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천 선생과의 시리즈 대담 두번째입니다. 현재 요동치는 동북아 정세의 배경 설
명과 앞으로의 전망에 관한 글인데, 최상천 선생 특유의 독특하고, 놀라운 시각을 쉬
운 어법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승호(이하 지) - 동북아 정세가 요동치고 있습니다. 일본 우익의 도발이나 한국과
중국의 받아치기나 한 치의 양보도 없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한국과 일본이 맞붙
는 듯 하더니 갑자기 중국이 뛰어들면서 싸움판이 중·일 대결로 바뀌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일본과 중국이 엄청난 기 싸움을 벌였는데요. 마치 동북아 패권다툼의 예고
편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이러다가 한국은 고래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꼴이 되는 것
아닙니까?
한국은 새우가 아니라 ‘꾀돌이 백상어’다
최상천(이하 최) - 중국과 일본이 고래인 건 맞는데 한국도 새우는 아닙니다. 경제력
이 한국의 20분의 1도 안 되는 조선(북한)도 새우이기를 거부하고 왕고래(미국)한테
덤비는 판국인데, 한국이 자칭 ‘새우’라고 하면 남들이 웃습니다. 미국, 중국, 일본,
유럽이 고래라면 한국은 상어 정도는 됩니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겠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노무현 대통령이 하는 걸 보면, 상
어 중에서도 고래 데리고 노는 ‘꾀돌이 백상어’ 정도는 됩니다. 세계 11위의 교역규
모에다 첨단산업분야에서는 상당한 정도의 선도적 역량도 가지고 있으니까 그렇게
말 할 수 있죠.
제국주의 시대에는 군사력 가지고 영토 빼앗는 게 국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세계시장시대에는 기술력 가지고 시장을 확보하는 게 국력의
핵심입니다. 이런 ‘시장의 시대’에는 한국 같은 작은 나라도 강대국이 될 수 있습니
다.
우리가 너무 자학을 해서 그렇지, 한국의 역량은 이미 무시못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머지 않아 기술강국이 되고 경제대국이 될 것이라는 전망도 제법 많이 나와 있습니
다. 주한 미국상공인 회장 제프리 존스 같은 사람은 10년 전쯤부터 앞으로 미국을 위
협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가 한국이라고 장담을 했어요.
미국의 골드만 삭스 사는 한국이 2050년에는 국내총생산에서 독일을 넘어서고, 개
인 GDP는 미국 다음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골드만 삭스 얘기를 그대로 믿는
다는 말이 아닙니다. ‘약소국’이라고 자학하고 기죽지 말고, 미래의 가능성을 열어놓
자는 이야기입니다.
생각을 바꾸면 미래가 보인다! 그 말 딱 맞습니다. 우리는 아주 다른 시대로 나아가
고 있습니다. 영토시대에 한국은 약소국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계시장시
대에는 전혀 다릅니다. 한마디로 시장을 많이 차지하면 강대국이 되는 겁니다.
사이버 공간이 정보, 시장, 소통, 교육의 장이 되는 시대에는 영토 개념도 달라져야
합니다. 사이버 공간도 ‘21세기형 영토’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사이버 공간은 실재
공간이 가지는 거리와 시간의 한계를 한꺼번에 해결해 줍니다.
이런 사이버 공간에서는 실제 공간에서보다 훨씬 발전되고 풍부하고 가변적이고 동
시적인 국가기관, 학교, 기업 등등을 세울 수 있습니다. 앞으로 시대는 실제 공간의
활용보다 사이버 공간의 활용능력이 압도적으로 중요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시대에는 국가에 대한 평가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인터넷
활용이라는 면에서는 한국은 이미 선진국 대열에 끼고도 남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한국이 인터넷을 고도의 소통과 교육의 장으로까지 발전시킨다고 상
상해 보세요. 한국은 고도의 사이버 영토를 가지게 되는 겁니다. 사정이 이런데도 많
은 경우 우리의 생각은 영토시대, 실물시대에 머물러 있어요. ‘약소국’이라는 고정관
념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지 - 일본이 갑자기 왜 저렇게 날뛰나 싶었는데, 이제 감이 잡힐 것 같습니다. 일본
우익이 제국주의시대, 영토 중심의 사고에서 못 벗어났군요. 아직도 시장 중심의 사
고를 하지 못하고, 영토 욕심에 사로잡혀 있다는 말씀인데요. 일본 경제가 헤매고 있
으니까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퇴행 증상을 보이는 것 아닙니까?
최 - 맞습니다. 이어령 씨가 ‘축소지향의 일본인’이라고 했는데, 요즘 보니까 ‘과거
지향의 일본 우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일본 우익은 아시아 침략전쟁을 ‘민족적
영광’으로 기억하고 있는 거죠. 그런 망령에 사로잡혀 있으니까 독도나 센카쿠 열도
나 사할린 영유권 가지고 떼를 쓰는 겁니다.
사실은 제국주의시대, 영토시대의 사고방식에서 못 벗어난 시대착오죠. 일본 우익도
국제적 행세를 하려면 21세기형 보수로 거듭나야 합니다. 빨리 군국주의 망령에서
깨어나야 하고, 세계 차원에서 생각하고 행동해야죠. 지금처럼 우물 안 개구리로 놀
다가는 ‘국제 바카야로’를 못 벗어납니다.
세 가지가 달라졌다
지 - 이번의 동북아 정세가 예전과는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것 같고, 미국의 위상도
좀 달라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최 - 지금 현재 기세 싸움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 기세 싸움은 이전의 동북아 정세라
고 할까요, 기존의 한중일 관계하고는 많이 다릅니다. 우선 3국이 서로의 입장 차이
에 따라 정면충돌하고 있다는 겁니다. 과거에 영토 문제나 역사서술 문제나 신사참
배 문제나 이런 게 불거져 나왔을 때는 체면치례 비슷하게 대충 얼버무리고 끝냈거
든요.
그런데 이번에는 한국의 경우에도 시위가 많았지만, 중국의 경우에는 대단했잖아요.
시위도 거셌지만 불매운동도 전국적으로 번져나가지 않았습니까?
