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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 김미정님
주 안에서 잘 지내시죠? 한 주간을 주님이 주신 말씀을 묵상하며 여기에서 주님이 주시는 뜻을 잘 헤아려 주님을 든든히 의존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님은 다음 두 곳의 성경 구절을 들며 궁금한 것을 질문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7장 20절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누가복음 17장 6절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위 두 구절의 말씀을 해석함에 있어서 아마도 누군가가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나 봅니다.
“성경에서 '산'은 하나님의 말씀(복음)이 나오는 곳-예루살렘 성전이 산 위에 있었음 등-으로 복음을 상징하고, 바다는 이방 세계를 상징하므로, 겨자씨만큼 작은 믿음만으로도 복음(산, 뽕나무)은 온 세상(여기서 저기로, 바다)에 전파(옮겨짐, 바다에 심김)될 것이다.”
이러한 해석에 대해서 님은 과연 이렇게 해석 한다면, 이것은 알레고리적 해석인지를 물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먼저 알레고리적 해석이 무엇인지부터 알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알레고리란 영어발음으로‘Allegory'입니다. 이것이 지닌 사전적인 뜻은“추상적인 내용을 구체적인 대상을 이용하여 표현하는 비유법”인데,‘풍유’,‘우화’,‘우의’,‘은유’,‘비유’ 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어떤 개념이나 사실을 직접 표현하지 않고 다른 대상에 빗대어 풍자적이며 암시적으로 표현하는 방법”(풍유)
“인격화한 동식물이나 기타 사물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그들의 행동 속에 풍자와 교훈의 뜻을 나타내는 것”(우화)
“작품의 구성이 우의적이거나 이야기에 교훈이나 풍자를 담고 있는 소설”(우의)
“행동, 개념, 물체 등을 그와 유사한 성질을 지닌 다른 말로 대체하는 수법을 쓰는 것”(은유)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그와 비슷한 다른 사물이나 현상에 빗대어 표현함”(비유)
혹자는, 성경에는 비유가 자주 등장하며, 예수께서도, 그리고 사도도 비유를 들어 말씀하여 주셨기 때문에 비유풀이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며 정당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성경 이러이러한 곳을 보라고 말합니다. 거기에 알레고리가 말씀되고 있지 않느냐면서 말입니다. 그러니 알레고리로 해석하며 설명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닌 옳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는 성경 전체 문맥과 성경의 중심 되는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의 십자가로 귀결되는 까닭에 이러한 해석을 한다면 그것은 알레고리가 아니라고 하는 이상한 논리를 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두는 참으로 무지한 말입니다. 예수께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것은,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이 알레고리적이었던 것은 이를 통해서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는 천국 복음이 지닌 진리를 드러내어 알게 해 주시기 위한 것이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들어도 듣지 못하는 귀에 있게 하며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는 눈에 있게 하며 그 마음에 깨달음이 없도록 강팎함에 내버려둠으로 천국 복음이 지닌 진리를 결코 알지 못하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는 것에서는 그 비유를 들고 있는 본문에서, 그리고 그 본문이 말씀되게 된 전후 문맥에 의해서 그 비유가 지닌 뜻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해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비유를 본다면 그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성경 본문에 한해서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성경에 비유를 들어 말씀하실 때 이것에 의해서 해 주시고 있는 의도를 알려주셨기 때문에 성경에서 그 비유를 보는 자는 자의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그 비유를 들어 알려 주시고 있는 의도를 파악하고 이를 드러내어 설명해 주는 것에서여야 합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유에 사용하고 있는 단어나 전개되고 있는 어떤 내용에 설교자가 임의로 해석하고 설명을 붙여서 말한다면, 이는 예수께서 비유를 들어 그것이 지닌 뜻을 풀어주신 것에서 알레고리(Allegory)가 아닌, 그래서 알레고리(Allegory)를 들어서 이것의 본문(문장)과 문맥적 의미의 파악에 의한 해석이 아닌, 설교자에 의한 임의적 알레고리(Allegory)가 또 등장하는 꼴이 되고 맙니다. 이러한 해석에 의한 설교를 ‘알레고리적(Allegorical) 해석'이라고 말하며, 이 해석은 잘못된 문제성 있는 것이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결코 알레고리로 해석할 단어나 내용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알레고리로 해석하여 알레고리적으로 설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님이 질문하는 것에서 예를 든 것이 여기에 해당되지 않나 싶습니다. 이를 다시 볼까요?
“성경에서 '산'은 하나님의 말씀(복음)이 나오는 곳-예루살렘 성전이 산 위에 있었음 등-으로 복음을 상징하고, 바다는 이방 세계를 상징하므로, 겨자씨만큼 작은 믿음만으로도 복음(산, 뽕나무)은 온 세상(여기서 저기로, 바다)에 전파(옮겨짐, 바다에 심김)될 것이다.”
