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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쓴 시영옥고리—장대천 화전 속 이야기 好好题诗咏玉钩——张大千画笺里的故事
2021년 06월 15일 12:20 새파수장 소스:이페어케이
출처: 베이징화원 《대장지문》 29기
민국 시대 많은 문인 화가들이 직접 전을 그렸다종이, 남쪽의 가게에 가서 그림을 주문 제작한다.문인화전은 이때 한 예술의 높이에 이르렀다.봉우리, 그리고 한 시대를 풍미하다.장대천 화백도 그림에 참여제작되어 세상에 전해지다꽃과 새와 인물의 전지가산수 위주. 그는 뿐만 아니라남방 가게를 위한 맞춤 제작이 있어전지, 그리고 셀프 노트로 그리고 광고도 내고 자신을 알린다.그는 민국 때 베이징의 청비각, 보진재, 상하이의 다지샹 등 남녘 종이 가게에 전지를 그려준 적이 있다.주로 베이징(北京)의 룽바오차이(榮寶齋)와 청두(成都)의 시비가(詩比家)가 합작했다.
1. 장대천과 영보재
영보재는 북경 유리공장의 서가에 위치하고 있다.서화계 인사들이 모여 교류하는 장소.영보재와 장대천의 관계는 19에 있다.24년 만에 입경하여교류가 있다. 그는 북경에서 일한다그림을 그릴 때는 모두 영보이다재장표구. 영보재환위주사·석청석록 등 전통국화안요. 영보재에서 일했던 고참 정무달 화백의 회상에 따르면 "화가 하나남녘 종이 가게의 종이 그림 밑그림을 꺼리는 것은 '조각벌레 잔재주'로 여겨질 만큼 시큰둥한데, 하물며 장다첸 같은 대화가도 말이다.그러나 영보재가 필요할 때는 사양하지 않았다.영보재에 굴존이 세 차례에 걸쳐 8장짜리 종이 화고를 만들어 산수(山水)와 화훼(花草)를 각각 1935년, 1951년, 1957년 각 판본 '영보재시전보(榮寶齋詩典譜)'에 실었다."
1933년과 1934년에 2년 동안영보재는 노신과 정진탁의 북평전보를 각인하고 십죽재를 복각했다.'전보'. 성공한경험을 인쇄하여 영보재로 만들다자신을 인쇄 제작할 자신이 있다기의 전보. 1935연영보재는 스스로 편집해 낸다《북평영보재》를 출판했다'시전보'는 1함 2권으로 200종의 전지를 수록했다.이 중 일부는 '북평전보'에 나오는 영보재(榮寶齋)에 새겨진 전지(紙紙)를 그대로 두고 나머지는 영보재를 거쳐 스스로 고른 그림이다.그중에서도 장대천 화전의 등재가 있다.
1935년 《북평영보재시전보》에도 있다.판본별로, 장서가 양종희, 화가 소, 금석학자 나진옥의 제첨이다.의 세 가지 버전입니다. 그래도믹스매치되는 경우가 있는데예를 들면, 함지의 서명 및표지의 제명이 완전히 맞지 않다.상황에 맞게 안에 수록하다내용도 완벽하지 않다.예. 북경화원이 소장하고 있는 《북평영보재시전보》 2부를 예로 들면소제첨의 《북평영보재시전보(北平榮寶齋詩典報)》에는 장대천 화훼전 18종, 장대천과 푸심이 합작한 산수 8종, 하집록 산수전 8종이 수록되어 있다.나진옥 문제함투, 양종의가 서명한 북평영보재시전보는 전편에만 장대천의 화훼전 6종이 수록돼 있을 뿐 화훼 문양과 소제 서판이 일치한다.
