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환기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코튼에 유채, 236×172cm, 1970년
김환기(1913-1974)가 1970년 제1회 한국일보 주최 한국미술대상전에 출품하여 대상을 차지한 한국현대미술의 기념비적인 작품입니다.
송진유에 청색 유채를 묽게 풀어서 병에 담아 두고, 그것을 붓끝에 묻혀 점을 찍고 네모로 둘러싸고, 또 그렇게 되풀이해 나가고…. 마치 화선지 위에 올리는 수묵화의 선염(渲染)처럼 한 점의 물감은 흰색 목면의 바탕으로 스며들거나 번져서 그 얼룩의 표정이 제 각각 어느 것 하나도 같은 것이 없습니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화제(畵題)처럼 앞날을 알 길 없이 얼룩점 하나하나가 한없이 잇대어져 되풀이되고 있을 뿐입니다.
뉴욕 시기에 이 추상 점화(點畵)를 작업하면서 김환기는 점 하나하나를 찍으며 고향의 그리운 얼굴들을 생각하였습니다. 그의 고향이란 태어난 전남 신안군 안좌도, 살았던 서울, 떠나온 한국입니다. 그 점들은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길 없는 친구들, 그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뉴욕의 밤하늘 아래 고향의 그리운 얼굴들을 점 하나하나로 떠올리며, 뭇별로 가득한 어느 성좌와 같이 무수한 점들로 가득 찬 깊고 푸르고 아름다운 공간을 열어 갑니다.
점 하나하나가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인연들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분명 수많은 '인’(因)과 '연’(緣)들이 만나 생성된 저 점 같은 순간들이 잇닿고 서로 기대면서 또 다른 새로운 만남을 낳을 것입니다.
김환기는 이 그림을 구상할 때부터 친구 김광섭의 시 ‘저녁에’를 늘 마음속으로 노래하였다고 합니다. “한국일보사로부터 내신. 한국미술대상전람회 제1회에 출품 의뢰. 출품하기로 맘먹다. 이산(怡山 : 김광섭) 시 ‘저녁’을 늘 맘속으로 노래하다. 시화 대작을 만들어 ‘한국전’에 보낼까 생각해 보다.”(1970년 2월 11일 일기. 김환기 에세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324쪽에서)
저녁에
김광섭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이산 김광섭(怡山 金珖燮 1905-1977)은 대표작 ‘성북동 비둘기’로 유명한 시인입니다. 1989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이산문학상'을 제정하여 매년 시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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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소개하면서, 덧붙여, 사람과 사람의 '인’(因)과 '연’(緣)이 어떻게 엮어지는지 시인 이상, 소설가 박태원, 화가 구본웅 3인의 인연을 통해 이야기해봅니다.
왼쪽부터 이상, 박태원, 수필가 김소운
시인 이상(李箱, 1910-1937)과 소설가 구보 박태원(九甫 朴泰遠, 1909-1986), 화가 구본웅(具本雄, 1906-1953)은 일제강점기에 경성을 휘젓던 단짝 술친구였다. 이상이 차린 <제비다방>은 지금은 아쉽게도 재개발로 사라진 청진동 해장국 골목 입구 오른편 코너에 있었다. 박태원은 자주 구본웅의 화실에 들렀는데 그 화실은 지금의 플라자 호텔 뒤편 북창동 쪽에 있었다. 이 세 사람은 놀라울 정도로 '인’(因)과 '연’(緣)이 생존 시에도 또 사후에도 서로서로 얽혀 있다.
이상에게는 로맨스가 몇 번 있다. 금홍이와의 로맨스는 그의 소설 <날개>와 <봉별기>에서 잘 그려져 있다. 이상은 폐결핵 요양 차 친구 구본웅과 함께 황해도 배천(白川) 온천에 갔다가 그곳 술집 여급이던 금홍이와 만나 <제비다방>의 마담으로 앉히고는 동거에 들어간다. 24살과 21살. 벌이는 시원치 않고, 금홍이는 외간남자들과 바람을 피운다. 이상은 금홍의 ‘오락’을 돕기 위해 가끔 P군의 집에 가 잔다. 이 P군이 소설가 구보 박태원이다.
“하루 나는 죄목 없이 금홍이에게 몹시 얻어맞았다. 나는 아파서 울고 사흘을 돌아오지 못했다. 너무도 금홍이가 무서웠다.” 그렇게 이상이 집을 나갔다 돌아온 어느 날 금홍이는 집에 없었다. 때 묻은 버선을 윗목에 팽개쳐 놓고 집을 나가버린 것이다. 그렇게 <제비다방>은 두 해 만에 문을 닫았다.
