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생명 말씀(2025.9.7.) 말씀/ 마태복음 11:29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오늘이 9월 첫주입니다. 이제 본격적인 가을의 시작입니다. 새로운 마음으로 일도 시작하고 천고마비의 계절 독서도 열심히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일본의 사이토 다카시아라는 교수는 문학 역사, 철학, 교육학으로부터 비즈니스 대화법 인간관계까지 종횡부진 공부를 하는 괴짜 교수입니다. 이 분이 쓴 ‘독서는 나를 절대 배반하지 않는다’는 책을 보면 그 글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내가 이 경험을 통해서 배운 것은 공부를 한 결과 지금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같아도 공부한 것이 절대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 공부는 마치 나무의 나이테처럼 내 안에 각인 되어 필요할 때 전혀 새로운 형태로 다시 나타나서 뜻밖의 성과를 가져다 준다. 그 깨달음이 나를 평생 공부할 수 있도록 해준 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공부라는 것은 꼭 당장 필요를 써 먹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평생 필요한 것이고 평생 어떤 모양이든지 그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학교 공부가 아니라면 나이가 들어도 언제든지 평생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당연 독서입니다. 독서보다 자율적으로 언제 어디서든지 공부할 수 있는 더 좋은 방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만일 당신이 살아왔던 대로 살기로 마음먹었다면 책을 읽지 않아도 괜찮다. 그러나 어제보다 조금이라도 나아진 모습으로 살고 싶다면, 단단한 내공을 쌓아 삶의 어떤 위기에도 흔들리고 쉽지 않다면 반드시 책을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아무리 열심히 산다고 해도 우리가 경험하고 배울 수 있는 지식과 경험은 한정되어 있어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생각과 행동에서 벗어나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창의적인 결과를 만들어내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한 사람이 깊은 내공을 쌓는 데 필요한 질과 양을 더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또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독서만큼 또 중요한 것이 자아 발견이다. 인간은 누구나 내가 누구인가 자아 발견, 자아를 찾기 위해서 낯선 환경을 경험할 필요가 있다.” 영화을 예를 들어줍니다. <애니 다이어리>라는 영화입니다. 주인공이 취업을 위해서 면접을 보는데 면접관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설명해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 패닉에 빠집니다. 이름, 생년월일, 고향, 가족들, 어느 학교 졸업. 이런 기본적인 사항을 제외하고 진자 자기 자신에 대해서 모른다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이지? 충격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자기가 살았던 환경과 전혀 다른 상류층 집안의 유모로 들어가서 아이를 돌보는 일을 합니다. 거기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가치관과 진정으로 원하는 삶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낯선 환경에서의 경험입니다. 인류학자들의 속설에 의하면 진정한 자아를 찾으려면 낯선 환경을 경험 해봐야 한다고 합니다. 애니는 상류층 가정의 유모로 사는 동안에 마침내 나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자아를 찾기 위해서 익숙한 곳을 떠나 낯선 환경으로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그게 인생 공부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인류학자들은 낯선 문화를 가지고 있는 곳을 찾아가 머물면서 다른 문호를 관찰하는데 그러면서 다른 문화를 이해 할뿐 아니라 결과적으로 자신의 문화를 더 명확하게 규명하게 된다고 합니다. 원리는 이런 것입니다. 다른 문화를 경험하고 나면 그동안 당연하고 익숙하게만 받아들였던 자신의 문화가 낯설게 보이고, 미처 알아보지 못한 부분들이 하나 둘 눈에 들어오면서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영행을 떠나서 많이 배운다는 것도 그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낯선 환경에서 자신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낯선 환경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쉽냐는 것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매일이라도 똑같은 일상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고, 나도 훌쩍 어디론가 훌쩍 떠나서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자아도 찾고 싶은데...