1936년 영보재는 《가화섬등》을 찍어냈다장대천 화훼전 수종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무엇을 '넝쿨 깎기'라고 합니까? '깎기'입니다.등나무는 섬현에서 생산된 것이다승주시 신창현)의 종이얇고 가벼우며 질기고 가늘고 하얗게, 윤기가 돌고 텍스처가 정교하다.양명이 높다. 서진 장화.《박물지》에 "섬계에는 고토가 매우 많아서 종이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명지가 된다.섬등(藤燈)은 "왕희지(王喜之)가 책을 지었다고 전해지는데, 시에 대한 고마운(謝靈運)은 반드시 이 종이를 사용했기 때문에 한 때 풍습이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영보재는 공무를 완성하였다사합영(私合營)은 '영보재신기(榮寶齋新記)'로 개칭되었다.1951년 3월, 영보재 신기정식으로 한 편 두 권의《베이징 영보재 신기시》전보. 전편에 수록.장다첸 화훼전 18종, 충어전 네 가지, 그리고장다첸·푸심이 합작하다산수전 8종. 1953년판 《북경영보재신기시전보》한 편지에 두 권을 120점으로 고쳤는데, 하권에는 장다첸 산수전 8종, 장다첸, 푸신 합작 산수전 3종이 수록되어 있다.1955년판 '북경영보재신기시전보(北京榮寶齋新記詩典報)'는 출간 필요 때문인지 그림전 80점만 수록됐다.장다첸 화전은 수록되지 않았다.1957년 '베이징 영보재 신기시전보(榮寶齋新記詩典報)'가 체례를 확대해 160점을 수록해 4권으로 나눠 인쇄했다.이 중 권삼은 장다첸과 푸심이 합작한 산수전 6종, 장다첸 산수전 8종, 화훼전 8종, 잡고전 8종을 받았다.잡고에 꿀벌과 게를 새로 넣는 것 말고는전도와 1935년 《북평영보재》시전보'의 내용이 일치한다.1957년 독일 베를린은 '베이징 영보재 신기시전보(榮寶齋新記詩典報)' 중 21점을 '빛나는 보물'이라는 독일어판 전보로 엮었다.이중장대천화전(張大千畵典)의 세 종류가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쌍어전(雙魚殿), 산수청급전(山水 。)이 포함되어 있다.쌍어전은 영보재 전보에 처음 등장한다.
1955년 가을, 장다첸과 푸심이 동에서 상봉하였다베이징은 슬고금촌 여관 밖에 남아 있다 1955年秋,张大千与溥心相逢于东京 留影于涩古金村旅舍外
문인묵객협동화역사상 드물지 않지만콜라보레이션은 흔치 않다.영보재 전보에는 장다첸과 푸심이 합작한 산이 수록되어 있다수화전. 일찍이 192에7년 봄에 장다첸이 푸에게 주었다북경의 옛 글자를 마음으로 알다호는 '춘화루'. 이때부터다.두 사람은 늘 글로 화답하고,예술상의 지음이 되다친한 친구. 두 사람은 1934년에 왕래가 잦았는데, 그때 장다첸이 다시 북상하였다.평. 장다첸은 북경 이화원의 청각기관에 세들어 살았는데, 그 동안 푸심과 함께 이웃으로 지내면서 시문회화와 전시회를 자주 열었다.지린성박물관은 이 시기 두 사람이 함께 그린 가작 '동자방연도'와 '추림고사도' 2점을 소장하고 있다.두 폭의 합작화가 모두 장다첸의 인물이라는 것을 볼 수 있다.하나는 왕손 귀족의 유민화가이고, 다른 하나는 남에서 경성을 들락날락하는 화가로 예술적 향수가 일치해 두 사람은 이 시기 경성에서 나날이 명성을 떨쳤다.두 사람의 화단의 위치로 유리공장 집췌산방 지배인 주전후수제 남장베이푸'의 설. 이후 1934년9월 15일 <북천화보>에서 비공식적인 글에서 "남장북부"에 대해 언급: "자기 재능 있는 사람은 특히 개성이 강하기 때문에 그의 이 강한 개성을 표현하는데, 그 특유의 학문 예술을 제외하고 그의 모습은……….결국 그의 차림새는 모두 그의 강인한 개성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장팔야(장다첸 행팔)는 야일한 사람을 묘사하고, 푸얼야오(푸신 행지)는 도회화귀하다.입장으로 말하자면, 둘째 할아버지는 팔야보다 높고, 풍류를 논하면 팔야는 반드시 둘째야옹만 못하지 않다. '남장북부'는 근래 화단에서 '남진북최' '남탕북대'보다 조금 높은 것 같다.둘째, 여덟째는 어떻게 생각하나"라고 물었다.
영보재시전보에 수록된 장·부 두 사람은 합하다이 대목은 그간의 행적을 증명하고 있다.합작전에는 '갑술춘', 혹은 '갑술춘'이라고 쓰여 있다.한옥 사촌동생이 대천과 합작하다', '갑술이월'도 있다.수천 명이 찾아와서 묵묵히 이 일을 하다책, 8월에 다시 입혀 색칠한다.'갑술년'은 19이다.34년. 콜라보레이션 전원본디 8개의 소책자 페이지로, 대부분 푸심이 경치를 그리고 장다첸이 사람을 그린다.세례 끝에 책장도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그러나 합작으로 그린 전은 실물로 '남장북부(南張北普)'의 뛰어난 서화 수준을 보여주는 것은 물론 두 사람의 잦은 교제와 두터운 우의를 증명한다.
