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973
12월13일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대림 제3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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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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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YtGXMS4xgcY (황주원 미카엘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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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뼈를 깎는 자기 성찰과 부단한 노력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이 성장합니다!>
메뚜기도 한철이라고 특강과 판공성사 시즌을 맞아, 한동안 바쁜 순간을 지내다가, 이제야 겨우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팬데믹 시대 점점 위축되어가는 신앙생활 앞에 힘겨워하시는 교우들의 눈망울을 보며 큰 안타까움과 함께 작은 도움이라도 되어드려야겠다는 마음에 열심히 뛰어 다녔습니다.
고백소에 들어갈 때마다 크게 느끼는 바가 한 가지가 있습니다. 저나 교우들이나 거기서 거기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잘 안 바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년 고백성사의 내용과 올해 내용이 거의 똑같다는 것입니다. 늘 같은 죄, 같은 고민을 평생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도회 입회 때 안고 있었던 고민을 아직도 안고 있습니다. 거의 매번 고백하는 죄의 내용이 똑같습니다. 그래서 영적지도 신부님께도 부끄럽습니다. 똑같은 죄를 반복하니...
그러면서 드는 한 가지 생각입니다. 신앙에도 성장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성장은 가만히 앉아있는 사람은 절대 주어지지 않습니다. 각고의 노력, 그야말로 뼈를 깎는 자기 성찰과 부단한 노력을 통해서 아주 조금씩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과수원을 운영하는 농부는 어떤 노력을 합니까? 이른 봄에 묘목들만 딱 꽂아놓으면 다 되는 일이 아닙니다. 심고 나서는 즉시 충분한 수분을 공급해주어야 합니다. 넉넉한 퇴비도 필수입니다. 강풍에 쓰러지지 않도록 지지대도 세워줘야 합니다. 때로 병충해 예방약에 성장촉진제도 투여합니다.
그래야 묘목이 무럭무럭 성장하고, 몇 년 뒤에는 꿈에 그리던 품질좋은 과일을 풍성히 수확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멋진 묘목을 본 농부의 마음은 얼마나 흐뭇하겠습니까?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에도 반드시 성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 각자 각자에게 주어지는 아주 중차대한 의무가 있는데, 각자 안에 뿌려진 신앙의 씨앗을 성장시키는 일입니다.
안타깝게도 세례받은 후 40년, 50년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이 조금도 성장하지 못하고 세례 때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분들을 만납니다. 하느님께서 보시고 얼마나 딱하게 여기실까, 걱정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그분의 성전 가장 가까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의 연륜을 따지자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의 신앙은 조금도 성장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메시아로 자신들의 목전까지 다가오신 예수님을 몰라봤습니다. 몰라본 것까지는 좋은데, 철저하게도 메시아를 거부하고 배척했으며, 결국 십자가에 못 박는 과오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매일 구체적인 삶 속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는 명품 신앙인이 되기를 원한다면, 너무나도 당연히 우리의 신앙이 성장해야 마땅합니다. 신앙의 성장을 위한 매일의 구체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남아있는 대림 시기 많이도말고 딱 두 가지, 자신의 신앙을 성장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영적 계획을 한번 세워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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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M-HUarn6u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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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세례자 요한을 대하는 방식 그대로 예수님도 당신을 대하신다>
오늘 복음도 세례자 요한에 관한 내용이 이어집니다. 바로 세례자 요한의 ‘권한’에 관한 논쟁입니다. 먼저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것을 보고는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이상하게도 세례자 요한의 권위를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그들이 만약 세례자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왔다고 하면 예수님께서 “그러면 왜 그가 증언한 나를 믿지 않느냐?”라고 할 것이고, 땅(사람)에서 왔다고 하면 그를 하늘에서 보낸 사람으로 아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뭇매를 맞을 것 같아서 “모르겠소”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도 그들에게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너희가 세례자 요한을 대하는 그대로 나도 너희를 대하겠다!”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이 세례자 요한에게 관심이 없다면 예수님도 그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유튜브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뭐 이런 일이 거의 있을법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오늘 복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긴 이야기인데 짧게 정리하면 내용은 이렇습니다.
아주 큰 회사의 회장이 은퇴하면서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주고나서 집에서만 있기가 무료했던 회장은 아들의 회사에서 주차관리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물론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회장은 그렇게 회사를 위해 작은 봉사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기뻤습니다.
그런데 그 회장에게 무례하게 대하는 직원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자기가 회사에 늦게 도착하고는 차 열쇠를 던지며 주차해놓고 열쇠는 다시 자신이 일하는 곳으로 가져다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회장은 “그것은 저희가 할 일이 아닌데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젊은 직원이 자신이 누구인지 아느냐며 화를 내고 올라가 버렸습니다. 회장은 꾹 참고 그 사람이 일하는 곳으로 갔습니다. 고맙다고 말하기는커녕 자신이 사장과 아는 사이인데 이런 식으로 하면 잘라버리겠다고 윽박질렀습니다.
그때 지나가던 사장이 이것을 보았습니다. 아버지가 어쩐 일이시냐며 인사를 했습니다. 비로소 사장의 아버지, 곧 회장님이라는 사실을 안 그 직원은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지만, 회사에서 쫓겨나는 것은 막을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회사를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회사를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낮은 곳에서 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세례자 요한의 모습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가난하고 겸손하고 절제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것이 그리스도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완성되려면 나의 세속-육신-마귀는 죽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게는 인정을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돈 있고 권력 있는 많은 사람에게 무시당하기에 십상입니다. 하지만 당신을 위해 가장 밑바닥에서 일하는 세례자 요한과 같은 이에게 함부로 대하는 이들을 주님은 어떻게 대하실까요? 그 사람을 대하는 방식으로 똑같이 갚아 줄 수밖에 없습니다. 괜히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래서 예수님과 친하다고 하면서 그분께로 인도하는 사람들을 존중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 때엔 사장 친구의 꼴이 됩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안다면 그리스도 때문에 세례자 요한이 된 이들을 존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세상에 세속-육신-마귀가 그리스도로 향하는 길의 걸림돌이기에 자신이 몸소 가난하고 정결하고 겸손해진 이들을 존중하고 본받으려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도 그렇게 대해주십니다. 그분은 사랑이고 행복입니다.
