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일주일동안 제주도에 머물며 관찰하듯 바라본 시간들의 기록입니다. 조금 느리고 불편함을 자처한 이 여행에선 약간의 호기심과 운, 그리고 체력과 용기가 필요했어요.
:: 여행일: 2019년 9월 말 ::
오랜만이야, 제주
늦은 오후, 공항 밖으로 나오니 이국적인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푸른 하늘과 야자수가 반겨 주던 기억 속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어렴풋이 바다가 보였고, 이대로 숙소로 가서 일정을 끝내기가 아쉬워 본능적으로 바다를 향해 걸어갔어요. 공항 옆 마을을 걸으니 머리 위로 끊임없이 이륙하는 비행기들을 보게 됩니다. 이곳에 여행 왔음에도 자꾸만 또 다른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집니다.

공항 옆 마을을 걸으면 계속해서 보게 되는 풍경이지요.

마을 끝에 이르니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고, 한적하고 여유로운 풍경 속에 있으니 그제야 낯선 곳에 와 있음을 실감했습니다.

빨간 등대가 보이는 이곳은 용담포구입니다.

시원하게 뻗은 용담해안도로를 따라 걸으며 북쪽 바다를 원없이 볼 수 있습니다. 이 길은 올레17코스에 해당되며 수근연대(횃불과 연기를 이용하여 정치·군사적으로 급한 소식을 전하던 통신수단), 용두암, 용연다리, 관덕정, 이호테우해변, 도두봉 등 소소하지만 아름다운 풍경들을 만나게 됩니다.

제법 어두워진 하늘과 바다를 한 번 더 눈에 담고 숙소로 갔습니다. 세 번째 방문이자, 처음으로 홀로 찾은 제주에서 어떤 여행을 하게 될지 사뭇 기대가 됩니다.

하루 동안 있었던 일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날씨부터 확인했습니다. 기대와 달리 비가 내리고 있었고, 심지어 18호 태풍 ‘미탁’이 북상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니 허탈한 웃음이 나왔습니다. 어찌 됐든 보고 싶은 풍경들을 보러 숙소를 나섰습니다. 렌터카로만 다녔던 제주에서 버스를 타고 잘 다닐 수 있을지 조금 걱정이 되었고, 특히 중산간 지대에 위치한 곳을 다닐 예정이라 초행길이나 다름없는 저에겐 약간의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지도 앱을 켜서 출발지와 도착지를 입력해 가장 먼저 오는 버스를 탔습니다. 경로에 대한 여러 옵션과 정류장 위치, 버스 도착 예정 시간까지 알려주는 똑똑한 앱을 이용해 보니 세상이 참 편리해졌음을 새삼 느끼게 되네요.
새별오름으로 가고 있는 중입니다. 예쁜 이름 때문일까요? 제주의 수많은 오름 중에서 이곳을 첫 목적지로 정했습니다.
① 나의 첫 오름, 새별오름
새별오름과 동떨어진 곳에 덩그러니 내려졌습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라 당황하기보다 ‘아, 이런 경우가 많을 거고, 이번 여행에서 많이 걷겠구나.’ 하고 빠르게 현실을 받아들였어요. 화전마을 정류장에서 도로 옆으로 난 보도를 따라 15분가량 걸어갔습니다. 입구에 이르니 황금빛 아름다운 풍광과 유려한 곡선의 오름이 보입니다.
■ 주소: 제주 제주시 애월읍 봉성리 산59-8
■ 해발 519.3m, 높이 119m 인 기생화산으로 저녁하늘에 샛별과 같이 외롭게 서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오래전부터 가축을 방목하였으며 겨울이면 들불을 놓았다고 합니다.(묵은 풀과 해충을 없애기 위함) 이러한 전통을 계승하여 정월대보름을 전후하여 제주도를 대표하는 축제인 들불축제가 열립니다. (참고: 두산백과, 비짓제주)


경사가 완만한 길을 걷다가 갑작스레 아주 가파른 등성이를 마주하게 됩니다. 중간에서 숨을 고르고 다시 힘을 내서 오르면 멋진 풍경을 만날 수 있습니다. 부분만 보아도 예쁘고, 전체를 보면 더 아름다운 그런 곳이었어요.