장대천 시전보첩지본설색종27.3센티 가로 21센티 张大千 诗笺谱册 纸本设色 纵27.3厘米 横21厘米
2. 장다첸과 시비가
장다첸은 원래 촉나라 사람이다.그는 1938년 일본에서 주로 예전에는 중국 상하이와 장쑤·저장·예술·베이징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1938년 10월 충칭(重慶)으로 돌아온 장다첸(張大千)은 그해 말 청두(成都)로 이동하면서 촉을 근거지로 한 예술활동을 시작했다.1949년 10월 대만에 도착하기까지 11년째 쓰촨(四川)성이었다.촉에 사는 동안 장다첸은 쓰촨(四川)의 '시비전(詩比傳)' 작성에 참여했다.시비전은 특별한 역사적 시기에 등장한 특이한 산물이다.항전 후방인 쓰촨(四川)성에서는 문인 묵객(墨客)이 점잖은 생활을 추구하면서 시비전(詩比典)이 앞다퉈 전해진다.
'시비전'의 등장은 쓰촨제지업의 발달과 직결된다.당대에는 제지 종류가 많아져 제지 공예가 사천으로 가장 먼저 꼽혔다.촉지의 전설적인 여성 시인 설도는 부용화즙으로 꽃향기가 나는 붉은색 시전을 만들고 원진, 백거이, 유우석 등과 시를 지어 화답했다.'설타오전'도 최초의 개인 맞춤형 제작이 됐다.원나라 비용(費作)이 쓴 『촉전보』에 따르면 "광도지는 일컬어지는 것은 가산남(假山南), 이컬어지는 것은 가영(假榮), 삼컬어지는 것은 장발촌( 四村), 사컬어지는 것은 죽지(竹紙)다.모두 닥종이 가죽으로 되어 있는데, 그 눈에는 너구리가 가장 정결하다.공사부계서권, 도적, 문첩은 모두 취하여 주었습니다.1933년에 노신 선생은 거액을 쾌척했다'북평전보(北平典譜)'를 새로 인쇄할 때는 옛날부터 선지 대신 쓰촨(四川)의 '협공지'를 사용했다.
시비가는 1920년 정차청 선생이 처음 설립했다.그 이름은 《세설신어(世說新語)》 권사(權四)의 "정현가(鄭玄家)의 비녀들은 모두 책을 읽고 경을 통했다"는 데서 유래했다.시비는 쉐타오를 가리킨다는 설도 있다.그녀는 빈입악적(貧入樂籍)으로 기만하였으나, 전을 짓고 시를 쓰기로 유명하였다.장다첸은 1947년 '설도제전도'(지금 장지린성박물관)를 그렸다.그림 속 설도는 화전을 들고 서서 고개를 숙여 보고 그리운 듯 바라보고 있다.인물 모양과 채색은 둔황벽화의 영향을 받아 당당한 체형을 자랑한다.장대천을 그려 '장미곡 소매는 찌푸리고, 계발은 화색이 촉나라를 휘날린다.취연방주는 술을 마시지 않고, 술에 취해 자개를 모을 줄 모른다.너구리꽃 전지는 복사꽃 빛깔이고, 커튼 밖에는 동풍이 불어 상필이다.십리시(十離詩)에 눈물 자국이 마르고 아침저녁으로 한 마음으로 매듭을 짓는다"고 했다.
1936년 정차청 선생의 아들 정백영이 시비집을 운영하기 시작했다.표구공예 외에 목판수인(木刻水印), 서화간첩(書畵簡帖), 문방사보(文房四寶), 컬러명전(色名典) 등의 사업을 추가했다.시비가는 당시 사회 명사, 촉의 문인들과 가까웠고, '오로칠현(五老七賢)'이라 불리던 증환여(曾環如)·방학재(方鶴齋)·조희(趙熙)·윤중석(尹仲錫)·임산비(林山 、)·유예파(劉藝波) 등과 왕래가 많았다.촉의 문화 명인들이 시비집에 모여 고감금(古監今)을 품평하고 시화창화(詩畵唱和)하여 당시 문인들을 아집(雅集)으로 만들었다.항전 시기가 되자 장다첸·치바이스·서비홍·황빈홍·황군벽·풍자개·사무량 등의 명가들도 분분하였다촉에 들어와 시비가의 세련된 표구와 훌륭한 필묵이 각광받았고, 스님들은 시비가의 단골손님이 되었다.장다첸은 전시에 교통이 차단되어 화선지가 부족하자 정백영과 함께 협강에 나가 제지 기예를 연구하여 '대천서화지(大千書畵紙)'를 개발하여 국내외에 명성을 떨치기도 하였다.