달라진 점으로 두 번째로 지적할 수 있는 게, 아주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일본 군국주의 부활에 대한 한중 공조가 상당히 이루어졌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한일 관계가 껄끄러워도 한미일동맹을 절대 벗어나지 않았고,
한중 공조는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국과 중국이 상당한 정도
의 공감대를 형성했고, 소위 밀어주고 당겨주는 그런 분위기였다는 말입니다. 이것
도 기존의 냉전적 시각, 한미일 안보체제라는 시각에서 보면 엄청난 변화입니다.
세 번째로 달라진 점은, 이게 어떤 면에서는 제일 중요한데요, 일본의 도발과 한국-
중국의 역공세 과정에서 미국이 거의 완벽하게 무기력했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미국이 이 과정을 팔짱끼고 즐긴 것도 아닙니다. 어정쩡하게 해가지고, 처
음에는 일본 편을 드는 듯 했다가, 분위기가 한중공조로까지 나아가자 일본의 상임
이사국 진출을 거부하는 듯한 행동을 보이다가, 여하튼 이래저래 우왕좌왕하다가 볼
일 다 봤어요. 통제력은 커녕 어떤 나라에도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정말 미국이 이렇게 무기력한 국가일 수 있는가 어리둥절할 지경이었습니
다.
지 -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노 대통령이 영리하게 외교를 했다고 평가
하는 반면,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한미공조를 무너뜨린다고 아우성입니다. 친북 하는
것도 모자라서 이번에는 친중국까지 한다면서 비판했는데요.
최 - 그럴 수 있습니다. 지금 상황이 한국의 안보와 대외정책이 일대전환을 모색하
는 시기이니까 극과 극의 평가가 나올 수밖에 없어요. 전환기에는 늘 그렇습니다.
저번에 독도 얘기할 때 그 얘기를 했지 않습니까? 한미일 안보체제하에서는 한국이
자주적 외교나 독자적인 국제전략을 가질 수가 없어요.
한미일 안보체제라는 게, 말이 ‘한-미-일’ 동맹이지 사실은 ‘미-일-한’의 종속적 동
맹 아닙니까. 이런 동맹체제에서는 국제전략은 미국이 결정해버립니다.
그래서 한국은 자주국방도 안 되고 자주외교도 할 수가 없었어요. 한미일 안보체제
가 강고하면 할수록 중국, 러시아 같은 ‘미국의 적’들과는 적극적인 교류를 할 수도
없고, 동맹 관계는 꿈도 못 꿉니다. 일본이 아무리 한국인의 심기를 건드려도 마음
놓고 한판 붙을 수도 없었어요.
대 북한 정책도 미국의 봉쇄정책을 벗어날 수 없었죠. 그래서 대북 제안도 미국이 오
케이 안 하면 어려운 겁니다. 그런데 미국이 대 중국, 대 러시아, 대 쿠바 정책을 추
진할 때 한국한테 한마디라도 하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말이 동맹이지 한국을
졸로 보는 거죠.
그러나 한국이 한미일 안보체제에서 빠져나와서 독자적인 국제전략을 구사하고 싶
어도 미국하고 대결할 수는 없습니다. 미국의 압박을 감당하기도 어렵지만, 미국 의
존 안보체제도 그렇고, 친미적 사회분위기도 일시에 바꿀 수는 없거든요. 이런 상황
에서 한미일 안보체제를 자주적인 방향으로 수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떤 특별한 계기가 필요했을 겁니다. 그런데 일본이 때마침 ‘독도 도발’을 해 준 겁
니다. 이 대목에서 노무현이 번개같이 순발력을 발휘합니다. 정말 ‘차력 정치’의 달
인답게, 노무현 대통령은 일본 우익의 망동을 이용해서 한미일 안보체제의 약한 고
리, 한일 관계를 내리쳐버린 겁니다.
노무현의 ‘차력 정치’가 빛을 발한다
지 - 노무현 대통령의 ‘차력 정치’가 뭡니까?
최 - 지 선생님, ‘노무현 대통령’을 만든 일등공신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지 - 글쎄요.
최 - 내 생각으로는 조선일보입니다. 8,90년대를 돌이켜보면, 다른 사람들이 조선일
보가 두려워서 비위나 맞추고 있을 때 노무현은 조선일보에 도전장을 던졌습니다.
조선일보의 ‘굉장한 힘’을 역이용하기로 한 거죠.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 조선일
보가 때리면 때릴수록 노무현이 커졌어요.
조선일보가 몇 대 때리자 별 볼일 없던 노무현이 ‘전국적 인물’이 되더니, 화가 나서
마구 두들겨 패자 ‘정치적 거물’로 커버리고, 죽으라고 몰매를 퍼붓자 이번에는 ‘대통
령 감’으로 떠버린 겁니다. 그래서 조선일보가 노무현이라면 미치는 겁니다.
지 - 그렇다면 노무현 대통령이 일본 우익의 도발을 역이용해서 한미일 안보체제를
흔들고 한국의 자주화를 추구했다는 얘기입니까?
최 - 그렇습니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이 ‘동북아 균형자’ 역할을 들고 나온 건 이보
다 한걸음 더 나가겠다는 얘깁니다. 이게 뭐냐 하면요, 더 이상 미국이 짜놓은 시나
리오대로 놀지 않고, 한국 나름의 판단에 따라서 독자적인 국제전략을 펴겠다고 선
언한 겁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한국이 독자적으로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이런 나라들과 상
대하면서, 동북아시아에서 균형추 역할을 하겠다. 한마디로 동북아시아 국제질서를
한국이 주도해 보겠다고 새우(?)가 ‘폭탄선언’(!)을 해버린 겁니다. 균형자 역할을
통해서 국가안보도 확보하고 동북아 평화체제도 추진하겠다는 야심 찬 구상입니다.
이건 사고입니다. 더 이상 ‘미국의 아이’가 아니라고 국제사회에다 대고 선언한 겁니
다. 이런 노선은 미국이 마음대로 주무르는 한미안보체제 하고는 한참 어긋날 수밖
에 없죠. 그래서 진보세력은 쌍수를 들어 환영하고, 보수세력은 졸도 직전까지 간 겁
니다.
