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즐거운 일을 꼽으라면 여행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같은 여행이라도 누구랑 가느냐가 중요한데 예순이 한참 넘은 나이에는 부담 없는 옛 친구만큼 멋진 파트너가 있을까. 7월 17일 화요일. 전남 나주 여행길에 올랐다. 43회 동기 임창선, 류영균, 신동혁, 그리고 나 홍성완은 용산역에서 만났다. 불과 보름여 전 전격적인 제의로 이뤄진 번개여행이니 예사롭지 않은 발걸음이다. 게다가 우리 4명이 함께 여행에 나서기는 1971년 고교 졸업 후 47년 만이다. 만나자마자 아줌마 수다 못지않게 이런 저런 얘기가 쉴 틈 없이 이어진다. 류영균이 구수한 목소리로 춘천 우두동 어린 시절과 군에서 장교계급장 달고 나타난 동기를 만나 놀랐던 얘기를 풀어놓는다. 문득 정신을 차리니 아뿔사.. 대기 중인 다른 열차를 타고 있었다. 우리가 타야 할 목포행 KTX가 옆 플랫폼에 들어온 것도 모르고 얘기 삼매경에 빠졌던 것. 열차는 놓쳤지만 좀 기다렸다가 다음 차를 타면 되지 대수냐. 차표를 다시 끊어 다음 차에 올라타 자리를 잡자 류영균이 “오늘 너희를 위해 이벤트를 준비했다”며 근엄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이벤트라니 뭔 소리여”라고 하려는데 각자에게 흰 봉투 하나씩을 건넨다. A4 용지 3장으로 된 내용물을 꺼내본 순간 “이게 뭐야” 하고 놀랐다. 고3 때 류영균이 돌린 앙케트 질문지를 복사한 종이였다. 질문 항목이 30여 개에 달할 정도로 상세하다. 볼펜 글씨체를 보니 내가 쓴 게 틀림없는데 기억이 잘 안 난다. 그러면서도 당시 나의 성격이나 사고가 지금과 크게 달라진 게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감수성은 풍부한 편이나 뚜렷한 야망이나 목표가 없었다...지난 세월 돌아보니 “맞아, 그게 바로 나구먼”. 산업은행 부행장을 역임한 신동혁은 “내가 학교 다닐 때 글씨를 이렇게 예쁘게 썼나?” 며 스스로 대견스러워한다. 류영균은 1970년 11월 30일 동기 33명에게 설문지를 돌렸다. 왜 33명이지? 3학년 3반이어서 그런가 했더니 3·1 독립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명에서 착안했단다. 당시 설문지 돌리는 게 유행이었는지는 몰라도 그런 발상을 한 것 자체가 대단하고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다는 게 더 놀랍다. 정말 회심의 대형 이벤트가 맞다. 기차여행이 주는 안락함에 젖기도 잠시, 2시간 10분 만에 일행은 나주역에 도착했다.
이곳은 석유화학 분야 사업을 하는 류영균이 업무차 가끔 들른 곳이란다. 역시 사업가는 다르다. 단순한 여행 정보 외에 인적 네트워크 구축 면에서 탁월하다. 나주역에 내려 근처에 있는 ‘일루이스’라는 우아한 카페에 들어서니 미리 연락을 받은 이 집 Y 사장이 커피, 키위 주스를 내오면서 반갑게 맞아주는 것이 아닌가. 나주 토박이 여사장이 직접 차를 몰고 가이드를 해준다니 아무 걱정이 없다. 테마파크 분야에서 사업을 오래 해 온 임창선이 언젠가 들려준 “비즈니스 세계에서는 여자를 남자로, 남자를 여자로 바꾸는 것 외에 불가능은 없다”는 말이 떠오른다.
Y 사장의 안내로 나주목(牧) 관아와 향교를 돌아보면서 고려부터 조선 시대까지 전라도 남부의 행정·문화 중심지였던 이곳의 역사적 비중을 느낄 수 있었다. 주변에 늘어선 곰탕집이 이곳이 나주임을 실감케 한다. 복암리 고분 전시관에 재현해놓은 옹관묘는 인상적이었다. 대형 독 2개를 이어서 만든 표주박 모양의 옹관묘는 사자(死者)를 모시는 장례 풍습이 오늘날보다 훨씬 정중하고 위엄있음을 보여줬다. 역사 공부를 하다 보니 금방 허기가 진다. 점심 메뉴는 구진포 장어구이. 나주 구진포는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지역이어서 예로부터 장어가 유명하다. 그러고 보니 초복이다. 폭염이 계속되는 복날에 어울리는 메뉴다. 질리지 않을 정도로 적당한 분량이 맘에 드는 장어구이를 먹고 나니 진한 국물이 일품인 장어탕이 나온다.
오후 투어코스로 들른 곳은 쪽 염색 박물관과 수공예품을 만들어 파는 공방. 어부인에게 선물할 의류와 곧 태어날 외손주에게 줄 모빌을 고르느라 분주한 친구들을 보면서 “남자는 나이 들면 왜 이리 자상해지는가?”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 마음을 가족이 제대로 이해해주면 좋으련만...
나주가 본관인 조선 중기의 시인이자 문장가 임제의 백호(白湖) 문학관에 들르니 임제가 천하절색 황진이의 무덤에서 술을 따르며 지었다는 시조가 입가에 흥얼거려진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듯 누웠는다/ 홍안은 어디두고 백골만 묻혔나니/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 하노라”
나주에 왔으니 그 유명한 홍어 요리 체험은 필수 코스가 아니겠는가. 영산포 ‘홍어거리’로 가는 길에 일제가 토지를 수탈하기 위해 만든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문서고(자료 보관소) 옆에 있는 예쁜 카페에 들러 커피와 매실차를 마셨다. 회, 무침, 튀김, 애탕국을 망라한 홍어 정식은 특유의 진한 향으로 머리가 띵할 지경이다. 음식점 화장실에 치약 칫솔이 비치된 이유를 알 만했다. 다시 나주역. 어둠이 깔린 철로 주변 작은 동산을 하얗게 물들인 채 시끄럽게 떠드는 백로떼를 뒤로하고 우리 4명은 서울행 KTX에 올랐다. 영균, 동혁, 창선.. 친구여 고맙네. 다음번 번개여행이 기다려지네. 언제일지는 몰라도 이제는 47년 만에 여행길에 나서는 일은 없도록 하세.
홍성완(43회·연합뉴스 전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