장다첸칭비각제전 1934년 张大千 清秘阁制笺 1934年
장다첸칭비각제전 1934년 张大千 清秘阁制笺 1934年
1930년대 중반 '촉예사' 사장인 나문모는 북평에서 영보재 '북평전보'를, 난징에서 강희 연간에 나온 '십죽재전보(十竹齋典報)'를 구입하는 등 공을 들였다.촉지로 돌아가자 그는 정백영에게 두 전보의 모습을 본떠 자신이 사용할 종이들을 시제하게 했다.나문모의 아들 회고에 따르면 아버지는 자신을 찍은 쌍청관(雙淸館·화실명)전 편지지와 정고(靜 (·별호)함 봉투의 도면으로 장대천에게 동백(洞茶) 한 점, 인물 소품을 부탁했다.동백은 사색에 사판, 인물은 삼색에 삼판이다.정백영도 직접 참여디자인, 스케치, 복장, 복장, 인쇄까지 철저히 해 단번에 시험인쇄에 성공했다"고 말했다.이후 정백영은 촉의 화가 소품 그림을 여러 곳에 모아 틀에 박힌 전보를 만들기로 결심했다.마침내 1943년 정백영이 '시비전(詩比典)'을 만들어 『정전시보(鄭典詩譜)』(일명 '청두시비가시전보')로 선집(選集)했다.이 전보는 한 편지에 두 권으로 채색 인쇄되어 있다.전봉은 파촉의 명사 조희(趙熙)가 쓴 '정전시보(鄭典詩譜)'다.서예가는 우임에서 선수를 맡았고, 서예가는 무량하게 서문을 지었다.제1권은 고인의 명작, 제2권은 시현의 명작이다.초판 500부 모두 일련번호가 달려 있습니다.이후 시장의 공백을 메우면서 반응이 뜨거워 1945년 500부 재판에도 일련번호가 붙었다.반면 재판전봉은 서예가 심윤묵이 썼다.서문에서 감사하게도 이를 극찬하다세트전보: "지금 장서가는 촉본이 가장 오래되었을 뿐 촉중 전지제(紙紙製)인지 몰라 잘 다듬어졌고, 당 이래 금강전탁지(金江電 之之)로 시가가 읊었고, 설도(雪濤)가 작전(作電)으로도 유명하였는데, 사실 멀리 조판 전에 촉본의 책을 우중(右重)으로 보는 것이 좋았으니 전해지지 않으니 책을 존대하여 남긴 것이 아니하겠는가.정군백영(鄭君伯英)은 아호예술(雅好藝術)로 소장하고 있으며, 명화백가(名畵百家)를 가까이 두고 전보를 새겨 오닉스 모시 교답에 꼭 필요하다는 옛 뜻의 대아군자(大雅君子)의 뜻을 깊이 새겨야 한다"고 말했다.정백영이 쓴 후서에는 시비전의 경위와 새로 만든 전이 생겨난 경위가 기술돼 있다.겨우 명주와 채후가 종이를 만들었기 때문에 실속은 많다.질문이 차례로 바뀌어 박이화, 부채창, 부채창으로 옮겨져 전을 만들기 시작했다.그 원류를 논하면, 실제는 서촉으로 간다.소박하게 화려함, 문장과 멀리 있음, 부부간의 편지가 열 가지이니, 문사가 족히 나타나리라.그 최저자로는 설도전(雪濤傳)이 있고, 남북파 소리시(聲詩)가 전해지고, 암자(庵子)가 분채하(分菜夏)로 전해지는 유래가 있다.이당이라 환원하였으나 요금은 내팽개쳤으나 중은 더욱 쇠망하였으나 촉은 여러 가지 고사가 있어 찬을 지은 일은 듣지 못하였다.그 뒤에 비록 박아호고지사가 있었지만 교묘한 생각을 하며 스스로 관대하게 베풀어 좋은 일을 시켰다.그러나 오촉은 서쪽 변방에 있어 문물이 중원에 뒤떨어져 험한 산천으로 둘러싸여 있고, 필연구의 자금으로 강남과 하북의 노점상들이 많이 찾아온다.그 후에 들은 바로는 영보재, 함분루와 같은 여러 작품들은 그 조각이 정교하여 실로 감상할 수 있었으며, 선촉의 고물은 무엇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경에 예원의 명숙으로 놀러 온 사람들이 저벅저벅 책을 메고 민아, 시언 향현 등을 끌어모으고 함께 어울리며, 바람이 불고 구름이 몰려와 장관을 연출하였다.남은 그릇된 사람은 지팡이에서 꽤 벗어나, 책과 먹의 분장을 하고, 옛날의 정을 남긴다.도혜는 여러 집안의 회화를 습득한 후에, 전보를 만들어 멀리 결말을 구하고, 근집시진, 전작을 계승하여, 부디 문한의 전설이 널리 퍼지고, 정강이가 없이도 국내외에 널리 퍼져, 스스로 수색을 하였다.