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우리세대는 가난과 어려운 살림살이에 헤메이며 삶을 헤쳐 나온 주인공이다
어느 누구가 고생을 않하리요. 내가 어렵살이 서울에 올라가서 내 삶을 개척한 추억의
이야기를 해 보고져 한다. 아마도 내인생에 있어서 제일 고생을 한 부분 같기도 하다.
나는 직장을 다닐때 동료들하고 술 한 잔하고 , 으례 노래방에 가는데, 나의 노래의 18번은
'섬마을 선생님'이다 아주 동료들이 나의 18번을 아주 알고 그 번호를 넣어 준다.
그때 그시절의 눈물나는 내 삶이 그려지고 ,어머니가 그리워지는 순간이다 나는 그 추억을
잊지 못하고 내가 지나온 삶을 그려 본다.
내가 먼저 농촌을 떠나 호남선의 무임승차로 상경하여 대학입시에 매진을 하였다. 환경이
좋아 먼저 광주로 유학을 갔다가 서울로 갔어야 하는데, 형편이 어려워 내가 원 했고 가고져
하였던 호남의 명문 광주고등학교를 원서를 다 써 놓고, 시험도 못 보고 시골의 농촌학교에서
고등학교를 나오고 말었다. 내 인생의 죄절을 여기서 한 번 꺽이고 말았다.
나주에서 학교를 졸업을 하고 서울로 올라와서 대학을 한 참 다니는데, 노부노모님들이 아들
따라 집안의 재산을 정리를 다 하시고 서울로 올라 오셨다. 시골의 재산을 다 정리를 하여보아야
얼마나 될까? 마포구 도화동 산8번지에 무허가 건물을 사서 거기서 부터 부모님하고 같이 생활을
서울생활이 시작이 된다. 부모님이 올라 오셨으니, 다니던 대학생활은 접고, 부모님을 모시는
부양의무자가 된 것이다. 어느날 갑작히 학생신분에서 집안을 이끌고 가야할 가장의 신세가 된
것이다.
더 학교를 다니고 공부를 하여야겠고, 또한 부모님을 부양하여 할 가장의 자리에서 나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우선 임시방편으로 인쇄소의 문선공(文選工) 책을 많이 보았고 한자를 좀 알다
보니 금방 숙련공이 되었다. 거기서 나의 수입원이 되었다. 그러니 우리집안의 생활을 근근히 할 수
있는 터전이 마련하였다. 나는 그러면서 고민을 하게 된다. 이거 일 할일이 아니라 직업을 가져야
겠다 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거기서 그안의 실력도 있고하여, 초등학교 교사는 그런데로 할수 있는
직업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인천교대'를 노크를 하게 된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에도 교육대학교의 시험의 경쟁률이 말이 아니다. 서울의 젊은 공부를 잘하는
사람들이 서울 교대 를 못 들어가면 인천의 교육대나 춘천의 교육대로 가기 마련이다. 서울의 명문의
고등학교를 졸업을 하거나 하는 우수한 학생들이 들어 왔다. 이걸 공부를 하는데, 정말 죽기아니면
살기 식으로 공부를 하였다. 어머니는 시골에서 살아 온 분이라 서울생활이 익숙치가 못 하시고
고향에 가을철인가 ? 내려 가셔서 겨울철에 먹을 양식과 반찬거리를 무척이나 많이 가지고 올라
오셨다. 즉 서울에서 쉐타나 양말 등등의 물건을 가지시고 시골의 고향에 가서 팔아 농촌에서
먹고 살 수 있는 물건을 많이 하여 가지고 오신 것이다.
가을철에 시골에서 그러니 행상을 하신것이다. 그리고 농촌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교환하시여 집으로
가지고 올라 오셨다. 그게 무리가 되셨는지 ? 몸이 아프시어 들어 눞게 계시게 되어 시름시름 아프
시더니 결국에는 다음해 2 월 달에 저 세상으로 떠나시게 되었다. 나는 그 어머니의 아픈 병환를 보살
피며 나의'인천교육대 시험'공부에 온 힘을 다 쏟았다. 그 추운 겨울에 한강변에서 불어오는 겨울철의
한냉의 한파는 마포꼭대기의 허름한 판자집의 방안은 꽁꽁 얼고 붙었고 찬바람은 방안의 공기가 항상
추었다. 겨우 연탄 하나에 온기를 갖고 살아야 하는 형편이었다.