어떤 자들은 님의 글에서 보는 것처럼 마태복음 17장 20절에서의 ‘산’은 예루살렘 성전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하며, 하나님이 임재하여 계신 성전에서 나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복음)이라고 합니다. 과연 그런 것이겠는지요. 바다는 이방 세계를 상징한다고 하는데, 과연 그런 것이겠는지요. 그러면서 겨자씨만큼 작은 믿음만으로도 복음(산, 뽕나무)은 온 세상(여기서 저기로, 바다)에 전파(옮겨짐, 바다에 심김)될 것이라고 하였는데, 예수께서 누가복음 17장 6절에서도 말씀하신 것이 그러한 것에서이겠는지요.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 내용에서 해 주시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7장 20절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누가복음 17장 6절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먼저, 마태복음 17장 20절에서 해 주시고 있는 말씀에 대해서부터 보겠습니다. 이에 관한 말씀은 마태복음 17장 14-21절(병행구절. 막 9:14-29; 눅 9:37-43)에서 보게 됩니다. 각 복음서의 기록을 종합하여서 그 내용을 보면, 3명의 제자들과 함께 변화산에 올라가셨다 내려오신 예수께서는 산 아래에 남아 있던 9명의 제자들이 군중에게 둘러 싸여 서기관(율법학자)들과 변론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보이자 사람들은 깜짝 놀라워하며 예수님께로 달려와 인사를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무슨 일로 서기관들과 논쟁을 벌이고 있느냐”.
이때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와 무릎을 끓고 엎드리고는 자비를 베풀어 줄 것을 구하였습니다. “선생님, 제게는 외아들이 있습니다. 그런 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다 죽어가게 되어서 선생님께 보이려고 데려왔습니다. 한번 봐 주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고쳐주십시오. 이 아이가 귀신들려 말을 못하는데다가 듣지도 못하고 간질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귀신이 어찌나 심하게 괴롭히는지 시도 때도 없이 심한 경련을 일으키는데, 한번 발작하기만 하면 거품을 내뿜고 이를 갈며 제 몸을 상하게 하는가 하면 얼굴이 핏기가 하나 없고 몸이 점점 말라갑니다. 이러다가는 죽고 말겠습니다. 그래서 보다 못해 제가 선생님께 데리고 나아왔는데 마침 선생님께서 계시지 않아서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제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어 병을 고쳐 달라고 간청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의 제자들이 좀처럼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발 선생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어서 제 아이를 고쳐주십시오. 이렇게 엎드려 간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완고하고 믿음이 없는 백성들아,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같이 있으면서 너희를 참아 주어야 너희 믿음이 온전하겠느냐 그 아이를 내게로 데려오라.” 예수님의 말씀이 있자 아이의 아버지는 아이를 데려왔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시는가 구경하고자 아이의 아버지와 함께 예수님께로 모여들었습니다. 아이가 예수님 앞으로 오는 도중에도 귀신은 그를 땅에다 거꾸러뜨리고 심한 경련을 일으켜 괴롭혔습니다. 귀신의 이러한 압제는 예수님 앞에서도 계속되었습니다. 아이가 예수님 앞에 오자 귀신이 예수님을 보고 아이에게 심한 발작을 일으켜 아이가 땅에 넘어저 거품을 흘리며 이리 저리 뒹굴었습니다. 그 아이를 보면서 예수님께서는 아이의 아버지에게 물으셨습니다. “아이가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아이 아버지는 대답하기를, “어렸을 때부터 이랬습니다. 귀신이 한번 발작을 일으키면 아이는 불 속이든 물 속이든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바람에 죽을 고비를 많이 넘겼습니다. 이런 아이인데 어떻게 선생님께서 고치실 수 없는지요? 만일 선생님께서 고치실 수만 있다면, 이렇게 간청하오니 제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도와주십시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 이 말씀을 들은 아이의 아버지는 황급히 태도를 바꾸어 소리쳤습니다. “제가 믿습니다. 제가 믿음이 없어서 그렇게 말했던 것이니,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예수께서는 군중이 많이 밀려오는 것을 보시고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셨습니다. “벙어리 되게 하고 귀를 먹게 하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령한다.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는 들어가지 말라.” 예수님의 명령이 있자 귀신은 크게 소리를 지르며 그 아이에게 심한 경련을 일으키고는 떠나갔습니다. 아이는 쓰러져 마치 죽은 자처럼 되어 꼼짝 않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군중들은 저마다 말하기를. “아이가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일어났습니다. 아이를 고치신 예수님은 아이를 그 아버지의 품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보고 놀라며 두려워하였습니다.
귀신들려 고통을 겪으며 고생하는 아이를 고치신 예수님은 거처하는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과 조용히 있게 되자 제자들은 궁금해 하였던 것을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우리는 어째서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것입니까?.”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능력을 나타낼 수 없다.” 마태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좀 더 자세히 기록하였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진정으로 말하는데, 너희 믿음이 적은 까닭이다. 만일 너희가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큼이라도 있다면, 이 산을 향하여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지라’고 명령하면 그대로 옮겨질 것이다. 그런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너희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본문의 내용에 대한 설명입니다.