나. 여러 해를 넘기고 널리 수확하여 모두 모았으니, 찬연하고 아름다워 지금의 옛일을 생각해 보겠다.명작들은 모두 백지를 얻었고, 집결소도 좋았지만, 감히 자기 진가를 누리지 못했다.삼가 미나리를 바쳐 예림에 상을 드립니다.현달을 바라보면 다행히도 좋은 일로 여기지 않을 수 있다"고 전했다.이 전보의 제판자는 대읍 여해여(餘海如)·화양 진택천(陳澤川)이고, 인쇄자는 청두(成都) 장비영(張比榮)·장여경(張如敬)이다.전화의 저자로는 항전으로 입천한 진수인(陳樹人), 량중밍(梁中銘), 량우밍(梁友銘), 정만타(鄭萬多), 관산월(關山月), 황군벽(黃君壁), 조망운(趙望雲), 방훈(方勳), 양향생(楊鄕生), 채패주(蔡培珠), 선운평(線雲平), 오아지(吳雅之), 천우천(張大千), 류예파(劉藝波), 여흥공(餘興公), 장채석(張蔡 、), 오수이(張蔡 、), 장채근(목판 수인(水印)의 수준은 대체로 항일전쟁 전 베이징·상하이와 같다.그중 장대천 화전 6점: 화훼전 4종(행화전·장미전·난화전·삼어전 포함), 인물전 2종(평안보시전·천리일지서전 포함)을 수록하고 있다.이 전은 모두 版판의 컬러풀한 인쇄로, 색채가 우아하고 디테일이 살아 있다.화훼전 4종은 '북평영보재시전보(北平榮寶齋詩典譜)'에 모두 나와 있는데, 인장에만 '정씨제(鄭氏制)'를 넣어 차별화했다.
흥미로운 것은 장다첸이 1948년 4월 '비엔티안·십일화보'에 '평안보시전(平安報時傳)'을 '전화선(傳畵選)' 광고로 게재했다는 점이다.비엔티안·십일화보는 1948년 4월 15일 장시뤄·왕쯔미가 청두에서 창간했다.왕쯔미가 편집장을 맡고, 목각가 서숙과 제자 데이아브가 제판 인쇄를 맡았다.화보는 만화를 무기로 국민당의 암흑통치를 비판한 간행물로, 엽천여, 랴오빙형, 딩총, 장러핑, 셰취성, 장원위안, 가오룽성, 왕쯔메이 등의 작품을 다수 실었다.장대천이 모사한 둔황벽화·장선자의 '정기'노래'도 모두 실렸다.그러나 간행물은 6회밖에 출간되지 않았고, 여러 사정으로 그해 6월 30일 이후 폐간해야 했다.
이후 시비가는 장다첸을 위해 따로 그림 전을 찍어주기도 했다.1946년에 인쇄된 《대천거사근작십이탱》이 그것이다.이 그림 세트는 제본이 되지 않았으며, 여전히 글씨가 무량하다.화훼작품 12점(연봉마름각전·모란전·옥잠전·가지·죽전·석류전·난전·국전·훤화전·동백화전·연꽃전·비파전 포함)을 수록하고 있다.다만 이 화첩은 색채가 너무 농염하고 아취가 부족해 편지지로서의 본래 취지를 잃고 원화면 색채를 따르고 있어 '영보재신기시전보(榮寶齋新記詩典報)'와 스타일이 비슷하다.훗날 1950년대에 이르러 사천 목각가 서숙평이 의지하였다이 그림책을 다시 새기고 인쇄한 것을 보면 촉의 예술가들은 대천 그림에 대한 애착이 식을 줄 모른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시비가는 국유화되었고, 장다첸의 화전을 찍어내기도 하였다.1960년대 사녀·사자·풍경·짐승·꽃 등 12장의 그림이 각인된 바 있다.그러나 이 세트지는 더 이상 채색 목판 워터마크가 아닌 단선으로 그려져 구리 카트리지의 그림 그리기 기술에 영향을 주는 스타일에 가깝다.예를 들어 루쉰이 《북평전보(北平典譜)》에서 "처음 동을 새기는 자를 위해 묵합을 만들고, 읍지를 그어 원고를 조각하고, 기성탁묵을 만들어 아취가 넘친다.오래지 않아 그 기량을 회복하여 재주가 왕성하고, 간결하며, 또한 칼부림을 당하지 않도록 하는 데 있어서, 시전은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1980년대에 이르러 이 화전은 다시 복각되었지만,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없다.
