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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잡스 ]
세계 최초로 개인용 컴퓨터를 세상에 내놓더니 21세기의 발명품, 아이폰과 아이팟을 만들고애플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이끌며 시대의 아이콘이 된 스티브 잡스! 췌장암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그는 충분히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습니다.
영화 <잡스>는 할리우드 배우 애쉬튼 커쳐가 이 영화에서 스티브 잡스로 분해 젊은 시절의 스티브 잡스와 120% 싱크로율을 보이며 화제를 모았던 작품입니다 .2대 8가르마에 수염만 길렀을 뿐인데 실제 잡스와 어쩌면 이렇게 닮았는지 놀랍습니다.
평소 스티브 잡스와 애플에 높은 관심을 갖고 있던 애쉬튼 커쳐는 <잡스>의 시나리오를 하루 만에 독파, 100시간이나 되는 스티브 잡스의 인터뷰와 기조연설 영상 등을 보며 캐릭터 분석을 하는 등 대단한 열의를 보였습니다. 외관상의 비주얼은 물론, 잡스의 걸음걸이와 말투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대단한 노력의 결과일까요.언뜻 보면 누가 스티브 잡스이고, 누가 애쉬튼 커쳐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닮아있는 모습이 흥미롭습니다. 영화 <잡스>에는 애쉬튼 커쳐 외에도 조시 게드, 더못 멀로니, 매튜 모딘 등이 출연해 스티브 잡스의 삶을 재조명합니다.
* 왼쪽 친구이자 천재, 스티브 워즈니악(영화에서)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사람에 대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특히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고, 일거수 일투족이 항상 언론에 회자되었던 스티브 잡스 같은 사람은 더욱 어렵습니다. 감독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아이언맨을 만들까요? 혹은 배트맨을 만들까요?
영화 <잡스>는 전자를 택했습니다. 어둠보다는 밝고 화려함을 주로 다뤘습니다. 스티브 잡스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나 스티브 잡스 지인들이 말하던 기행은 극히 일부만 다뤘습니다. 영화의 관점을 이렇게 정하니, 스티브 잡스를 옹호하는 연출이 많을 수 밖에 없습니다.
* 맥킨토시 팀원들과...
스티브 잡스가 친구를 속이거나 돈에 인색한 부분은 아주 귀엽고 유머러스하게 연출합니다. 리사(잡스의 딸)의 생모를 버린 이유에 대해서는 리사의 생모가 난잡한 파티를 하던 모습을 스티브 잡스가 목격하는 장면으로 면죄부를 부여합니다.
직원에 대한 폭언과 해고 역시 스티브 잡스의 열정을 보여주는 우호적인 에피소드로 대신합니다. 그와 처음을 같이 했던 친구들에게 주식을 주지 않는 이유도 공과 사를 구분하는 쿨한 성격으로 설득력 있게 그렸습니다.
* 최초의 애플 회로기판을 들고...차고에서 워즈니악과...
잡스가 처음부터 PC와 기술에 대한 이해와 비전이 확실했던 사람으로 그려집니다. 영화 초반부는 스피디하고 경쾌하게 진행된다. 하나둘씩 조력자가 모이고, 불가능한 일을 이뤄내고, 애플은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기업이 됩니다.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그가 리드대학을 다니던 1972년부터 시작해서 게임회사인 아타리 입사(1974년), 창고에서 애플을 창립(1976년)한 후, 애플에서 쫓겨나는 1985년까지가 주로 그려집니다. 그리고, 영화는 1996년 스티브 잡스가 애플로 복귀하는 순간 끝이 납니다.
그가 아이맥으로 성공을 거두고, 아이팟을 내놓는 과정(영화 도입부)은 아주 짧게 처리됩니다. 특히 아이폰, 아이패드, 그리고 애플의 가장 영광스러운 시기(2010년 전후)는 영화 속에서 그려지지 않습니다. 이유는 그의 인생 후반부의 놀라운 성공을 이 영화를 보는 많은 사람들이 라이브로 지켜봤기 때문일 것입니다.
