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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을 좇는 자(롬 8장 5- 8)
성경본문: 로마서 8: 5- 8
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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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하지만 설교는 <추수감사주일>의 본문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이번 주는 <추수감사주일>, 다음 주는 <공동체전도주일>이라고 별도의 본문을 선택하다보면 로마서의 설교가 계속 끊길 것 같아서 로마서 본문으로 계속 가는 모험을 선택한 셈입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과 불평하는 사람입니다.
추수의 절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해를 먹고 산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며 손에 감사의 제물을 준비해서 나오는 사람과 자기의 피나는 노력으로 살았는데 하나님께 무슨 감사냐고 코웃음 치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세상 모든 사람을 두 유형으로 가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과 그리스도 예수 밖에 있는 사람으로 나눕니다.
성령의 통치 아래서 생명을 누리는 사람과 죄의 통치 아래서 죽음을 맛보는 사람입니다.
성령께 속한 사람과 육신에 속한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은 두 유형의 사람을 좀 더 자세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결코 정죄함이 없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사람에게만 구원의 확실성이 보장됨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첫째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심이라.”
그러면 오늘 두 유형의 사람 가운데 먼저 불신자의 모습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불신자의 전반적인 특징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정의하면 육신을 좇는 사람입니다.
불신자의 특성은 타락한 인간 죄성(罪性)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태어난 본성에 따라서 습관적으로 죄에 이끌림을 받는 사람입니다.
죄 가운데 태어나서, 죄 가운데 자라가며, 그리고 죄 가운데서 계속 살아가는 자입니다.
타락한 본성을 따라 사는 자는 그 실체의 모습을 어떻게 드러내고 있습니까?
5절 상반절은 말하기를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하나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생각한다.’는 단어는 지극한 관심을 갖고 유별나게 집착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주 포괄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단어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빌 3:18~19)라고 말합니다.
여기 땅의 일을 생각한다는 말은 가끔 땅의 일을 생각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생각 전부가 땅의 일에 머물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불신자들은 습관적으로 필연적으로 땅의 것에 그 마음을 쏟고 있습니다.
땅의 일들이 그들이 가장 기뻐하는 일들이요 그들에게 최고 만족을 주는 일들입니다.
그러므로 유달리 그들이 찾는 대상이 땅의 것들입니다.
여기 생각한다는 것은 지적인 측면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관심하고 열광하는 것 전부를 지칭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성도들을 향해서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합니다. 즉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에 혼을 빼주고 살지 말라는 권고입니다.
불신자는 타락한 인간 본성에 지배되기에 무엇보다도 육신의 일에 관심하는 사람입니다.
육신의 일은 감각적인 쾌락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신체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의 일은 그보다 훨씬 포괄적인 영역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갈 5:19-21)
사도 요한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여기에 포함시킵니다.
육신이란 무엇보다도 세속적인 마음, 세상 지향성을 의미합니다.
육신의 일은 하나님을 배제시킨 삶의 모든 측면을 다 의미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일은 세상에만 속한 일입니다. 영적인 모든 것들로부터는 단절되어 있습니다.
육신의 일은 오직 보이는 것, 일시적인 것, 이 세상에 속한 것만 집중합니다.
그 관심 속에는 보이지 않는 것, 영원한 것, 이 세상 넘어 있는 것은 배제되어 있습니다. 뭐든지 눈에 보이는 것, 만질 수 있는 것, 이 세상에 속한 것에만 관심을 쓴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넘어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것을 생각한다는 말을 저질의 삶을 살고 있는 거리의 죄인들에게만 한정시킬 수 없습니다.
소위 지성인들과 최고의 도덕주의자들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소위 세상이 고상하다고 여기는 부류의 사람도 육신에 속한 자로서 육신의 일을 생각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없는 정치적인 관심, 하나님 없는 사회적인 관심, 하나님 없는 문화적 관심, 하나님 없는 윤리적 관심은 모두 육신의 일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고상한 활동, 철학 예술 문학 음악 모두가 육신의 일을 넘어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배제된 활동은 그 무엇이라도 육신의 일에 속할 뿐입니다.