3. 장대천의 주문서
남녘 종이 가게에 종이뿐 아니라 장다첸도 자신과 친구를 위해 메모를 작성했다.나 자신을 위해 만든 '아심여기(我心如記)'전처럼 '대천거사제전(大千居士製典)'과 매화전(梅花典)을 그려 '대천거사용원인법(大千居士用元人法)'을 스스로 주안(主案)했다.
시중에서도 장다천이 친구를 위해 만든 각종 개인전(私家傳)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현대 장초의 일인자' 라복칸이 그린 석류전 같은 모습입니다.제목 : "그가 입을 여는 것이 부럽다.복암 사생을 위하여. 대천"이라고 썼다.쓴 시구는 운평의 《석류책》에서 나왔다.뤄푸칸은 평생을 권세가를 잘 사귀지 못했고, 친구들 대부분이 예술계 인사로 장다첸(張大千), 치바이스(齊白石), 쉬페이훙(徐悲鴻), 매란팡(梅蘭芳), 청옌추(程秋秋) 등 그와 친분이 두터웠다.넷째 형인 장문수(張文修)를 위해 영보재에서 정제한 채색처방전 2종도 있다.하나는 살구꽃 전으로 '살아 있는 사람이 살구를 심고, 이행시인(易行施人)', 하나는 '향명견심(向明見心)' 전이다.장원슈는 쓰촨의 4대 명의 중 하나로, 상해 함락 후 북평과 장다첸에 가서 함께 살았다.당시 떠돌던 난민들은 그의 무상으로 치료받는 경우가 많았다.그는 일본 당국은 도쿄에 가서 사람을 보내 주십시오, 그는 의학을 강의하게 됐다. 의연하고 사퇴장다첸은 이를 위해 특히 넷째 형을 흠모하고 의사에게 존경하는 의미로 직접 전지(紙紙)를 만들었다.
4. 장대천 그림의 사용
장다첸도 자신의 그림 전을 이용해 지인들에게 편지를 썼다.그가 야오윈장에게 보낸 편지라면 장다첸(張大千), 푸신(富心心)이 합작한 산수전(山水傳)을 썼다.'운강 선배 족하: 연일 그림 빚에 핍박받다가 손발이 뻣뻣해지고 숨도 못 쉬어 찾아뵙게 되어 죄악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죄가 심하오나! 소척목권. 어제 먼저 오셨던 것을 보고 안쓰러운 마음에 진덕형제를 데리고 내려오시기를 바랍니다.제자가 칠일 동안 남행하면 마땅히 다시 모여서 이야기해야 한다."장다첸은 야오윈장(姚雲江)과 같은 상하이(上海)의 '형양서화학사(刑陽書畵學社)' 소속이며, 증희와 리서청의 제자로 편지에서도 두 사람의 교분이 각별함을 알 수 있다.이외에도 그가 바다에 썼다.화단에 오른 명가 왕사자의 편지에는 영보재에서 만든 살구꽃전, 연꽃전이 사용됐다."사자도장형께: 앞에 한 권 올립니다.인물의 산수는 먼저 8탱으로 적는데, 만약 표구가에게 잘 부탁하면 더욱 좋다. 동생의 뒷모습이 모두 빛나기 때문이다.사녀는 약 일주일 후에 그림을 그릴 수 있다.어린이 류상하이 방면에는 6백 위안이 필요하니, 매우 급하니, 맨 선형에게 물어보면 알 것이다.만약 아직 마련하지 않았다면,동생보다 먼저 윤자 중에 바로 그것을 배상할 수 있다.하지만 어린 야나기에게 알리지 않는다"고 말했다.편지 속에서 장다첸은 셰치류와 친분이 두터우며, 금전적으로 사심이 없이 도와 이름을 남기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장다첸이 전각가 간금재에게 보낸 편지는 '평안보시전(平安報時典)'으로 썼다.간결한 화풍의 화전은 장대천이 쓴 행초서와 잘 어울린다.
장다첸의 자작전 외에도 민국시대 문인들이 장다첸을 사용한 사례가 있다.상하이도서관 장민국 때 형단이 우후판에게 보낸 편지처럼 장다첸 산수전을 썼다.형단은 농상부 광정국장, 공상국장, 일반문관징계회 위원, 수습회의 대표, 정형형 광무국 총판을 거쳐 1928년 이후 한가로이 지냈다.한가한 나날을 보내고 우후판과 함께 예술을 논하는 편지였다.또 상하이도서관 장민국 소장가 리셴공(李宣公)이 절친한 친구인 우후판(吳湖凡)에게 보낸 편지는 장다첸롄화전(張大千蓮花傳)을 썼다.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에도 많은 문인 묵객들이 장다첸의 그림을 사용해 왔다.칭화대 예술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1978년 명청사 전문가 셰궈정(謝國亭)이 작가 탕치(唐 的)에게 쓴 '정당칠언시고'에 장다첸(張大千)의 난초전을 썼다.편지에서 두 사람은 황경인의 《양당헌시》를 읽은 감발을 탐구하였다.