지 - 노 대통령의 팀의 이슈 제기능력이라고 할까 조어력이라고 할까. 괜찮지 않습
니까? ‘협력적 자주국방’이라는 말도 그렇고요. 정반대의 대립적 이념과 언어를 변증
법적으로 통합해서 쌈빡한 신개념을 만들어내는 것 같은데요.
최 - 꽤 괜찮습니다. ‘협력적 자주국방’이란 말이 아주 오묘한데요, 자주국방을 하되,
위험하게 한국 혼자서만 하지 않고, 사안에 따라 파트너를 골라잡겠다는 얘기거든
요. 지금은 미국하고 손을 잡고 있지만, 필요하면 중국이나 러시아하고도 손을 잡겠
다는 겁니다. 이건 일종의 ‘탈미(脫美) 선언’ 아닙니까? 미국이 수호신이고 홀로서기
는 죽음이라고 믿는 사람들한테는 엄청난 충격이죠.
지 - 일부 보수언론들은 “우리가 국력이 약한데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같은 강대
국을 상대로 균형자 역할을 한다는 게 말이나 되느냐?”면서 콧방귀를 뀌던데요.
최 - 그런 게 구시대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제국주의 시대, 영토 중심의 시대에는 한
국은 분명히 약소국입니다. 그런데 WTO 체제가 되면서 세계는 세계시장체제로 가
고 있습니다. 이 추세는 누구도 막을 수가 없어요. 왜? 지금 인류의 생산력은 지구적
인 시장을 요구하는데, 이 흐름을 막으면 이 생산력이 엄청난 재앙을 불러올 수도 있
습니다. 시장을 열기 위해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세계 시장체제에서는 덩치 크고 주먹 세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누가 시장을 차지하
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좋든 싫든 시장시대에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중국 바
로 옆에 있습니다. 중국하고 관계도 괜찮고요. 지금은 중국의 시장규모가 세계 3위
지만, 불원간 세계 최대 시장이 될 건 확실하지 않습니까. 인도도 시장규모가 크고
잠재력도 대단한데요, 지금 중국과 인도에서 한국 기업이 시장점유율을 가파르게 높
여가고 있거든요.
한국기업의 구조나 행태를 옹호하자는 게 아닙니다. 재벌의 조폭적 구조는 통째로
바꿔야 하고, 장기적으로는 총수의 사유물에서 노·자 공동기업으로 전환해야 합니
다. 여러 가지 문제가 있겠지만, 아무튼 한국기업이 세계시장에서 위력을 발휘하는
건 아주 좋은 일 아닙니까? 아주 단순화하자면 한국기업이 시장을 많이 확보하면 한
국도 강대국이 되는 겁니다.
‘동북아 균형자 역할’이 지금은 약간 무리 같아 보이지만, 미국, 중국, 일본의 힘을
잘 활용하면 안 될 것도 없습니다. ‘균형자 역할’에는 어느 정도 힘이 필요합니다. 그
러나 작전은 머리로 하는 것이지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에 그런 정도 머리
는 제법 많습니다. 노 대통령처럼 ‘차력 정치’를 구사할 수 있는 인물도 어디엔가 있
을 겁니다. 그리고 힘에 좀 버겁더라도 목표를 좀 높이 잡는 게 작전상 좋은 것 아닙
니까?
미국이 말발도 안 선다
지 - 동북아 정세가 이렇게 돌아가면서 북핵 문제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었지 않습니
까? 우리가 그 문제를 늘 수세적으로 풀 수밖에 없었는데요. 미국에 외교적으로 해
결해달라고 매달리는 꼴이었는데요. 이번 일을 보고서 공격이 최선의 방어일 수 있
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완전히 공세적일 수는 없겠지만, ‘북핵 문제’에 대해서 우
리가 어느 정도 주도권을 가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 아닌가요?
최 - 그건 좀 오버 같습니다. 미국 얘기를 좀 더 할 필요가 있는데요. 요즘 들어 미국
의 영향력이 동북아에서 아주 빠르게 퇴조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번에 일본
이 도발한 사정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즘 일본의 최대관심사는 UN 상임이사국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한국과 중
국의 동의를 얻기 위해 립서비스는 물론이고 물량공세라도 퍼부어야 되는 것 아닙니
까? 특히 상임이사국인 중국의 동의를 얻는 것은 결정적이죠. 이런 중대한 시기에
이웃나라의 민족감정을 건드리는 행동을 시리즈로 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지 - 글쎄 말입니다. 그래서 대부분 학자들은 이렇게 보는 것 같습니다. 최근의 정세
는 미일안보체제가 어느 때보다 강고하다. 그런데 한국은 틈만 나면 미국 심기를 건
드리고, 걸핏하면 반미 행동을 일삼고, 철딱서니 없이 대북 봉쇄정책에 구멍이나 뚫
어버리고,
그래서 한국은 미국 눈 밖에 났다. 더구나 미국의 패권전략이 중국을 겨냥하기 시작
한 낌새를 감지하고는 일본이 이때다 싶어서 도발한 것이다. 대충 이런 얘기입니다.
동북아 정세가 일본에게 아주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미국 믿고 도발을 했다는 주장
인데요.
최 - 그럴까요? 미국이 처음에는 일본 등을 밀어주는 척하다가 얼마 안 가서 손을 놔
버렸잖아요. 상임이사국 반대가 그거죠. 이런 주장은 일본이 미국 믿고 까불다가 된
통 당했다는 얘기가 되는데 일본을 그렇게 바보로 보면 곤란하죠.
사태가 이상하게 돌아가다 보니까 황당한 주장도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채언
교수의 주장이 단연 돋보였습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부시 정권은 평화를 거부
하는 일본 우익, 한국 우익, 대만 독립운동세력을 퇴출시키고 동북아 평화체제를 구
축하기로 구상하고 한편의 ‘평화 시나리오’를 만들었다. 미국은 이 시나리오에 따라
일본 우익이 도발하도록 부추겨서 국제적 왕따를 만들었다는 얘기인데요, 일본의
도발은 미국의 원대한 ‘평화 시나리오’의 산물이라는 것이 주장의 핵심입니다.