영화 ‘패밀리맨’(2000)은 출세를 위해 사랑하는 케이트라는 연인을 떠나서 성공한 삶을 살아가는 잭이라는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그 후 13년 뒤 큰 투자기업의 사장이 되어있는 그는 성탄절도 즐기지 못하고 일합니다. 그러다 잠에서 깨어나 보니 이전에 사랑했던 여인과 결혼하여 아이들 둘을 데리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남자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처음엔 가난한 삶이 적응하기 힘들었지만, 이내 아내와 아이들의 사랑을 받으며 가정이 주는 행복에 젖어갑니다. 그리고 다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때쯤 눈을 뜹니다. 그는 회사의 중요한 일도 집어치우고 성공을 위해 버렸던 자신을 떠나 비행기를 타려는 한 여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이것이 성탄절이 주는 선물이었습니다.
행복은 욕심과 동행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알려주는 이가 케이트입니다. 케이트에게 대하는 대로 행복도 잭을 무시합니다. 그러나 대신 돈이 행복이라는 마약으로 순간적인 쾌락은 허락합니다. 하지만 케이트를 잠시만이라도 받아들이면 욕심이 없는 행복을 맛봅니다. 세례자 요한과 같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곧 사랑과 행복이 나를 대하는 방식이 되는 것입니다. 욕심을 버림과 행복이 그렇듯, 요한과 예수님은 둘이 아닙니다.
그러니 세상에 나를 가난하게 하고 겸손하게 하고 절제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꼭 붙드십시오.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이 곧 사랑이요, 행복이요, 영원한 생명인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입니다. 교회가 바로 세례자 요한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 돌아가실 때 “결국 저는 교회의 딸입니다”라고 말한 예수의 데레사 수녀는 하늘나라에서 어떤 대접을 받게 될까요? “너도 내 딸이다”라며 맞아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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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1,23-27 : 요한은 누구에게서 권한을 받아 세례를 베풀었느냐?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따져 묻는다. 그들은 위대한 기적들을 많이 보았다. 그 기적들은 그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들은 예수님께 누구의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묻는다. 그들은 아마 그 기적들의 결과가 미래에 어떠한 결과로 나타날지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들의 위치가 흔들릴 것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이 사건들 안에서 모든 위험을 보았기 때문이다.
구제하기 어려운 그들의 사악함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질문을 던지신다. 그들이 질문의 뜻을 이해하고 답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더 이상 당신께 질문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24-25절)
그들은 이제 자기들의 대답이 가져올 위험을 생각하며 망설인다. 요한이 하늘에서 왔다고 하면, 그 답은 하늘이 보낸 증인을 믿지 않은 결과를 인정하는 것이 될 터였고, 또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군중에게 돌을 맞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답에 발목을 잡힐까봐 두려워 “모르겠소.”(27절) 하고 대답한다. 사실 그들은 요한 하늘에서 왔는지 사람에게서 왔는지 몰랐다.
그들에게 신앙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어두워진 마음은 빛에서 나온 것을 알아보지 못한다. 눈이 멀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영적으로 눈이 멀면 신앙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한다. 소리 없이 사냥하는 사냥꾼은 함정을 파면서 동시에 함정 옆에 결코 도망칠 수 없도록 그물을 쳐 놓는다고 한다. 사냥감이 도망을 못가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도 덫을 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주님께서는 사탄에게도 똑같이 하셨다. 사탄이 성경을 인용하며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명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마태 4,6; 시편 9,11-12). 주님께서는 성경 말씀이 그런 뜻이 아니라고 하시지 않고, 신명기의 말씀을 들어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마태 4,7; 신명 6,16)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도 “나도 모른다.”고 답하지 않으시고,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27절)고 하신다. 즉 그들에게는 자격이 없으므로 말씀하시지 않겠다는 말씀이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당신의 신비를 드러내지 않으시면서도 당신을 신문하는 자들을 가르치시고, 합리적인 논증으로 상대의 교묘한 비난을 논박하시고 계시다.
신앙을 가진 우리들은 필요하다면 하늘이 무너져도 알고 있는 진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진리를 알려고 하는 태도를 가져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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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도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서 가르치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하였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우리에게 말할 것이오.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 하자니 군중이 두렵소. 그들이 모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니 말이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마태 21,23-27)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라는 질문은, 정말로 예수님의 권한을 알고 싶어서 한 질문이 아니라, “당신은 아무 권한도 없으면서 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라는 뜻으로 한 질문입니다.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면서 왜 무엇이나 되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인가?”) 사제들과 원로들의 눈에는, 예수님은 갈릴래아 나자렛의 가난한 목수일 뿐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당국의 허락을 받고 장사하는 사람들을 성전에서 쫓아내고, 또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으니, 사제들과 원로들은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 논쟁은 예수님의 ‘권한’에 관한 논쟁이 아니라, 예수님의 ‘신성’에 관한 논쟁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사람’으로만 생각하면서, 예수님이 감히 하느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행동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 우리는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셔야 할 일을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이신 분이 성전을 정화하고,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은 당신의 권한을 행사하신 일입니다. 그 일을 하시기 위해서 사제들에게 가서 허락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논쟁은 ‘인간을 구원하는 권한과 권능’에까지 연결됩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향해서, “너 자신이나 구해 보아라.”라고 말하면서 조롱하고 비아냥거렸습니다.(마태 27,39-44)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바로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는 구세주라고 믿고 있습니다.>
만일에 사제들과 원로들이 순수한 마음으로 질문했다면, 예수님께서는 “나의 권한은 하늘에서 왔다.”라고 단순하게 대답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믿으려는 마음 없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막으려는 의도로 질문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 세례자 요한을 먼저 언급하십니다. ‘믿음’은 ‘마음을 돌리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말씀하신 것은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돌려서 당신을 믿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왔다는 것을 믿는다면, 예수님의 권한이 하늘에서 왔다는 것도, 또 예수님이 하늘에서 오셨다는 것도 믿을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은 메시아”라고 증언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대로 회개를 했느냐? 의 여부와 상관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이고, 그의 세례는 하늘에서 왔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지금 이 이야기에 나오는 사제들과 원로들도 그것을 인정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늘에서 왔다.’라고 대답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받지 않았고, 예수님에 대한 요한의 증언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왔다는 말을 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세례자 요한의 세례는 하늘에서 왔다.”라고 생각하지만, 생각만 하고, 실제로 회개할 마음은 없었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사제들과 원로들은 ‘하늘에서 왔다.’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께서 어떤 반응을 보이실지 예상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믿는다면서 왜 나에 대한 그의 증언은 안 믿느냐?”