도덕 향상 운동, 환경 보전 운동 그 무엇이라도 하나님이 중심에 있지 아니할 때 그것은 육신의 일에 해당합니다.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이상향을 논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우리가 걸작품을 산출해낼 수 있습니다.
예술, 문학, 음악 모든 영역에서 괜찮은 것들을 산출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 하나님이 없으면, 성령이 없으면 육신을 추구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소위 술주정뱅이나 고상한 사람의 차이는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질적인 차이를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세상은 그 차이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길거리에서 죄를 범하는 사람은 아주 저질의 인생으로 생각하고, 고상하게 앉아서 세상을 논하는 사람은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그 차이라고 하는 것은 어쩌면 더러운 피부 대신 깨끗한 피부를 소유하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냄새 나는 옷 대신에 향수 냄새가 날 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차이는 아닙니다.
살갗 밑은 모두 동일합니다.
누추하고 더러운 삶과 고상하고 청결한 삶의 차이는 그게 표면적인 차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불신자에 관해서 본문은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밝힙니다.
둘째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라고 선언합니다.
여기 바울은 오직 육신의 일만 생각하는 사람들의 마음 상태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신앙 고백을 한 직후에 베드로를 책망한 적이 있습니다.
베드로의 관점이 세상 것, 사람의 일에만 머물고 있다고 책망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생각이 새롭게 되지 않고는 소망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육에 속한 사람은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왜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그들이 생각할 때는 미련하게 보이고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 못 깨닫습니까?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별하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는 선언은 자연인이 영적인 사망 상태에 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불신자는 육신적으로 살아있으나 영적으로 죽어있는 자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다른 모든 면에서 하는 것 보면 살아있어요.
백화점에서 바겐세일 한다면 좇아가는 것 보면 죽어 있긴요 살아 있죠.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 잔치에 관한 포스타가 붙어 있으면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면에서는 죽어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죽어있는 사람은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사는 자입니다.
현실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도, 그렇고 미래를 설계하는 데 있어서도 하나님은 사고 속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저 내 문제를 붙들고, 나만 생각하고 있고, 내 미래에 대한 비전속에, 하나님이 개입하실 여지가 없으면 불신자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입니다.
도덕적이고 고상한 삶을 사는 사람도 영적으로는 얼마든지 죽어있을 수 있습니다.
평생 술주정하는 것 식구들에게 보여준 적이 없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도 자기 배우자에게 불성실한 일을 행한 적이 없는 사람도 영적으로 죽어있을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죽어 있다고 하는 것은 인간관계에서 논하는 것이 일차적으로 아닙니다.
영적으로 죽어있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전혀 관련을 짓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친구들 만나면 잘 어울려요, 친구들이 모두 다 좋아해요, 친구들하고 지내는 것 보면 문제가 하나도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그 생각 속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직장에서는 존경받는 행동을 합니다.
지역 사회 들어와서도 모두 사람들이 우러러 볼 수 있는 삶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그 생각과 활동 속에 그러나 하나님이 없으면 영적으로 죽어있는 사람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영적인 영역 자체가 그의 모든 사고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히려 그런 것을 말하면 코웃음을 칠뿐입니다.
영적 사실은 그에게 별반 의미가 없는 겁니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현실만이 그에게는 모든 것입니다.
성경책은 난센스, 영적인 일을 논하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감이 없습니다.
영적인 진리가 설파되고 있는데도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겁니다.
하품하다 나오면서 ‘나는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오늘 깨달을 수가 없다’고 반응합니다.
그것이 영국의 윌버포스라는 사람의 친구 윌리암 피터라는 사람에게 남겼던 이야기입니다.
윌버포스가 자기 친구를 데리고 런던에서 당대에 가장 설교를 잘한 리차드 세실의 교회에 데리고 와서 같이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날따라 설교가 아주 길었습니다.
그런데 친구는 나오면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나는 전혀 알아듣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이 뒤에 영국의 수상이 되었습니다. 똑똑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이야기에 대해서는 전혀 무슨 소리를 하는 지 못 알아듣는 것입니다.
그게 뭐 영국 이야기뿐이겠습니까?
한국에는 없겠습니까?
예배 시간에 나와서 앉아 있어도 전혀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교회에 항상 있어 왔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이 귀에는 들리지만 마음에는 아무 의미가 없어요.