글을 읽으면서 마치 황당무계한 괴기영화를 보는 듯했습니다. 평화 열망은 이해하지
만 세상을 거꾸로 읽으면 곤란하죠.
일본이 미국 믿고 도발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얘기가 안 맞아 들어가요. 미국만
지지한다고 상임이사국이 되는 게 아니잖아요. 한국과 중국한테 아양을 떨어야 할
판국에 도발을 한 데는 상임이사국 되는 것보다 더 중대한 일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내가 보기에 일본이 도발한 진짜 이유는 동북아의 정세변화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
장 중요한 것은 미국의 영향력 퇴조입니다.
동북아지역에서는 최근 들어서 미국의 영향력이 눈에 띠게 줄어들었습니다. 통제력
은 거의 잃어버렸고요. 이런 사실은 여러 곳에서 확인되는데요, 영향력은 고사하고
말발도 서지 않을 지경입니다. 조선(북한)에 대해서 ‘악의 축’이니, 선제공격을 하겠
다느니 최강의 압박을 가해도 6자 회담에 끌어내지도 못하고 있어요.
다른 나라에 대해서도 무기력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미국 의도대로 움직이는 나라
가 없어요. 중국을 ‘가상 적국’으로 삼으면서도 대만 지지는 꿈도 못 꿉니다. 일본은
겉으로는 보조를 맞추는 척 하면서도 속으로는 군사대국화만 노리고 있어요. 조일
수교도 일본이 국내 사정 때문에 멈칫거리고 있는 것이지 미국 때문에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말발이 안 서기는 한국한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한미군 줄이겠다고 협박해도 꿈쩍
도 안 해요. 조중동이 아무리 호들갑을 떨어도 노무현 정권은 먼 산만 쳐다보고 있어
요.
얼마 전까지는 제발 북한 공격 하지 말아달라고 애원하기라도 했는데 요즘은 그마저
도 안 해요. 함부로 남북교류하지 말라고 요구해도 씨알도 안 먹혀요. 남북의 사정
때문에 급진전은 없지만 교류협력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경의선과 동해선이 뚫리고
금강산과 개성공단 개발은 차질 없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이라크 침략은 미국 패권 붕괴의 전주곡이다
지 - 동북아시아에서는 미국의 패권이 무너졌다는 얘기입니까?
최 - 아직 패권이 무너졌다고 얘기하기는 어렵지만, 동북아지역에서 패권 행사가 잘
안 되고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중국은 물론이고 한국도 더 이상 미국의 뜻대로 움
직이지 않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역내의 전쟁에 반대한다고 공공연하게 밝힌 것이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국익에 따라 움직이겠다는 뜻을 명확하게 밝힌 것이죠.
지 - 언제부터 미국 패권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까?
최 - 이라크 침략 이후인 것 같습니다. 미국이 힘만 믿고 많이 오버했거든요. 그 업
보죠. 왕권에도 백성의 보이지 않는 동의가 필요합니다. 왕이 백성을 위해 뭔가 하고
있다는 모습도 보여줘야 해요. 그래도 동의를 못 얻을 때는 어떻게 됩니까? 반란이
일어납니다.
왕국이 이렇다면 국제사회에서야 어떻겠어요. 국제사회란 게 명색이 독립국가들 모
임 아닙니까. 패권 국가라고 멋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도 안 되고요. 패
권에도 동의가 필요하고, 패권이 공동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흉내라도 내야 합니
다. 그런데 부시 정권은 그런 사정을 싹 무시했어요. 무식하게 ‘힘이 정의다’라고 선
언해버린 겁니다.
그 결정적인 장면이 이라크 침략 아닙니까? 세계 최강국이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
같은 자립 능력도 없는 나라만 골라서 최신무기로 쑥대밭을 만들어버렸어요. 깡패들
이 동네 소녀들 겁탈하고 돈 빼앗는 모습과 다를 게 없거든요. 스스로 패권 국가 자
격이 없다고 고백한 겁니다. 이것이 미국입니다. 했다고 하더라도 아프가니스탄 침
공에서 멈췄어야 했습니다. 거기까지는 9.11에 대한 보복 정도로 봐줬을 텐데 말입
니다.
지 - 최 선생님은 미국의 이라크 침략이 유라시아의 대륙간 연대를 차단하기 위해서
미국이 장기적인 전략목표 아래 감행한 도발이라고 하셨는데요. 그 얘기를 좀 해 주
십시오.
최 - 앞에서 세계시장체제가 형성되고 있다는 얘기를 했잖습니까. 세계시장체제에서
패권 국가의 중요한 정책 결정은 세계체제 차원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라크 침략도
그런 차원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 왜 세계여론을 묵살하면서 무모하게 이라크 침략을 강행했느냐는 겁니다. 크게
두 가지 주장이 있습니다. 하나는 미국이 석유 통제권을 독점하기 위한 조치라는 주
장이고, 또 하나는 이라크를 비롯한 중동지역이 달러 대신에 유로를 결재 화폐로 사
용하려고 하는 움직임을 막기 위한 선제공격이라는 주장입니다.
두 주장 다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완전한 설명은 아닌 듯 합니다. 패
권을 유지하기 위해 에너지 독점 지배도 중요하고,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도 중요하
지만, 더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는 생각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유럽과 아시아 미국 패권에 대항하는 연합전선을 구축할 가능성을 막
기 위한 사전조치가 아니냐는 생각이 듭니다. 중동이 유럽의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되
면 미국은 유라시아 대륙의 중요한 거점을 잃어버리게 되거든요. 그래서 중동 지배
를 계속하고 ‘유라시아 연합’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 무리하게 침략을 강행했다고
봅니다.
이런 사정 때문에 프랑스, 독일 등 유럽연합과 중국, 러시아 등 유라시아 국가들이
강력하게 반발했다고 봅니다. 미국 패권에 대항하는 보이지 않는 연대가 이루어졌
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이런 현상은 미국 패권이 도전을 받고 있다는 얘기거든요.
