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조천리 김해 김씨의 젊은 반역아 집단을 대표하는 최초의 인물은 솔뫼 김명식과 목우 김문준이었다. 솔뫼는 이론가였고 목우는 현장 활동가였다. 처음에는 서울의 같은 단체에서 함께 일하던 두 젊은이는 곧 헤어져 한 사람은 서울, 다른 한 사람은 일본 오사카로 활동 영역을 달리했다. 김명식은 <동아일보> 창간 역원이면서 1면의 논설란을 거의 전담하다시피 한 열정적인 논객이었다. 자유가 무엇이고 평등이 무엇인지, 제국주의가 무엇인지, 루소와 몽테스키외가 누구이고 맑스가 누구인지 아는 이가 별로 없던 그 시절에 그 시절에 그의 논설은 새로운 사상에 목마른 청년들에게 특히 인기가 있었다. 나중에 신문사를 떠나 정치조직운동에 투신한 그는 조선 최초의 사회주의 필화사건을 일으켜 세간의 이목을 모은 바 있었다. 그 사건으로 투옥된 그는 모진 고문과 옥독(獄毒)으로 병을 얻어 형기 중간에 출감했지만, 이미 몸은 형편없이 망가져 반신불수에 청각장애인이 되어 있었다.
(271-272)
면장을 마을 밖으로 내친 시위대는 예순살의 원로 김시범 선생을 모시고 동쪽으로 일주도로변에 위치한 만세동산으로 행진해갔다. 기미년 3.1만세운동 때 올라 만세를 불렀던 동산에 그 운동의 주역으로 징역살이를 한 김시범 선생을 모시고 오른 조천리민들의 가슴에는 참으로 만감이 교차했다. 조천리의 모든 항일운동의 원천은 만세동산이었고, 항일로 점철된 마을의 수난사는 언제나 그들의 자부심이었다. 그런 만세동산에서 만세 소리가 다시 터져나온 것이다. 만세동산의 남쪽 사면을 빈틈없이 뒤덮은 군중은 강풍 맞은 대숲처럼 다 함께 온몸을 흔들면서 열렬하게 만세를 불렀다. 이십육년 만에 터져나오는 “조선 독립 만세”였다. 열세살 창세도, 열여섯살 행필도 땅에 두 발을 쿵쿵 구르면서 목이 쉬도록 소리쳤다. 일제에 의해 억눌렸던 땅, 그 땅에서 기운이 솟아올라 그들의 몸에 넘쳐오르는 것 같았다. 온 세상, 온 우주가 환희로 가득 찬 느낌이었다. 한층 가깝게 다가온 한라산을 향하여, 그 아래 질펀하게 펼쳐진 푸른 들판을 향하여, 저 푸른 희망을 향하여 함성을 지르고 또 질렀다. 휑하니 비어 있는 일주도로 또한 밝은 미래를 향한 새로운 질주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조선 독립 만세!
(295-296)
“우리 삼팔선이 그어진 중도 몰랐수다. 전쟁 중에 정신없이 살아서…… 시모노세키 항구에서 출국심사하는 맥아더 사령부 미군이 우리한테 물읍디다. 북조선으로 가겠느냐, 남조선으로 가겠느냐고. 허 참! 북조선, 남조선이라니, 난생처음 듣는 말 아니우꽈? 그래서 물어십주. 거 무슨 말이냐고, 북조선은 뭐고 남조선은 뭐냐고 하니까 삼팔선이 그어졌다는 거라예. 허, 그것참!”
“그래서 모두 이구동성으로 말해십주. ‘우린 남도 아니고 북도 아니고, 제주도로 가겠다!’ 하고.”
(327-328)
“조천리민 여러분! 그동안 우리가 나라를 빼앗기고 얼마나 고생이 많았수과? 얼마나 많은 피눈물을 흘렸수과? 부모 없는 설움보다 나라 없는 설움이 더 컸수다. 왜 놈들한테 당한 일을 생각하면 참말로 치가 떨립니다. 멸시당하고 매 맞고…… 아아, 그러나 이제는 해방이우다. 압제의 굴레에서 풀려났수다. 여러분, 고맙수다. 이 기쁜 자리에 우리를 불러 이렇게 축하해주시니 참말로 고맙수다. 하지만 우리가 축하받기 전에 먼저 생각해야 할 어른님들이 있수다. 극악무도한 살인적, 강도적 일본제국주의와 싸우다가 해방을 보지 못한 채 돌아가신 순국열사, 우리 마을 조천리가 낳은 영웅들, 그분들을 먼저 생각하면서 애도를 표합시다!”
(333)
“청년 여러분, 지난날을 생각하면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저 악독한 왜놈들을 위해 종노릇한 일을 생각하면 참으로 지긋지긋해여마씸. 식민지 청년이란 얼마나 가난하고 누추하고 비굴한 존재였수과? 우리는 채찍 맞아 돌아가는 팽이처럼 날이면 날마다 매 맞고 구박을 당해야만 했수다. 그러나 이제는 해방이우다. 압제의 족쇄와 쇠사슬이 풀리고 해방이 왔수다. 금방 안세훈 선생님의 말씀, 참말로 옳은 말씀이우다. 이제 청년의 시대입니다. 우리의 시대란 말이우다!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
(375)
일제의 극심한 압박에 짓눌렸던 제주 사회는 일본군이 떠나자 도처에 신생의 기운이 넘쳐흘렀다. 사방 초목도 억압에서 벗어난 듯 더욱 푸르고 푸른 바다, 푸른 하늘도 새로운 빛으로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밭마다 돌담 안에 가득 실린 조 이삭들이 탐스럽게 자라 풍작을 기약하고 있었고, 알뜨르, 진뜨르 비행장도 농토로 복구하여 주인에게 돌려주기 위한 작업이 한창이었다. 전분 공장, 단추 공장, 방직 공장이 작업을 재개했고, 공습으로 파괴된 주정 공장은 복구 중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