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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초 대구 동구지역에서는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방불케하는 의문의 살인이 잇따라 발생했다. 40일 남짓한 기간 동안 동구 신암동 일대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은 무려 8건. 피해자 9명은 하나같이 예리한 흉기에 찔려 처참하게 숨진 채 발견됐다. 며칠 간격으로 터지는 살인 소식에 주민들은 공포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수사결과 이 중 4건의 살인사건은 동일범에 의한 사건으로 밝혀졌는데 놀랍게도 범인은 입대를 앞둔 20대 청년이었다. 이번에 김원배 경찰청 수사연구관이 전하는 잊을 수 없는 사건은 12년 전 대구를 발칵 뒤집어놨던 일명 ‘대구 동구 연쇄살인사건’이다. 특히 범인은 ‘아무 이유 없이’ ‘아무 상관없는’ 시민 4명을 죽였는데 이 중 3명은 한 시간 안에 연달아 살해한 것으로 드러나 더욱 큰 충격을 주었다.
1997년 2월 10일 오전 10시 30분경. 대구광역시 동구 율하동의 한 가정집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남편이 출근한 뒤 어린 아들(4)과 집을 지키고 있던 주부 김순옥 씨(가명·31)가 예리한 흉기에 난자당한 채 발견된 것이다. 경찰이 도착했을 때 김 씨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고 김 씨의 어린 아들도 범인이 휘두른 흉기에 목을 찔려 중태였다. 없어진 것은 현금 7만 원.
집안 곳곳에 뒤진 흔적이 있었기 때문에 경찰은 전형적인 강도살인사건으로 추정하고 수사에 나섰다. 범인이 남긴 것은 평균 남성 사이즈의 발자국 뿐이었고 목격자도 없어 수사는 난항에 부딪혔다.
그리고 열흘 뒤인 2월 20일 늦은 밤 동구 신암동에서 또다시 끔찍한 사건이 벌어진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밤 11시 50분경 신암 5동에 있는 한 분식집에 20대 초반의 청년이 들어왔다. 무슨 이유에선지 청년은 무척 흥분해 있었다. 청년은 식당을 지키고 있던 여고생 이민선 양(가명·18)에게 ‘주문받으라’고 말했다. 마침 가게 문을 닫을 시간이었기에 이 양은 ‘영업 끝났는데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청년은 신경질적으로 테이블을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험한 욕설을 내뱉으며 흉기를 꺼내들고 이 양에게 다가왔다. 이 양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청년의 행동이 심상치 않다고 느낀 이 양은 재빨리 가게 안에 있는 방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청년은 방에까지 이 양을 쫓아 들어가 마구 흉기를 휘두르고 달아났다.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잠시 후 가게에 돌아온 이 양의 할머니는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는 손녀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목 부분에 치명상을 입은 이 양은 구급차에 실려 인근 병원으로 후송됐으나 사망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약 40분 뒤 또 한 건의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밤 12시 30분경 신암동의 한 교회 사택입구에서 60대 여성이 피살된 채 발견된 것이다. 새벽기도를 가기 위해 집을 나섰던 김말자 씨(가명·64)였다. 김 씨는 온몸이 흉기에 찔린 채 쓰러져 있었는데 사택 관리인이 발견했을 때는 이미 사망한 후였다.
신암동 일대에서 잇달아 발생한 의문의 연쇄살인사건에 경찰은 비상이 걸렸다. 세 사건은 주부와 여고생, 60대 노인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 범행이었지만 피해자가 모두 여성이라는 점, 성폭행은 없었다는 점, 모두 예리한 흉기를 사용했다는 점, 수차례 흉기로 찔러 잔혹하게 살해했다는 점 등에서 공통점이 있었다. 그러나 범인의 윤곽이나 범행동기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피해액수가 적은 데다가 금품 피해가 없는 피살자도 있었기 때문에 단순히 돈을 노린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기에도 석연찮은 점이 있었다.