이라크 전쟁을 보면 명백해져요. 미국 패권에 동조하는 영국, 일본, 이탈리아, 한국
등등과 반대하는 유라시아 중요 국가 사이에 상당한 균열과 대결이 있었거든요. 이
런 현상은 2차 대전 이후 세계를 주도했던 미국 패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이야기
입니다.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요. 이라크 침략 이후 세계인의 가슴 속에서 ‘자유의
나라 미국’ 이미지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무서운 미국’ 이미지가 들어섰다는 사실
입니다. 세계인으로부터 ‘패권 국가’로 동의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이런 사태는 미국한테 심각한 타격을 주고 있습니다. 반미기류가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어떤 국가도 함부로 미국 따라가기가 겁나게 되었어요. 그랬
다가는 친미파니 ‘미국 앞잡이’니 따위 욕을 먹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미국이 패권
을 수호하기 위해 벌인 전쟁인데 결과는 반대로 나타났어요.
미국은 거의 모든 나라에서 반미와 자주화를 선동하고, 패권을 스스로 허물어뜨렸어
요. 결국 부시가 반미운동 선봉장을 한 겁니다. 한국을 보면 명확하죠. 미국이 이라
크 파병을 요구하자 반미 폭풍이 몰아치고, 평화운동과 자주화 요구가 폭발하지 않
았습니까. 요즘 ‘친미파’ 보다 더 큰 욕 봤습니까?
지 - 미국 패권이 동북아시아에서 첫 시험대에 올랐다고 할 수 있을까요?
최 - 예. 그렇게 봅니다.
지 - 어떻게 되어 가고 있습니까?
최 - 오락가락 합니다. 미국 입장에서도 한미일 안보체제가 계륵입니다. 유지할 수
도 없고 버릴 수도 없어요. 유지하자니 중국의 반발만 불러올 게 너무 뻔해요. 조이
면 조일수록 중국은 거세게 반발할 것이고 강하게 도전할 것입니다. 이래가지고는
중국을 패권 도전자로 키워주기만 할 뿐입니다. 그렇다고 한미일 동맹을 바꾸자니
뾰족한 대안이 없는 겁니다. 중국과 일본을 조종해서 ‘은메달 싸움’을 붙이는 게 최
고의 패권전략인데, 그런 고도의 이이제이 전략을 구사할 방법이 없는 겁니다.
이런 오도가도 못하는 입장 때문이었는지 일본의 도발과 한중의 반격 사이에서 미국
은 영향력 행사는 커녕 눈치 보기에 바빴습니다. 이라크를 향해서 진격 명령을 내리
던 위풍당당(?)하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혹시 그런 장면 본 적 있습니까?
부시도 세상이 엄청 바뀌었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겁니다.
이 얘기가 뭣이냐 하면,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한중일이 각축을 벌여도 미국이 무기
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실 자체가 엄청난 변화죠. 미국 패권
이란 게 원래 강대국을 상대로 하는 게 아니고 약한 놈 골라서 묵사발 내놓는 방식이
니까 이미 강대국 반열에 들어선 중국과 일본을 어쩔 용기도 없을 겁니다. 아무튼 동
북아시아에서는 미국이 쳐다만 보고 있는 건 틀림없습니다.
‘김대중 선생’이 세상을 움직였다
지 - 그렇지만 미국이 패권주의를 쉽사리 포기하지도 않을 것이고, 동북아에서 영향
력을 회복하려고 온갖 꾀를 다 낼 텐데요. 그런 움직임은 없습니까?
최 - 그런 시도는 이미 2002년에 있었습니다. 소위 북핵 문제라는 건데요.
지 - 2002년 10월 3일 제임스 켈리가 북한 방문을 해서 강석주 외무상 등과 회담을
한 이후의 상황 말입니까? 그 후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는 등 ‘북핵
문제’에 대한 강경발언들이 나왔었는데요. 이게 ‘북핵 문제’의 발단이 되지 않았습니
까.
최 - ‘북핵 문제’에 대해서는 할 얘기가 많지만 그 얘기는 다음에 하기로 하고, 오늘
은 ‘북핵 문제’가 불거지기 직전 상황을 얘기해 봅시다.
‘북핵 문제’는 꼭 일본과 북한이 수교하려고 할 때 일어났습니다. 1차 ‘북핵 문제’도
그랬고, 2차 ‘북핵 문제’도 그랬는데요. 이걸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1차는 오래
된 얘기니까 그만두구요. 2차만 살펴봅시다.
2002년 9월 17일 고이즈미가 조일 수교를 위해 전격적으로 평양 방문을 했는데요,
평양방문 사실을 하루 전에야 미국에 통보했습니다. 미국이 난리가 났습니다. 미국
의 제일 가까운 우방이 어느 나라입니까? 영국과 일본 두 나라 아닙니까. 어떻게 보
면 미국은 일본 경제발전의 은인이죠. 그런데 뒤통수를 얻어맞았어요. 굉장한 충격
이었던 모양입니다.
고이즈미의 급작스러운 평양방문은 그만한 사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태가 급박하
기도 했고, 미국을 따돌려야 할 이유도 있었을 것입니다. 1차 ‘북핵 문제’를 경험한
터라, 이번에도 미국이 방해할까봐 극비에 붙인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일본
마저 평화무드에 휩쓸리자 이번에는 미국이 급해졌습니다.
부시가 9월 25일 북한에 특사를 보내겠다고 발표를 했고, 10월 3일 국무성 동아시아
담당차관보 제임스 켈리를 북한에 특사로 파견합니다. 이 대목이 클라이맥스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악의 축’이라고 욕을 퍼붓던 조선에 갑자기 특사를 파견한 겁
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당시를 돌이켜보면 당시 동북아시아는 평화무드, 경제협력무드가 그 어느 때보다
무르익었다는 사실입니다. 지 선생님, 당시 평화무드의 주도자가 누군지 아세요?
지 - 혹시 김대중 전 대통령 아닙니까?
최 - 맞습니다. 이걸 이해하자면 김대중의 4강 외교를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김대
중 전 대통령은 71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을 때부터, 그때는 삼엄한 냉전체제였는
데도 미국, 일본, 소련, 중국 네 나라 보장 하에 평화통일을 추진하겠다는 공약을 내
놓았습니다. 당시로서는 혁명적 구상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스물 한 살이었는데 가
슴이 벅찰 정도로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여하튼 김대중은 30년이 지나서 대통령이 된 다음에도 4강 외교를 실천했습니다. 이
4강 외교의 핵심이 뭡니까? 한미일 안보체제, 그러니까 냉전체제를 넘어 평화통일
을 실현하겠다는 전략 아닙니까.