우리는 이 내용을 보면서 관심을 갖고 살펴보며 교훈 받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먼저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적을 행하신 것에서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만, 복음서 기자가 주된 관심을 갖고 우리에게 말하여 알게 해 주고자 하는 것은 제자들이 왜 아무런 능력을 나타내지 못했는가 하는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이 아무런 능력을 나타내지 못한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동안 예수님의 제자로서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로 있으면서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조차 없었다는데 있습니다. 이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서 전개되고 있는 내용이 지닌 의미를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3명의 제자들과 함께 변화산에 오르셔서 자신의 변형된 모습을 나타내시고 그 이튿날에 돌아오시는 동안에, 산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다른 9명의 제자들에게는 귀신들려 고통을 겪는 아이를 고치지 못한 일 때문에 서기관들과 논쟁을 벌이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무런 능력을 행사하지 못한 것을 두고 예수님을 함께 싸잡아서 비난하였기 때문일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는 시기적으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구속 사역을 마치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시점에 있기 때문에 이를 훼방하려는 마귀의 발악이 한층 강화되는 때였습니다. 여기에 도구로 이용되고 있는 종교 지도자들 중에 서기관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간에 예수님을 해칠 계획을 가지고서 그 기회를 엿보며 책잡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던 참에 좋은 기회를 잡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겠다고 하는데 고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서기관들은 “너희들이 이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하는 것을 보니까 아무 능력이 없는 것 아니냐. 그러면 그렇지 너희들이 무슨 능력이 있어서 이 아이에게서 귀신을 내쫓을 수 있겠느냐. 너희가 못하는 것을 너희 선생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너희 선생도 별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비난하며 모욕을 주었습니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이 예수님을 멀리하고 따르지 않도록 은밀히 선동하였습니다.
이처럼 산 아래에 있으면서 예수께서 돌아오실 것을 기다리고 있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한 아버지의 귀신들린 아들을 고치려다가 못 고친 일 때문에 서기관들과 변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제자들이 아이를 고치기 위해서 애쓰는 광경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들 앞에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나자 사람들은 놀라며 모여들었습니다. 이때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께 나와 무릎을 끓고 엎드리고는 자비를 베풀어 줄 것을 구하였습니다. “선생님 벙어리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 왔나이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 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이 말을 들은 예수께서는 “가라사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 오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제자들이 보인 믿음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말씀하기를 ‘믿음이 없는 세대여’ 라고 질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의 상태를 믿음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는 일과 관련해서 그들이 하나님께 대해 가진 믿음의 상태가 하나님의 전능하심 속에서 사는, 그래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온전히 의존하는 가운데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지극히 자기 의지와 노력으로 해 보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들의 믿음은 전혀 믿음이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그러한 그들을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하였습니다. ‘패역하다’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마음이 뒤틀려 있는, 또는 마음이 꼬부라진 상태에 있는 것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마음이 완고하게, 또는 마음이 완악하게 뒤틀려있다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없는 세대’는 믿음이 없는 백성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이 말을 하셨을 때는 제자들의 믿음의 상태를 질책하신 것입니다만, 단지 제자들만을 의식하시지 않고 그 자리에 있는 이스라엘 대중의 영적인 상태를 보시고서 말씀하셨습니다.
정리해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려고 한 일과 관련해서 그들이 보인 믿음이 무엇이 문제가 있는 것인지, 다시 말해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지적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선한 마음에서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이 기회에 자기들에게도 예수님과 같이 귀신을 내쫓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과시해 볼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전에 전도 파송 받았을 때 또한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능력을 예수님께로부터 부여받아 이미 예수님이 행하신 것과 같은 능력을 해 본 경험이 있어(막 6:7, 30) 자기들이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고, 그런 일이라면 예수님이 아니라도 제자들인 자기들도 능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들이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의존할 리가 만무합니다. 순전히 자기 능력으로 해보려고 합니다. 그런 인간적인 능력을 수단으로 삼아서 귀신들린 아이를 고쳐보려고 애쓰는 제자들의 마음은 완악한 상태입니다. 지극히 육신의 욕망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이름의 명성을 등에 업고 자신의 능력을 과시해 보려고 하는 것이었기에 전혀 믿음과는 상관없는, 아주 완악한 행위였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그동안 그들과 함께 계시면서 믿음이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통을 가지면서 하나님의 의와 권능을 힘입고 사는 삶을 발휘하는데 있다는 것을 몸소 보이시고 가르치시면서 믿음을 심어주셨던 것과는 전혀 반대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오랫동안 믿음의 훈련을 시키셨고, 또한 이미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와 약한 자를 고치는 권세도 부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로 사는 믿음 있는 자로서 하나님의 의와 권능을 행사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 때문에 지금까지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그들이 연약성을 보이더라도 용서하셨고 믿음 없는 모습을 보이더라도 참아오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이제 하나님의 의와 권능을 행사하여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해 드리는 믿음을 나타내야 할 이 시점에서도 여전히 믿음이 없는 자로 있습니다. 제자들이 믿음이 없으므로 해서 하나님의 권능을 전혀 행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면서 이런 너희들의 믿음 없는 모습을 보고 있어야 하겠느냐? 도대체 내가 언제까지 참아 주어야만 너희가 믿음이 온전해지겠느냐”고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질책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언제쯤이 되면 너희가 비로소 하나님의 의와 권능으로 사는 그런 믿음 있는 모습을 띠겠느냐는 것입니다.