왜 그렇습니까? 영적으로 죽어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돈 십만 원을 주겠다고 하면 그건 귀에 번쩍 들어옵니다.
하지만 구원의 진리에 대해서는 아무 감동이 없어요.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구원을 얻는 일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을 쏟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좀 편할까?
내게 좀 유익이 있을까를 묻고 산다면 신앙인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에 대해서 무관심한 사람은 불신자입니다.
신자는 이 현세보다도 영원한 세상에 대해서, 보이는 세상보다도 보이지 않는 세상에 대해서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불신자에 대해서 또 하나의 중요한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셋째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왜 육신의 생각이 사망인지 그 이유를 밝힙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으면 그는 하나님의 생명 밖에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 여러분은 신자가 되었습니까?
신자가 된 이유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서였습니다.
왜 주 예수를 영접했습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 믿고 축복 받고 싶어 합니까?
하나님과 원수된 삶의 결과를 알기 때문입니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골 1:21)
행실, 삶 그 자체가 하나님과 멀리 떠나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은 마음이 멀리 떠나 있으니까 삶이 그렇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모든 인생은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이 멀어져 있는 자입니다.
악한 행동뿐 아니라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신앙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 왔다고 생각합니다.
막연히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다만 자기가 생각한 하나님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가 생각해낸 하나님은 우상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나름대로의 하나님에 대해서 좋아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과 더불어서 화해할 때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내 나름대로 하나님에 대해서 우호적인 것이 우리를 신앙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생각 속의 하나님 섬기는 사람은 없습니까?
봐주고 용서하고 사랑만 베푸는 하나님이지 공의롭고 진노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
여러분이 지금 매일성경을 통해서 만날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을 여러분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은 성경에서부터 나옵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자기를 나타내시는 계시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추구해서 알아내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생각해낸 하나님을 섬기고 만족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에 다녀도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살아계시고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해서는 적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바울은 불신자에 대해서 또 하나의 중대한 선언하고 있습니다.
넷째 “하나님의 법에 글복하지 아니하는 자”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상관의 명령에 사령관의 명령에 불복하고 반항하는 군인처럼, 불신자는 하나님께 대해서 거역하고 반항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던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예배드리고 가면 그 뿐입니다.
설교 말씀을 통해서 뭐라고 선포하시던 상관이 없습니다.
예배 참석하고 돌아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자기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자기하고 싶은 대로 합니다.
그런 사람은 3년 되었든 30년이 되었던 내 생각 속의 하나님을 섬길 뿐입니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하나님과 원수 된 자들입니다.
그래서 반항하며 적대감을 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 코웃음을 칩니다.
예언자는 말합니다.
“우리는 다 양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거늘.”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 십계명이든 다른 도덕률이든 모두 다 짓밟아버리고 마는 겁니다.
노골적으로 그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주 교묘하게 그냥 빠져 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것을 노골적으로 거역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그게 그들의 목표입니다. 달리 말해서 내 하고 싶은 것 그것이 그들의 신입니다.
여러분, 혹시 그렇게 살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법을 배우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 싶은 생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 싶은 소원을 가지고 매일 성경으로 가까이 가고 있습니까?
그냥 뭐 다 골치 아프고, 나는 그냥 신앙생활 해 왔던 대로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까?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해 왔던 대로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까?
불신자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는 자입니다.
다섯째 “하나님의 법에 굴복할 수조차 없는 자”라고 규정합니다.
불신자의 상황에 대해서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도 드뭅니다.
하나님의 법을 좋아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좋아할 수조차 없는 자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고전 2:14)
학점과 관계된 강의를 들으면 이 시간대 강의에 졸 리가 만무해요.
다 잘 듣습니다.
하지만,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에 관한 진리가 우습게 보이고, 또 깨닫지도 못하는데 귀에 들어올 리가 만무합니다.
참 이상하죠?
자기하고는 아무 관련을 짓지 못하니까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왜 못 깨닫습니까?
그 똑똑한 머리를 가지고.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별함이라.”
귀머거리는 아무리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해도 그것을 감상할 수 없습니다. 소원해도 불가능합니다.