가 그들이 예상한 예수님의 반응인데, 그들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지 못해서 난감해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에게서 왔다.’라는 말도 하지 못합니다. 세례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는 군중이 돌을 던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우리가 보기에는 딱하게만 보이는 상황입니다. 아주 단순한 질문인데도 그들의 머릿속은 너무 복잡합니다. 자기들이 얻게 될 이익과 손해를 계산해야 하고, 변명과 핑계도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은 ‘군중이 두렵소.’ 라는 말입니다. 사제들과 원로들은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군중만 두려워했습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죄입니다. 만일에 그들이 참으로 하느님을 두려워했다면 단순한 질문에 단순하게 대답할 수 있었을 것이고, 복잡한 상황은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르겠소.”라는 그들의 대답은, 대답이 아니라 대답하기를 회피하는 말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말한 것은, 자기들을 구원해 주려고 하시는 목자를 피해서 달아나는 어리석은 태도입니다. (그들의 모르겠다는 말은, “관심 없다. 알고 싶지 않다.”라는 뜻으로 한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말은 영혼 구원에는 관심이 없고,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이익에만 관심을 가지는 그들의 태도를 드러내는 말이 됩니다.) “나도 ......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라는 예수님 말씀은, 그런 그들에게는 말해도 소용이 없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포기하신 것은 아닙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언급하신 것은, 당신의 권한이 하늘에서 왔음을 밝히신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안 믿으려고 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반문의 뜻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어려워서 못 알아들은 것이 아니라 안 들으려고 해서 듣지 못한 것입니다. 따라서 “나도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라는 예수님 말씀을, “왜 이렇게 마음과 귀를 닫아 놓고 있는 것이냐?”라고 안타까워하시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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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문사에 있으면서 좋은 점은 매주 신문을 정독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2개의 연재물이 끝났습니다. 호명환 신부님의 ‘프란치스칸 영성’은 66회로 마감되었습니다. 김혜경 교수님의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의 한 장면’은 61회로 마감되었습니다. 저는 두 연재물을 읽으면서 ‘권위’에 대한 생각을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하고, 보잘 것 없고 사제도 아니었던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무너져가는 교회를 부탁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가난과 정결 그리고 비움으로 무너져가는 교회에 신선한 영성의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오상’의 은총을 주셨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교회라는 ‘틀’에서 벗어나 우주적인 그리스도를 찬양하였습니다. 꽃과 나무, 나비와 벌이 하느님을 찬양하는 생태적인 신앙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우리는 모두 한 형제요, 자매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종교, 민족, 국가, 신념, 체제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의 한 장면’은 권위의 또 다른 모습을 전해 주었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권력을 가지려 할 때, 교회가 높은 첨탑과 제도의 그늘에 머물러 있을 때는 부패와 타락이 생겼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을 때는 교회의 권위도 조금씩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러나 교황이 다스리던 영토를 내어주었을 때, 세상의 권력에서 멀어졌을 때, 가난한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을 때 교회는 비로소 영적인 권위를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연재물은 ‘예루살렘 공의회, 트리텐트 공의회’와 더불어 교회를 영적으로 쇄신했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마지막으로 다루었습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가 세상에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는 공의회가 아니었습니다. 처음으로 교회가 바티칸의 창문을 열고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경청하는 공의회였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교회가 먼저 쇄신되어야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권위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어디에서 왔을까요? 예수님의 권위는 하느님께로부터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입니다.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며 “이는 내 마음에 드는 아들,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말이 들렸습니다. 타볼 산에서 거룩하게 변모하셨을 때입니다. 이때도 하늘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말이 들렸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힘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십자가’에서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십자가’를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 없는 권위는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습니다. 십자가 없는 권위는 바람 앞의 등불과 같습니다.
21세기에 우리가 대림시기를 지내고, 성탄을 이야기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그것은 과학과 기술만으로는 우리 앞에 놓인 문제를 해결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전쟁, 폭력, 살인, 범죄, 욕망은 과학과 기술로 해결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구는 인류에게 충분한 자원을 마련하였지만 인류의 욕망을 채우기에는 부족하기 마련입니다. 두 번에 걸친 세계 전쟁, 식민지 지배의 탐욕을 우리는 경험했습니다. 지금도 난민, 테러, 환경오염, 가난, 질병, 굶주림이 우리 삶의 주변에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겸손을 이야기하고, 사랑을 이야기하고, 자비를 이야기 합니다. 영성의 시대를 살면 원시인류였어도 감사하며 행복할 수 있습니다. 욕망의 시대를 살면 21세기의 풍요 속에서도 우리는 빈곤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을 과학과 기술 그리고 법칙과 질서로만 살아간다면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과학과 기술의 옷을 입더라도 우리는 영성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지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아직도 ‘성탄’을 기다리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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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부산 분도명상의 집) 박재찬 안셀모 신부님]
<마음의 눈이 먼 우리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요?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마음의 눈이 멀었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시기에 누구로부터의 어떤 권한을 받으실 필요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때때로 우리도 마음의 눈이 멀어 예수님의 뜻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세상의 논리나 편견으로 함부로 판단하고 자신의 뜻을 고집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하며 주님의 자비를 청하도록 합시다.
찬미 예수님! 오늘은 성녀 루치아 축일입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오늘을 루치아 성녀의 축일로 기억하는 분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성녀 오틸리아의 축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왜관 베네딕도 수도원 수도자들은 12월 13일 하면 루치아 성녀 축일보다는 오틸리아 성녀 축일을 더 먼저 떠 올립니다. 왜 그런고 하니,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은 성 오틸리아 연합회 소속이기 때문입니다. 베네딕도회는 다른 수도회와는 달리 왜관 수도원과 같은 단위 수도원이 독립된 수도원입니다. 그런데 이런 독립된 수도원들이 하나의 연합회를 형성하여 서로 연대를 하고 있는데, 상트 오일레엔 연합회는 17개의 크고 작은 수도원들의 연합체 입니다. 이런 연합회가 전세계적으로 21개 정도 있습니다. 독일에 모원을 둔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는 성녀 오틸리아를 주보로 모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날은 대축일로 지내며 오틸리아 성녀를 특별히 더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루치아 성녀와 오틸리아 성녀의 생애를 보다 보니, 두 분의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먼저 귀족 출신이고 동정녀였다는 것 외에도 성녀들의 성화를 보면 두 분 모두 눈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눈동자를 들고 있거나 눈이 성화에 나타납니다. 왜 그럴까요? 루치아 성녀의 경우는 모진 고문 속에서 심지어 눈 알을 뽑히는 고통을 당합니다. 그런데 천사가 뽑힌 눈 알을 가지고 나타나 끼워주어 다시 보게 됩니다.