귀신들린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가 있느냐, 권세가 없어서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느냐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 권세는 믿음으로 행사되는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서 의로우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의 아버지가 되시고,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래서 아버지의 의와 권능을 입고 자라가고 마침내 그 의와 권능을 발휘하면서 사는 그런 자녀가 되어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믿음을 그동안 심어주셨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와 약한 자를 고치는 권세를 주셔서 그들이 지닌 믿음을 실증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것은, 그들에게 그럴만한 권세, 곧 능력이 없어서라는 문제가 아니라, 믿음이 없어서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처음부터 전적으로 무능력한 자인데,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서 삽니다. 그 능력은 바로 하나님과 관계를 갖고 있는데서 발휘됩니다. 제자들은 전도 파송 시에 그 사실을 충분히 실험적으로 경험했습니다(막 6:12-13). 그러나 그뿐입니다. 제자들은 이후 이 하나님과 관계를 갖는 실제적인 삶을 자신들의 생활에서 갖질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기회를 만나니까 그 기회를 하나님을 의존하는 자신을 진실되고 분명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전에 경험한 능력이 자기들 개인의 능력으로 계속해서 소유된 것으로 생각하고 단지 자신에게도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과시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렇게 제자들의 믿음은 뒤틀려 있었고, 이런 제자들의 모습은 사실 믿음이 없는 자였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얼마나 더 참고 있어야 하겠느냐. 도대체 언제쯤이 되면 너희가 온전히 믿음 있는 자가 되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보고 또는 들어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의 믿음은 말입니다. 귀신들려 고생하는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줄 알고 있었으면, 그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의존하는 믿음의 상태에서 예수님을 찾고 또한 긍휼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만일 그러한 믿음으로 있다고 하면 예수님이 계시고 않고 제자들만 있어도 동일한 믿음으로 있어야 했고, 또 예수님과 제자들이 계시지 않은 곳에 있어서 기도할지라도 하나님의 의와 권능은 그 믿음에 역사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나중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는 말씀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29절). 그리고 이러한 믿음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보거나 들어서 익히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있어야 했습니다. 그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와 권능을 바라보고 기대했어야 한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들의 패역하고 믿음 없음을 질책하였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또 모든 사람들이 믿음이 없는 것을 질책하시면서도 아이를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는 아이를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나왔습니다. 아이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예수님 앞에 오는 도중에도 귀신의 계속되는 압제로 심한 경련을 일어나 땅에 엎드러져 이리 저리 뒹굴며 거품을 흘리면서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아이가 예수님 앞에 이르러서는 귀신이 예수님을 보고 아이에게 더 심한 경련을 일으켰습니다. 그런 아이를 보며 예수님은 아이의 아버지에게 물으시기를,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아이의 아버지는 “어릴 때 부터 이랬습니다.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라고 아이가 겪고 있는 상태를 이야기하면서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라고 예수님에게 도움을 간청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는 것에서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보인 믿음이 잘못되었음을 문제 삼으며 새롭게 고쳐주시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께 보인 믿음에 어떤 점이 잘못되었는데 그러하시는지요.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는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이라고 전제한 뒤에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라고 말하였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 도움을 받으면 귀신들린 아들을 고칠 수 있을 것이라는 소망을 갖고 바로 조금 전에 찾아 나왔는데 예수님을 만나지는 못하고 제자들만 있자 예수님의 제자들이 자기 아들을 고쳐줄 수 있을 것이라고 크게 기대하였는데 아무리 애써도 고치지 못하자 크게 실망을 하고 있던 차에 예수님을 뵙게 되었으므로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식으로 예수님께 매달려서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대가 처음 예수님을 찾아 나올 때와는 사뭇 다른 것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무런 권세를 발휘하지 못함으로 해서 예수님에 대한 기대가 반감되었습니다. 기대 반 의심 반이 된 것입니다. 게다가 서기관들이 제자들의 무능력을 비난하자 그런 마음은 더욱 심했습니다. 그래서“선생님의 제자들이 아무리 애써도 제 아들을 고치지 못하였는데, 선생님께서는 어떠신지요? 선생님께서는 제자들이 하지 못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십니까? 만일 능력이 있으시다면 제 아들을 고치실 수 있겠지요? 그러니 고치실 수 있다면 이렇게 간청하오니 제발 제 아들과 저를 불쌍히 여기셔서 도와주십시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렇게 간청하는 그에게 예수님은 “하실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이 과연 귀신을 내쫓아 병을 고치는 능력이 있는지를 염려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자기 아들에게 아무런 능력을 행사하지 못한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서는 과연 귀신을 내쫓아 병을 고칠만한 그런 능력이 있는지 완전히 확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에게서 귀신을 내쫓아 병을 고칠만한 그런 능력이 있어야 자기 아들을 고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실 수 있거든 도와주십시오”라고 간청한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그게 무슨 말이냐? 지금 너는 나에게 네 아들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를 알고 싶은 것이냐? 그러나 네 아들을 고침 받는 일은 네 믿음에 관한 문제이다. 만일 네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다면 또한 그분의 전능하심도 믿어야 할 것이다. 만일 네가 그 믿음을 가지고서 나를 하늘에서 온 자 곧 메시야인줄 알고 있다면 너는 이미 전능하신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힘입고 사는 자가 아니냐? 