여름과 가을 사이,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다양한 제주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무덤 주변에 사각형태로 돌담을 두른 제주 특유의 묘지가 보입니다.

하늘도 파랗고, 햇살도 예쁘며 기온도 적당했습니다. 특히 비가 내려 별 기대가 없던 날, 갑자기 이렇게 완벽한 날씨를 마주하게 되면 그저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오늘은 어디든 다 갈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샘솟네요.

② 목장 가는 길
오름 주변을 한바퀴 돌아보고 내려와도 여전히 이른 아침이었습니다. ‘이제 어디가지?’ 다음 목적지들을 향하는 버스를 검색해 보지만 어디에도 쉽게 갈 수가 없었습니다. 중산간도로를 지나는 버스들의 배차 간격이 길고 다니는 횟수도 적어 몇 시간동안 마냥 기다릴 순 없었어요. 가까운 거리에 목장이 있어 차라리 걷기로 했습니다. 첫 날부터 이 여행의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했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어요. 모처럼 휴가 와서 시간도 있고, 체력도 좋으며,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니까요. 이런 길을 걸어볼 기회가 이 때 아니면 언제 또 있을까요?

누군가에겐 익숙한 풍경이라도, 제겐 보석 같은 풍경이었습니다. 저 멀리 이달오름과 새별오름이 보이네요.

차들이 이 주변에 멈춰 있길래 뭐가 있나 싶어 다가갔습니다. 아! 이것이 나홀로 나무군요! 저 멀리 보이는 새별오름과 나란히 서 있어서 이름 붙여진 ‘새별오름 나홀로 나무’입니다. 의도치 않게 비경을 발견할 때면 그 기쁨이 상당히 큽니다.

③ 성이시돌 목장
여러 목장들을 지나쳐 성이시돌 목장에 도착했습니다.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풍경을 지닌 아름다운 목장이었어요. 이곳에서 단연 눈에 뛰는 건물은 ‘테쉬폰’이 아닐까요? 테쉬폰에 대해선 이시돌 목장에서 안내하는 내용을 발췌해 봅니다.
이라크 바그다드 가까운 곳에 Cteshphon이라 불리우는 곳이 있는데 이곳에서 이 건축물의 기원을 찾을 수 있기에 이러한 양식의 건물을 테쉬폰(Cteshphon)이라 합니다. 그곳에는 지금도 약 2000년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유사한 형태의 건물들을 볼 수 있답니다. 그 오랜 세월 거센 태풍과 지진으로부터 어떻게 온전히 그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요? 그 비밀은 곡선형으로 연결된 쇠사슬형태의 구조에 있답니다. 이곳 이시돌에는 1961년도에 처음 목장에서 숙소로 사용하기 위해 건축되었고 이후 조금 작은 크기로 제작해 돈사로도 사용을 했으며, 1963년에는 사료공장, 1965년에는 협재성당을 건축하는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었지요. 협재성당은 아직 그대로 사용하고 있답니다. 테쉬폰 주택은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이시돌에만 있는 귀중한 보물이랍니다. - 성이시돌 목장 <테쉬폰>



어디서나 제주 특유의 밭담을 볼 수 있습니다. '밭담'은 돌을 이용해 밭의 경계를 구분하고 바람과 방목하는 말과 소로부터 농작물을 보호하는 기능을 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특색 있는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곳을 여행하는 일이 무척 행복했어요.