성녀 오틸리아는 태생 소경이었습니다. 그런데 12살에 주교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을 때 기름을 바르자 눈이 열리고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소경이라고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결국 아버지는 오틸리아 성녀를 위해 수도원을 지어 주고 수도생활을 물신 양면 돕게 됩니다. 마음의 눈을 뜨지 못하고 태생 소경인 딸을 수치스럽게 여겼던 그가 이제 영적인 눈을 뜨고 주님을 바라보며 회개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틸리아 성녀와 루치아 성녀를 통해 많은 눈 먼이들이 치유되었으며 두 분 모두 소경들의 주보 성인이 되셨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두 성녀이 축일을 맞아 복음에서도 마음의 눈을 뜨지 못하고 제대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채 세상의 논리와 자신들의 관습에 따라 예수님께 그 “권한”을 묻는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눈 먼 인도자였기에 예수님은 그 어떤 권한도 필요하지 않은 모든 권한의 원천이신 하느님이심을 몰라 보았던 것입니다. 가만히 오늘 복음을 묵상하다 보면 우리 역시 본다고 하지만 자신의 편견이나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주님의 뜻을 제대로 알아 보지 못하는 영적으로 눈 먼이로 살아갈 때가 많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가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고 말하지 않으면 삼킬 듯이 다가와 묻고 따지며 뜯어 고치려 들며 하느님의 뜻을 잊어 버리곤 합니다.
저도 예전에 저희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의 표어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는 “Lumen Caecis, 소경들에게 빛을” 이라는 표어를 외치며 1884년 안으로는 정주하는 베네딕도회로서 동시에 밖으로는 선교하는 수도승으로 새로운 소명을 수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유럽의 베네딕도회 수도승들은 아프리카와 아시아로 선교 파견을 떠나게 됩니다. 그런데 저는 처음에 “소경에게 빛을”이라는 표어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유럽인들이 보기에는 아시아나 아프리카 사람들은 눈 먼 소경이고 유럽인들이 빛을 준단 말인가? 사실 아시아 인들도 이미 진리를 찾고 보고 깨닫고 보고 있지 않았는가! 본다고 하는 그들이 제대로 보고 있는가? 단지 먼저 복음을 알았다고 해서 그들은 눈 뜬 이들이고 우리 아시아 사람들은 눈 먼이들인가? 기분나빴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아시아 사람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표어가 제국주의적 산물 같아서 기분이 나쁜 것도 잠시였습니다. 저도 소경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장님입니다. 본다고 하지만 보지 못하고 듣는다고 하지만 듣지 못하고 느낀다고 하지만 느끼지 못하고 제가 보고 듣고 알고 느끼는 것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저는 주님의 빛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는 것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소경은 우리 모두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지 못하면 여전히 우리는 자신 안에 갇혀 어둠 속을 헤매이게 됩니다. 영의 눈을 뜨지 못하면 여전히 우리는 지금 보이는 것만 보려고 할 뿐, 자신이 보는 것을 보지 못하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며 자신의 감옥에 갇혀 있을 뿐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것을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눈을 감고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합니다. 지금도 눈을 감고 아무 것도 보려 하지 않는 우리를 향해 “소경에게 빛을”하고 외치지만 이 미사가 끝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저 똑같은 하루를 보내며 새로운 것을 보기를 두려워 합니다. 자신 안에 갇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상처 받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랑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새로움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지금 이렇게 있는 것이 익숙하고 편안합니다. 용서를 구하고 화해하기 보다는 그저 지금 이렇게 있는 것이 낫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러고 있는 모습을 주님께서 보시기에 기뻐하실까요! 마음의 문을 닫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내 맘대로 해도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자신의 삶의 영역에 갇혀 사는 것을 주님 보시면 좋아하실까요?
사실 아무 것도 아닌데 오해와 불신과 자존심이 스스로를 그렇게 감옥에 가두고 문도 없는 그 감옥에서 나오라 해도 안나옵니다. 참 불쌍한 영혼입니다. 그저 건강이나 돌보며 남은 생애 더 마음 아프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 감옥을 나오면 더 자유로운데 안합니다. 주님보시기에 정말 너무도 안타까운 마음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오늘 루치아 성녀는 자신의 이름처럼 이런 우리에게 주님의 빛을 전해 주고자 합니다. 오늘 오틸리아 성녀는 눈 먼 우리에게 이제 그만 눈을 뜨고 화해하고 용서하며 자신의 감옥에서 나오라고 하시는 듯합니다.
주님, 닫혀진 우리 마음에 당신 빛을 비추어 주소서.
과거의 감옥에서,
사람의 감옥에서,
자아의 감옥에서 저희를 구해 주시고,
당신만을 바라보며 참된 사랑 안에서 자유롭게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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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한승훈 안드레아 신부님]
<우리의 판단 기준은 무엇입니까?>
부제품을 받기 전 영성수련을 받았습니다. 30일 동안 주님과의 깊은 만남을 통해 각자 삶의 방향을 얻었습니다.
그 중 한 친구의 말이 유난히 기억에 남습니다. “하느님의 시선 앞에서”라는 말이었습니다. 친구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어떻게 보시느냐를 생각하며 살아가겠다고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제들과 원로들은 예수님의 권한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를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인지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인지에 대해 반문하십니다. 그들은 고민에 빠집니다. 하늘에서 온 것이라 하면 믿지 않은 것에 대해 비난 받을 것이고, 사람에게서 왔다하면 군중들이 거세게 반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른다고 회피합니다.
사제들과 원로들의 고민에는 하느님이 없습니다. 오직 여론에만 촉각을 세우고 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고 율법에 충실한 그들이었지만 그들의 판단은 하느님이 아니라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례자 요한을 인정하지 않았고,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시선을 무시하고 오직 사람들의 시선만을 의식하는 사람은 진리가 눈앞에 있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당신의 권한에 대해 말씀해주시지 않은 이유입니다 우리의 판단 기준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입니까? 아니면 사람입니까?
살아가면서 우리는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합니다. 그것은 삶의 방향을 결정짓습니다. 신앙인의 판단기준은 사람의 시선이 아니라 하느님의 시선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시선만을 의식하여 결정한다면 우리의 삶은 진리를 향하지 못합니다. 성령이 충만한 힘찬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시선 앞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오늘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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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상호 세례자요한 신부님]
<“예수님은 무슨 전능으로 사람들을 가르치시는가”>
우리들은 오늘 들은 복음에서 “예수님은 무슨 전능으로 사람들을 가르치시는가”라는 백성들 원로들의 질문을 듣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는 권한을 하늘이 주었는가, 사람들이 주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그 질문의 대답을 복음서는 들려줍니다. “하늘이 주었다고 하면 왜 믿지 않는냐고 할 것이고 사람이 주었다고 하면 군중이 두렵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었다고 복음서는 이곳저곳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카파르나움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이 매우 놀랐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루카 4.32)
또 한번은 더러운 악령더러 명령하시니 악령들이 떠나갔습니다. 그러자 모두 깜짝 놀라 수군대며 말하였습니다.