그렇다면 그런 믿음이 있는 자에게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권세 있게 역사 하시고 계시니 그 하나님을 힘입고 사는 너에게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 그러니 네가 믿음이 있으면 너는 무슨 일을 만나든지 간에, 그래서 어떤 일을 당하든지간에 그 앞에서 당당히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네 아들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로 염려할 것이 아니라 먼저 믿음이 있는 자가 되라. 그러면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너와 함께 하고 있음을 볼 것이다”라고 말씀하셔서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가진 믿음을 바르게 가질 수 있도록 잡아 주셨습니다. 그것은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의 믿음은 예수께서 아이에게서 귀신을 내쫓아 아이의 병을 고치는 능력의 여부에 따라 의존하고 말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 그 믿음은 그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관계를 뜻하는 것이기에 자기 아들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매사에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는 믿음을 가져 어떤 일에서나 전능하신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생각을 갖고 온전히 그 능력을 의존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믿음으로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을 바라보는 것이 되어야 하며,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의 전능하신 능력을 선하게 나타내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 믿음을 가진 자라면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모든 일을 선하게 섭리하신다는 확신 속에서 살기 때문에 매사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갈 것이며, 과연 모든 일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어졌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는 소문으로 들었든, 아니면 자기의 눈으로 보았든지 간에 예수님의 행적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보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온전히 의지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찾아 나온 주관점은 능력 행함 그 자체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에게서 아무런 능력을 보지 못하자 예수님이 과연 자기 아들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였는지를 염려하는 불신앙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가진 믿음의 문제성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예수님이 무슨 의도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인지를 바로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즉시 태도를 고치며 소리쳐 부르짖었습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이 말은 “제가 믿습니다. 이제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제가 하나님을 믿고 또한 그의 전능하심도 믿습니다. 아까 제가 그렇게 말한 것은 믿음이 부족해서 그랬습니다. 그러니 저의 이 부족한 믿음을 도와주십시오. 그래서 이제는 제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사는 온전한 믿음이 있는 자가 되게 해 주십시오.”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믿음이 지니고 있는 문제성을 분명히 인식하고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자기 인생이 진행되는 그런 믿음 있는 자가 되기를 소원했습니다.
이렇게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자기의 믿음이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고서 예수께 은혜 받기를 구하자, 예수님은 많은 사람이 달려와 모이는 것을 보시고 더 기다리지 않으시고 곧 아이에게서 귀신을 꾸짖어 내쫓으셨습니다.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그러자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갔습니다. 귀신은 아이에게서 쫓겨나가는 그 순간까지도 아이를 압제하면서 끝까지 자신의 세력을 과시하며 아이에게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귀신이 예수님에게 아주 격렬히 저항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끝내는 예수님의 권세에 굴복하고 쫓겨납니다. 귀신이 나간 아이는 죽은 것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말하기를, “아이가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께서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자 아이는 온전한 몸으로 일어났습니다.
예수께서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에게서 먼저 믿음의 상태를 점검하여 교정하게 하신 후에 아이에게서 귀신을 내쫓아 귀신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신 것은, 아이의 아버지가 지닌 믿음이 좋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라, 그가 믿은 믿음을 확증시켜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즉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귀신들렸던 아들이 온전한 몸으로 돌아오는 것을 눈으로 보게 하는 것을 통해서 경험하게 함으로 이후 그의 인생이 전능하신 하나님과 함께 하면서 오직 그분의 권세있는 능력을 힘입는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게 확고히 세워주신 것입니다.
아이에게서 귀신을 내쫓으신 후에 예수님은 거처하는 집으로 돌아오셨습니다. 비로소 조용한 시간을 갖게 된 제자들은 이때까지 궁금해 하며 갖고 있던 의문을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왜 저희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복음서 기자가 관심을 갖고 우리에게 말하여 알게 해 주고자 하는 핵심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냈는데, 제자들은 왜 아무런 능력을 나타내지 못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자신들이 아무런 능력을 나타내지 못한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의문을 갖고 질문하자 예수님은 그 이유를 명확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 예수님은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 것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 그러니까 그들에게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 주시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너희들이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행사해 보겠다고 했지만, 그러나 너희들에게 정말 먼저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그것은 믿음이다. 너희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행사하려고 하면 먼저 너희들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 속에 있어야 하겠느냐? 