그런데 이 노선은 자주외교 차원을 넘어서는 훌륭한 국제전략이거든요. 무슨 얘기냐
하면 4강 외교는 미국 종속을 벗어나는 ‘자주화’ 정도가 아닙니다. 민족평화통일과
세계냉전체제 청산을 동시에 추구하는 한국 최초의 세계전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대중 선생’이라는 호칭은 결코 허사가 아닙니다.
지 - 98년부터 김대중 전 대통령이 본격적으로 4개국 순방외교를 펼쳤는데, 그때 그
런 외교적인 성과가 있었습니까?
최 - 그렇습니다. 2001년 러시아를 방문해서 정상회담을 하고 8개항의 공동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건설적이고 상호보완적 동반자 관계를 심화・발전시켜 나간다는데 합
의했고, 특히 경제협력을 강조하고 시베리아 자원 공동개발, 시베리아 철도 공동부
설 등등의 대계획을 추진하기로 합의했습니다.
러시아 외교보다 더 획기적인 것이 중국 외교입니다. 한중관계를 동반자관계로 격상
하고, 이념적 차이나 적대성을 완전히 청산하기로 했습니다. 중국 외교에서 특히 주
목을 끄는 것이 국방장관 회담의 정례화인데, 4강 외교의 하이라이트였습니다.
미국한테는 굉장한 충격이었습니다. 한국이 중?물? 손을 잡다니! 더구나 미국을 제
쳐놓고 국방장관회담을 정례화하다니! 미국은 엄청난 위기의식을 느꼈고, 그래서 김
대중이 귀국한지 일주일 밖에 안 지난 11월 21일에 클린턴이 부랴부랴 한국을 방문
합니다. 그만큼 다급했다는 얘기죠.
지 - 클린턴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북한의 핵시설 의혹’에 대해서 강력하게 비난했
는데요. 일종의 경고였군요.
최 - 그렇죠. 클린턴이 와서 핵문제를 들고 나온 것은 동북아 평화무드를 대결 무드
로 바꾸겠다는 의도였습니다. 아무튼 2002년 9월 무렵의 동북아시아에는 따스한 봄
기운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당시 상황을 대충이라도 짚어봅시다. 북한이 개혁개방 정책으로 나아가면서 신의주
계획을 발표하고 장관도 임명했습니다. 중국 동북지역과 시베리아 가스 공동개발도
논의되고, 러시아는 시베리아 철도 부설을 위해 철도장관회담을 제의했습니다. 바야
흐로 평화와 경제협력 무드가 최고조로 달아올랐습니다.
부산에서 출발한 시베리아 철도가 중국, 시베리아, 몽골, 러시아와 유럽 대륙을 거쳐
서 런던까지 달린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것 한 가지만으로도 유라시아 대륙에 평화
와 협력의 훈풍이 불지 않겠어요? 김대중이 그렸던 그랜드 플랜이 유라시아 대륙 차
원의 대전략이었다는 얘기입니다. 김대중이 받은 노벨평화상은 김정일하고 손잡았
다고 준 것이 아닙니다.
민족주의는 위험하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이렇게 동북아가 평화무드로 가자 일본과 미국이 큰 충격을 받았
습니다. 일본은 남북한과 중국, 러시아 등 동북아 국가들이 추구하는 경제협력 흐름
에서 소외될까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수상이 부랴부랴 평양을 방문했고, 혹시
미국이 또 방해할까봐서 하루 전에야 알린 것입니다.
미국은 일본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동북아가 평화무드로 가면 미국이
군대를 주둔시킬 명분도 약해지고, 패권 휘두르기는 더더욱 어려워집니다. 자칫 잘
못하면 동북아에서 퇴출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지 - 패권주의가 무너지지 않겠습니까?
최 - 그렇죠. 동북아시아는 인구, 경제력, 군사력, 시장규모, 이 모든 면에서 앞으로
10년 이내에 세계 최고지역이 될 것이 확실합니다. 이 지역에서 퇴출되면 패권은 끝
입니다. 미국은 잘해야 아메리카 맹주노릇이나 해야죠. 이건 미국의 악몽입니다. 이
런 상황을 막기 위해서는 특단의 기폭제가 필요했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웃음)
지 - ‘북핵 문제’ 아닌가요?(웃음)
최 - 그렇습니다. 왜 느닷없이 ‘북핵 문제’가 튀어나옵니까? 이해가 안 되잖아요. 20
02년 9월은 동북아 지역에서 150년 이래에 평화무드가 최고조에 달했던 때였습니
다. 그런데 부시의 특사가 조선을 며칠 다녀간 다음 졸지에 상황이 뒤집어졌습니다.
그 핵심이 뭡니까? 바로 핵 아닙니까? 미국과 조선이 ‘핵 문제’를 터뜨려서 평화무
드, 협력무드를 전쟁무드, 대결무드로 확 바꿔버린 겁니다.
지 - 미국의 뒤집기 작전이 일단은 성공한 셈이군요.
최 - 그 이후 2년 반 이상 대결무드가 지속되고 있으니까 미국이 일단은 소원성취를
한 거죠. 그런데 문제는 시간이 흐를수록 미국이 늪으로 빨려 들어갔다는 사실입니
다. ‘핵 약발’이 떨어지자 오도가도 못 하고 있습니다.
점차 발목, 정강이, 허벅지를 넘어 허리까지 빠져버렸다고나 할까요. 세월만 보내고
해결한 건 하나도 없습니다. 이러니 누가 미국 능력을 믿겠어요. 2년 반 동안 미국
의 무능을 선전하고 다닌 꼴이 되었어요. 요즘은 한국, 중국, 일본 할 것 없이 “당신
의 능력을 보여주세요!”라며 미국을 놀려댑니다.
지 - 그렇다면 이번에 일본이 도발한 것도 미국의 무능을 눈치 챘기 때문입니까?