한국 야수파 화가의 독보적 존재이자 2살 때 사고로 곱사등이가 되어 ‘한국의 툴루즈 로트레크’라고 불렸던 화가 구본웅은 이상과 박태원에 끌려 다니며 술값을 대야 했지만 그리 싫은 내색 없이 스폰서 역할을 충실히 했다.
구본웅이 그린 이상. <친구의 초상>, 캔버스에 유화, 65×53cm, 1930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이상과 권영희와의 로맨스는 권영희의 일방적 짝사랑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권영희는 이상, 박태원과 친했던 소설가 정인택과 결혼한다. 정인택이 권영희를 못 잊어 죽네 사네하며 음독자살 소동까지 벌인 때문이다. 둘은 한국전쟁 때 함께 월북한다.
이상은 1936년 27세에 경성여고보(경기여고)와 이화여전 영문과 중퇴 출신의 변동림과 결혼한다. 그리고 4개월 후 새로운 재기를 위해 일본 동경으로 떠난다. 그러나 이듬해 사상 불온 혐의로 일본 경찰에 붙잡혀 유치 생활을 하다 폐결핵 병세가 악화되어 뇌출혈로 동경제대 부속병원에서 객사하고 만다. 아내 변동림이 몇날 며칠 동경으로 가서 시신을 수습하여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하나 그 후 유실되고 만다.
그런데 변동림이 누구인가? 화가 김환기의 부인 김향안이 바로 변동림이다. 단짝 술친구 이상과 박태원의 술값 스폰서였던 화가 구본웅의 계모인 변동숙의 배다른 여동생이 변동림이고, 구본웅의 딸 구근모가 낳은 딸, 그러니까 구본웅의 외손녀 중 하나가 세계적 발레리나 강수진이다. 그러니까 발레리나 강수진은 외할아버지 구본웅을 중심으로 구본웅의 이모인 김향안과 이모부 김환기, 그리고 외할아버지의 친구인 이상과 연(緣)이 닿는 셈이다. 얽히고설킨 인연이여….
세계적 발레리나 강수진. 그녀의 외할아버지가 ‘한국의 툴루즈 로트레크’ 화가 구본웅이다.
이상의 아내 변동림은 1944년 김환기와 재혼하고 수필가로 데뷔하며 김향안(金鄕岸)이란 이름을 썼다. 김향안은 1955년 김환기와 함께 프랑스 유학길에 올라 파리에서 미술평론을 공부하였고, 1964년 미국 뉴욕으로 건너간 이후 줄곧 뉴욕에서 살았다. 1974년 김환기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남편의 유작과 유품을 돌보는 한편, 1978년에는 환기재단을 설립해 김환기의 예술을 알리는 데 힘썼다. 1992년에는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자비로 환기미술관을 설립하였는데, 사설 개인 기념미술관으로는 국내 최초였다.
2004년 미국 뉴욕에서 작고한 김향안은 1986년 월간 <문학사상>에서, 그녀가 변동림이었을 때 불과 4개월을 같이 산 첫 남편 이상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가장 천재적인 황홀한 일생을 마쳤다. 그가 살다간 27년은 천재가 완성되어 소멸되어 가는 충분한 시간이다. (…) 천재는 또 미완성이다."
<소설가 구보씨의 1일>, <천변풍경>의 작가 구보 박태원은 해방 전에 결혼을 해서 성북동 싸리집에 살 때는 이미 2남 3녀의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그런 구보가 한국전쟁 당시에 북한으로 넘어간 것에 대해서는 모두가 놀랐는데 그는 경향작가도 아니고 카프의 멤버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내와 2남 3녀를 두고 말이다.
구보 박태원은 월북한 후 1955년 홀로 사는 아픔을 달래려 했는지 결혼을 한다. 상대는 이상을 짝사랑했으나 정인택과 결혼하고 월북한 권영희다. 그녀는 박태원이 말년에 시력을 상실하고 구술로 작품을 쓸 때 같이 공동 작업을 하면서 ‘구보씨’의 마지막을 지켜본다. 월북한 구보 박태원의 둘째딸의 막내아들이 영화 <살인의 추억>, <괴물>, <설국열차>의 감독 봉준호이다. 그러니까 봉준호 감독은 소설가 구보 박태원의 외손자인 것이다.
영화감독 봉준호. 그는 소설가 구보 박태원의 외손자이다.
첫댓글 미나님^^ 요기서 보니까...더 방가방가~~ㅋ~
반갑습니다 ^^
역시 예술가의 유전자가 흐르는가 봅니다.
박태원의 외손자 봉준호 감독님이 칸 영화제에서 < 기생충>으로 황금종려상을 받았네요
처음 뵙겠습니다 ,자주님!^^
수고하셨습니다 고마워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박태원님의 막내아드님 되는
박재영님이 아트힐 회원이랍니다
박다니엘님이 자작글방에 예전에 박태원님글 올린게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