전능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의지하여서 그분의 능력으로 인생을 펼쳐나가는 믿음을 가져야 하지 않겠느냐? 너희는 과연 그런 인생이 되기 위해서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길 뿐만 아니라 드려 나가고자 하여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믿음을 지녀왔느냐? 그런 믿음의 기도를 해 왔느냐?. 또한 지금 이 시간에도 그런 믿음 속에 있어서 너희는 전능하신 능력을 의지하고 있는 중에 귀신들린 이 아이에게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베풀어주시는 은혜가 있어 이 아이가 귀신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기를 소원하는 기도를 한 것이냐? 만일 그런 믿음이 있다면 하나님이 그 믿음과 함께 일하여 너희가 이 산을 향하여 옮겨지라고 하여도 옮겨질 것이다. 너희가 믿음만 있으면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루지 못할 일이 있겠느냐? 하물며 이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는 일이랴? 그런데 너희가 이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것은 너희에게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니 너희는 믿음 있는 자가 되기 위하여 기도하라. 그래서 먼저 믿음 있는 자가 되라. 그렇지 않고는 하나님의 능력을 기대할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으로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이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 17:20) 입니다.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해서 아이의 병을 고치지 못한 것은 믿음이 없어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을 행하려면 거기에 해당하는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큼이라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들이 권세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전혀 나타내지 못한 것은 그들이 그동안 예수님의 제자로서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로 있으면서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조차 없었다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지닌 능력에서 무엇을 말해 주시는 것일까요? 아무리 적은 믿음일지라도 믿음이 있기만 하면 태산을 뽑아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까? 과연 믿음은 아무리 적을지라도 그런 능력을 행사한다는 것입니까? 그래서 믿음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불가능이 없다는 것인가요? 분명히 하나님은 그런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분이시오, 무에서 유가 되게 하신 분이신데, 있는 것을 가지고서 일하시는 것인데 못하실 일이 있겠는지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에서 말씀하고자 하는 의도는 믿음의 ‘양’ 문제가 아닙니다.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는 문제입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태산을 옮긴다면 태산만한 믿음 또한 태산을 옮기는 믿음입니다. 그러니 믿음의 양에 관하여 하시고 있는 말씀이 아니고, 결국은 눈에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아주 작은 겨자씨 한 알만큼의 믿음조차도 없었다는 얘기이니 믿음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런 능력이 나타나지 않은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에서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은 믿음을 가진 자의 주이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지, 우리가 태산을 옮기는 초월적인 능력을 소유한 자가 된다는 뜻으로 말씀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여기서 말한 태산을 옮기는 능력은 믿음이 지닌 능력을 설명하기 위해 비유로 든 것이기 때문에, 믿음의 역사가 산을 옮기는 일이 아닌 이상, 예수님의 비유가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단지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데에는 제자들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한 의도에서 였습니다. 그러니까 의미 있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곧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능력 그 자체를 부각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믿음을 부각시켜 주시기 위해서 그러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능력은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전능하신 능력을 힘입으며 사는 관계성에 그 터를 둔 것이기 때문에 무한한 것입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없으면, 즉 믿음이 아니고서는 전능하신 하나님과 그 자신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도 없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겨자씨 한 알만큼의 믿음의 관계도 가져오질 않고서 귀신을 쫓아내야 할 형편 앞에서 자기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발휘하겠다고 하니 그것이 가당키나 한 일이겠는지요.
예수님은 앞서 제자들에게 그들의 믿음이 없음을 질책하셨고, 또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에게도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질문을 받으시고 이 문제를 분명히 짚으셨습니다. “너희가 믿음이 없다”고 말입니다. 왜 제자들이 믿음이 없습니까? 그들은 많은 시간을 예수님과 함께 동거 동행하면서 예수님이 하신 일들 속에 같이 있으며 교육을 받고 훈련을 받았고, 이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성업을 이루실 때가 다가온 시점에 있지만 그 깨달음이 미미하였습니다. 그것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은 본문의 사건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자기들 앞에 주어진 일을 처리해 나가는데 있어서 아무런 능력을 나타내지 못하는, 즉 하나님을 전혀 드러내지 못하는 그런 믿음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우선적으로 자신들이 안고 있는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습니다. 그럴 때 제자들은 태산이 옮겨져 바다에 심기우지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음에 있게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으로 죄에서 구원 받아 하나님 나라의 백성 되는 복을 받음에 있는 것입니다. 이는 말이죠.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시는 데서 되어지는 것입니다.
해서, 마태복음 17장 20절에서 하시고 있는 말씀은 어느 누가 말하는 것인 “성경에서 '산'은 하나님의 말씀(복음)이 나오는 곳-예루살렘 성전이 산 위에 있었음 등-으로 복음을 상징하고, 바다는 이방 세계를 상징하므로, 겨자씨만큼 작은 믿음만으로도 복음(산, 뽕나무)은 온 세상(여기서 저기로, 바다)에 전파(옮겨짐, 바다에 심김)될 것이다.”을 말하는 것에서가 아닙니다.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에게서도,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서도 예수께서 그들의 주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의 믿음이신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해 주시고 있는 것이었죠.
