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의 빼어난 경치 여덟 곳을 노래한 안동 팔경의 제2경은 ‘귀래모운(歸來暮雲)’으로 귀래정 위로 흰 구름이 흘러가는 목가적인 경치를 읊고 있다. 안동 팔경의 하나로 꼽힐 만큼 아름다운 경관을 품고 있는 귀래정은 고성 이씨 낙포(洛浦) 이굉(李浤, 1441~1516)선생이 1510년(중종 5)에 지은 정자이다. 선생은 1513년(중종 8) 벼슬에서 물러나 안동으로 내려와서 안동부성 건너편 낙천과 동천이 합쳐지는 경치 좋은 곳에 정자를 짓고 그곳이 도연명의 ‘귀거래사’와 흡사하다고 하여 정자의 이름을 귀래정이라 했다. 선생은 1476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480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조카인 주(冑)가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사사되자 공도 김굉필의 일당으로 몰려 삭탈관직 되고 영해로 유배되었다. 이후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개성유수로 나가고 후에 안동으로 낙향한다. 귀래정의 건립 배경은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는 것이 이해에 도움이 되는데, 하나는 귀래정을 창건한 낙포 이굉이 안동에 정착하게 된 배경을 통해 살펴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적 배경이 된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이다.
귀래정
먼저 이굉이 안동에 정착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고성이씨의 안동 입향조는 이굉의 아버지 이증(李增, 1419~1480)이고, 할아버지는 세종 때 좌의정을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철성부원군에 봉해진 이원(李原, 1368~1429)이다. 아버지인 이증이 안동에 정착하게 되는 배경은 안동 출신으로서 서울에 정착하여 상당한 명망을 쌓은 권근과의 관계를 빼놓을 수 없다. 또 이증은 장인인 이희(李暿, 1404~1448)가 경상감사에 오른 후 안동지역을 순시하다가 학질(瘧疾)에 걸려 영호루에서 객사하자 장인상을 치르기 위해 안동에 머물면서 임청각 일대를 둘러보게 되었고, 산수(山水)에 매료되어 안동에 살기를 마음먹게 된다. 한편 권근은 이증의 조부 문경공 이강(李岡)의 사위였으므로 이증에게는 고모부가 된다. 또 서거정은 권근의 외손자였다. 이러한 관계로 이증은 안동 출신이면서 서울에서 활동하는 사람들과 쉽게 교류할 수 있었고 서거정과도 서로 어울리게 되었다. 이러한 교류에서 이증은 한걸음 더 나아가 안동의 인물들과 결속체를 만들었다. 안동의 대표적인 5가문 13인(권씨3, 배씨4, 남씨4, 이씨1, 노씨1)으로 이루어진 우향계(友鄕契, 1478년)를 결성했다. 우향계는 덕업을 서로 권하며[德業相勸], 과실을 바로 잡고[過失相規], 친목을 도타이 하고 풍속을 바로 잡아 임천(林泉)을 벗하며 유연자적하고자 결성한 것으로 후손들에 의해 영산홍과 귀래정 지금까지 500년 이상 지속되고 있는 유계(儒契)이다. 이증은 당시 안동의 지식인과의 결속체인 우향계를 배경으로 향후 안동인으로 굳건하게 자리 잡아 간다.
영산홍과 귀래정
이굉의 안동 정착은 반드시 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것이기보다는 자신의 삶에 대한 새로운 결단으로 보는 것도 이해에 도움이 된다. 그 결단의 정신적 원형이 도연명의 ‘귀거래사’였기 때문이다. 귀거래사는 중국 진(晉)나라 시인 도연명(陶淵明)의 작품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후 전원생활에서 느끼는 자유와 평안을 노래한 시다. 입신과 양명에 눈이 멀어 권력에 아부하고 금권을 좇아 타락하는 관료 사회에 대한 염증에 대한 반작용으로, 전원에서 자연을 접하는 아름다움과 섭리에 따라 살아가는 기쁨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굉은 나이 70이 넘어 안동부성을 마주해 있는 낙동강 두 물줄기가 합수하는 곳에 지금의 귀래정을 짓게 된다. 그런데 왜 ‘귀거래정’이라 하지 않고 ‘귀래정’이라 했을까? 부르기 좋은 발음으로 하기 위해 귀거래를 귀래로 약칭한 것일까? 아니면 거래(去來)에서 거(去)를 의도적으로 빼버린 것일까? 의미상으로 빼버려도 되는 것은 ‘거’자가 아니라 조사인 ‘래’자인 것인데, 오히려 ‘거’를 뺀 것은 아무래도 어느 정도의 의도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돌아간다’라고 말하면 여전히 현실이 기준이 되어 그곳에서 ‘벗어남’을 의도하기 때문이다.
귀래정의 옛 모습이다. 귀래정에 오르면 낙천과 동천이 합류하는 아름다운 경관을 볼 수 있었다.