영화에 대해서 불만을 갖는 이가 있다면 더 보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그리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영웅 스토리에서 끝없는 승리만큼 뻔한 즐거움이 또 있을까요? 하지만 <잡스>는 뻔한 승리 직전에 영화가 끝이 납니다. 마치 예수 영화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히고, 다시 부활하려는 순간 영화가 끝나는 셈입니다.
* 왼쪽 실제 잡스, 오른쪽 배우 애쉬튼
대신 이야기는 난데없이 스티브 잡스의 복수극에 클라이막스를 맞춰 놓았습니다. 그를 내쫓는데 한 표를 던졌던 마이크 마쿨라를 복귀해서 내쫓는 모습과 이사회를 굴복시키는 모습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길 원했던 것 같습니다.
영화 <잡스>는 IBM과의 경쟁, 빌 게이츠의 마이크로 소프트와의 경쟁 등을 거의 다루지 않습니다. 오히려 애플 내부의 적들과 싸우는 모습을 밀도 있게 다뤘습니다.
만약 스티브 잡스가 자신의 내면과 싸우는 모습이나 광기에 가까운 성공에 대한 집착을 더 다뤘다면 영화 비평가들에게 호평을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업계의 복잡한 비즈니스 관계와 스티브 잡스의 놀라운 대처 능력을 보여줬다면 IT 업계에게 호평을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많은 스티브 잡스 광 팬들에게 다시 한번 스티브 잡스를 그리워 할 수 있게 하는 영화입니다.
* 애플1을 만들고 있을 때...집 앞에서...
[ 혁신의 아이콘, 천재 스티브 잡스 ]
* 잡스의 죽음
2011년 10월 5일, 전 세계는 심한 상실감에 사로잡혔습니다. 스티브 잡스가 오래동안 앓던 췌장암으로 눈을 감았던 것입니다. 잡스는 확실히 그 자신이 생전에 경의를 표하던 위인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가 사랑해 마지않았던 밥 딜런, 피카소, 아인슈타인, 알프레도 히치콕과 유사한 마법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놀랄만큼 주위의 흐름을 역행했던 잡스의 방식, 검정 터틀넥 니트, 청바지는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있을 겁니다. 잡스는 개인주의자였지만 매우 정이 많았고, 비사교적이었지만 특이하게 매혹적인 사람이었습니다.
* 왼쪽 잡스, 오른쪽 워즈니악
우리는 일상적인 사업 관행에 잡스가 담대히 “아니오”라고 말하며 개인적 신념과 예술적 취향을 굽히지 않는 인물이었기에 더더욱 그를 사랑했습니다.
애플 초창기 모험을 함께한 동료이자 컴퓨터 천재인 스티브 워즈니악, 애플의 중역 장루이 가세의 공식 추도 메시지가 전파됐고 세계적으로 추모의 물결이 멀리 멀리 퍼져나갔습니다.
* 아이폰을 들고...
버락 오바마를 필두로 세계 유수 국가들의 대통령과 과거 경쟁자였던 빌 게이츠뿐 아니라 스티븐 스필버그, 폴 매카트니, 에바 롱고리아 같은 유명 영화인과 음악가, 패션디자이너들이 잡스의 업적과 재능을 기렸습니다.
이러한 추모 열기 속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아무래도 보통 사람들의 모습이었을 겁니다. 수많은 애플 팬들은 뉴욕, 바르셀로나, 파리의 애플 스토어를 찾아가 잡스에게 작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남기거나 사과나 꽃을 놓아두었습니다.
* 잡스 생일날 집에서...오른쪽 오바마가 보입니다. 오바마 왼편이 잡스
그들은 친구의 마지막 안녕을 위해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잡스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와 훨씬 더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잡스는 아름다운 제품들을 통해 우리 삶을 더욱 아름답게 보도록 도와주었고 윤택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자신의 미학과 철학을 불어넣어주고 저 세상으로 떠난 것입니다.