다음으로, 누가복음 17장 6절에서 하시고 있는 말씀인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에 대해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말씀은 누가복음 17장 1-6절에서 해 주시고 있는 말씀의 한 구절입니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죄의 유혹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죄짓게 하는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 너희가 보기에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일지라도 그들 가운데 하나를 죄짓게 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은 차라리 자기 목에 연자맷돌을 맨 줄을 매달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지옥불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그러니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너희 중에 누구라 할지라도 죄를 짓거든 꾸짖어라. 그리고 그가 너희가 하는 말을 듣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하루에 네게 일곱 번 죄를 저지르더라도 매번 뉘우쳐 네게 돌아와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네게 용서를 구한다면 너는 그를 용서해 주어야 한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죄짓게 하는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죄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라고 믿고 따르는 자들, 곧 예수님에게 가까이 와서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는 현장에 있는 아마도 약한 자들, 낮은 자들, 사람들의 멸시에 있는 자들을 실족케 하는 것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는 나를 따르는 사람들을 너희가 보잘 것 없게 보고서 무시하여 예수님에게 나아오는 것을 막음으로써 이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 예수께 나아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듣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예수님에게 나오는 일을 하지 않는 죄를 짓는 사람이 있게 한다면 - 그가 누구든지 간에 그는 화가 있을 것이라며, 그는 차라리 목에 연자맷돌을 달고 깊은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처럼 말씀하신 것은 제자들 중 그 누구도 예수께 나아오는 사람을 하찮게 여기고 막음으로써 그를 실족하게 한다면 그는 연자맷돌을 가운데 뚫린 구명 속으로 자신의 머리를 넣어서 확실하게 바다에 가라앉을 수 있는 기괴한 목걸이를 한 채로 바다 속으로 던져지는 것이나, 또는 연자맷돌을 일하는 나귀에 묶은 것과 같은 모습으로 묶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보다 더 나쁜 곤경으로 스스로를 밀어 넣는 것이 될 것이라는 의도에서 입니다. 마태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목숨을 잃을 것이나, 목숨을 부지하고서 지옥불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목숨을 잃더라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참조. 마 18:6-9). 예수님은 이러한 말씀을 하신 것은 누구든지 예수님에게 나아와 예수께서 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사람을 귀히 대할 것을 강조하여 허투루 듣지 말고 마음에 깊이 새기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남을 실족케 하지 않도록 할 뿐만 아니라, 여기에서 하나를 더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8장 19-20절에 의하면, 그것은 예수님을 주로 섬기는 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모여 마음을 합하여 하나님께 그들이 구할 기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 중에 두 사람이 땅 위에서 마음을 합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두 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예수께서도 그들과 함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예수께서 마음을 합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들이 원하여 구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들어주실 것이라고 하는 것에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마음을 합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하신 것은 그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예수께서도 그들과 함께 하신 까닭이라고 하신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을 합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루어주시는 것은 그들이 구하는 것을 들어주실 수밖에 없는 기도에 있는 때문이니 그것은 예수께서 그들에게 구하게 하시는 것을 구하는 기도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구하게 하시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예수님이 구하게 하신 것을 구함에 있는 자의 기도를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들어주십니다. 예수께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하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것을 산상설교에서 예수께서 제자들 가르치신‘주기도문’에서 알 수 있습니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하시면서“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8장 21-22절에 의하면, 그때 베드로가 예수께 물었습니다.“주님, 형제가 제게 죄를 지었을 경우에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되겠습니까?”그러자 예수님은“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에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누가복음 본문 앞인 17장 3-4절에서는“만일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그가 네게 하루에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서 '회개한다'고 하면, 너는 용서하라.”마태복음에서는 일곱 번 용서하면 되겠느냐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용서의 한계를 드러내는 베드로의 물음에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용서인 일곱에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말이죠. 마음을 합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들어주실 것이라고 하신데 따른 것입니다.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곱 번에 일흔 번이라도 하나님께서 용서에 있게 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형제의 용서를 구하는 기도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가 말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자비에 하나님이 택정하신 모든 백성이 있게 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십자가에 달리고자 하십니다. 이 일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세상에 보내시고 맡기신 일이시기에 말입니다.
예수께서 형제의 죄를 용서를 구하는 기도에 있게 하는 말씀을 하시자 사도들이 주께 말하였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예수께서 말씀하신 형제의 죄를 용서하라는 말씀에 따를 수 있는, 그래서 형제의 죄를 용서할 것을 구하는 하는 기도에 있을 수 있는 믿음에 있게 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이죠. 사도들이 자신들에게 믿음을 더하여 달라고 예수께 구한 것은 형제들 - 믿음의 동료들 - 이 잘못을 인정하며 용서를 구하는 것에 대해서 과연 그들을 용서할 수 있는 믿음에 있게 해 달라는 것에서입니다. 하루에 자신들에게 일곱 번 죄를 저질렀어도 그들이 용서를 구하면 용서해 줄 수 있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곱 번에 일흔 번이라도 그들이 용서를 구하면 용서해 줄 수 있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자비를 베풀 수 있는 하나님의 자비에 있는 믿음에 있게 해 달라는 요청에서 제자들은 예수께“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이 요청은 지금 자신들에게는 일곱 번에 일흔 번이라도 용서할 수 있는 믿음에 자신들이 있지 않다고 여기는 까닭입니다.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되겠느냐고 사람이 할 수 있는 한계를 드러내 보이는 자신들에게 일곱 번에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시니, 그렇게까지 용서할 수 있기에는 자신들로서는 버거우며 무리라고 느끼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이 자신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면 무엇이든지 다하겠다는 정신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에 있으나 이 믿음으로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여기는 까닭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뽕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기어라' 하면, 그대로 될 것이다.”예수님은 겨자씨를 들어 그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뽕나무더러 명하여 뽑혀서 바다에 심기어라 라고 하여도 그대로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겨자씨의 겨자는 밭에서 재배하는 1년초 또는 월년초가 있는데, 이 겨자의 씨는 누가 표현하기를 종이에 볼펜을 찍었을 때 그 점만 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작습니다. 우리가 씨로써 작은 것을 생각할 때 깨의 씨를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깨의 씨보다도 작은 것이 겨자씨입니다. 그런 조그마한 아주 작은 겨자씨가 자라면 그 키가 무려 1-2m에 이릅니다.