이런 저런 일로 그게 잘 안 됩니다. 이런 한계점을 극복하는 것이 바로 독서라는 것입니다. 책들 속에는 전혀 다른 환경 속에 처해있는 저자의 삶과 생각 그리고 그가 본 세상의 모습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책 한 권을 읽는 것은 내가 있는 자리에서 비록 몸은 떠나지 못해도 낯선 사람과 관계를 맺고,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때 일본에서 유명했던 <,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 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말기 암환자들이 고통을 줄여주는 호스피스 전문의인 오츠 슈이치가 쓴 것입니다. 그가 죽음을 눈 앞에 둔 수 많은 환자들을 만났던 경험을 토대로 사람들이 죽기 전에 어떤 후회를 하는지 그래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이 책이 많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만큼 사람들이 후회 없는 삶을 살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책에 담긴 내용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더라면,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했더라면, 등 어느 누구나 평범하고 당연한 것들로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인생을 충실히 사는 법“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살지 못했는가? 그 이유는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어떤 일인지, 돈이 인생의 정말 행복을 주는 것인지. 나는 어떤 일을 할 때 정말 가치 있고 행복한 것인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인생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돈을 벌지 못해도, 그렇게 높은 지위에 오르지 않더라도 그저 평범한 삶을 살더라도 얼마든지 행복하고 후회 없는 인생을 살 수 있는데 문제는 그런 인생 공부를 하지 않은 것입니다. 진작에 책을 좀 읽었더라면 후회를 하지 않고 살았을 텐데 말입니다. 지난 주영정공 예배를 드리고 실제 저는 책 몇 권가지고 고흥 낭도 백야 낯선 곳으로 차를 몰았습니다. 새벽큐티부터 기도. 독서 똑같은 생활이지만 낯선 곳에서 2박3일을 보냈습니다. 거기서 전에 읽었던 <월든> 이라는 책을 다시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소로우가 월든 호수가에 작은 오두막을 짓고 2년 동안 가능한 한 단순하게 살면서 인간의 행복을 방해하는 불필요한 물질적 정신적 요소들 제거하는 방법을 배우면서 자연애 대한 사색을 생생하고 풍부하게 묘사한 책입니다. 기술과 사치에 집착하는 사회에서 삶의 본질을 보여주는 고전적인 명작입니다. 초반부에서 그는 농부들이 내 집 마련하고 집에 갇혀 산다고 합니다. 부자가 되고 집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집이 주인 노룻을 한다는 것입니다. 집의 의미를 잘 모르고 이웃이 집에 있으니 나도 있어야 한다고 힘들게 마련하고는 가난하게 살지 않아도 되는데 빚을 갚으며 평생 가난하게 산다는 것입니다. 집만 있지 삶은 가난하게 살다가 가난하게 죽는 것입니다. 아마 요즘 젊은 세대들 안쓰러울 정도로 그런 사람들 많습니다. 평생 빚내서 집 사고 빚 갚느냐고 허덕입니다. 이 분은 이런 문명사회를 반하여 숲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2년 동안 얼마든지 최소 비용으로 자유롭게 살 수 이음을 실험했습니다. 2년 중에 8개월간 들어간 비용을 게산 해 보았습니다. 집 짓는데 들어간 비용 / 28달라 12.5센트. 1년 농사비/ 14달러 8개월간 식비/ 8달라 74센트. 8개월간 의복비 /8달러 40.75센트. 8개월간 석유비와 기타 / 2달러. 총 61달러 99.75센트. 수입도 있습니다. 농작물 판매수입 23달러 44센트. 노동하고 받은 품삯/ 13달러 34센트. 합계/ 36달러 34센트. 프러스 마이너스 하면 25달러 21,75센트 적자. 이 돈은 처음 숲에 들어올 때 가지고 있던 돈과 비숫한 액수였습니다. 그는 이런 계산을 통해 앞으로 지출할 예상 금액을 추정해 볼 수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의 다음 고백입니다. “그 대신 나는 여유로움과 독립된 삶 그리도 건강을 얻었으며 언제든 원할 때 마음 것 거주할 수 있는 안전하고 편안한 집을 얻었다.”. 그의 삶을 보면서 저는 과거 철학자들의 삶과 비숫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옷이나 집이나 땅이나 이런 것은 무소유. 내용은 풍성하게 자유롭게 독립적인 삶 건강한 삶을 마음것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맞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결국 인간은 옷도 벗고, 집도 두고 세상을 떠날 것인데 미리 떠나서 좀 더 자유로운 삶을 사는 것이 지혜롭지 않는가 공감이 되었습니다. 