최 - 예.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평양 방문해서 조일 수교를 본격적으로 추진하려는
판에 미국이 뛰어들어서 판을 엎어버렸잖아요. 엄청 황당했을 겁니다. 그래서 미국
이 하는 짓을 유심히 살폈겠죠. 그런데 미국이 ‘핵 문제’를 터뜨려 놓고는 오도가도
못 하는 걸 봤단 말입니다.
그래서 일본은 판단했습니다. 미국은 종이 호랑이다. 동북아시아는 머지않아 무주공
산이 된다. 그래서 “한국과 중국이 얼마나 세게 나오는지 어디 한번 찔러보자”면서
도발을 한 것이다, 이런 얘기입니다. 결국 이번 사태는 미국의 패권이 약해진 틈을
타서, 먼저 일본이 도발을 했고, 이에 뒤질세라 한국과 중국도 거세게 맞받아치면서
동북아 기세싸움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렇게 봅니다.
지 - 이번 한중일 각축을 보면 세 나라 모두 민족주의 정서가 압도적인데요. 사태를
도발한 일본 우익도 그랬고, 맞받아치는 한국도 그랬고, 시위에 나선 중국인민도 그
랬습니다. 이런 민족주의 충돌이 문제는 없을까요?
최 - 아주 중요한 지적을 하셨습니다. 그게 가장 걱정되는 대목입니다. 세 나라가 다
민족주의로 나가면 대결과 충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일본 민족주의는 천황주의와 군국주의가 결합해서 야쿠자 본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본사람들은 아직도 정신적으로는 ‘오야봉-꼬봉’, ‘천황-신민’이라는 야쿠자문화를
못 벗어난 것 같습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천황 한 사람만 숭배하다가, 요즘은 욘사
마 배용준이나 축구선수 베컴도 천황만큼 사모한다는 것 정도입니다. 그러나 몸과
마음을 다 바쳐서 스타를 사모하는 두목숭배정신, 신민정신은 그대로입니다. 이런
형편이니까 일본 우익도 위험하지만 일본의 이런 야쿠자문화는 더 위험하다는 겁니
다.
지 - 그러나 다른 견해도 있습니다. 일본 우익이 선동을 해도 일본 국민은 너무나 차
분하잖아요. 한국과 중국의 거친 대응과는 많이 다르지 않습니까?
최 - 나도 그런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시마네 현이 ‘다케시마의 날’을 정하든 말든
대다수 일본인은 관심도 없다. 우익이 그렇게 난리법석을 떠는데도 「새로운 역사교
과서」 채택률이 1%도 안 된다. 이만하면 성숙한 시민이고 대단한 역량 아니냐는 거
죠.
그런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습니다. 입장부터 다
릅니다. 일본은 영토를 빼앗으려고 하는 입장이고, 한국과 중국은 빼앗기지 않으려
고 하는 입장입니다. 결집력이 다를 수밖에 없죠. 일본인이 이런 억지에도 부화뇌동
한다면 그건 보통 걱정이 아니죠. 문제는 일본인이 권력에 대한 대항력과 견제력이
아주 취약하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상황이 오면 대다수 일본인은 우익의 선동에 따
라간다는 얘기거든요.
지 - 중국 민족주의는 어떻습니까?
최 - 지금은 일본보다 문제가 더 심각합니다. 중국이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자본주의
로 돌아선 것은 오래 된 일이거든요. 그러다보니 중국도 초기 자본주의 병폐가 심각
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부패, 빈부 격차, 독재권력, 공해 등등, 건드리면 터질 문제
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요.
그러나 어느 것 하나 가까운 장래에 해결될 가능성이 없습니다. 이런 사정이니까 ‘계
급 없는 사회’를 지향한다는 공산당 깃발은 내걸기도 어렵습니다. 웃기는 짜장이 되
어버리니까요. 그래서 꺼내놓은 게 대중화(大中華)라는 왕조시대 유물입니다. 패권
주의와 민족통합주의를 결합한 패권적 민족통합 노선입니다. 다만 아직은 이 노선이
대외 지향적이라기보다는 대내 통합 목적이기 때문에 그렇게 위험하다고 할 수는 없
습니다.
지 - 고구려사 왜곡 같은 것은 문제 아닙니까? 조선(북한)이 붕괴될 경우에 중국이
개입할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흡수하려 한다는 주장도 있습
니다. 정말 그런 의도가 있다면 중국 민족주의도 대단히 위험한 것 아닙니까?
최 - 그럴 가능성은 충분히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나 중국이 아직은 대외 팽창보다
는 중국 분열을 더 걱정해야 할 형편이라고 봅니다.
지 - 만약 일본이 대동아공영권을 다시 들고 나오고, 중국이 대중화권을 들고 나온
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중국과 일본이 동아시아 내지 아시아 패권을 다툰다면 대
단히 위험한 사태가 오는 것 아닙니까?
최 - 그렇습니다. 어떤 민족주의든 민족주의라고 생긴 것은 배타성을 가질 수밖에
없고, 충돌을 피하기도 어렵습니다. 특히 중국과 일본의 충돌은 파급력이 2차대전
보다도 클 것입니다.
따라서 한국은 이런 충돌을 예방하고 조정할 수 있는 힘과 국제전략을 반드시 가져
야 합니다. 그 방향은 장기적으로는 동북아 집단안보체제와 공동시장이겠지만, 아직
은 요원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현실적 전략으로 나온 것이 노무현 대통령의 ‘동북
아 균형자 역할’이 아닌가 싶습니다.
평화 주도 전략국가를 만들자!
지 - 한국 민족주의는 어떻습니까?
최 - 한국 민족주의도 위험하기는 합니다. 한국 민족주의에도 배타성이 있고 최근에
는 민족우월주의도 엿보입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면에서 일본이나 중국의 민족주의
보다는 질이 좋습니다.
