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좋은 일과 나쁜 일, 옳고 그른 일, 싫은 일과 좋아하는 일 등에도 시시비비하지 않으며 경계에 끄달리지 않고 그저 묵묵하게 如如하여야 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宗敎는 최상의 가르침이며 佛敎는 그 최상을 확철하게 깨달은 분의 가르침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최상이라 하겠습니까.
최상이라 함은 곧 중도입니다.
붓다(깨달은 분=부처님)의 가르침은 곧 중도입니다.
중도란 중앙도 아니고 변도 아니며 중앙과 변을 모두 다 아우르는 것이라고 말씀들은 잘 합니다.
그럼에도 중도를 실천하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이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가르침인 최상의 가르침을 받아 배우고 있는 불자들이 죽은(죽는)공부만 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업식이 기타 등등과 같아서 쉬지 못하고 들뛰는 업식을 갖고 있기에 그 업식의 성품을 쉬면서 잘 관조하여 죽이는 공부를 하였다면 이제는 그것을 잘 살려내서 적재적소에 유효적절하게 사용을 해야 함에도 내 발등에 불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느껴지는 일에는 모르쇠로 일관하니 그런 공부는 해서 무얼 하려고 하십니까.
죽는 공부는 차라리 안하니만 못한 것입니다.
그런 공부를 무엇때문에 어렵사리 하는 것입니까.
그냥 살아도 아무런 문제도 없고 그누가 뭐라고 했거나 말거나, 그누가 애를 쓰든 말든 그런 것은 언제나 그냥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나 불자로써 마음공부를 하는 분이라면 누구나가 무슨일이든지 그러 그러하지만 어떻게 하여야 중도를 펼치며 살게 되겠는가를 공부하여야 한다고 봅니다.
이것의 결실이 지혜의 완성이라고 하는 반야바라밀이 되는 것입니다.
입으로 외워서 말로만 마하반야바라밀이라고 외쳐서 그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중도란,
주먹을 쥐어야 할 때와 펴야 할 때,
누울자리와 서야 할 자리,
말을 해야 할 때와 말을 하지 않아야 할 때 등등을 명확하게 구별하고 그것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말을 하고 행동을 해야 할 때에 말을 못하고 행동을 하지 못하는 것은 중생의 대표적인 퇴굴심때문입니다.
그렇게 용기가 없는 사람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나가겠습니까.
물론 밥은 먹으니까 죽지는 않겠지요만 그와같이 사는 것이 과연 바른불자의 삶이며 누구든지 주인됨이며 선자리가 곧 진리의 자리로써 살아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경계에 끄달리지 않을 것이라고 괴롭고 싫어도 싫다는 말도 못하고
더워도 부채질도 못하며 추워도 옷을 껴 입지 못하며
살아서는 눕지 못하고 죽어서는 앉지를 못하니
과연 이러함이 붓다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이런 말씀을 올리는 이유는,
이까페의 회원불자님들 대다수가(물론 아닌 분들도 많이 계십니다) 죽은 공부만 하고 있어서 옳은 일과 그른 일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인지 모두다 하나같이 입을 봉하고 있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경계에 여여해야 한다고 하는 없는 경계를 만들어서 다시 거기에 매여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일에 여여해야 한다는 경계,
세상일을 초탈하여 그런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는 경계,
이런 따위를 경계로 삼고 그것에 끄달리지 않아야 바르게 공부하는불자인 줄로 착각을 하고서 세상일에 그저 묵묵부답하고 나몰라라 하는 모르쇠가 되니 이렇게 돼서야 불자들이 마취제를 맞고 누워있는 사람과 무엇이 다르다 하겠습니까.
붓다께서 가르치신 중도는 적극적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도 최상의 최선을 다해서 살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일을 바르게 보고 바르게 판단해서 잘 회향되어지도록 적극적으로 최선을 다해서 살라는 말씀입니다.
다만 모든 일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제행이 무상한 것이니 시시각각 찰라찰라로 변해가지만 육신의 몸을 갖고 사는 우리로서는 지금 이찰라를 가장 수승하게 느끼고 있어야 하며 그렇게 느낀 것을 수승하게 행하는 것이 중도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까페 게시판에 올라오는 글들은 거의 다 좋은 말씀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중에는 운하에 대한 말씀들도 여러차례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화계사 주지로 계시는 수경스님이 대표적으로 대통령 당선자에게 충고하는 글을 올리셨습니다.
나는 수경스님이 환경론자라서 운하에 반대하신 말씀이 아니라 전체적인 면으로 보시고 하신 말씀으로 판단합니다.
