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아함경> 안에는 6입처를 심연생으로 뿐 아니라 6근과 같은 것처럼 설하는 내용이 적지 않다.
이 말은 6입처는 마음 법 또는 존재하는 법 두 가지로 설하고 있는 게 된다.
이곳에서는 6입처는 6근과 다른 마음 법으로만 집중하니.. 6입처를 6근과 같은 존재라 하는 것은 배격하는 것이 되는데..
왜 석가세존께서는 마음이라 하면서 존재라고 하신 것일까?..
6입처를 존재처럼 설하는 경을 보면..
273. 수성유경(手聲喩經)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이 때 어떤 비구가 홀로 고요히 사색하고 있었다.
'어떤 것을 나라고 하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그는 선정에서 깨어나 부처님 계신 곳에 나아가 머리를 조아려 그 발에 예배하고 한쪽에 물러나 앉아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혼자서 어느 고요한 곳에서 '어떤 것을 나라고 하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이제 너를 위해 두 가지 법에 대해 설명하리니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여라. 어떤 것이 그 두 가지인가?
안과 색이 둘이요, 이와 성·비와 향·설과 미·신과 촉·의와 법이 둘이니,
이것을 두 가지 법이라고 하느니라.
비구야, 만일 어떤 이가 '사문 구담(瞿曇)이 말하는 두 가지 법은 둘이 아니다. 내가 이제 그것을 버리고 다시 두 가지 법을 세우리라' 하고 말한다면, 그것은 말만 있을 뿐이다. 여러 차례 질문하고 나면 알지 못하고 그 의혹만 더할 것이니, 그것은 대경(對境)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안(眼)과 색(色)을 인연하여 안식(眼識)이 생긴다.
비구야, 그 안(眼)이라는 살덩어리이고, 그것은 안[內]이며, 그것은 인연(因緣)이고, 그것은 단단한 것이며, 그것은 느끼는 것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안(眼)이라는 살덩어리 안의 지계(地界)라고 한다.
비구야, 안(眼)이라는 살덩어리에서 안이요 인연이며, 촉촉한 것이요 윤택한 것이며, 이것은 느끼는 것이다. 이것을 안(眼)이라는 살덩어리 안의 수계(水界)라고 한다.
비구야, 그 안(眼)이라는 살덩이에서 안이요 인연이며, 밝은 것이요 따뜻한 것이며, 이것은 느끼는 것이니, 이것을 안(眼)이라는 살덩어리 안의 화계(火界)라고 한다.
비구야, 안(眼)이라는 살덩어리에서 안이요 인연이며, 가볍게 요동하는 것이고 이것은 느끼는 것이니, 이것을 안(眼)이라는 살덩어리 안의 풍계(風界)라고 하느니라.
비구야, 비유하면 두 손이 합해서 서로 마주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나니, 이와 같이 안과 색을 인연하여 안식이 생긴다.
이 세 가지가 화합한 것이 촉(觸, 3사화합)이니, 촉이 함께 하면 느낌[受]·생각[想]·의도[思]가 생긴다.
...
안(眼)에서와 같이 이(耳)·비(鼻)·설(舌)·신(身)도 마찬가지이며, 의(意)과 법(法)을 인연하여 의식(意識)이 생긴다.
<273. 수성유경> 내용은.. 식을 생기게 하는 2법 가운데 안.이.비.설.신 5내입처는 존재하는 4대로 만들어진 것이라 하여 색.성.향.미.촉 5경과 같은 존재로 본다.
그러기에 안과 색 등 12처를 마음에서 생긴 것이라고 제기했을 때..
<273경>처럼 12처를 6근6경과 같은 것으로 설명하는 경을 제시하며 반론을 펼칠 뿐 아니라
12처를 심연생으로 설하는 내용은 드문 것을 보며..
심연생은 후대에 삽입한 것이라는 주장을 은근히 깔았다.
그에 대해 세상은 여전히 12처는 6근6경과 같은 것으로 취급한다.
