떤 방식으로 살아왔는지를 드러내는 고백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의 이름을 더 이상 ‘야곱’이 아닌 ‘이스라엘’로 불러주십니다. 이제 그는 자기 힘으로 움켜쥐며 얻어 내는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께 매달린 사람이 됩니다. 동이 트는 새벽, 세속의 가치가 아닌 하느님께 사로잡힌 야곱은 강 건너에서 기다리는 형 에사우를 향해 두려움 없이 나아갑니다.
유서 깊은 교우촌이었던 수원 양간 용수말 출신의 하느님의 종 지 타대오는 스무 살 무렵, 평택 현덕면 인광리에 살던 열심한 교우이자 대부호의 무남독녀 김 바르바라와 혼인하게 됩니다. 그는 데릴사위로 처가살이를 하며, 타고난 부지런함과 뛰어난 수완으로 처가의 재산을 몇 배로 늘렸고, 마을 사람들에게도 후하게 베풀어 누구에게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넉넉한 재산은 탐욕스러운 포교와 관리들의 수탈 대상이 되었고, 그는 1866년 평택 포교에게 붙잡혀 옥에 갇히게 됩니다. 아내와 자식들에 대한 걱정 때문에 그는 이내 배교하였지만, 그 뒤로 깊은 번민 속에서 자주 통회의 기도를 바쳤다고 합니다. 1869년 어느 날, 마당에서 멍석을 만들고 있던 타대오 앞에 다시 포졸들이 들이닥칩니다. 그는 만들던 멍석 위에 무릎 꿇은 채 큰 소리로 「사도신경」을 외우며 신앙을 고백합니다. 호송되던 길에 따라온 아내와 주막에서 마지막 식사를 하며, 그는 가족을 위해 묻어 둔 금화를 필요할 때 꺼내 쓰라는 말을 남기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나는 세속을 끊었다.” 1869년 음력 5월 23일, 지 타대오는 수원 북문 밖 공터에서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순교합니다.
우리는 자주 더 많이 이루고 더 많이 가지고, 더 인정 받아야 비로소 우리 삶이 의미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세상과 씨름하여 얻어낸 수많은 승리도 하느님과 씨름하지 않는 영혼에게는 사막의 신기루일 뿐입니다. 세속적으로 많은 것을 이루었던 하느님의 종 지 타대오는 통회의 밤을 지나 자신이 붙들고 있던 세속의 미련을 내려놓았습니다. “이제 나는 세속을 끊었다.”라는 그의 고백은 성취와 소유로 자신을 증명하려는 삶을 멈추고,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맡긴다는 믿음의 선언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종 지 타대오의 전구가 우리의 메마른 영혼을 복음의 물가로 이끌어, 하느님 안에서만 찾을 수 있는 참된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종 지 타대오
저희가 성취와 소유로
자신을 증명하려 하지 않고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게 하소서.
[K톨릭: 영화] 가족이라는 미련
- 영화 <남매의 여름밤>, 2020, 윤단비 감독 -
“내 마음이 가는 그곳에 너무나도 그리운 사람….” 흔들리는 봉고차 안에서 장현의 애절한 목소리가 흘러나옵니다. 옥주 남매가 낯선 할아버지 집으로 향하는 길은 여행보다 유배에 가까웠습니다. 정든 반지하 집을 떠나면서 이미 그리움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도착한 이층 양옥집에는 할아버지의 여름이 있었고, 아버지 남매의 여름이 있었고, 이제 옥주 남매의 여름이 포개집니다. 갈 곳 없는 가족들이 모여든 이 집에는 이야기가 남은 자리마다 그리움이 자랍니다. 형편이 어려운 아버지, 집을 나온 고모, 기력이 쇠해가는 할아버지. 효율로만 따지면 이미 흩어져야 할 것 같은 가족입니다.
영화에는 특별한 사건이 없습니다. 함께 밥을 먹고, 사소한 일로 다투고, 텃밭을 돌봅니다. 그런 평범한 시간 속에서 가족은 서로에게 스며듭니다. 어쩌면 가족이란 함께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함께 시간을 견뎌내는 사람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밤중, 낡은 전축에서 세 번이나 반복되는 노래 ‘미련’이 흘러나옵니다. 무표정했던 할아버지가 노래에 마음을 싣고 미소를 짓습니다. 계단 구석에 앉은 옥주도 말없이 그 노래를 듣습니다. 할아버지의 오래된 그리움과 옥주의 풋풋한 그리움이 베틀의 날과 씨처럼 엮입니다.