경찰은 목격자를 찾는 동시에 그 일대 동일전과자 등을 상대로 탐문 수사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게 웬일인가. 다음날 밤 신암동에서 또다시 살인사건 신고가 접수된다. 이번 피해자는 남자였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22일 밤 10시 15분쯤, 신암 5동의 한 가정집에서 사체가 발견됐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피살자는 그 집에 세들어 살던 남자미용사 김석원 씨(가명·27)였다. 김 씨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김 씨가 일하던 미용실 원장이었다. 그는 ‘20일부터 김 씨가 연락도 없이 출근하지 않아서 집에 찾아와보니 피투성이 상태로 죽어있었다’고 진술했다. 혈액응고나 사체 상태를 분석한 결과 김 씨는 이미 결근 첫날인 20일에 사망한 것으로 드러났다. 충격적인 것은 김 씨가 온몸은 물론 두 눈까지 상처를 입은 처참한 상태였다는 사실이었다.”
이 일대에서만 무려 4번째 살인이었다. 경찰은 범행수법이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잔혹하다는 점과 없어진 금품 등이 없다는 점에서 원한에 의한 살인일 가능성에 무게를 뒀다. 더욱이 김 씨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에 주목한 경찰은 치정살인일 가능성도 열어두고 김 씨의 주변인물들을 상대로 탐문수사에 들어갔다.
특이한 것은 미용사 김 씨가 살해된 곳은 앞서 여고생이 살해된 분식집과 불과 50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경찰은 동일범에 의한 범행일 가능성에 크게 비중을 두지 않았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사건들을 종합한 결과 당시 대구경찰청은 금품 피해가 거의 없고 범행수법이 잔혹하다는 점에서 원한에 의한 살인사건이나 정신이상자에 의한 범행 가능성에 무게를 뒀다. 하지만 반경 2km 이내의 신암동 일대에서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살인사건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별개의 사건으로 보고 초동수사를 한 것은 경찰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특히 20일 밤부터 새벽에 발생한 3건의 사건은 모두 지척거리에서 한 시간 내에 집중적으로 발생한 것으로 동일범에 의한 범행 가능성을 충분히 고려해야 했었다. 하지만 각 사건간의 연관성에 대한 판단 등이 치밀하게 이뤄지지 않아 사건의 조기해결에 실패한 면이 있었다.”
갈수록 주민들의 불안감은 커져만 갔다. 대구지방경찰청과 관할 경찰서에는 ‘불안해서 못 살겠다’는 시민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경찰 수사력을 비난하는 목소리도 점점 높아졌다. 인근 일부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안전을 우려해 당분간 야간자율학습을 중단하는 소동까지 벌어졌다.
경찰은 초유의 비상사태에 돌입했다. 수사가 진전이 없자 담당자들이 책임을 지고 줄줄이 경질되는 사태도 벌어졌다. 대구경찰청은 23일 잇따른 살인사건의 책임을 물어 대구동부경찰서 형사과장과 방범계장을 직위해제시키고 동구 신암 3, 4, 5동 파출소장들을 모조리 경질시켰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수사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다급해진 대구지방경찰청은 2월 24일 급기야 통합수사본부를 발족, 집중 수사에 들어갔다. 당시 구성된 통합수사본부에는 무려 159명의 형사가 투입돼 전담반이 꾸려졌다. 그리고 전 경찰력을 동원해 동구 일대에 대한 집중 탐문수사와 특별방범활동이 시작됐다. 하지만 사건이 발생한 동구는 공항과 터미널, 역 등을 끼고 있는 데다가 면적까지 넓어 탐문수사에 어려움이 있었다. 또 지리적 특성상 외지인에 의한 범죄, 즉 ‘여행성 범죄’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하지만 4건의 사건을 분석한 수사팀이 내린 최종 결론은 ‘동일인에 의한 범행’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열어두고 수사를 진행하던 수사팀은 범행시각 때마다 현장 인근에서 목격됐다는 ‘20대 초중반의 남자’에 주목했다.
수사팀은 목격자들의 진술 등을 토대로 작성한 몽타주를 배포, 수사망을 좁혀나갔다. 그리고 사건이 발생한 신암동 일대에서 집중 탐문수사를 진행하던 수사팀은 몽타주와 생김새가 유사한 데다가 특정 거주지 없이 신암동 일대 당구장 등을 전전하는 수상한 청년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게 된다. 수사팀의 레이더에 포착된 인물은 특수절도 등 세 차례의 전과를 갖고 있던 이진석 씨(가명·21)였다. 그리고 27일 범행 현장에서 채취한 발자국 등을 토대로 이 씨를 체포한 수사팀은 이 씨를 추궁, 모든 범행사실을 자백받기에 이른다. 경찰 조사결과 드러난 이 씨의 범행은 이렇다.