그 이유는 12처를 6근6경과 같은 것으로 여겨도.. 불교를 이해하는 데 걸림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면 12처는 심연생임을 보아야 한다는 주장은 왜 사라지지 않는가?.
12처는 심연생임을 이해할 때 지금 여기서 완전한 열반[구경열반, 반열반, 무여열반]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12처를 6근6경으로 알면 살아서는 유여열반이요, 힌두교에서 처럼 죽은 후에나 완전한 열반이 가능해진다.
만일 12처가 마음을 연해 생긴 것이라면..
12처를 6근경과 같은 존재처럼 설하는 <273. 수성유경>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석가모니께서 완전한 열반을 성취하기 전 모습을 상기하면 된다.
곧 석사모니 수행자가 최고의 명상 수행을 하고 6년 고행을 했지만 구경열반을 성취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12처를 6근경과 같은 것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었다.
법을 성취한 후 내가 이룬 법을 사람들이 깨치기 어렵다고 한 이유는..
그들은 12처를 6근경과 다른 심연생임을 깨치는 게 정말 어렵다는 것을 스스로 체험했기 때문이었다.
하여 제자라고 해도.. 누구에게나 심연생을 가르치지 않고..
심연생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른 자들에게만 설했을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으리라.
세존이 입멸한 후 12처가 심연생임을 이해하고 스스로 깨친 자는 점점 더 줄어간 것 같다.
하여 <잡아함경>이 문자로 수집정리될 지음에는 심연생을 깨친 자는 거의 없었던 같다.
그래도 12처가 심연생임을 경에서 뺄 수는 없어.. (내가 아는 한) 니까야에서는 거의 다 빼 버렸지만.. 마치 맹장처럼 흔적을 <잡아함경> 안에 남겨 놓은 것으로 보인다.
12연기법을 보면.. 무명으로 시작한다.
무명은 어디에 있는가? 마음이거나 마음에 있지 아니한가..
무명을 연해 생긴 행이라면.. 역시 마음이어야 하고.. 행을 연해 생긴 식은 당연히 마음이고..
식을 연해 생긴 명색[名色, 이름과 모양]은?. 마음에 생긴 게 아닌가?.
그런데 이름이 생겼다면.. 그것은 이제 존재하는 것처럼 된다.
자연에는 계절 따라 수많은 꽃들이 핀다.
그 가운데 어떤 꽃을 '진달래'라고 이름을 지어주면.. 이제 진달래 모양[색]과 이름이 하나가 되어..
꽃들 가운데 존재가 된다.
하늘에 있는 수많은 별 가운데 '북극성'이라고 이름을 지어주면.. 밤하늘에 북극성은 존재가 된다.
맨 처음 안과 색과 안식이 만나 장미라는 모양에 이름을 지어주면..
그 후부터는 장미를 보는 안근이 된다.
맨 처음 식을 연해 명색이 생기면, 그 명색을 연해 새 식이 생기는데..
두 번째부터 식[나]과 명색은 존재처럼 자리한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법은 내가 아니요, 영원한 것이 아니니, 이것은 무상한 나요, 영원하지 않고 안온하지 않으며 변하고 바뀌는 나이니라. 왜냐 하면 비구야,
그것은 이른바 나고 늙고 죽고 사라지며 태어남을 받게 하는 법이기 때문이니라.
비구야, 모든 행(行)은 허깨비와 같고 불꽃과 같으며 잠깐 동안에 다 썩는 것으로서 진실로 오고 진실로 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비구야, 공(空)한 모든 행에 대해서 마땅히 알고 마땅히 기뻐하며 마땅히 기억해야 한다.
공한 모든 행은 항상 머무르고 변하거나 바뀌는 법이 아니다.
공(空)에는 나[我]도 없고 내 것[我所]도 없느니라.
만일 12처를 6근경과 같은 것으로 여기면서도..
무상과 무아를 깨쳐 지금 여기서 구경 열반을 성취할 수 있다면..
그 무엇이 문제리요.
대승불교의 핵심은..
12처를 6근경과 같은 것으로 여기면서..
지금 여기서 구경열반을 성취할 수 있다는 불교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