고모는 그것이 기억인 줄 알았는데, 어느새 꿈이 되어버렸다고 말합니다. 옥주가 묻습니다. “아직도 할머니가 보고 싶어?” 그 물음은 결국 자신을 향한 것입니다. 인정하면 더 아플까 봐 애써 밀어내는 그리움.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품는 일, 그것은 사랑이 남긴 가장 깊은 흔적일 것입니다. 누구의 삶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가족은 함께 그 시간을 살아냅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즉시 얻을 수 있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기다림은 비효율이 되고 관계는 쉽게 정리되고 단절됩니다. 하지만 가족은 참 신비롭습니다. 떠나도 끝나지 않고, 잊은 줄 알았는데 문득 그리워집니다. 그래서 가족은 그렇게, 미련으로 이어지는 관계입니다.
미련은 버려야 할 감정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를 오래 그리워하고, 함께한 시간을 함부로 잊지 않는 일. 그것은 미련함이 아니라 사랑의 다른 이름입니다.
신앙 또한 기다림으로 이어지는 관계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향해 마음을 거두지 않고, 응답이 더디어도 그분을 향한 자리를 남겨 두는 일. 기도는 그 자리를 오래 비워 두는 사랑입니다.
〈남매의 여름밤〉은 가족이라는 미련을 끝내 내려놓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기도란 어쩌면 하느님을 향한 가장 오래된 미련입니다. 사랑하기에 기다리고, 기다리기에 그리워하는 것. 그 미련한 사랑이 결국 우리를 살게 합니다.
[성미술 산책] 미켈란젤로 <피에타>
예수 안은 니코데모에 자신 투영
- 미켈란젤로 <피에타>. 1547~1555년. H.226cm. 피렌체 두오모 미술관. 이탈리아
머리에 두건을 쓴 나이 지긋한 턱수염의 남성이 더 이상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남성을 조심스레 부축하고, 양옆에는 두 명의 여성이 있습니다. 여기 ‘S자’로 힘없이 축 늘어진 남성은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 그리스도, 우측에서 죽은 아들을 떠받는 성모 그리고 좌측에 자그마한 체구를 한 젊은 여성은 마리아 막달레나로 추정됩니다.
그렇다면 맨 뒤에 두건을 쓴 남성의 정체가 궁금합니다. 아리마테아 사람 요셉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니코데모’로 알려져 있습니다. 바리사이파 그리고 유다 최고 의회인 산헤드린의 의원으로 학식 있는 종교 지도자지요. 그는 아리마테아 사람 요셉과 함께 그리스도 매장을 도운 자입니다.
서구 중세 시대부터 널리 다뤄진 ‘자비’, ‘연민’의 뜻을 가진 <피에타(pietà)>상,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성 베드로 대성당의 <피에타>(1498~1499년)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전성기의 거장 미켈란젤로가 청년 때 만든 작품으로, 성모가 무릎 위에 아들 예수를 안고 비통해하는 장면을 절제되면서도 이상적인 모습으로 표현한 걸작입니다.
한편 지금 소개하는 <피에타>는 피렌체 두오모 대성당 뒤에 위치한 ‘두오모 미술관’ 소장품입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피에타>를 제작하고 무려 50여 년 후 미켈란젤로가 70대 초반에서 80세까지 7~8년간 혼신을 다해 제작했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모습이 이상합니다. 상반신이 하반신보다 훨씬 비대하고 양팔이 너무 길게 표현된 반면 하반신의 다리는 너무 앙상한 것입니다. 완벽한 기술적 표현력을 가진 미켈란젤로가 인체 비례를 무시한 과장된 표현을 한 것은 이제 명줄이 끊긴 상태의 예수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지요.
더군다나 성모의 모습이 너무 거칠어 이목구비가 잘 보이지도 않는 것은 미완성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모든 것의 근원, 바탕임을 드러냅니다. 거칠고 모든 것을 품는 대지입니다.
그리고 여기 숨은 감동은 바로 니코데모에 있는데, 바로 미켈란젤로 자신의 모습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깊은 신심의 소유자인 미켈란젤로는 손수 예수의 차디찬 시신을 묻어 드리고픈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자신이 묻힐 성당의 제단 발치에 설치하기 위해 제작한 이 <피에타>는 그의 절절한 신앙고백입니다.