만약 새로운 삶을 중심에 둔다면, ‘돌아온다’고 함이 옳다고 본 것이 아닐까? 이 귀래정은 어쨌든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빼놓고 생각할 수 없는 정자다. 아니 ‘귀거래’를 ‘귀래’로 한 것을 보면, 도연명의 뜻을 더욱 적극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중국이 생성하여 수천 년 동안 관념과 그림 속에만 있었던 존재, 귀거래의 이상향(理想鄕)이 이굉의 새로운 해석을 통해 안동의 낙동강 강가에 그 구체적 모습을 드러낸 것이 바로 귀래정이다. 귀래정은 우선 안동부성에서 낙동강을 건너 있으며, 아우 명(洺)이 지은 임청각과 마주보고 있다. 안동부성과 강을 건너 있다는 것은 나름대로 번거로운 삶을 벗어나 있다는 것이며, 임청각과 마주보고 있다는 것은 아우 이명이나 아버지가 처음 뜻을 두었던 곳과의 연대성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뜻한다. 이 지역은 낙동강 두 줄기가 합류하여 수량의 변화가 만만치 않기 때문에 안동부성에 가까이 있으면서도 왕래가 불편하여 큰 마을이 발달하지 않았던 곳이다. 반면에 낙동강 합류 지점인 관계로 가장 드넓은 경관을 확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연의 상시적 변화를 보여주는 강물의 흐름을 늘 볼 수 있는 위치이다. 낙동강 합수 지점인 이곳은 오고 가는 사람들의 왕래와 물고기와 날짐승의 움직임을 늘 관망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자연경관에 대한 시야를 확보하고 자연 생태계의 변화와 자연과 함께 사는 사람들의 삶을 동시에 관망할 수 있는 위치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퇴계 선생의 숙부인 송재(松齋) 이우(李堣)가 쓴 다음의 시를 보면 귀래정의 자연을 잘 설명하고 있다.
이굉의 생각을 잘 아는 이우는 귀거래사의 요지를 두 수의 5언 절구로 간명하게 읊고 있다. 강과 산의 주인이 사람이 아니라 자연이요, 주인은 자연에 동화되어 사는 갈매기와 해오라기와 같은 존재라는 것, 또한 술 빚어 마시며 한가하게 구름과 어울리는 것이 벼슬살이로 번거롭게 사는 것보다 참삶에 가깝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노래한다. 진실로 자기 안으로 돌아온 삶을 이끌어 주고 실현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산과 물이 어우러지고 고기와 새가 뛰노는 시원하게 펼쳐진 자연이다. 자연의 정태적인, 혹은 동태적인 장면이 회화처럼 펼쳐져 있어 일상적으로 관망할 수 있고 가까이 다가가 체감할 수 있어야 한다. 귀래정만큼 이러한 자연경관을 얻을 수 있는 곳은 흔치 않다. 이우의 시는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하늘과 땅이 둘러싸니 곧 내 집’이라는 것은 자연 안에 이미 안기었다는 것이며 ‘세상살이에서 깨어 있는 날 적음을 기뻐하는’ 것은 세속에서 허덕이며 살아왔던 삶 전체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음을 의미한다. “하늘과 땅으로 둘러싸인 넓은 공간 전체를 품으며 이것이 바로 내 집이다.”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광활하면서도 자연의 조화와 변화를 볼 수 있는 귀래정의 조망권이다. “긴 숲 은은한데 연기는 물을 가리고, 옛 절은 희미하여 아득한데 달은 모래에 어리네.”는 마주보는 개목나루(임청각 앞의 나루터)와 법흥사일 것이다.
편액 글씨는 명필 황기로(黃耆老)가 썼다. 매학산인(梅鶴山人) 황기로는 조선 서예사에서 초서로 김구(金絿)ㆍ양사언(楊士彦)과 함께 제1인자라는 평을 받는다.
귀래정에서 보면, 임청각과 법흥사가 대각선으로 마주하게 되어 원경으로서 그곳 경관이 또한 일품이었을 것이다. 임청각 군자정에서 바라보는 경관과 귀래정에서 임청각을 바라보는 경관은 매우 대조적이었을 것이다. 이들 형제는 귀거래의 마음을 공유하며 안동의 지근거리에서 안동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외호하는 새로운 명문으로 성장해갔다. 1. 이들의 귀거래는 ‘귀거’가 아니라 참삶 속으로 돌아오는 ‘귀래’이기 때문이다. 안동에 있는 다른 정자 중 다수는 자연으로 돌아오는 도가적 귀거래가 아니라 유가적 처사로서 여전히 유가적 도덕률을 함양하는 정자이지만, 귀래정은 유가적 삶의 도덕적 결단마저 놓아버리는 좀 더 순수한 자연 회귀 사상이 투영된 정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귀래정은 유난히 반짝이던 여울인 와부탄(瓦釜灘)을 내려다보고 바로 앞의 깊은 소(沼)가 정자와 정자 둘레의 우거진 숲을 비추던 옛 모습을 잃어버렸다. 정자 앞으로 4차선 도로가 나버렸고 숲은 사라졌으며 정자 옆에 현대식 새 건물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일찍이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안동의 많은 정자 중에 임청각 군자정, 하회의 옥연정과 더불어 이 귀래정이 가장 아름답다고 할 정도였지만 지금은 그런 모습을 찾을 수 없어 매우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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