예수님은 이 겨자씨를 들어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있는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너희가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산더러 명하여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라고 하면 그대로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백두산, 한라산, 지리산, 설악산, 우리가 잘 아는 이런 태산에게 명하여“산아, 뽑혀 저 동해 바다 깊은 곳에 우뚝 서라!”라고 명하면 그대로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예수께서 왜 이런 말씀을 하셨겠는지요. 예수께서 과연 이런 일을 하시겠는지요. 예수께서 말씀하신 진의는 이것보다 더 큰 일도 하는 믿음에 제자들이있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알게 해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실제로 유대 땅에 있는 산을 명하여 갈릴리 바다에 세우는 일을 하시지는 않습니다. 그 일을 하실 수 없어서 하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께서는 성부 하나님과 그리고 성령 하나님과 더불어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조하신 땅의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으며, 그 사람에게 생기를 주어 살아 움직이게 하셨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든 자를 고치셨습니다. 홍해를 갈라 육지 같이 건너게 하셨습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께서는 창조 사역과 함께 구원 사역을 행하심에서 필요한 이적은 태산을 옮겨 바다에 심우시는 것보다 더 큰 능력을 행하십니다. 태산을 옮겨 바다에 심우시는 것이 구원 사역에 필요한 것이라면 능히 이 일을 행하십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은 제자들에게 있는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이해하여 알게 해주시기 위해서 비유로 들어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니 예수께서 태산을 옮겨 바다에 심는 일을 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태산을 옮겨 바다에 심는 일을 행하시는 것보다 더 큰, 더 경이로운 이적이 행해지는 능력에 제자들이 있게 하십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심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름에 있는 믿음으로 태산을 명하여 바다에 심기우라고 하여도 그대로 될 것이라고 하는 것에서 지금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름에 있는 믿음으로“우리가 형제를 몇 번이나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할 때“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곱 번에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라고 하신 그 용서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산상설교에서 주기도문을 통하여 가르치신 하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짐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이루어짐에 제자들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제자들과 예수께서 함께 하시며 예수께서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이루실 기도에 그들의 구함이 있는 것에는 예수께서 그들에게 은혜로 주신 믿음이면 충분했습니다. 비록 그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하게 여겨질지라도 그 믿음이 태산을 옮겨 바다에 던져 심는 능력을 발휘하듯이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용서의 자비에 두시고서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하늘의 능력을 이 땅에서 행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며 그분을 따라가 십자가에까지 이르러 예수님이 자신을 죽이는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을 용서하고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 처형당하는 한편 강도를 주와 함께 주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시는 행하신 용서를 보며 제자들 자신들도 자신들에게 있는 믿음이 하는 일인 용서를 하는 것에 있게 됩니다. 제자들은 성령강림 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함으로써 죄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에서 행해지는 용서를 베품에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누가복음 17장 1-6절에서 해 주시고 있는 말씀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심으로 제자들에게 있는 믿음은 겨자씨 한 알만하게 여겨질지라도 그 믿음이 태산을 옮겨 바다에 던져 심는 능력을 발휘하듯이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용서의 자비에 두시고서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하늘의 능력을 이 땅에서 행하실 것을 알게 해 주시는 것에서였습니다.
그런 것에서 마태복음에서도 그리고 누가복음에서도 당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며 계신 유대의 땅에 있는 산들의 산과 바다(갈릴리 바다/호수), 그리고 겨자씨를 들어서 믿음을 설명해 주시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여기에서의 산과 바다와 겨자씨 그 자체는 예수께서 믿음을 설명하기 위하여 사용하시는 것으로 등장시키고 있는 것일 뿐이지, 이러한 단어와 문구에 무슨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거나 영적 해석할 의미를 지니고 있거나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해서 여기에서의 산을 예루살렘 성전이며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는 곳임을 상징한다고 말하고, 바다는 이방 세계를 상징한다고 하며, 겨자씨만큼 작은 믿음만으로도 복음(산, 뽕나무)은 온 세상(여기서 저기로, 바다)에 전파(옮겨짐, 바다에 심김)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 말을 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이 이렇게 하는 말은 말이 되기는 하지만 예수께서 상징성의 의미를 담고 영적으로 해석하여 그 의미를 말씀해 주시는 것으로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임의로 상징성을 띠고 있다고 하고 영해하여 이러이러한 의미를 띠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이러한 해석은 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임의적으로 알레고리적 의미를 부여하여 해석하는 것으로, 본문에서 말씀해 주시는 것에서 하나님의 본의를 드러내 주시는 알게 되는 참된 의도를 가리는 일을 하게 됩니다.
님이여.
이상으로 답글을 마칩니다.
님이 질문한 것에서 성경 두 곳의 구절이 무엇 때문에 말씀되고 있는 것인지를 알 수 있도록 그 구절이 있는 본문에 의해서 설명하려다 보니 글이 참으로 길어졌습니다. 시간을 갖고 찬찬히 잘 읽으시면서 잘 정리하여 올바르게 이해를 가져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 안에서 평안을 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