“내가 사랑하고 찬미하는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증오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내가 죽기 전에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성미술 산책] 미켈란젤로 <아담의 창조>
인류의 역사 시작되는 극적인 순간
- 미켈란젤로 <아담의 창조>. 1508~1512년. ‘천지창조’ 천정화 중. 프레스코화. 13.41x40.93m, 로마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 시스티나 경당, 이탈리아
오늘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전성기 거장으로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의 <피에타>를 만든,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의 또 다른 불후의 명작 <아담의 창조>를 살펴봅니다.
그런데 먼저, 최고의 조각가로 명성이 자자했던 그가 어떻게 성 베드로 대성당 시스티나 경당의 천장화 작업을 맡게 된 걸까요?
여기에는 놀라운 사연이 있습니다. 바로 바티칸 궁전과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을 주도한 건축가 도나토 브라만테(Donato Bramante, 1444~1514)가 율리오 2세 교황(Julius II, 재위 1503~1513)에게 시스티나 천장화 작업의 적임자로 미켈란젤로를 추천했는데, 이는 회화 작업이 익숙하지 않은 미켈란젤로를 골탕 먹이기 위한 불순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부담스러운 제안을 수락한 미켈란젤로는 1508년부터 1512년까지 무려 4년간 전념해 최고의 걸작을 탄생시켰습니다. 길이 40m, 폭이 13m에 달하는 거대한 천장은 구약성경의 ‘천지창조’ 외에 예언자들과 무녀 등의 장면이 역동적으로 펼쳐지는 웅장한 인류 드라마의 절정을 보여 줍니다.
천장 중앙에는 총 10편, 즉 <빛과 어둠을 가르다>, <태양과 달의 창조>, <물을 갈라 뭍이 드러나게 하다>, <아담의 창조>, <이브의 창조>, <인류의 타락>과 <에덴동산에서의 추방>, <노아의 제물>, <대홍수>, <노아의 만취> 등 천지창조 장면이 차례로 펼쳐집니다.
당시 육체에서 벗어나 정신으로의 초월을 이상으로 여긴 신플라톤주의에 심취한 그의 신념이 적극 적용된 걸작으로,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아담의 창조>입니다.
하느님은 팔을 뻗어 그의 형상대로 빚은 최초의 인간 아담에게 생명의 숨결을 불어 넣습니다. 거센 바람에 휘날리는 분홍색의 커다란 망토 안에는 청년 모습의 천사들이 에워싸고, 근육질의 위엄 있는 모습의 하느님과 그가 빚은 아담은 이상적인 아름다움과 기품을 지닌 모습입니다.
특히 이 장면이 유명한 것은 하느님의 손가락 끝이 아담의 손끝에 닿기 직전의 찰나를 포착해 극대화된 긴장감에 있습니다. 인류 역사의 대장정이 시작되는 극적인 순간을 이같이 절묘하게 포착해 내는 미켈란젤로의 천재성이 돋보이는 순간입니다.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놀랍고 파란만장한 세계 창조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성미술 산책] 레오나르도 다 빈치 <성녀 안나와 성모자>
정적 분위기 '성스러운 대화'의 순간
- 레오나르도 다빈치 <성녀 안나와 성모자>, 1501~1513년, 목판에 유채, 168x130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프랑스
이 작품은 당시 60대 초반이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으로 물 흐르는 듯 생기 넘치고 절제된 움직임과 고상하고 우아한 색채 그리고 무한대로 펼쳐지는 원경의 자연 풍광 등 그의 원숙한 화풍이 고스란히 담긴 걸작입니다.
그는 르네상스의 과학적인 일점소실원근법을 넘어 ‘시각적 효능은 어느 한 지점으로 귀착되지 않고 눈의 동공 전체로 확산된다’는 광학적 연구에 근거한 ‘대기원근법(atmospheric perspective)’과 사물의 윤곽선을 ‘연기처럼(sfumato)’ 흐릿하고 몽환적으로 표현하는 화풍을 창안했는데, 이는 바로 <모나리자>의 미소가 신비롭게 느껴지는 이유입니다.
