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대륙에는 서기 761년부터 817년까지 4대 58년간 당나라와 맞서며 산동반도 일대를 장악했던 독립국가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고구려 유민 이정기가 세운 평로치청왕국이다.
1.고구려 유민 이정기의 나라 평로치청왕국
이정기는 서기 668년 고구려의 멸망으로 보장왕과 함께 당으로 끌려온 고구려 유민의 후손 이다. 그의 본명은 '이희옥'이며, 평로에서 태어나 평로군 부장이 되었다. 서기 755년 안록산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평로에서 산동으로 건너온 그는 치청의 절도사 ' 우희일을 몰아내고 절도사가 된다. 서기 765년 당은 유화정책으로 이정기를 치청의 절도사로 임명하지만, 그는 반당세력으로서 독립노선을 추구한다. 서기 778년에 그는 수도를 청주에서 운주로 옮기고, 계속적으로 당에 대항 하는데, 이 당시 치청의 인구는 약500만, 넓이는 18만 평방 킬로미터 정도 되었으며, 군대는 10만이었다고 전 한다. (당시에 신라의 넓이가 약 13만 평방킬로미터 정도 되었음을 볼 때, 상당한 국력을 가 지 나라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참고로 당시의 당의 인구는 5000만 정도 되었고 군대는 60 만 정도였음) 서기 781년 평로치청군은 제음에서 격전을 벌이는데, 이때 이정기(732-781)는 사망하고 서 기 782년 그의 아들 이납이 제왕에 오른다. 서기 813년 이납이 죽고 이사고가 즉위한다. 서기 815년 이사고가 죽고 동생인 이사도가 즉위한다. 이때에 이르러 당은 치청을 칠 목적으로 하음전운원에 있는 150간의 창고에 200만석의 군량 미를 비축하지만 이사도의 공격으로 불타게 된다. 서기 817년 당나라 헌종은 당군, 선무군, 위박군, 무령군(장보고의 군대)을 동원하여 치청을 공격하는데, 이사도가 전장에서 돌아오던 중 부관인 유오에게 시해당하여 사망함으로써, 서 기 818년에 4대 58년간 의 짧은 역사를 뒤로 하고 평로치청왕국은 멸망한다.
다음은 중국 청주박물관 부관장 씨아밍차이씨의 말이다.
"언젠가는 당신들이 찾아 올 줄 알았다.... 이정기는 당신들 한국인의 선조다. 이정기의 나라 는 형식상 당나라에 속했으나 실제로는 조세, 법률 등을 독자적으로 시행하던 산동성 전체 와 하북, 하남, 안휘성을 다스린 독립왕국이었다......"
아직도 청주 범공사에 이정기가 심었다는 당추(唐楸)라는 나무가 있다고 한다..
위 글은 1997년 10월2,3일 KBS-1 TV에서 개천절 특집으로 방송됐던 "고구려 유민 이정기 의 나라 평로치청왕국" 의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2.'평로치청왕국'에 대한 기록
처음에 TV를 보고 상당히 놀랐습니다. 이금껏 우리에게 이런 역사가 있음을 왜 몰랐을까 요? 부끄러운 일입니다. 다음은 이 평로치청왕국에 대한 우리측 기록들입니다.
대흥(대진국 (발해) 3대왕 문황제 흠무의 연호) 45년 (서기 781년임) 치 청의 절도사 이정기가 군사를 일으켜 당나라 군사에 항거하니 제(문황제)는 장수를 보내어 전쟁을 돕게 했다. 이정기는 고구려 사람인데 평로에서 태어 났다. 22년 장수들은 군수 이희일을 쫓아내고 정기를 즉위시켰다. 정기가 죽 은 후 아들 납이 아버지의 백성들을 통솔하였고 56년 납이 죽고 아들 사고 가 그 대를 이었으며 사고가 죽자 그의 집안 사람들이 상례를 치르지 않고 은밀히 사도를 맞이하여 그를 받들었다.
(2). 국민 조선 역사(최남선)
이정기는 북지나에서 만주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통치했다는 짤막한 기록이 있음
(3). 삼국사기
이사도가 당나라 헌종을 거역하여 신라가 군사 3만을 동원하여 토벌했다는 기록이 있음
이번에도 한단고기의 사료적 중요성은 여지없이 들어납니다 과연 어느 누가 한다고기는 위 서라고 감히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