성이시돌 목장에서 금악리를 거쳐 저지예술인마을을 향했습니다. 한강에서 종종 운동을 하고 있어 하루에 얼만큼 걷는 일은 저에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갑작스러운 더위와 강한 햇볕에 조금씩 지쳐갔습니다. 숙소에 두고 온 버킷햇과 선크림이 간절했습니다. 제주도는 변덕스러운 날씨와 그늘이 많지 않아 땡볕이나 자연에 그대로 노출되기 쉬우니 어느정도 준비를 갖출 필요가 있습니다. 걷는 것도 물론 좋았지만 시간과 장소에 얽매여야 하는 자유롭지 못한 여행이 아쉬웠습니다.
■ 버스를 이용해 중산간지역을 여행하는 사람들을 위한 작은 TIP!
일주일동안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습니다. 제주도 구석구석 자유롭게 다니고 싶은 여행자는 확실히 렌터카로 다니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제주도의 대중교통(버스)은 매우 잘 되어 있고, 주요 장소를 여행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습니다. 다만, 중산간지대에 위치한 일부 지역은 버스로 다니기엔 조금 불편할 수가 있는데 아무래도 버스 배차 간격과 운행횟수가 적기 때문에 이를 고려해서 계획을 세우는 것이 좋습니다. 도로 한복판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정류장도 있고, 사람들도 잘 다니지 않아 처음이거나 혼자 왔을 때 당황스러울 수가 있어요. 해가 빨리 지는 계절이나 궂은 날씨에는 늦게 않게 중산간지역을 빠져나가는 것이 좋습니다. 외진 정류장에서 당황하지 말고, 일단 목적지 쪽으로 향하는 아무 버스를 타서 규모가 큰 마을이나 환승 정류장 같은 곳으로 가는 것이 좋아요. (환승 정류장은 노선이 다양하고 버스가 꽤 많이 다니는 편) 그리고 체력과 여유로운 마음, 약간의 모험심과 용기를 가지고 여행을 하면 더욱 좋지요. 추가로 버스 여행시 스마트폰 지도 앱의 의존도가 꽤 큰 편입니다.
④ 아름다운 미술관, 제주도립 김창열 미술관
김창열 미술관을 방문하기 위해서 찾은 저지예술인마을.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도착한 이 마을은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습니다. 한여름 같이 이글거리는 열기 속에 있다가 시원한 분수가 보이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가장 먼저 미술관 건축물에 매료되었다가 곧 김창열 화백의 작품에 빠져들었어요. 잔잔하지만 큰 힘이 느껴지는 그림들 앞에 서서 한참동안 바라보았습니다. 回[돌아올 회]를 형상화하고 있는 건축물과 물방울을 소재로 삼은 작품. 작품과 건축과 자연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 주소: 제주 제주시 한림읍 월림리 115-173
■ 운영시간: 평일 09:00 - 18:00 (매주 월요일, 설날, 추석, 1월1일 휴관) / * 2020년 6월 현재, 사전예약제 운영
■ http://kimtschang-yeul.jeju.go.kr/







⑤ 월령선인장군락[천연기념물 제429호]
미술관을 돌아보고 나오니 이제 그만 이 지역을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한참 기다렸다가 겨우 오는 버스 아무거나 타고 일단 이 지역을 빠져나왔습니다. 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가니 왠지 안심이 되었어요. 괜찮은 척해도 저도 모르게 긴장을 하고 있었나 봅니다. 해안일주로를 달리는 버스 안에서 여유를 찾고 나니 반나절 동안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고생스러운 여행이었지만 그만큼 내가 모르던 제주도와 마을의 특색 있는 모습들을 볼 수 있어서 소중한 시간들이었습니다. 가을 햇빛에 피부가 익어가는 줄 모르고 꽤 오래 땡볕에 노출되어 있었더니 피부가 따끔거리기 시작했어요. 이만 숙소로 가야겠다고 생각하던 중, 창 밖으로 선인장들이 산발적으로 자라나 있는 독특한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하차 벨을 누르고 내렸습니다. 이렇게 많은 선인장들은 처음 봤어요. 푸른 바다를 곁에 두고 바위틈으로 자라난 작은 초록 생명들이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 위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월령리


⑥ 바닷가 마을
돌담과 낮고, 예쁜 색 지붕을 가진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을 지나 바다로 갔습니다.


비양도가 보입니다.

비양도가 보이는 이곳은 말이 필요없는 아름다운 바다, 금능해변입니다.

얕고 맑은 바닷물 위로 드러난 돌들이 마치 작은 섬들 같았어요.

금능 해변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협재 해수욕장이 나옵니다. 이곳 역시 아름다운 바다지요. 어느덧 해가 질 시간이네요. 바다 앞 카페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예쁜 노을을 보러 나왔습니다. 선명하고 붉은 동그라미가 구름 속에 들어갈 때까지 하염없이 바라보았어요. 왠지 눈물 날 것만 같은 풍경입니다. 많은 것들이 마음 속에 들어온 제주에서의 둘째 날. 아름다운 노을과 함께 조금 고단한 하루를 마무리해 봅니다. 내일은 무슨 일이 있을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