“이게 웬 말이냐, 이분이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들도 떠나가는구나." 그러니까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권위가 있는 것을 알아 차렸는데 그 반대로 예수님을 시샘하던 사람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그래서 어리석은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무슨 전능으로 이런 일을 합니까.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습니까"
권위가 있는 말은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나를 납득시키고 그래서 내가 동의하도록 만들며 감동을 자아냅니다. 권위가 있는 말에는 강제적인 윽박을 지르던지 나를 위협하던지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자발적으로 그 말씀에 따라 가도록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때로는 나를 부끄럽게도 만들지만 대개는 나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말들이 권위가 있습니다. 권위가 있는 말을 사람들은 듣고 싶어 합니다.
그 반대로 권위가 없는 말은 사람들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강제와 무력과 압력과 고함과 처벌을 동원하여 억지로 사람들을 움직일 수는 있겠지만 자발적으로는 권위가 없는 말을 따라 가지 않습니다.
자발적으로 사람들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는 말을 우리는 잔소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잔소리를 사람들은 듣기 싫어합니다.
권위가 있는 말은 존경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옵니다. 예를 들어서 마더 데레사의 말에는 권위가 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의 말씀에도 권위가 있습니다. 비록 조용히 그리고 나긋나긋 말씀하시지만 사람들을 그 말씀에 빠져들도록 만듭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정치인들의 말에는 권위가 없습니다. 권력자들의 말에는 권위가 없습니다. 힘은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무력이지 권위가 아닌 것입니다.
악령도 그 명령을 받들고 또 카파르나움 사람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예수님의 가르침은 권위가 있다고들 하는데 우리에게도 그러합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나에게 위로가 되고 희망이 되고 또 삶의 힘이 되어 준다면 그 말씀은 우리에게도 분명히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이 내 귀를 스쳐 지나는 잔소리로 들린다면 우리들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권위를 찾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오늘 복음의 원로들처럼 저 가르침은 하늘에서 온 것일까 땅에서 온 것일까 하며 어리석은 질문을 반복할 것입니다.
권위 있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귓전을 지나서 우리들의 마음속에 늘 자리 잡기를 청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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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불신자에게 유보된 예수의 정체>
대림시기에 봉독되는 복음의 주요 내용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고 했다.
첫째는 메시아의 도래와 현존이 가져오는 징표들에 관한 내용으로서 예수께서 메시아로서 병자와 소경을 치유하고, 죄인의 죄를 사하며, 억눌린 백성들을 배려하고 위로하는 내용이다.
둘째는 메시아적 징표들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요구하는 내용으로서 그 태도는 믿음과 불신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을 선택할 경우 하느님 나라의 보장을 받는다.
셋째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를 대조하는 내용이다. 둘 다 구약성서에 계시된 자들로서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를 위한 특사요 선구자로, 예수는 야훼의 고난 받는 종이요 메시아로 예언되었다.
이들 주요내용을 잘 이해하는 방법으로 그 날의 독서로 대부분 봉독되는 이사야 예언서와의 연결을 도모하도록 권유하였다. 이제 대림 제3주간의 복음은 모두가 세례자 요한과 관련된 것이다.
복음은 메시아의 도래를 위한 선구자로 세례자 요한을 등장시키고 그의 정체성을 밝히면서 광야와 요르단강에서 회개의 설교와 세례를 베풀게 한다. 그러나 복음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따라서 복음은 선구자의 중요한 역할을 부각시키면서 그 이상으로 메시아의 정체와 권위가 출중함을 보여준다.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복음이 우선 메시아를 준비하는 요한의 선구자적 역할을 보도하고, 그 다음에 메시아의 역사적 도래, 그리고 메시아의 활동을 단순히 시간상의 순서로 열거하려는 목적만 가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복음은 특정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언제나 영향력을 가진다는 말이다. 그래서 메시아 예수의 ‘이미 오심’을 준비하는 세례자 요한의 선구자적 역할은 인자(人子)의 ‘다시 오심’에로 연장될 수 있는 것이다.
좀 더 다른 각도에서 이야기해 보자. 역사적 사건의 측면에서 볼 때, 세례자 요한의 선구자적 역할은 메시아 예수의 공생활로 말미암은 신약의 시작으로 끝나며, 신약은 그리스도 예수의 메시아적 역할, 즉 공생활, 수난, 죽음, 부활로 끝난다.
그러나 구세사적 측면에서 볼 때, 요한과 예수의 역할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지속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시공을 초월할 수 있는 두 분의 역할은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경륜 속에 하느님 스스로가 세례자 요한과 아들 예수에게 부여한 사명과 권한 때문이다. 이 사명과 권한이 두 분의 역할과 활동을 인간구원과 관련하여 정당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오늘 복음이 바로 그 권위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예수의 권위에 대한 예수와 백성의 지도자들 사이에 벌어진 논쟁의 정확한 시점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후 이틀째 되는 날이다.
마르코복음에서는 사흘째 되는 날로 편집되었다.(마르 11,1-33) 논쟁의 원인이 되는 ‘이런 일’이란 예수께서 입성 직후 행하신 성전정화사건을 말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행하신 예수님의 전체 행적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예수님의 권한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하느님으로부터의 권한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직접적인 답변을 회피하시고, 그들이 알아듣기 훨씬 쉬운 방법을 택하신다. 그것은 바로 세례자 요한의 권한에 대한 반문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을 믿고 회개의 세례를 받았지만 백성의 지도자들과 대사제들은 세례자의 말을 믿지 않았다. 예수님의 반문이 그들을 진퇴양난에 빠트려 ‘모르겠다.’는 대답을 얻어냈지만, 사실상 그들은 속으로 세례자 요한을 불신함으로써 예수까지도 불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르겠다.’는 대답은 사실상 직무유기에 해당한다. 대사제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무엇이 하느님의 일이고 무엇이 아닌지를 분별하여 백성들에게 제시해야 하는 임무를 가진 자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세례자 요한의 권한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함으로써 자신들의 직무를 다하지 못함은 물론, 예수가 누구이며, 어떤 권한으로 지금까지 놀라운 행적을 해왔는지에 대하여 알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된다.
이렇듯 불신자에게 예수님의 참된 정체성은 유보된다. 예수님의 대답은 적어도 말씀을 들으려 하고 받아들이려 하는 자에게만 주어진다.
