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하면 덕수 이씨 인 이순신을 떠올리지만 조선시대는 충무공의 시호를 인물들 많이있다.
특히 임진왜란 때 많은 충무공이 나오는데 진주성 전투의 김시민, 이항복의 동서인 정충신.
그리고 이수일과 이순신이다.
울산에서 벼슬한 인물들을 조사 하던 중에 알아 낸 이수일장군은 진주목사 알려져 있고 삼도수군통제사로도
너무 알려져 있어 경상좌병사는 역임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번 조사에서 발견하였다,
우리가 진주목사와 경상우병사에 치우쳐 간과한것으로 생각된다.
백강 선생의 쓴 신도비명에는 경상좌병사 도임에 대한 글은 안보여 제수는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을 보면 아래와같다
선조 35년 임인(1602) 12월 1일(무자)
이수광ㆍ송응순ㆍ이안눌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수광(李睟光)을 대사간으로, 송응순(宋應洵)을 사간으로, 이안눌(李安訥)을 예조 정랑으로, 채형(蔡衡)을 병조 정랑으로, 최동식(崔東式)을 정언으로, 이수일(李守一)을 경상 좌병사로, 손기양(孫起陽)을 영천 군수로(永川郡守)로, 현덕승(玄德升)을 울산 판관(蔚山判官)으로 삼았다.
앞의 기록에서 보듯이 이수일장군이 경상좌병사로 임명되는 기록이 보이고 그를 보좌하는 현덕승이 울산 판관으로 오는데
울산선생안에는 현덕승이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라 경상좌병사가 울산부사를 겸하였기에 현덕승이 판관으로 오는 경우인데 그의 앞의 판관인 손기양은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의문이 드는 것은 울산선생안에는 김태허가 1602년 8월22일 경상좌병사로 와서 1604년에 과만이 되어 돌아갔다 되어 있어 이에 대한 연구가 필요 한것으로 생각된다.
이수일 장군이 좌병사로 임명되었지만 그 다음에 대한 기록이 없고 김태허는 실록에는 좌병사에 대한 기록이 없기에 어느 것이
정확한 것인지는 연구를 해야 할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추정하기로는 함경도 병사로 있는 이수일 장군을 경상좌병사로 임명하였지만 부임하지 않은것으로 추정하여 보지만
기록이 미진하여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수일이 경상좌병사로 임명되고 난 뒤의 기록이 보이지 않아 제수는 되었지만 도임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이수일이 경상좌병사로 임명되면 김태허에 대한 기록이 있어야 되는데 그런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울산선생안과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 많이 없어서 정확하게 어느것이 맞는지는 연구를 거듭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의문만 남은 이수일의 경상좌병사 임명이다.
조선시대는 기록을 중히 여기는 시대 인데도 임진왜란 이후 나라가 어수선하여 한 사람의 기록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
좌병사는 중요직인데 그에 대한 대신들의 회의 기록도 없고 다만 삼도 통제사 자리에 누군가가 마땅한지 그에 대한
어전회의에 이수일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는데 좌병사 임명은 되었지만 도임하지 않았는지 대한 기록은 전무하여
많은 의문만 품은채 조선왕조실록을 뒤져봐도 없으니 기록을 원망 할 뿐이다...
언젠가는 밝혀질날 오리라
옥산 이희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