* 잡스의 집 앞, 추모객들의 꽃다발들
* 잡스의 상상력, 철학, 인문학, 낭만 그리고 미학
스티브 잡스의 상상력과 철학은 일반인들의 예상을 훨씬 넘어섭니다. 놀랍도록 과감하고 직접적이면서도 심오한 통찰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평가도 극과 극을 달립니다. 때로는 폭군으로 불리며, 심지어 ‘현실을 왜곡하는 자’로 규정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표독스러운 CEO의 모습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정반대편에서는 ‘창의성의 아이콘’, ‘새로운 시대를 만든 사람’으로도 바라봅니다. 그러나 잡스의 참모습은 이런 겉모습이 아니라 잡스 내면의 정신세계가 참으로 매혹적으로 다가온다는 겁니다.
* 가족들과...맨 오른쪽 부인 로렌 파월과 그리고 아이들
왜 그가 그런 말을 하는지, 왜 그가 그렇게 창의적일 수 있는지, 왜 그가 그렇게 직원들을 혹독하게 대하는지, 왜 그가 그토록 일에 열정을 발휘할 수 있는지에 대한 ‘근원’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잡스의 세계로 들어가는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키워드는 바로 인문학입니다. 그는 늘 자신이 기술과 인문학의 중간에 있었으며, 기술만 가지고는 많이 부족하다고 말해 왔습니다. 심지어 그는 “소크라테스와 한나절을 보낼 수 있다면 애플이 가진 모든 기술을 내놓겠다”고 까지 말했습니다.
그래서 인문학적 배경 지식이 없이 스티브 잡스의 정신세계를 탐구하는 것은 감히 불가능한 일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 겁니다.
* 잡스가 남긴 명언들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들의 생각대로 살아야 한다는 도그마에 얽매이지 마세요. 타인이 내는 의견 때문에 여러분 내면의 목소리를 낮추지 마세요. 끊임없이 갈망하고, 우직하게 정진하십시오” - 스탠포드 대학교 졸업식에서
“제가 가장 관심을 두는 일은, 미래에 부자들이 묻히는 묘지에 함께 묻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하루도 대단한 일을 했다고 제 자신을 다독이며 잠자리에 드는 일입니다.”
* 빌 게이츠와...둘은 티격태격 하곤 했지만 나중에 화해했지요
“애플의 DNA는 기술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인문학과 기술을 결합하고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가 결합되어야만 최종적으로 가슴을 울리는 결과물을 만들 수 있습니다.”
* 펩시콜라 사장이었던 존 스컬리를 영입할 당시 뉴욕에서...
남은 여생을 설탕물이나 팔면서 살겠냐고 설파하던 잡스, 그러나 이후 두사람은 내쫓고 내쫓기는 애증관계를 연출합니다.
“우리는 이 산업(IT산업)에 낭만과 혁신을 불어 넣었습니다.”
“빌 게이츠의 마이크로소프트가 안고 있는 문제는 그들이 맛이 없다는 겁니다. 그들은 절대적으로 무미건조할 뿐입니다. 도대체 그들은 그들의 제품 속에 ‘문화’라는 것을 불어 넣으려고 하질 않습니다.”
“사회가 요구하는 시선을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한편으로는 그 시선의 틀에 당신 자신을 끼워 맞추고 안주하는 이상 ‘예술가의 창의성’은 없습니다.”
* 영화에서...동네 산책길, 주로 맨발로 걸어다녔던 잡스
“실패의 위험을 무릅쓴다면 그는 여전히 예술가입니다. 밥 딜런과 피카소는 늘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결정과 행동은 우리의 가치관의 표출이듯이 ‘창의적인’ 결정과 행동은 ‘창의적인’ 가치관의 표출인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직감, 운명, 인생, 카르마(業), 기타 무엇이든 그런 것들을 신뢰해야만 합니다.”