나는 내가 다니면서 우리가정의 생활의 원천인 인쇄소의 직장을 여름철을 지나고, 그만두고 시험공부에
매진하여 어머니의 병환을 보살피며 그 추운방에서 정열을 쏟았다 이거 지나간 이야기이니까 그렇지 ,
죽기 아니면 살기식이다. 이를 악 물어 가면서 공부를 하였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기에 그 어려운 시험에
나의 명단이 있었다.
야! 이 쾌거 , 정말 그 심정은 하늘을 뜷고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그 토록 아들을 위하여 고생을 하셨던
어머니, 그리고 서울의 둘째 누나의 보살핌이 있어서 , 내가 이렇게 내가 시험에 합격을 하게 된 것이다.
둘째누나집에 가서 이 즐거움을 알리고 누나와 같이 부등켜 안고 서로 눈물을 흘리면서 그 즐거움을
느끼기도하였다. 야 이제 그 인쇄소 문선공의 일도 않 하여야 하고 내가 원하는 직장에 들어가게
되어 자식된 도리도 하고 내가 꿈이었던 '섬마을의 선생님'이 되는 것이다 섬마을에 들어가 조그마한
어촌의 마을에서 나의 꿈을 키우고 어린학생들과 같이 생활을 하며 산다고 생각을 하니 마음이 설레
이기도 ......
유행가사 '섬마을 선생님'이 나의 삶이고 부모님에게 효도를 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니 이 세상
부러 운게 없다. 나는 이 노래를 술 한 잔에 취해 부르지만 나의 어머니와의 사랑이 있고, 어머니와의
헤어짐이 있어, 노래방에서 이 노래를 부를 때 마다 어머니의 애절한 사랑을 느끼 곤 한다.
첫댓글 섬마을 선생님을 애창곡으로 한 내력을 알게 해주는 삶의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다 지나간 옛이야기이지만 ,나의 젊은시절의 한페이지입니다
섬마을 선생님이란 노래가
60년대 후반에 많이 유행하기 시작했었죠.
섬마을 선생님이란 노래를 통하여
꿈꾸었던 자신의 모습을
어려웠던 인생의 모퉁이를
돌고 돌아서 여기까지 오셨네요.
아마도, 시골처녀가 서울에서 온
총각선생님을 사모했던 이야기,
영화로도 나왔던가요.
감사합니다
저는 그영화는 못보았고요
그져 나의 젊은시절의 추억을 한번 써보았습니다
그러한 시절을 겪어 오면서 나의 삶을 개척을 하였습니다
어렸을때 보았던 행상
제겐 마치 선물꾸러미를 들고
나타나는 싼타 같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머님의 그 수고로움과
짐보따리만큼 흘리셨을 땀과
어머님의 노래가락과
만장봉님의 생애
쟁취하신 꿈까지
감동 스토리...입니다.
감사합니다
저러한 나의 삶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제가 있는거 같습니다 .결코 나의
삶은 도전과 응전의 싸움이었습니다 . 어떤목적을 달성하였을대의 기쁨 은 희열을 안겨줍니다
라디오 드라마 못지 않게 인기를 끌었던 주제가 “섬마을 선생님” 은
서슬퍼런 유신정권하에서 왜색조의 곡이라 하여 한때 금지곡이 되기도 했었죠.
이 곡은 멜로디는 물론 전주, 간주도 난이도가 높지 않아
제가 기타로 즐겨 연주하는 트로트 곡 중의 하나입니다….^&^
감사합니다
우리민족의 정서와 비슷한것 같고요
노래도 보편적으로 좋습니다
아!! 그런 눈물겨운 사연이 있으셨군요!
그래서 결국 섬마을 선생님이 되신건가요?
2탄이 기다려 집니다 !!!
누구나 인생사가 그렇게 힘들게 살아왔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제2탄은 위에 올린 나의 달동네 의 삶이란 글로 답을 합니다
나의 삶의인생사 ....
강한 의지력으로 합격자 명단에...감동적 입니다.
만장봉님 아름문학상 대상수상도 함께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