이선공, 오호범 손자영보재 제작전 상하이도서관 소장
邢端致吴湖帆手札 荣宝斋制笺 上海图书馆藏
5. 장대천 그림의 특징
전반적으로 장다첸의 그림 전은 그의 그림 스타일의 영향이었다.내용은 대부분 고사와 산수, 매란죽국 등이다.청초하고 탈속적인 문인화전(文人畵典)은 제백석(齊白石)의 묘미가 살아 숨쉬는 민속풍의 그림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장다첸의 화훼전, 먹을 뿌린 연잎에 살짝 잎맥을 그려 넣으니 정신이 번쩍 든다.백하건 홍하건 붓놀림이 흔들리고 매화, 난초, 장미 등은 꽃의 자태를 간결하게 묘사한다.장다첸의 화훼는 청등백양의 사의, 팔대산인의 냉엄함, 석도의 필묵, 금농의 의취와 같이 고대 여러 집안의 장점을 널리 취하였다. 그는 일찍이 석도가 천강화훼를 그리는 것을 특별히 언급하였다: "청상화훼훼훼채소와 과실이 특히 준수하다. 백양, 청등소굴에 빠지지 않고 우뚝 독립한다………먼저 수묵을 주니, 후롱이 얕고 강성이며, 개역산수법이다.남전이 나오자 법은 사라졌다"고 말했다.장다첸이 그린 화초는 대부분 석도를 이용하여 먼저 수묵을 쓰고, 그 위에 꽃을 덮는다청·홍갈색의 방법, 이외에 그는 운도 섞었다수평몰골화훼의 신선함과 아름다움, 기법에는 덮개 염색과 몰골이 뒤섞여 있으며, 수려하면서도 골법이 청명하여 그의 임고·모방·변고화풍의 전범이다.판각판과 컬러 커버를 쉽게 하기 위해 전화를 그릴 때도 이 화법에 치중했다.
그림 전은 자폭이 한정돼 있어 예술적 효과는 밑그림뿐 아니라 조각판과 채색 인쇄에도 나타난다.따라서 밑그림을 간략하게 하고, 적은 수의 붓으로 물상을 표현하는 구조를 통해 시적 경지를 조성하고, 점잖은 기운을 전달해야 한다.영보재(榮寶齋)에 소장됐다가 장마당에서 사라진 《북평영보재전보(北平榮寶齋典報)》에 나오는 화훼전(花 的) 장대천팔장(張大千八章)의 원고가 보인다.연꽃, 수선화, 복숭아꽃, 베고니아, 부용, 비파, 대나무, 난초 등 8가지 다른 꽃채소와 과일을 그려 청초하고 은은한 색상으로 조화된 배치를 자랑합니다.화가는 창작할 때 이미 목판 워터마크의 기술적 난이도를 생각해 네댓 가지 색상으로만 몰골법으로 지척에서 꽃의 자태를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그림의 취지에 충실하고, 다만 화면 통일을 위해 먹색인 발문을 옅은 남색, 옅은 갈색으로 고친 것이다.이렇게 편지를 쓸 때 색깔도 뺏기지 않는다필획을 쓰고 시한을 그리는 풍조가 인간적이다.장다첸의 산수화 전은 대부분이다모조품은 제재와 그림의 취미가 모두 옛것을 따르고 기개가 있다필묵보다 운(運)의 경영이 많고, 문인(文人)의 수양(養養)과 내실(內實)이 있어 자연스럽고 우아한 풍모를 보여준다.