* 잡스의 열정,철학,그리고 운명
“직관적이고, 사용하기에 재미있고, 더불어 사용하기 쉬운 제품을 만들기 위해 늘 우리는 과학기술과 인문학의 교차점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우리가 아이폰이나 아이패드같은 창조적인 제품들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이 두가지 요소들의 결합덕분이었습니다.”
“만약 애플이 컴퓨터를 단순한 상품으로 취급하는 회사가 된다면, 따라서 모든 낭만이 사라져 버리고 컴퓨터가 ‘인간이 만든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라는 것을 잊어버리는 곳이 된다면 나는 애플을 잃었다고 느낄 것입니다.” - 1995년 애플에 새로이 복귀했을 때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현재 무엇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동물적 감각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게 제가 말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일생을 바쳐 그 방향으로 노력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중의 한명인 웨인 그레츠키(전설적인 아이스하키 선수)의 오래된 명언이 하나 있습니다. ‘나는 퍽이 있는 곳이 아니라, 퍽이 가야 할 곳으로 움직인다’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애플에서 언제나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지요. 아주, 아주 초창기부터 말이죠.”
“만약 당신이 무엇인가를 이루었고, 그것이 상당히 좋다고 확인되었다면 거기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곧바로 다른 멋진 일을 추진해 나가야하며, 다음으로 할 일을 찾아내야 합니다.”
* 현재 애플사의 CEO인 쿡과...
“대부분의 성공한 예술가들이 어느 시점에서 명성을 잃어가는 것은 처음에 성공한 방식을 계속해서 고집할 뿐 더 이상 발전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속적으로 실패의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예술가입니다.”
“그들(마이크로소프트)은 독창적 아이디어에 관해서 생각하지 않고, 제품에 문화를 불어넣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것 때문에 슬퍼지는 겁니다. 그들의 성공 때문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나에게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성공할 자격이 충분히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삼류제품을 만든다는 점입니다.”
“애플을 망쳐 놓은 것은 성장과 발전이 더디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애플을 망쳐 놓은 것은 가치 기준이었습니다. 존 스컬리(잡스를 내쫓은 애플의 CEO)가 애들을 망쳐 놓았습니다. 그는 고위 간부들에게 일련의 부패한 가치들을 심어 주었으며, 그것으로 그들을 타락시켰습니다....
애플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고객들이 사용할 위대한 컴퓨터를 만드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에 관해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위대한 컴퓨터를 만드는 방법을 알지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이 신경을 쓸 바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오로지 많은 돈을 버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입니다.” - 1995년 애플에 복귀했을 때
* 스탠포드 대학교 졸업식 연설식장에서...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스스로 하고 있는 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설탕물이나 팔면서 남은 인생을 보내고 싶습니까? 아니면 세상을 바꿀 기회를 붙잡고 싶습니까?” - 당시 펩시콜라 사장인 존 스컬리를 애플 CEO로 영입할 때 결정적으로 써 먹은 말
* 초기 시절...워즈니악과...
“나는 죽음이야말로 삶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깨닫게 해주고 우선 순위를 정해주기 때문이죠.”
“나의 주문 중 하나는 집중과 단순함입니다. 단순함은 복잡함보다 더 어렵죠. 생각을 단순하고 명료하게 하려면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한번 그런 단계에 도달하면 산도 움직일 수 있습니다.”