또한 어떤분(행인님인가요)께서 꾸준하게 운하를 반대하는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물론 불자님들은 나름대로 운하에 대한 반대운동을 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마는
우리까페(염화실)에서의 반응은 아까 지적한대로 대다수 분들이 다 모르쇠입니다.
과연 운하따위와 같은 세상일은 나하고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니 나몰라라 하는 모르쇠 정신이 불자의 바른 태도이며 그것이 경계에 여여한 중도라고 하겠습니까?
비단 이번 운하에 관련한 일이 아니더라도 그렇습니다.
무슨 까페가 요즘 트렌드인 영어로 말해야 하는 까페도 아닌데 옳지 못한 일들에 말이 나왔을 때 모두가 함구하며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는 것에 각별한 조심을 하는 것 같으니 시시비비를 그렇게 무서워 해서 어디 시시비비를 가릴 눈을 갖출 수 있겠습니까?
시시비비가 다 나쁜 것이 아닙니다.
시시비비에 집착해서 논쟁을 하던 회원들 사이에 나쁜 감정을 갖는 것이 문제지 옳고 그름을 논하지 못하고서야 어떤 다른 것을 이정표로 삼아서 길을 간다 할 것입니까?
그래서 시시비비를 적극 권장하는 파사현정이라는 말도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이런 공부는 죽은 공부입니다.
죽는 공부는 하지 않아도 때가되면 저절로 죽어지게 돼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 것을 무엇때문에 애써 좌선을 하고 애써 절하며 경을 외고 염불을 한다 하겠습니까.
죽어본 사람이 있다면 예전의 삶이 자신만의 아집을 위해서였다면 이제는 寂寂惺惺으로 다시 되살려 펄펄뛰는 삶으로써 회향되게 살아야 자신의 삶도 알차게 되며 타인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주어 다함께 호호탕탕한 삶으로 회향되어지지 않겠습니까!
죽어보지는 못한 사람이라도 때가 이르르면 저절로 죽어지는 것이니 이제는 惺惺寂寂으로 죽은(죽는) 공부는 그만 하시고 활발발하게 사는 공부로써 나와 자연을 포함한 남에게 이익이 되는 하루를 살아도 천년을 산 것과 같이 密密한 삶을 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옳다고 판단되는 일에는 적극적으로 동참해서 그때그때의 시시비비를 안으로 관조하면서 내공부도 하면서 세상에 이익이 되는 삶으로 회향되도록 자세를 바궈보실 것을 적극 권합니다.
이글을 보시고 "네가 뭔데!" 하면서 기분이 나빠지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기분나쁘게 하려고 쓴 글 아닙니다.
여러분들과 함께 기분좋게 살려고 쓴 글입니다.
우리 함께 잘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아보십시다.
첫댓글 '어떤 경계와 와도 끄달리지 않는' 부처님의 참지혜의 생각해봅니다. 개인적으로 처리할 여러가지 일들이 있고, 함께 힘과 지혜를 모아야할 일들이 있는데, '운하'와 같은 일은 제가 생각하기에 팔만대장경을 조성하던 대몽항전보다 더 심각하게 우리가 당대에 맞이한 환란인 것 같습니다. 문제는 항거해야 할 대상이 칼을 들고 우리에게 달려드는 병사가 아니라 우리의 탐욕과 어리석음을 교묘히 이용해 속이고 있는 '그럴싸한'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운하가 맞지 않다는 것은 그 애초 시작이 빠른 물류수송이었다는 목적에 있습니다. 빠른 물류수송은 비행기이면 족합니다.
경계에 끄달리지 않는 지혜라는 것은, 경계 속에서 경계와 함께하지만 그에 물듦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피하는것이 능사가 아닐진대 적극적으로 대처해서 땅파는것 만큼은 말려야 할 일입니다.
심산님, 저는 당연히 님의 글에 동의합니다. 그렇지만 대처하는 방법에 있어서 저는 침묵하는 이들에게보다, 갈등의 소지를 몰고오는 이들에게 더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까페 활동을 이 공간 안에서만 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들은 항상 고요한 이들의 분열을 조장합니다.
갈등을 어째서 피해야 하는 것입니까? 갈등을 피해야 한다는 대명제가 있습니까.갈등이 오면 같이 갈등하는 가운데에서 활로를 열어가야지 피한다고 하는 공부는 유위법을 닦는 것임을 아시기 바랍니다.불교를 바로 믿을 때 비로소 불교가 되는 것입니다.불교는 오직 유일하게 무위법이라고 하지요. 갈등,나쁜 것이 아닙니다.피한다 해도 금새 다른 경계가 기다리고 있지요.