첫 사건이 발생한 2월 10일 오전 10시 30분경 금품을 훔치기 위해 율하동의 가정집에 침입한 이 씨는 집안을 뒤지다가 김 씨에게 발각되자 흉기로 김 씨를 살해하고 만다. 그리고 열흘 후인 20일 밤 11시경 대구역 지하도에서 미용사 김 씨를 우연히 만난 이 씨는 같이 술을 마신 후 김 씨의 집으로 따라갔다. 하지만 동성애자인 김 씨가 몸을 더듬으며 성관계를 요구하자 이 씨는 주방에 있던 식도로 김 씨를 마구 찔러 살해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김 씨를 살해한 후 허기를 느낀 이 씨는 김 씨의 집에서 약 50m 떨어진 분식집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당시 식당을 지키고 있던 여고생 이 양이 “영업 끝났는데요”라고 퉁명스레 말하자 흥분해 이 양마저 무참히 살해하고 만다. 김 씨를 살해한 지 불과 20분 후의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피를 본 이 씨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여고생까지 살해한 이 씨는 약 40분 후인 밤 12시 30분경 신암 3동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때마침 새벽기도를 가는 김 씨를 발견한 이 씨는 그녀의 가방을 뺏으려 하다 김 씨가 반항하자 그녀마저 살해하고 만다. 불과 한 시간 동안 3명을 거침없이 살해한 것이었다. 도대체 이 씨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이진석의 아버지는 막노동, 어머니는 식당일을 하고 있었다. 그의 청소년기는 평탄하지 못했다. 15세 때 이미 특수절도 혐의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던 이 씨는 대구의 한 공업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17세 때 또다시 특수절도죄로 구속돼 퇴학당하고 만다. 이후에도 이 씨는 좀처럼 범죄의 유혹을 떨쳐내지 못했다. 이 씨는 96년 1월 야간주거침입죄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아 범행 당시에도 집행유예 상태였다. 이진석은 한때 자동차정비공장에서 일을 하기도 했지만 이내 그만두고 96년 11월 가출, 포항과 대구의 만화가게와 당구장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이진석은 당시 4월에 공익근무요원으로 입영통지를 받은 상태였다.”
이 씨는 첫 번째 범행 후 친구집에 찾아가 ‘사람을 죽였다’고 털어놓은 뒤 범행에 사용한 가죽장갑을 버려줄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그리고 경찰 수사를 비웃기라도 하듯 범행 현장 인근인 대구역 주변의 심야만화방과 신암동 일대의 당구장 등을 전전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경찰이 동구 일대를 중심으로 철통같은 검문수색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씨는 단 한번도 검문을 받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그렇다면 이 씨가 막가파식 살인행각을 저지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어지는 김 연구관의 얘기.
“처음부터 살인을 마음먹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이진석 역시 첫 범행동기는 돈 몇 푼 때문이었다. 11월 중순에 가출해 용돈이 궁했다는 것이었다. 또 유흥비를 마련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이진석이 4명을 살해하고 손에 쥔 돈은 15만 원에 불과했다. 가출한 이유에 대해 이진석은 ‘4월에 군입대가 예정돼 있었기 때문에 마음껏 돌아다니면서 놀고 싶었다’고 담담히 말했다. 특히 그는 ‘입영 영장을 받은 후 기분이 나쁘고 우울해서 과도를 소지하고 거리를 배회했다. 처음부터 사람을 죽일 생각은 없었는데 한 번 죽인 뒤로는 나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진술했다.”
수사팀은 이 씨로부터 범행에 사용한 등산용 칼과 가죽장갑, 피 묻은 가죽점퍼, 피살된 미용사 김씨의 휴대폰 번호가 적힌 메모지 등을 증거물로 압수함으로써 사건을 종결지었다.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