이 책을 들고 집 밖으로 나오니 온 천지가 신세계입니다. 여기 저기 하늘 아래 차박할 수 있는 장소들이 많습니다. 헉슬리의 <신세계> 카스토리를 글을 써서 여기저기 보냈더니 광주의 우 목사님이 답글을 보냈습니다. “목사님의 삶이 진짜 신세계의 삶이네요” 여러분들도 혹시 이런 삶을 살고 싶지 않습니까? 진짜 신세계에서의 자유로운 삶! 돈만 갖고 잘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삶도 공부입니다. 남이 한다고 나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이 한다고 좋아 보여서 카라반 샀다가 후회하는 사람 많고, 잔디밭 딸린 전원주택 샀다가 풀 뽑느라고 고생하는 사람 많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더라도 책을 읽고 배우는 것이 필요하고, 조금씩이라도 나에게 맞는 실전 경험도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소로우의 글을 읽으면서 예수님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아떻게 사셨을까? 갈릴리 호수 주변을 배경으로 사역하신 예수님의 삶은 어떤 점에서는 소로우보다 앞섭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예수님을 따르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따르려보니 걸리는 것이 많습니다. 아버지 장례식도 치루어야 하고, 농사짓던 것 마져지어야 하고, 작별 인사도 해야 하고, 세상 살다보면 정말 얽히고 섥힌 문제들이 많습니다. 자유롭게 빠져나온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또 어떤 서기관이 나아와 선생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겠다고 하자 예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둘 곳이 없다.” 예수님의 삶을 보니 월든의 오두박도 없으셨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서 주무시는지 무엇을 드시고, 옷은 또 누가 준비해주셨는가? 가계부도 없으셨습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을 거느리시고 3년반 공생애를 잘 마치셨습니다. 궁핍한 모습을 보이지도 않으셨고, 오히려 헐벗은 자들을 먹이시고 입히시고, 병든 자들을 일으키시고 살리시며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 온 천지를 다니시면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소유는 없으셨지만 존재가 부요하셨습니다. 독립적으로 매이는 것 없으니 자유로우셨습니다. . 이렇게 살려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도전과 모험심, 그리고 자립 능력 있어야 하고, 소유보다 존재가 부요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디오게네스가 통속에 살았어도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지적인 부자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머리 둘 곳 없이 사셨어도 자유하실 수 있으셨던 것은 성령 충만, 진리 충만 생명 충만 존재가 부요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도 여러분들도 이렇게 집이 없고 돈이 없어도 존재가 부요한 자유한 영혼이 된다면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바로 그렇게 살았습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9-10)
독일 태생의 이론물리 학자로 상대성이론을 발표한 세계적인 과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1955)이 노벨물리학상을 탄 후에도 여전히 공부에 매진하는 모습을 보고 한 제자가 물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과학자인 교수님이 어찌 아직도 공부를 하십니까?” 아인슈타인은 칠판에 큰 원을 하나 그린 뒤 말했습니다. “이 안이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고, 원 밖은 아직 모르는 것들이라네. 남들보다 원이 조금 크다고 원 밖의 것들을 모른 척 해서야 되겠는가?” 소크라테스는 사형을 당하기 1주일 전, 간수가 부르는 ‘시테코러스’라는 그리스 가곡을 듣고 제발 자기에게 노래를 가르쳐 달라고 사정했습니다. 1주일 뒤에 세상을 떠날 사람이 고작 노래를 배워서 뭐하냐는 간수의 말에 소크라테스가 말했습니다. “살 날이 50년 남은 사람이나 1주일 남은 사람이나 결국 죽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배움에는 다른 이유가 없다네.” 이렇게 인류 역사 가운데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 형향을 끼쳤던 사람들은 끊임없이 스스로 배우며 공부를 하는 사람들 이었다는 것입니다. 춘추중국 춘추전국시대 말년에 사광이라는 유명한 악사가 있었습니다. 