이에 선행되어야 할 일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세례자 요한에 대한 신뢰이다. 세례자 요한을 통하여 일어나는 하느님의 사건에 대한 믿음 없이 예수께 대한 믿음을 얻기란 힘들다.
우리 중에 세례자 요한에 대하여 모른다고 말 할 사람은 없다. 오늘날 세례자 요한이라는 인물과 그의 선구자적 역할과 활동을 신뢰한다는 것은 곧 메시아의 탄생을 준비하는 회개와 쇄신의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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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성탄이 곧 다가옵니다. 이제 열흘 남짓 남았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발라암은 신탁을 통해 선포합니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민수 24,17)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권한에 대한 논쟁을 전해줍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이 주님을 두고 저울질을 합니다. 곧 예수님의 성전정화에 대한 권한을 따집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요?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마태 21,23)
원래 ‘권한’ 혹은 ‘권위’를 말할 때, “권”은 저울을 말한다고 합니다. 저울의 눈금은 어느 것이 딱 들어맞고, 어느 것이 딱 들어맞지 않는 것인지를 판가름해 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저울은 ‘하늘’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저울은 사람의 저울과는 사뭇 다릅니다. 사람의 저울은 물건의 경중을 가려서 판가름해 내지만, 하늘의 저울은 “하늘의 뜻”을 따르고 있는지를 판가름해 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이 주님을 두고 저울질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반문하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마태 21,25)
그들은 자신들의 대답이 가져올 위험을 생각하며 망설였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모르겠소.” 하고 대답합니다. “모르겠소.”라는 이 말마디가 가슴을 쿵 내리칩니다. 이는 진실하지도 솔직하지도 못하고, 비겁하고 위선적이고, 눈치 보며 회피하는 계산적인 평소의 나의 말마디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둠에 가린 제 마음을 질책하십니다. 가려진 거짓을 들추시고, 제 오만함을 꼼짝달싹 못하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죄를 일깨워주십니다. 제가 저 자신의 저울로 예수님을 저울질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는 오늘도 제 자신의 저울로 다른 이들을 저울질하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게 합니다.
사실, 타인을 저울질 하다가, 제 자신이 저울질 당하게 됩니다. 은밀히 감추어진 속내가 드러나게 됩니다. 오만함으로 쌓여 있는 속셈이 들통 나게 됩니다. 결국 타인을 저울질 하다가, 자신이 저울질 당하게 됩니다. 사실, 저울질하는 바로 그 순간, 막상 저울에 올려 진 이는 타인의 눈치를 보느라 가려진 제 자신의 위선의 무게일 뿐일 것입니다. 그러니 오만함과 자신의 속셈과 거짓과 위선으로 치장하고 있는 자신을 들여다보고,이제는 저울 위에 타인을 올려놓기보다 자기 자신을 올려놓아야 할 일입니다.
이제는 남을 저울질하기보다, 자신이 주님의 저울인 “아버지의 뜻”에 합당하게 처신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할 일입니다. 오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사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타인의 권한을 따지기보다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을 따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 그에게 나의 사랑이 얼마나 필요한 지를 볼 수 있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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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마태 21,23)
주님!
타인의 권한을 따지기보다, 그에 대한 내 사랑의 무게를 따지게 하소서!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 나의 사랑이 얼마나 필요한 지를 가리게 하소서.
저울질하는 바로 그 순간, 막상 저울에 올려 진 이는
타인의 눈치를 보느라 가려진 제 자신의 위선의 무게임을 알게 하소서.
저울 위에 타인을 올려놓기보다 저 자신을 올려놓고
오만함으로 쌓여 있는 제 속셈과 거짓과 위선을 들여다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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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마태21,23)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서 가르치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의 권한을 문제 삼습니다. 그리고 그 권한을 누가 주었는지를 묻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율법 교사가 아닌데 어떻게 성전에서 가르칠 수 있느냐고 따진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고 물으시면서, 이에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이해타산하다가 곤경에 빠지자, "모르겠소." 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도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권한'은 사람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온 것인데, 백성의 종교 지도자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보지 않고 그들의 걸림돌로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지금 여기에서 그럴 수 있습니다. 자기가 만들어 놓았거나, 자기가 알고 있는 틀 안에 갇혀 있으면, 유다인들처럼 율법이라는 형식의 틀에만 갇혀 있으면, 다양한 형상이나 표징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주님'을 알아보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합니다.
우리의 눈, 보이는 것 그 너머의 것을 볼 수 있는 우리의 '영적인 눈'이 열려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성녀 루치아 축일'입니다. 영명축일을 맞이한 모든 자매님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루치아(Lucia)는 '빛' 또는 '광명'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영적인 눈이 열려, 삶의 자리에서 주님을 만나고, '그리스도의 빛(광명)'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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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묻지 마라>
마태오 21,23-27 (예수님의 권한을 문제 삼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서 가르치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하였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우리에게 말할 것이오.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 하자니 군중이 두렵소. 그들이 모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니 말이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묻지 마라>
네가
뭔데
나에게
이러느냐
묻지 마라
내가
바르면
그대로 가면
되고
내가
그르면
바르게 바꾸면
될 뿐이니
네가
뭔데
나에게
이러느냐
묻지 말고
다만
나를 살피라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낯선 지역을 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예전에는 지도를 펼쳐놓고서 어떻게 가장 빠른 길로 갈 수 있는지를 공부했지만, 이제는 전혀 공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비게이션이 정확하게 목적지로 안내해주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어느 신부의 차를 탔는데, 내비게이션에서 안내하는 대로 운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따르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나는 내비게이션을 믿지 않아.”라고 말합니다. 즉, 막히는 곳으로만 안내한다면서 아는 길의 경우는 내비게이션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오히려 더 늦게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내비게이션을 믿지 않은 결과입니다.