장다첸 화전은 화면에 잘 맞춰 고서시나 자가제시가 있는데, 문의가 얕고 화려하지 않은 것도 장다첸의 고서사 소양을 반영한다.이는 제백석이 주로 경고의 의미, 탁물언지의 발문을 한 것과 다르다.예를 들어 1935년 《북평영보재시전보(北平榮寶齋詩典報)》에서 해당전은 '낙엽은 산발적으로 울리고 서풍은 노안변서리를 분다.돌맹장은 한밤중에 의지할 사람이 없고, 남은 반딧불이 해당화를 비춘다."연꽃전 제목인 청대 포화의 시구는 "고사는 결벽증이 있고 미인은 야용이 없다"고 했다.수선화 전 제목 : "옥패소인강 올라가고 금비련여객중 오라"도화전 제목: '여린집 술기풍, 몇 군데서 봄을 찾아 옥총마를?소년이 야유하던 일을 기억하며 한 가닥 꺾어 담장 동쪽에 있었다"고 말했다.황촉규전 제목은 '외롭게도 이슬이 초췌하고, 가을 거위가 이마에 깊이 박혀 있다'다.비파전 제목 : "옛날에 비파 두 글자는 없고 비파로 통했다.돌밭 비파의 열매를 맺는 시는 초등학교를 이해하지 못하기 위함이다!"가을바람과 가을비가 내리는 강 언덕, 달빛 가득한 한가로운 술잔이여." 난초전.미뤄 물을 양손으로 떠서 누런 먹물을 갈아 이소(異所)를 그린다"고 말했다."남조는 여기서부터 궁체를 자랑하였으니 첫째는 역시 살구꽃이다."1943년 『청두시비가전보(成都詩比家典報)』 인물전 제목인 남송(南宋) 육유시구(陸遊詩句)는 "천리만리 종이책 한 권, 은문망병(恩問亡病病)"이다.1946년 '청두의 시비가전보'에서 옥란전 제목에 "운희희희, 연기가 희미하고 선인은 오수의를 새로 입고 웃으며 옥비를 기뻐한다"고 쓰여 있다.《북평영보재시전보(北平榮寶齋詩典報)》에 나오는 산주방청급전(山主房淸給傳), 모율전(毛栗殿), 춘도전(春桃殿)은 장대천(張大千)의 시문(詩文)은 물론 수석공(壽石工)의 시문(詩文)을 곁들였다.여모율전(如毛栗傳)에 나오는 장대천(張大千)의 제목은 "손님이 오셔서 아침과 저녁의 흥취를 말하려고 삼인서(三 "徐)가 백옥장(白玉 ")"이다.수석공이 배합한 제목에 '백옥장이 이러하니 새벽에 또 과자, 주덕공환, 남중모율, 허습상'이라 하였다.객구철필. 을해팔월."춘도전에 나오는 장다첸(張大千)은 "무릉춘감우(武陵春感雨), 옥동효명하(玉洞曉明夏)"라고 썼다.수석공은 "옥동명하효, 선원식우춘, 풍문무릉인들에게 물으니 쌍도근잎이 있어 신음한다"고 덧붙였다.'산주방청납'의 전기석공은 "두 냥은 작고, 과가는 대팽을 치고, 서로 초명은 밝다.전가의 풍미가 좋으니, 무소를 마시며 술잔을 기울인다.구절." 두 사람은 서로 어울리며 그림 속 의경을 완벽하게 맞췄다.필자가 찾아본 세 장의 그림 원고는 1992년 4월 홍콩 소더비 경매에 나왔다.원화첩은 8절지로 우제호를 풀 때마다 예서와 도장이 중복되지 않아 그림을 그릴 때의 세심한 정성을 충분히 알 수 있다.그러다가 1935년 옛 경예우(京藝友) 수석공(壽石工)에게 오절시(五絶詩)라는 제목을 붙여 그를 붙였다.원래 화첩이 횡판, 화전이 세로판인 것을 보면 영보재를 위해 장다첸이 그린 그림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그림의 화면에 따라 가로로 세로로 바꾸고 구도가 바뀌며 화면 내용도 약간 취사선택했지만 전체적인 스타일에는 영향을 주지 않았다.
장대천 张大千《菜单 — 白豆腐干》
판권 관념이 덜 무르익던 시기, 영보재, 청비각, 시비가에서 장대천 화전을 찍어내는 경우가 있었다.팔대산인의 화법을 본뜬 삼어전, 모란전, 살구화전처럼 같은 원고를 쓰지만, 인쇄 수준을 놓고 보면 고하의 차이를 알 수 있다.1934년 청비각에 의해 인쇄된 화전은 잎맥 흐름의 필치, 작은 낚싯줄의 맞물림, 색의 청아함, 수묵의 층위가 더 세세한 부분에서 더욱 중시되었다.
작은 그림 한 장이 시, 책, 그림, 인쇄를 아우른다고 할 수 있다.쓰지는 않았지만 그 자체가 한 폭의 작품이었다.그래서 문인묵객들은 각기 다른 그림으로 지금의 심경을 쓰고 기록하는 것을 즐겼다.화전, 작전, 작전, 장전 역시 풍아한 옛일을 이루며 후대의 발굴을 기다리고 있다.
(본 글의 저자는 북경화원 이론연구부 부연구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