사광은 앞을 보지 못했지만, 실력이 뛰어나 그가 악기를 연주하면 새가 입에 물고 있던 모이를 떨어뜨릴 정도였다고 합니다. 또한 음악뿐만 아니라 정치, 군사, 외교 등 다양한 방면으로 지혜를 갖춘 인재였습니다. 진나라와 진평공은 이런 사광의 재주를 아껴서 가까이 두고 스승이자 친구처럼 대했습니다. 하루는 진평공이 사광과 이야기를 하다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 나이가 이제 일흔이 넘었으니, 배우고 싶어도 나이가 많아 너무 늦었구나." 이 말을 들은 사광이 답했습니다. "날이 저물었으면 촛불을 켜면 되지 않겠습니까? 제가 듣건대 소년이 배우는 것은 해 뜰 때의 별빛과 같고, 장년에 배우는 것은 한낮의 햇빛과 같으며, 노년에 배움은 촛불의 밝음과 같다고 했습니다. 촛불이 밝은데 어두움이 어찌 함께 하겠습니까?" 여러분, 여행은 누가 합니까? 여행을 많이 하는 사람이 합니다. 공부는 누가 합니까? 무엇이든지 열심히 배우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책은 누가 읽습니까? 책을 안 읽는 사람이 읽는 것이 아닙니다. 책을 많이 읽고 있는 사람이 더욱 갈급해서 읽는 것입니다. 정말 제대로 공부하는 사람은 절대 교만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옥이라도 갈고 닦아야 아름다운 보석이 될 수 있듯이 우리는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합니다. 배움에는 정년이 없습니다. 배움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늙기 시작합니다. 나만 옳다는 생각, 내가 최고라는 생각, 내가 주인공이라는 생각, 이미 배울 것은 다 배웠다는 생각을 버려야합니다. 예전에 이미 배웠지만 다시 배우고 반복하고, 잊어버린 것을 다시 생각하며 배운 것을 익히고 내 삶속에서 실천하도록 꾸준히 훈련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책도 좋은 책은 다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더 배우게 됩니다. <독서는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다시 읽고,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도 다시 읽고, <월든>도 다시 읽고 ..저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할 것은 모든 지식의 근본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참 스승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라는 것입니다. 배움의 궁극적인 목적은 최고의 선생이신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15]을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학문이 줄 수 없고 덕망이 줄 수 없는 일을 우리에게 주셨고,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세상에 어떤 스승도 할 수 없는 일, 즉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심으로서 구원에 이르는 길을 열어 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아무리 많은 공부를 하고, 훌륭한 업적을 남겼어도 예수님을 모른다면 그것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배움의 궁극적인 목적지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더 잘 아는 것입니다. 인생의 죄와 죽음 생명문제는 세상 철학 학문으로 풀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가르쳐 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공부하려는 자들을 이렇게 초청하십니다. [마태복음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결론적으로 세상 지식은 끝이 없습니다. 처음에 배움에 설레이고 희망을 주지만 많은 지식도 우리를 피곤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지식의 결정체 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성품을 배워야 합니다. 온유함과 겸손과 사랑이 없는 지식 공부는 헛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왜 주님은 '나의 멍에'를 메고 배우라고 하셨을까요? 예수님을 배우는 것은 이론적 지식이 아닙니다. 예수님 가까이 곁에 딱 붙어서 체험하며 배우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옆에서 주님과 보조를 맞춰 주님 가시는 방향대로 우직하게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벗어 놓을 수 있고 쉼도 얻을 수 있고 또 가까이서 모든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것이 공부를 잘 하는 비결입니다. 가을 학기 우리 모두 열심히 주님 가까이 주의 멍에를 메고 겸손과 온유함을 배우며 존재가 부요한 믿음의 사람으로 빚어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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