믿어야 내비게이션을 잘 활용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주님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주님을 믿어야, 하늘 나라에 가는 길을 잘 안내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이틀 동안 성전에 들어가셔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말씀을 경청하였고, 이로써 예수님을 하느님이 보낸 예언자로 굳게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말씀을 전하신다는 것은 곧 성전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교에서 수학하지 않았고 법적으로 교사 자격을 얻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은 이스라엘의 그 어떤 율법 학자보다도 뛰어났습니다. 율법 학자들은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는 생활 방법을 가르쳤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구원을 가져다주는 복음을 전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인 대제관, 율법 학자, 원로들은 이 교도권 문제를 문제 삼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마태 21,23)라고 질문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도 질문하시지요.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마태 21,25)
그들을 곤란하게 만드는 질문이었습니다. 하늘로부터 온 것이라고 하면 그들 자신이 세례자 요한을 배척했으니 하느님께 불충한 자가 되는 것이고,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모두가 요한을 예언자로 믿고 있는 터에 자신들이 법적으로 처형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빠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거짓 예언자는 돌로 쳐 죽여야 했고, 참 예언자를 거부하는 행위도 같은 벌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르겠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도 믿음이 없는 이에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말해 주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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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초 안에 불행해지는 법>
60초 안에 불행해지는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친구를 떠올린 다음, 그 친구와 나를 비교합니다. 특히 이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저 친구는 가졌지만, 나는 갖지 못해 부러운 것.”
60초 안에 내 자존감이 무너져 내리고 내가 쓸모없는 사람인 것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남과의 비교는 한도 끝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내 마음에 큰 상처를 주면서 우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비교만 하지 않아도 행복에 더 가까워지게 됩니다. 다른 사람은 그 사람 나름의 삶을 사는 것이고, 나도 나만의 삶을 사는 것뿐입니다. 절대 비교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비교는 남과 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하는 것은 아닐까요? 부족한 부분의 나와 이를 채워 나가는 나를 비교한다면 어떨까요? 더 이상 불행의 단어를 나의 것으로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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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소명에 응답해야 한다>
이스라엘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기적을 베풀고 말씀을 전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마태21,23). 하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반문하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마태21,25).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한 후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대답은‘눈 가리고 아웅’한 것입니다.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때로는 우리도 진실을 외면할 때가 있습니다. 아닌 줄을 알면서도 나의 이기심과 어리석음에 지배당할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는다고 하면서도 나의 뜻을 굽히지 않을 때가 있고, 때로는 내 뜻을 주님의 뜻 인양 내세우기도 합니다.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내가 그분에게 맞춰야 하지만 합리화 거리를 찾습니다. 주님을 나의 들러리로 세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생각도 그분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분 앞에는 말 한마디도 숨길 수 없습니다”(집회42,20).
이현주 목사는 “세상에서 사람이 하는 일에는 두 가지가 있을 뿐인데 하나는 주님의 일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의 일”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인으로써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사람의 일이 앞서는 것을 보면 아직도 믿음의 길이 멀기만 합니다. 빛으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면서 사람의 일을 줄이고 하느님의 일을 늘리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께서 주신 소명과 권한에 모두를 걸었듯이 우리도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알고 그 사명에 충실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기억하는 루치아 성녀는 하느님께 동정을 서원하고 결혼준비로 장만한 재물을 모두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루치아를 취할 생각을 가지고 있던 귀족은 이것에 분개하여 그가 가톨릭 신자임을 밀고하여 재판정에 서게 하였습니다. 그는 재판정에 서서 “성스러운 신앙을 지닌 순결한 마음속은 곧 성령의 궁전입니다”하며 꿋꿋이 믿음을 고백하며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루치아 성녀의 상본은 ‘쟁반에 두 눈이 담겨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루치아의 이름은 광명, 또는 빛의 의미를 담고 있는 데 그 빛을 말합니다. 루치아가 신앙의 빛이 되었듯이 우리도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영혼의 맑고 밝은 빛이 되기 위해 먼저 회개의 요청에 응해야 하겠습니다.
신자들의 유형이 여러 가지인데 ‘백설공주형'이 있답니다.‘백방으로 설치고 다니는 공포의 주둥이’랍니다. 주님의 말씀을 전하기에 바빠야 하는데 오히려 남을 흉보고 헐뜯고 욕하는 사람이지요.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원망하고, 불평불만하며 교만한 '원불교'신자도 있지요. 그런가 하면, ‘우거지’형도 있습니다.‘우아하고, 거룩하고, 지성적인’신자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데 기왕이면‘우거지 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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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꿈의 훈련, 꿈의 실현>
-루멘체치스(Luumen Caecis);맹인에게 빛을!-
오늘은 우리 오딜리아 베네딕도 연합회의 수호자인 성녀 오딜리아 동정 대축일이자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성녀 오딜리아는 순교자는 아녔지만 말 그대로 순교적 삶을 살았던 성녀였습니다. 잠시 루치아 성녀에 대해 전설적인 일화를 소개합니다.
“빛, 광명을 의미하는 ‘룩스’(Lux)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이름을 가진 성녀 루치아는 4세기초(314년) 순교한 분으로 모진 고문을 받을 때 눈알에 뽑히는 형벌까지도 받았다. 그러나 천사의 도움으로 뽑힌 눈알을 돌려 받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성녀 루치아는 이름 그대로 어둠을 밝히는 빛나는 동정 순교자로서, 시력이 약하거나 시력을 잃은 이들과 눈병으로 고생하는 이들의 수호성인으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오늘 우리 연합회의 대축일을 지내는 오딜리아 성녀와 ‘빛’이란 점에서 일맥상통합니다. 오딜리아 성녀 역시 전설적인 분으로 7세기 중엽 프랑스 북동부 알자스 지방 보주 산맥의 오베르하임에서 태어난 성녀는 후에 수녀원장이 될 때까지 참 판란만장한 고난의 삶이었습니다.
맹인으로 태어난 성녀는 세례중 성유가 눈에 닿자마자 눈이 열려 시력이 온전해 지는 기적이 일어났다는 전설같은 실화가 전해집니다. 성녀에 대한 공경은 프랑스를 넘어 독일에까지 급속하게 퍼져갔으며 16세기 이전부터 성녀 오딜리아는 앞을 보지 못하는 이들이나 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수호성인으로 여겨져 왔으며, 교황 비오 12세는 성녀 오딜리아를 알자스 지방과 시각장애인 및 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합니다.
두분 성녀 시각장애인들의 수호성인이란 점에서 일치합니다. 우리 연합회의 모토인 “루멘체치스(Luumen Caecis);맹인에게 빛을!”이란 말마디도 오딜리아 성녀의 전설적인 일화에서 근거합니다. 간절히 하느님을 열망하여 하느님을 꿈꿨기에 은총으로 눈이 열린 오딜리아 성녀임을 깨닫습니다.
모든 성인들의 공통점에 주목합니다. 성인들은 모두가 ‘꿈의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부단히 하느님을 꿈꾸는 성인들이었고 그 꿈이 실현되어 하느님을 닮은 성인이 되었습니다. 하늘 꿈, 하늘 희망, 하늘 비전은 우리 믿는 이들의 삶에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꿈이, 희망이, 비전이 있어야 비로소 참으로 살아있다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꿈을 노래한 끝기도시 찬미가중 주님을 꿈꾸게 해달라는 아름다운 한 연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잠을 자도 주님과 함께/꿈에도 당신만을 뵙게 하소서
언제나 한결같이 당신영광을/새는날 밝아올제 찬미하리라.”