여기서는 성모자의 모친 성녀 안나도 함께 등장하는데 모녀간 나이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이들이 세상의 시간 개념을 초월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맨 뒤에는 가장 크게 표현된 안나가 있고 무릎 위에 마리아가 앉아 있는데, 우리 시선은 사랑 넘치는 눈으로 마리아를 내려다보는 성녀 안나, 근심 어린 표정으로 아기 예수를 바라보는 마리아의 시선과 그를 향해 뻗은 두 팔 그리고 천진하게 성모를 올려다보며 흰 양에게 팔을 뻗는 아기 예수에게로 이어집니다.여기 아들이 맞닥뜨릴 고통의 운명을 막으려는 듯 희생의 상징인 양 위에 올라타려는 예수를 말리려는 성모의 간절함이 전해져 애처롭습니다. 또한 안나의 몸은 좌측으로 움직이는 반면 시선은 예수에게로 향하고, 마리아의 몸과 시선은 다시 우측의 예수에게로 그리고 예수와 양은 고개를 돌려 마리아를 바라보는 매우 복잡하고 역동적인 구도로 표현되었는데도 안정감이 느껴지는 것은 인물들이 균형 잡힌 피라미드 구도로 배치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매우 정적이고 고요한 분위기에서 동작과 시선을 통해 드러나는 복잡 미묘하고 신비로운 교감, 바로 ‘성스러운 대화(Sacra Conversazione)’가 오가는 순간입니다.
자연과 인체를 같은 맥락에서 바라본 레오나르도. 그에게 땅은 인간의 ‘살’, 산맥은 ‘골격’ 그리고 강물은 ‘피’입니다. 여기 원경의 푸르스름 어렴풋한 자연풍광과 전경의 인물들이 살아 숨 쉬는 듯 느껴지는 것은 이 모두 대자연 속 신비로운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한의 자연 속 성가족은 동양의 장자(莊子)가 일컫는 물아일체(物我一體), 즉 ‘바깥 사물과 나, 객관과 주관 또는 물질계와 정신계가 어우러져 한 몸으로 이루어진 그것’을 연상시킵니다. 이같이 오묘한 조화를 이루며 그 안에서 일치를 이루는 것, 이것이 대자연의 신비, 바로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성미술 산책] 레오나르도 다빈치 <성모영보>
백합 든 가브리엘 대천사와 마리아
- 레오나르도 다빈치 <성모영보>, 1472년경, 목판에 템페라, 유채, 98x217cm,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이탈리아
수평으로 긴 화면이 안정감을 주는 평화로운 그림입니다. 멀리 중앙에는 푸르스름 어렴풋이 보이는 뾰족한 산이 무한의 공간을 열어 주고, 전경에는 작은 꽃들이 만발한 꽃밭이 정교하게 짠 페르시안 카펫과 같이 펼쳐져 있습니다.
우측에는 르네상스 양식의 웅장한 저택이 있는데, 열린 문틈으로 붉은 침대보가 씌워진 친밀한 공간이 들여다보입니다. 지붕 있는 복도 로지아(loggia)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탁자가 있고, 마리아는 성경 위에 살포시 손가락을 짚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여 집중하고 있는 순간, 천상에서 가브리엘 대천사가 찾아왔습니다. 붉은 드레스에 흰 상의 그리고 카키색 망토를 휘날리는 고상하고 어여쁜 천사는 날개를 채 접지도 않고, 손에는 성모의 순결을 상징하는 백합 한 송이를 든 모습입니다.
마리아의 살짝 들어 올린 왼손에서는 예측하지 못한 방문과 전해 주는 소식에 놀라워하는 심적 동요가 전해집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에덴동산을 연상시키는 정원은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화면 중경에 낮은 벽이 있고 그 뒤로 각양각색의 모양을 한 검은 실루엣의 나무들이 마치 앞의 마리아를 보호하는 병풍같이 줄지어 서 있습니다.
이는 중세 시대부터 널리 알려진 성모의 ‘무염시태’ 신비를 의미하는 ‘닫힌 정원(hortus conclusus)’ 비유로 “닫힌 정원은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아가 4,12 참조)에서 유래되었고, 주로 장미 정원에 있는 성모자의 모습으로 그려졌습니다.
아직 20세인 레오나르도의 초기작이어서 머리 주위의 후광을 표현했는데, 점차 과학적인 시선이 지배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후광은 등장하지 않게 됩니다.
‘성모영보’의 신비로운 순간, 천사와 마리아 간 주고받은 깊은 영적 대화의 순간을 청년 화가가 이리도 감동적으로 포착하다니 그저 놀랍기만 합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전성기를 대표하는 3대 거장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빈치 중에서도 미술, 과학, 식물학, 건축, 해부학 등의 분야를 자유롭게 넘나든 진정한 천재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의 섬세하고 고전적인 매력이 두드러지는 걸작입니다.
크나큰 영광이지만 한 여인의 몸으로 감당하기 버거운 십자가의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마리아. 이제 구약의 아담과 이브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신약의 아담과 이브, 구원의 희망을 알립니다. “거룩하신 성령님이여, 부족한 제 마음에도 임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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