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심 도성의 북쪽에 있는 마을, 성북동에 갔다.
경복궁 토요반 지킴이 선생님들 15명 답사에 나도 합류 한 것이다.
동쪽 흥인지문과 북쪽 숙정문 사이를 잇는 도성 밖을 돌아 본 것.
조선 시대에는 도성을 방비하기 위해 도성 북쪽에 둔진 (屯鎭)을 설치하였다.
성북동의 둔진 주민에게는 시전에서 판매하는 무명 삼베 모시를 표백 하는 일을 맡겨
생계를 꾸려가게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돈암장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가 해방 후 환국하여 잠시 머무시던 곳.
나라의 아버지 국부로 칭송되며 대한민국의 처음 대통령이던 분을 떠올려 본다.
내가 고2때 4.19 혁명이 있었다. 나는 전주에서 별 영문도 모르고 지냈다.
심우장
3.1 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 중 한 분 만해 한 용운 선생이 거쳐 하던 곳.
성 안에 그것도 경복궁을 가로막은 조선 총독부 건물을 등지고 북을 향해 지은 집.
목부 (牧夫)가 소를 찾아 떠나는 집에서 민족의 횃불이 되셨던 선각자 이다.
이 재준 가
이 집은 마포 부자 이 종상의 별장 이다.
그는 1900년경 당시 마포에서 가장 많은 상선을 가진 상인 이었다.
이 재준 가라는 이름은 소설가 이재준이 이 집을 사서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지금은 어느 교회 목사관으로 사용 하고 있다.
선잠단지(先蠶壇址)
조선시대 왕비의 소임중 하나는 친잠례를 지내는 것이었다.
이곳 선잠단은 성북초등학교 옆에 조그만 터만 남아있다.
선잠단은 선농단의 신위와 함께 사직단에 옮겨져 제사를 지내고 있다.
그렇지만 매년 5월이면 이 곳에서 친잠례를 재현 한다고 한다.
성락원(城樂園)
철종 때 이조판서 심 상응의 별장으로 의친왕 이강이 35년간 별궁으로 사용하던 곳이다.
작은 골짜기가 온통 정원을 이루고 있어서 심산유곡을 찾아 온 것 같다.
지금은 개인 소유의 집이어서 여러 번 부탁 끝에 방문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최순우 옛집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내셨던 분.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저서를 쓰신 분의 집이다.
옹색하리만큼 작은 정원이지만 멋스럽다.
굵은 떡갈나무가 정원수로 서 있고 작은 키의 참죽나무 앞에는
백자 달 항아리가 방 안의 눈높이만큼 받침대 위에 놓여있으니
백자에 대나무가 저절로 그려지는 셈이어서
경회루 연못에 인왕산을 차경(借景)하는 이치와 같다.
마을버스 111번을 타고 오르락내리락 배가 고프다.
뭐니 뭐니 해도 답사의 즐거움은 먹을거리도 포함된다.
성북동 메밀수제비 집은 유명한가 보다 사람이 붐비고 차들이 많다. 먹어보니 과연 맛있다.
이태준 가 , 수연산방 ; 정취와 휴식
해방 직후 월북한 작가 이태준이 살 던 집. 문장 강화라는 문장론은 유명하다고 한다.
어느 구릉 낮은 언덕쯤에 지어진 한옥 집인데 찻집으로 이용하고 있다.
신발 벗고 안으로 들어가 한국전통 차를 마시고
성 밖 북쪽 산턱을 바라보노라니 여름 하늘이 맑고 청명하다.
담장은 기와를 얹었다. 툇마루 앞 좁은 뜰에는 석류나무가 자라고 있다.
옆 벽에 뚫어진 봉창을 보며 모두들 궁금해 한다. 중학시절 전주 우리 집은 한옥이었다.
꽤 넓은 텃밭과 행랑채도 있었다. 한 시간이 넘도록 옛 날 생각에 젖었다.
그 때는 나도 소년 이었었다. 그립다.
길상사
이 곳은 요정 대원각 자리에 세워진 절이다.
고 김영한 여사가 법정 스님에게 땅을 시주해길상사를 지었다. 요정은 일류 음식점을 말한다.
삼청각, 청운각과 함께 대원각은 유명하다.
환골탈퇴란 말이 있다. 이제는 맑고 향기롭게 부처님 말씀으로 세상을 교화 하고 있다.
삼청각
길상사에서 이 곳까지 고갯길을 걸었다. 혜화문 쪽에서 북쪽 숙정문 뒤까지 온 것이다.
그러니까 경복궁 뒷산 북악산 북쪽 이다. 지금은 대중음식과 공연장이 있다.
자유로운 시간을 가지고 각자 한담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건청궁
그 날 4시부터 건청궁 설명이 있다. 복원을 담당 하신 경복궁 과장님의 해설을 들었다.
명성황후가 곤녕합 옥호루 어디쯤에서 시해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한다.
사랑채 안채 별당 형식의 단청 없는 한옥에서 강의를 듣고 하루를 마감한다.
시인 김광섭은 이렇게 읊는다.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 던 성북동 비들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중략
사랑과 평화의 새 비들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
..................
쫓기는 새가 되었다. 끝
발전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성북동의 평화는 하나씩 사라지고 있다.
우리는 가슴에 금이 간 성북동 비들기를 찾고 있었다.
무명 삼베 모시를 표백하던 성북동에서
첫댓글 돈암장, 심우장, 성락원, 이재준가 모두 다 개인소유여서..... 최순우 옛집처럼 우리 모두가 원하면 언제든 가보고 느낄수 있는 공간이됐으면 참 좋겠는데요!!!!!!
네 동감 입니다.
짧지만 강한 문장, 정확한 정보 - 그대로 긁어서 나중에 써먹을 요량으로 가져갑니다. 선생님 글을 대하면 얼굴을 뵙는 착각에 빠집니다. 글과 생활의 여실함, 똑같음을 느끼는 것이겠지요. 여름 편안히 지내시기를.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선생님때문에 행복한 한주 였습니다. 왜냐구요? 잊혀졌던 젊은날을 그리워하는 시간 속으로 빠져들었고 페리퀜트의 조곡을 다시 들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멋있는 선생님을 알게되서 항상 감사합니다.
감사 합니다. 이 성남님께도 안부를 전합니다.
열정과 미소의 멋쟁이 선생님 ! 계속 화이팅 입니다 ! 남편과 함께 감사 인사 드리며 박수를 보냅니다 !!!
이 상섭님께도 신의 가호를 기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