더불어 주일미사후 낮기도 대신 바치는 짧은 시편 은혜로운 한 대목도 생각납니다.
“주님은 사랑하시는 자에게/그 잘때에 은혜를 베푸심이로다.”(시편127,2ㄴ)
오늘 제1독서의 주인공 이사야 예언자 역시 꿈의 사람이었습니다. 예언자이자 신비가이자 시인이였고 부단히 하느님을 꿈꿨던 말그대로 이상주의理想主義적 현실주의現實主義자였습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의 하늘 나라 꿈은 얼마나 고무적이며 우리를 격발激發케 하는지요! 바로 이런 하느님 꿈이, 하늘나라 꿈이 우리를 참으로 살게 합니다. 그대로 대림시기를 맞이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수선화처럼 활짝 피고, 즐거워 뛰며 환성을 올려라. 그들이 주님의 영광을 보리라. 우리 하느님의 영화를 보리라.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끝없는 즐거움이 그들 머리위에 넘치고,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들과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
이사야 예언자가 아니곤 어디서 이런 아름다운 꿈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는지요! 언젠가의 ‘그때’가 아니라 바로 오늘 ‘이때’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참으로 하느님 꿈을 통해 하느님을 만날 때 마음의 눈이 열립니다. 참으로 많이 강조했던 하느님을 모르고 나를 모르는 무지無知라는 마음의 병입니다. 무지에 눈멈에서 기인하는 온갖 불행이요 비극입니다.
하느님을 꿈꿀 때, 회개를 통해 하느님을 만날 때 무지의 눈이 열립니다. 참으로 회개를 통해 무지의 눈이 열릴 때 비로소 사랑과 지혜, 겸손과 진실의 사람이 됩니다.
엊그제 가톨릭 신문 복음 묵상란 제목을 잊지 못합니다. “기쁨의 훈련!”입니다. 언젠가 본 ‘희망의 훈련’이란 말마디도 생각났습니다. 죽을 때까지 살아있는 그날까지 영성훈련이 기쁨의 훈련, 희망의 훈련, 꿈의 훈련이라는 것입니다. 어찌 이뿐입니까! 감사의 훈련, 겸손의 훈련, 사랑의 훈련, 행복의 훈련 줄줄이 계속됩니다. 참으로 우리가 이런 덕목을 선택하여 부단히 훈련할 때 행복한 삶이겠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매일 평생 끊임없이 마음을 다해 바치는 공동전례기도시간은 희망과 기쁨, 겸손과 진실, 찬미와 감사의 영성훈련시간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부단히 선택하여 단련하고 키워야 하는 희망이자 꿈이요 기쁨이요 모든 영성 덕목들입니다. 이런 영성훈련의 열매가 참 풍요롭습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을 만날 때 무지의 두려움에서 해방됩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맥 풀린 손에 힘을 불어넣고, 꺾인 무릅에 힘을 돋우어라. 마음이 불안한 이들에게 말하여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하느님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바로 이것이 희망의 힘, 꿈의 힘이요 하느님의 힘입니다. 사실 희망을 잃으면 모두를 잃는 것이요 무기력하고 무감각한 죽어있는 삶이 뒤따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만날 때 깨어 살아나는 영혼이요 무지의 두려움에서 해방이요 샘솟는 활력이며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주님을 만날 때 날로 좋아지는 마음의 눈입니다. 주님을 만날 때 마음의 순수요, 밝고 맑은 마음의 눈으로 삶의 실재를 직시합니다. 복음 말씀 그대로입니다.
“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맑을 때에는 온몸도 환하고 성하지 않을 때에는 몸도 어둡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 보아라. 너의 온몸이 환하여 어두운 데가 없으면, 네 몸이 온통 환해질 것이다.”
귀한 가르침이자 깨우침을 주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만나 날로 마음의 눈이, 심안이 밝아질 때, 몸도 더불어 환해 진다는 것입니다. 눈은 마음의 거울이라 합니다. 마음이 깨끗하면 육안도 심안도 맑고 밝고 몸까지도 밝아 환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만병의 치유에 주님을 만나 마음 깨끗해지는 일이 결정적인 조건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마음의 순수 역시 훈련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을 만나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은 마음 순수의 훈련시간입니다.
주님을 만날 때 무지의 탐욕에서 벗어납니다. 집착에서의 이탈을 통한, 주님을 만난 이들에게 주어지는 참 좋은 은총의 선물이 마음의 초연함, 홀가분함입니다. 세상 도피가 아닌 세상에 살되 세상에 매이지 않은 탈속脫俗의 자유로운 깨어 있는 영혼들입니다. 참으로 품위있고 충실히 주님을 섬기는 이들에게 선사되는 축복입니다. 바오로 사도가우리 모두 초연한 이탈의, 종말론적인 삶을 살 것을 촉구합니다.
“때가 얼마남지 않았습니다.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흘러가는, 변하는 세상 것들에 집착하여 일희일비一喜一悲하거나 마음을 두지 말고, 오로지 하느님 중심 안에 정주定住의 뿌리를 깊이 내리고 하느님을 꿈꾸며, 초연하고 홀가분한 자유인自由人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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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mRNhLP1-a7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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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마태 21, 25)
색깔만
바꾼다고
그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인간에게
짓밟힌 길을
하느님께서
새롭게 하신다.
언제나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가로막는
아둔한 교만이다.
참으로 중요한
것을 또 다시
놓치며 우리는
살고 있다.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는
사람이 있다.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을 가는
사람이 있다.
사람의
이정표는
언제나
사람이었다.
깨어지는
아픔 없이는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없다.
모든 구원의
역사는 뜨거운
피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자기변화이다.
깨어지지
않고서는
벗어날 수 없다.
하느님의 뜻을
방해하는 것은
언제나 우리들
교만이다.
깨어져야 할
한 줌의
교만이다.
사람의 길은
끝이 있지만
하느님의 길은
영원하다.
영원하신
하느님께서
세례를 통하여
우리를 새롭게
하신다.
새롭게
살아나는
사랑이
참된 빛이다.
서로에게
빛을 줄 수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세례는
우리에게
빛을 준다.
다시 태어나는
세례의 기쁨이다.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세례와 성탄의
여정이다.
깨어지는 것이
자아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벗어나는 것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새로움의 초대
대림의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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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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