필요없는 것을 왜 모든 것을 갈아엎으며 굳이 하려는 것입니까? 갈아엎어 없어지는 모든 것 속에는 생명존중의 불자들의 모든 이상이 다 담겨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 까페에 운하찬성의 글들, 그것을 주도하는 자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글들을 옮겨오는 분들이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이 공간안에 그런 글들은 올리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그분들의 글에 댓글을 달아서 그분들의 의도에 말려들고 싶어하지 않는 많은 침묵의 말도 읽습니다.
침묵의 말이라는 것은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일 뿐! 운하파기에 말려들지 않으려고 하기보다는 반대를 해야 함에도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은 死句禪의 대표적 병폐로써 문자에만 천착을 했지 문자가 가르치는 방향을 보지 못했으며 그냥 그렇게 주저 앉은 소식이지 딴게 아닙니다.내 말에 동의하지 못하시는 분들이 계신다면 앞으로는 산공부를 하시기 바랍니다.
아...제가 말려들기를 했군요. 참회합니다.
피하려고 하고 멀리하려고 하는 것이 이 염화실 까페의 가장 큰 병폐입니다.온라인상에서 말입니다. 온라인상에서 보여주고 있는 이런 공부는 공부가 아닙니다. 말만 번드르르 하지 피하고 말고 할 것이 없는 줄 알면 그속에서 함께하며 일체화돼 가는 것이 깨달은 가르침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심산님처럼 불교에 해박하지 못해서 불교적인 용어를 잘 사용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적극적인 현실참여라는 미명하에 이 카페와 회원들을 모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 카페는 정법을 선양하고 배우는 곳입니다.
하하하~~에스더님, 불교용어를 잘 아는 것이 자랑할만한 것도 못되지만 불자가 불교용어도 모른다면 그것도 자랑할 일은 아니라고 보며 오히려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 아닌가요? 염화실이 정법을 가르치는 도량인 줄 알기에 하는 말이라는 생각도 해보셔야지요. ^^ 지금과 같이 마음에 안드는 글이 올라오면 댓글을 다는 것처럼 부디 산 공부를 잘 해 나가시기 바랍니다.이렇게 오고 가는 생각 속에서 은산철벽을 뚫고 나아갈 힘과 활로를 찾을 수 있는 것이랍니다.
에스더님의 말씀에 한표!심산님의 말씀에 한표!
숭례문, 대운하댐 돌아 걸어보니, 많은글들 내놓았네요,, 이런저런 표현이 다를뿐 , 불교공부가 죽은 공부라 하심은 좀그렇습니다, 우주파장은, 소리로만 들려지는게아니라, 마음의파장까지도 감지해내는 안테나 같은것 아닐까요?...즉,소리내지않음이어도 ,, 좋고 옳은 파장 쪽의에너지가 많고 긍정적이면, 그곳으로 움직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 그저 ,자연의 소중한생명 훼손이 염려되어서 하시는 말씀인줄 잘 압니다 ~
연등님에게는 새색시가 올리는 절을 올리겠습니다. ^^*
오해를 하실까봐서..새색시 절을 한다는 말은 연등님의 생각이 고개도 잘 못드는 얌전한 새색시 같다는 뜻으로 갓 시집을 온 새색시도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그집 가풍에 맞게 적응해서 씩씩하게 제 할일을 하면서 살게 마련이 아니던가요.ㅎㅎㅎ
제목에 "누구든지 죽은 공부하는 사람들은 보시오" 라고 했습니다. 나도 염화실 까페를 크게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며 무비 큰스님을 존경하는 사람입니다.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비단 운하뿐만 아니라 매사에 그렇다는 말입니다.입이 있어도 밥먹을 때만 쓰는 입이라면 그것이 동물의 입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생각이 있어도 말하지 못한다면 생각이 없는 것과 무엇이 다르다 하겠습니까? 생각이 없는 것과 다르지 않다면 무정물과 무슨 차이가 난다 하겠습니까? 부디 펄펄하게 살아 숨쉬는 산 공부를 하시기 바랍니다. 경계에 휘둘리지 않을 것이라고 해서 경계를 멀리하려거나 떨쳐내려는 짓은 항하사를 크기별로 나누것과 같은 일입니다
살아있는 공부를 하시려면 온라인상에서만 머리를 조아리며 굽신거리지 마시고 무비큰스님 설법하시는 곳에 직접 참석해서 살아 숨쉬는 법문을 직접 들으시고 무비스님이 그렇게 죽는 공부를 가르치시던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일부러 죽어지려고(경계를 멀리 하려고 말도 하지 않으며 떨쳐내려고 애쓰지 않아도) 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저절로 죽게 마련이니까 우리 모두 다 펄펄하게 산채로 산공부를 하며 사십시다.