“해군이 아니라 해적이 되라” - 매킨토시 제작 팀원들에게
“우리는 우주에 흔적을 남기기 위해 여기에 있다. 그게 아니라면 왜 여기에 있겠는가” - 맥킨토시 제작 팀원들에게
[ 혁신의 아이콘인 천재 스티브 잡스의 일대기 ]
스티브 잡스는 1955년 2월 24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나자마자 양부모 폴Paul과 클라라Clara에게 입양되었습니다. 그의 양아버지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캘리포니아 주 해안경비대에 들어가 경비정 기관사로 근무했었습니다. 전역 후 클라라와 결혼하였고 중고차 수리 및 세일즈맨 그리고 대금 미납 상품 회수원으로 살아갔습니다. 부인이 아이를 가질 수 없자 스티브 잡스를 입양하였다. 잡스는 어려서 자신이 입양된 사실을 알았습니다.
버림받았다는 생각과 선택받았다는 두 가지 생각이 평생 그를 따라 다녔습니다. 나중에 커서 작가로 활동하는 모나 심프슨Mona Simpson이라는 여동생과 대화 치료사였던 어머니와 시리아 출신인 정치학 교수였던 친아버지의 존재도 알게 되었습니다. 친아버지는 잡스의 회사 근처인 실리콘 벨리에서 식당업을 했고 잡스도 가끔 직원들과 그곳에 갔었으나 당시는 전혀 몰랐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끝내 아는 체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언제나 양부모를 친부모로 여겼습니다. 3살 되던 해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샌프란시스코 남쪽의 산업단지에 들어선 주택가로 이주하였고 주변 전자회사에 다니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성장하였습니다. 이때 전자분야에 관심이 많았던 5살 위의 천재 스티브 워즈니악을 만나게 됩니다. 워즈니악과는 애플사를 창업하는 동지로 발전합니다. 워즈니악은 컴퓨터의 천재였고 잡스는 그런 워즈의 재능이 세상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를 고민했습니다.
그들은 학교에서는 못 말리는 장난꾸러기이자 독불장군들이었지만 전자 분야에 대한 지식과 관심은 지대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이때 자신이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당시 히피문화에 흠뻑 젖어있었습니다. 고등학교를 마친 뒤 오리건 주 포틀랜드에 있는 리드대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리드Reed 대학은 북부 태평양 연안 지역에서 최고의 인문대학인데 1년 만에 때려치웁니다. 별로 배울 게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마약을 중단하고 아타리Atari 라는 전자게임회사에 취업하였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를 그만두고 잡스는 인도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수개월간 인도 북부 히말라야 일대를 돌아다녔지만 그가 기대했던 내면의 정신적인 만족감을 얻지 못한 채 미국으로 돌아와 아타리에 복직하였습니다. 그는 컴퓨터 게임을 만들었으며 이때 전자분야의 도사인 워즈니악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사업적인 수완과 마케팅 감각이 뛰어난 스티브 잡스는 천부적인 전자 엔지니어였던 워즈니악의 도움이 있어야만 그의 아이디어가 실현 가능했고 각각의 장점을 합쳐 두 사람은 1976년 컴퓨터 회로기판을 제조하는 회사를 공동창업을 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그야말로 환상의 콤비였습니다. 회사이름은 스티브 잡스가 오리건 주의 선불교 수행을 하던 장소였던 사과농장을 연상하여 애플Apple이라고 지었습니다. 혹은 컴퓨터 공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천재였던 앨런 튜링이 독약을 넣은 사과를 깨물고 죽은 데서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회로기판만 있는 PC '애플Ⅰ'을 만들어 발표했으며, 당시 퍼스널컴퓨터 시장이 주목받게 되자 곧 새로운 컴퓨터 플랫폼인 애플Ⅱ를 만들어 냈습니다. 확장 슬롯으로 기능을 향상시킬 수 있었고 획기적인 운영체계를 적용하여 컴퓨터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도 불편 없이 사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경험도 없는데다가 영세한 업체로서는 사업을 확장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때 잡스는 마이크 마쿨라라는 의욕적인 벤쳐 투자자를 만나 그의 도움으로 “PC의 세계는 반드시 도래한다.”라는 자신의 꿈을 열정적으로 실현해 나갔습니다. 마침내 그들의 애플 PC는 시장에서 큰 반응을 보이며 판매에 성공했고 그에 힘입어 1980년에는 주식을 공개했습니다. 그는 곧 미국에서 최고 부자대열에 올랐다. 당시 미국에서 가장 젊은 억만장자가 된 것입니다.