두 가지 면에서 그런데요. 하나는 반제 저항성입니다. 한국 민족주의는 제국주의 침
략에 맞서서 싸우는 과정에 숙성되었기 때문에, 굉장한 저항성과 민족적 연대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강자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침략 이데올로기’가 아니
라 약자의 독립과 해방을 지향하는 ‘해방 이데올로기’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한국 민족주의가 민주주의와 결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민족주의는 대
체로 제국주의 아니면 파시즘과 결합하는데, 한국에서는 민주주의와 결합하고 있습
니다. 분단과 미국 종속이라는 독특한 역사적 조건 때문에, 변혁운동이 미국 반대와
독재 반대를 동시에 추구한 결과, 민족주의와 민주주의가 공통분모를 가지게 되었
고, 동전의 앞뒷면처럼 결합되기도 했습니다.
그 공통분모는 ‘주권’입니다. 민족주의는 반외세와 국가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이념이
었고, 민주주의는 반독재와 시민주권을 쟁취하기 위한 이념이었습니다.
지 - 지나친 자화자찬일 수도 있을 거 같은데요.
최 -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일부 일그러진 조폭적 행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
민족주의세력의 다수는 내부에 강렬한 평화주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통일운동도 그
렇고 반미운동도 그렇고 이라크 파병 반대운동도 그랬습니다. 문제는 한국 민족주의
가 민족간 협동과 국제평화주의로 전환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지 - 일본이 대동아공영권을 꿈꾸고, 중국이 대중화권을 추구하는데 한국한테만 국
제평화주의를 추구하라는 건 무리 아닙니까?
최 - 대동아공영권, 대중화권은 다 시대착오적인 몽상입니다. 처음에 얘기했듯이 영
토시대의 발상이죠. 고구려사가 한국역사냐 중국역사냐 싸우는 것도 달밤에 헛발질
이고요. 고구려사는 한국사도 중국사도 아닙니다. 그냥 고구려사일 뿐입니다. 이탈
리아 사람들이 신성로마 시절 독일을 두고 이탈리아 역사라고 안 하잖아요. 그런 얘
기하면 돈 사람이죠.
지 - 그렇다면 나라의 발전, 나아가서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서 한국이
어떤 역할을 하면 좋겠습니까?
최 - 어느 곳에나 협력과 경쟁은 있습니다. 따라서 어느 한쪽만 강조하면 곤란합니
다.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 경쟁력을 갖추면서도 동아시아의 평화와 협력을 추구
하려는 의지, 다시 말해서 경쟁과 협력을 동시에 추구하는 균형 감각이 필요합니다.
세계시장체제에서 경쟁과 협력을 동시에 추구할 때 한국에게 가장 시급한 과제는 국
제전략을 가지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제는 한국 내부만 들어다보고 시시콜콜한 걸로
지지고 볶고 싸우기만 하면 곤란합니다.
지금 바로 전략국가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합니다. 미국은 세계패권전략을 가지
고 있는데 우리는 국제전략도 못 가진다면 곤란하죠. 영원히 미국의 그늘에서 벗어
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일본과 중국은 대동아공영권이니 대중화권이니 나름의 국제
전략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는 땜빵 요법밖에 없다면 미래가 뻔한지 않겠습니까.
김대중 전 대통령의 4강 외교나 노무현 대통령의 동북아 균형자 역할론은 훌륭한 국
제전략입니다. 그러나 장기 전략과 체계를 갖추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
다. 이제는 대통령 차원이 아닌 국가 차원에서 국제전략을 준비해야 합니다.
지 - 혹시 최 선생님이 생각하는 국제전략이 있습니까?
최 - 구체적인 것은 없습니다. 한 사람이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다만 몇 가지
필수사항은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국제전략은 남북의 평화와 협력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합니다. 민족의 공동
번영전략이 없는 국제전략은 공허하고 실효성도 없습니다.
특히 통일에 매달리지 말고 민족경제권 실현 방안을 반드시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남북 협력이 동북아시아, 나아가서 아시아에서 한국이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는 토
대가 됩니다. 만약 조선이 일본이나 중국의 영향 하에 들어가서 민족경제마저 확보
하지 못하면 그야말로 약소국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민족주의는 넘어서야 하지
만 민족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둘째,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주변 국가와 친친(親親) 외교를 기본 외교정책으
로 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국가도 따돌리거나 적대시하지 않고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국제전략의 필수요소입니다. 다만 필요에 따라서 사안에 따라서 더
친하거나 덜 친한 경우는 많이 나올 수 있습니다. 이런 친친 정책이야말로 최고의
자주외교일 것입니다.
셋째, 동북아시아의 협력과 통합을 위한 방안을 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세계
는 급격하게 지역블럭으로 통합되고 있습니다. 유럽이 대표적인데요.
시장통합, 화폐통합을 통해서 경제통합을 이루고, 유럽합중국이라는 정치통합을 향
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추세 속에서 동북아시아만 민족국가와 민족주의에 갇
혀 있으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형태로든지 동북아 경
제협력체제를 추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인데, 이에 대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지 - 가까운 장래에 훌륭한 국제전략을 만들어내서 대한민국이 당당한 전략국가로
비상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랜 시간 수고하셨습니다.
[데일리 서프라이즈 2005-05-06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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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쀍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글이 잼있어서 퍼왔습니다. 제가 노무현 씨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번 동북아 균형론 발언이 괜히 한 번 해 본 말이 아니라 현 시대의 흐름을 철저
히 읽어서 내린 결론이란걸 알 수 있었네요. 단 고구려사의 경우 영토문제가 아니라 민족의
식 계승의 문제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역사이고 결코 중국의 변방민족의 역사가 될 수 없습니
다. 나라타이틀만 따온 신성로마제국이랑은 차원이 틀리죠. 이 글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
들이 있으면 리플좀 달아주세요. ^^;; 단 일방적인 비난의 리플은 나빠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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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외국에서 본 한국/국제
한국은 새우가 아니라 '꾀돌이 백상어' 다.
킬러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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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5.16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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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고구려사 발언한 부분은 현재 그런 영토문제를 따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중심을 두고 하신것 같은데요.
전체적으로 좋은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고구려사 문제만은 확실히 깨는군여.. 고구려사는 우리의 역사입니다..
고구려사 얘기로 깬다 하시는 분들 많은데.... 사실 고구려사나 발해사는 중국의 역사도 한국의 역사도 아닌 "요동사"로 묶어야 한다는 건 지역 도서관에서 책 좀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