불신자는 하나님을 미워하고 율법에 굴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고 싶은 소원이 없습니다.
영적인 욕구가 그 안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건 전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표범이 자기 검은 점을 없이하든지, 에티오피아 사람이 검은 피부를 희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죄인은 그 죄 짓는 길을 떠날 수 없습니다.
지금껏 말한 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8절과 같습니다.
여섯째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불신자는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소원도 없고 능력도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열매를 맺힐 수 없는 사람입니다.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드릴 수 없는 사람입니다.
육신의 요구를 따라서 살 뿐입니다.
육신의 생각에 지배를 당하고 하나님의 생명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께 드릴만한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것이 없어요.
하나님이 보면 생각하는 것이 참 가상하다 여길만한 것이 없고 행동을 봐도 거기에는 아무 것도 나타나는 것이 없고 마음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어떻게 그런 죄인으로 태어난 사람들이 바뀔 수가 있습니까?
그렇게 태어난 사람들이 바뀌어져 가지고 주일마다 예배의 자리에 나아올 수가 있게 됩니까?
죄를 짓기에 아주 익숙하던 사람들이 오늘 같은 날 단풍놀이 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 외에는 달리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변해서 여기 와서 찬송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뀝니까?
불신자가 어떻게 신자가 될 수 있지요?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성령의 세력이 죄의 세력에서부터 우리를 해방시켰습니다.
우리가 뭔가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뭔가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한 일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로 인해서 사람은 신자가 됩니다.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는 사람이 풀려나기 위해서는 수용소에 있는 죄수가 뭔가 해 낸 것이 아니라 해방군이 그 포로수용소 문을 활짝 열어젖힌 것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엡2:8-9)
우리가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의 결과입니다.
그로 인해서 신자들은 모일 때마다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우리가 뭔가 해서 착한 사람이 되고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이 되었으면 우리는 나와서 폼을 잡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다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냥 그 놀라운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찬송할 뿐입니다.
달리 말해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셨기에 우리의 구원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안전합니다. 그리고 보장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이 전부 하셨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우리는 신자인 동시에 새롭게 하심을 받은 자입니다. 영적인 영역 속으로 옮겨진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 영역 안으로 옮기셨습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구출하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골1:13) 흑암의 권세에서 살던 자들을 구출하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빛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우리의 국적은 이제 변경되었습니다. 더 이상 우리는 아담 안에 있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의 아들의 사랑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흑암의 권세에서 사랑의 나라로 국적 변경이 이루어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접붙임을 하셨습니다.
이는 모두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신자는 걸작 품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형제 안에서 주의 영광을’ 본다고 찬송하고 ‘자매 안에서 주의 영광을’ 본다고 노래하는 자들이 아닙니까?
지금까지 우리는 불신자의 모습을 주로 살폈습니다.
불신자의 모습을 정확하게 알기 전에는 신자가 된 우리가 얼마나 복 받은 자인지를 우리는 제대로 인식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옛 모습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하나님이 살리셨습니다.
하나님이 살리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직도 죽어 있었을 것입니다.
죽은 자는 스스로 생명을 공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생명을 주셨기에 여러분과 저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시 산 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햇빛 난 날만 아니라 비오는 날도 주님을 찬송합니다.
꽃피는 봄날이나 아름답게 단풍잎이 장식한 가을날이나 하나님 섬기는 일에 차이를 가져오지 않습니다.
씨 뿌릴 때도 감사하고, 추수할 때도 감사합니다.
영원한 시간 속에서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기로 작정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분은 영원토록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건강할 때 주님을 섬긴 자들이고 그러기에 병든 가운데서 주님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성공한 가운데서도 주님을 섬기는 자들이고 파산한 가운데서도 주님을 노래하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주신 이 영적인 생명은 결코 시간에 따라서 환경에 따라서 변화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 안에서, 그 생명 안에서 사는 자들을 일컬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합니다.
더 이상 육신 죄악 된 본성에 따라서 살지 맙시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우리를 하나님이 옮기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생명의 맛을 본 사람입니다.
그래서 맛을 본 사람은 그 생명을 누려야만 합니다.
생명과 평강을 만끽하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죄와 사망의 대열에 살아가는 이웃들을 돌아보는 한 주간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