오랫동안 연인관계였던 크리산 브래넌Chrisann Brennan과 사이에서 리사라는 딸을 두었으나 그는 자신이 친부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잡스는 앤이 낳은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고 우기다가 기어코 친자확인 소송에서 패소한 이후에야 가까스로 리사가 친자임을 받아들였습니다. 이와 같이 모순되고 괴팍한 성격으로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애플은 엄청나게 커졌습니다.
이런 애플의 성장세는 월스트리트의 기업 분석가들로부터 집중적인 조명을 받게 됩니다. 회사 내에서는 매킨토시와 리사 컴퓨터를 개발하면서 애플사의 경영진들과 반목이 심해졌고, 그의 성격에서 기인하지만 그는 이런 불화를 조화롭게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뒤처지는 자에게는 무자비했고 재능이 뛰어난 자는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 호오好惡가 너무나 뚜렷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비정하고 자기중심적인 성격은 애플 내에서 분열을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자신이 주도했던 ‘리사 프로젝트’에서 밀려나자 새로운 ‘매킨토시 프로젝트’를 추진합니다. 마침내 1984년에는 IBM에 대항하여 매킨토시 컴퓨터(맥,Mac)를 선보이고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었지만 회사 내부에서는 실패한 리사 프로젝트팀과 치열한 암투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매킨토시 발표 후 얼마 지나자 사람들은 맥이 화려하기는 했지만 속도가 심각할 정도로 느리다는 점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점차 맥의 판매량이 감소하기 시작했습니다.
잡스의 독특한 스타일과 함께 매킨토시에 매료되었던 사람들은 이제 맥을 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1985년 1월 19일 워즈니악과 함께 백악관에 초빙되어 레이건 대통령이 수여하는 국가기술훈장을 받기도 했지만 워즈니악은 회사를 떠났습니다. 마침내 스티브는 현실성이 결여된 망상가이자 회사를 도탄에 빠뜨린 장본인으로 지목되어 1985년 5월 경영일선에서 쫓겨나면서 아예 회사를 나왔습니다. 잡스는 애플의 보유 주식을 딱 한 주만 남기고 모두 현금으로 전환했습니다. 이 돈은 나중에 ‘픽사’를 인수하는데 요긴하게 사용합니다.
나중에 "스티브의 최고 행운은 애플에서 쫓겨난 것"이라는 역설이 뒤따랐습니다. 혹독한 시련이 그를 인간적으로 더욱 성숙하고 지혜롭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애플을 떠난 뒤 넥스트社를 설립했고 1986년에는 조지 루카스George Lucas 감독으로부터 픽사Pixar를 1천만 달러에 인수하였습니다. 차세대 운영체제를 갖춘 그래픽 전용 컴퓨터를 개발하여 의료업계에 판매하려고 시도했으나 두 회사(넥스트와 픽사) 모두 수익을 못 내고 스티브 잡스를 위기로 몰아갔습니다. 그러나 픽사는 하드웨어 사업을 포기하고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들면서 극적으로 회생합니다.