부처 있는 곳에 머무르지 말며... 부처 없는 곳은 지나쳐 가라..!! << 금강경 공부 하고 있습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 _()_
말씀하신 바라면, 부처 있는 곳은 어디이며? 부처 없는 곳은 어디 입니까? 그걸 먼저 알아야 머물든지 지나쳐 가든지 할 것 아니겠는지요? 한말씀 기다립니다.
열반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두두물물이 개유불성이라고 하셨으니 모든 것에 불성이 있다는 말씀이고 고타마가 정각한 후 첫 일성이 "모든 중생에게도 나와 똑같은 지혜의 덕상(불성)이 갖춰져 있구나" 라고 했다는데 부처가 있는 곳과 없는 곳을 일러서 같이 탁마토록 해 보십시다.
에너지 넘치시는 님의 글에 덩달아 .. ^^ 집착하는 고것이 참~ 묘하지요._()()()_
부석님, 얼토당토 않는 말씀을 하신 것을 알고 계시지요? 나는 부석님처럼 그렇게 알지 못하고 "수처작주 입처개진" 이라고 알고 있으며 그와 같으니 누구들처럼 애써서 응무소주이생기심 하는 것이 아니고 저절로 응무소주이생기심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어떻게 그러느냐고 묻는다면, 곧 타면 문득 타고 곧 내리면 문득 내려서 그렇다고 말씀드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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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다리카님에게는 김여사님에게 올리는 절을 합니다.김여사가 어떤 분인가 알아보시려면 포털 검색창에다가 김여사 하고 쳐 보시기 바랍니다.그럼 거품인 걸 애써가며 기억하지 않아도 거품인 줄로 아시는 분이 되기 바라면서...
주금강을 들어보기는 했지요? 덕산이 금강경소초를 써서 짊어지고 다녔던 것도 아시지요? 그렇게나 똑소리났던 덕산이 어째서 공짜로 준다는 노파의 떡을 먹지 못하고 쫄쫄 굶은 채 욤담을 찾아갔을까요? 말은 손가락질이라고 얼마나 많이 말씀을 하시던가요? 손가락직이 진실인 줄 알고 가리키는 달을 보지 못하면 입으로는 부드럽게 말하는 것 같지만 거칠고 사나운 마음만 드러내게 되는 것이랍니다.
불자는 용맹스러워야 합니다.사나우라는 말이 아닙니다.당당해야 한다는 말입니다.즉심즉불이라고 가르쳤던 마조가 제자 대매가 잘 산다는 말을 듣고서 그의 살림을 알아보고파서 시자를 보내서 "그전에는 즉심즉불이라고 하셨는데 지금은 비심비불이라고 하십니다" 라고 시켰더니 대매화상 왈, "그 영감탱이가 헛소리를 하시는 가보구나 누가 뭐래도 나는 즉심즉불이다!" 라고 하였다는 소리를 듣고 매실이 잘 읽엇다고 했습니다. 말을 따르지 않아야 그 말씀하신 분의(부처님이든 무비스님이든) 의 뜻을 계합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고작 불자들 간에 시비가 일어날 것을 우려하고 그로써 자신의 마음이 다칠 것을 염려하며 상하게 될 것을 조심해서 자신이 공부한 것도 내비치지 못하고 산다면 그걸 무슨 공부라고 하겠습니까.불자 아닌 사람들도 다 그렇게 잘 살고 있습니다.불자라면 최소한 불자가 아닌 사람들 보다는 좀 더 진취적으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앞에서 드러내 놓고 말도 못하면서 뒷담화나 하는 것은 아녀자나 하는 짓거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불가에는 예로부터 남녀 승속 귀천을 불문하고 불자다운 사람이 훤칠대장부라고 하는 줄을 아시기 바라며 얌전한 분들에게 얌전만이 능사가 아니고 말할 자리에서 할말도 하지 못하고 사는 것이 불자의 삶이 아니
라는 말씀입니다. 부처님(위없이 높게 깨달으신 분)의 가르침을 배우고서도 무슨 일에든지 뜻을 밝혀서 세상에 이익이 되도록 회향시키지 못하고 말도 한자리 응대하지 못하는 것으로 세상 경계를 넘으려는 분은 참불자의 공부가 아니라는 뜻으로 드린 말씀입니다. 그럼 이만 편안하시기 바랍니다.(용맹과 겸손은 상반되는 말이 아닙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부석님의 귀에 달갑지 않았나보군요. 내가 어찌 부석님의 생각을 만류하려 하겠습니까.그게 편하다면 그리 하시지요.
허허허~~ 하는 걸 보니 부석님으로 환생한 루미나님을 대하는 것 같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