픽사는 존 래스터John Lasseter가 제작한 <토이 스토리Toy Story>의 엄청난 대박에 힘입어 거의 빈털털이로 내몰렸던 스티브 잡스를 다시 한 번 억만장자의 반열에 올려놓았습니다. 2006년에 월트 디즈니가 픽사를 인수하면서 잡스는 월트 디즈니의 이사회 임원이 되었습니다. 1991년 3월 18일 요세미티 국립공원에서 로렌 파월Laurene Powell이라는 여성과 결혼했으며 3명의 아이를 낳았습니다. 유연하지만 강인한 성격의 로렌은 까다롭고 변덕스러우며 격한 성격의 잡스를 부드럽게 토닥거리면서 결혼생활을 잘 이끌어 나갔습니다. 아마도 로렌의 성격이 안정적인 데다가 똑똑해서 잡스와 지적인 교류도 가능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편 1996년 적자에 허덕이며 새로운 운영체계를 원했던 애플이 넥스트사(社)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스티브 잡스는 13년 만에 다시 애플로 복귀하여 경영 컨설턴트로 역할하며 4억 달러 흑자를 내는 데 공을 세웠다. 처음에는 잡스는 애플에 돌아오고 싶지 않았습니다. 픽사에서 나오는 수입이 막대하기도 했고 애플에 대한 쓰라린 추억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휘청거리는 애플로서는 잡스라는 구원투수가 절실한 상황이었습니다.
12년 만에 애플에 복귀한 잡스는 이전보다 퍽 달라졌습니다. 까칠하고 최고와 얼간이를 구분하여 차별하는 극단적인 사고방식은 여전했지만 과거처럼 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습니다. 고함을 치고 윽박지르던 독선적인 모습은 많이 사라졌습니다. 그만큼 애플에서 쫓겨난 지난 12년간의 낭인시절과 로렌과의 화목한 결혼생활이 그를 인간적으로 더욱 성숙하고 노련해지게 했습니다. 잡스도 나중에 애플에서 쫓겨난 경험은 매우 쓴 약이었지만 그에게는 보약과도 같았다고 회고했습니다. 애플에 복귀한 후 잡스의 일하는 방식이 달라졌습니다. 과거에는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우주에 흔적을 남기겠다는 식으로 호언장담으로 기대를 부풀리게 했으나 이제는 조용히 수행해 나갔습니다. 잡스는 과거의 실수를 통해서 성숙해진 것입니다.
스티브 잡스가 애플의 CEO로 복귀한 2년 동안 애플은 자본이 20억 달러에서 160억 달러로 폭등했으며 픽사는 계속되는 흥행성공으로 애니메이션 역사상 가장 성공한 영화사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러 면에서 한층 여유로워진 잡스는 새로운 미디어인 인터넷과 접목한 새로운 제품개발에 눈을 돌렸으며 그 대상은 음악시장이었습니다. 아이튠즈iTunes 개발에 이어 아이팟iPod이라는 MP3플레이어를 개발하여 세계적인 히트상품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는 집요할 정도로 매끈한 미니멀리즘의 디자인을 추구했습니다. 나사 하나 구멍 하나를 없애기 위해 팀원들과 침식을 잊을 정도로 몰두했습니다.
그는 이제 사업가에서 세상을 바꾸는 혁신의 선도자로 사람들에게 각인되고 있었습니다. 많은 청중들 앞에서 청바지에 검은색 셔츠로 연설하는 모습은 바뀌어가는 세상의 서막을 알리는 행사로 각인되었고 사람들은 그가 만든 제품에 열광했습니다. 2007년 컴퓨터 전시회인 맥월드 Macworld에서 아이폰iPhone이 발표되면서 또 한 번 전 세계적인 선풍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특히 아이폰은 통신업계 전반을 뒤흔들어 놓았고 문화적 파급효과도 지대했습니다. 또한 2010년 발표된 아이패드iPad라는 태블릿Tablet PC를 발표하면서 잡스가 주도하는 변화는 도대체 멈출 것 같지 않아 보였습니다.
하지만 잡스는 IT 역사에 폭풍을 몰고 다니는 인물로 평가되면서 성공가도를 달렸으나 췌장암 발병으로 개인적으로 건강문제에 시달렸습니다. 2004년 암으로 수술을 받고 2009년 간이식 치료를 받았습니다. 2011년 8월 24일 병세악화로 애플 CEO직을 사임했고, 사임 후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은 10월 5일에 향년 56세로 눈을 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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