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종말론 파동
시한부 종말론자 등이 주장해온 이른바 ‘예수공중재림’ 및 ‘휴거’ 예정일인 28일 밤 12시 전국 166개 종말론 신봉교회에서 8,000여명의 신도들이 휴거집회를 가졌으나 휴거는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1980년] 군사재판, 김대중에 사형 구형
1980년 오늘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으로 기소된 야당지도자 김대중씨에게 사형이 구형됐다.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은 1980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 운동을 김대중 일당이 정권을 잡기위해 민중을 선동해 일으킨 봉기로 조작해 김대중씨와 문익환 목사 등 20여명을 연행해 군사재판에 회부한 사건이다.
사형이 구형된 후 스즈키 젠코 일본 총리가 최경록 대사에게 김대중 사건에 대한 일본 정부의 관심을 표명함으로써 이 문제가 내정간섭으로까지 비화돼 한국과 일본간에 마찰을 빚기도 했다.
사형 확정 후 독일 미국 일본 프랑스 등에서 현지 교포들과 각국의 양심적 지식인 등이 김대중씨 구명운동에 나서자 군사정권은 형량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하고 1982년 12월 김대중씨를 석방했다.
23년 후인 2004년 1월 29일 재심을 통해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YTN
[1978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 즉위 미사
1978년 오늘, 즉위한 지 엿새가 지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이탈리아의 한마을에서 즉위 미사를 올린다.
신도들을 직접 만나길 좋아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역대 교황 가운데 가장 대중적인 교황으로 여겨지게 된다.
제264대 교황(재위 1978∼2005). 폴란드 바도비체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카롤 보이티야(Karol Wojtyla)이다. 1938년 아젤로니아대학교 철학과에 입학, 연극활동을 하며 안드레아 예비엔이라는 이름으로 시·희곡 등을 쓰기도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학업을 중단하고 연극배우생활에 전념하다가, 1942년 성직에 뜻을 안고 나치하에서 비밀리에 운영되던 크라코프신학교를 졸업, 1946년에 사제(司祭)가 된 후, 크라코프대학교 신학교수 등을 거쳐, 1964년 크라코프의 대주교가 되어, 1967년 추기경에 임명되었다.
1978년 요한 바오로 1세가 등위 34일 만에 죽자, 그 후계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이탈리아인이 아닌 교황은 사상 처음 455년 만의 일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신학적으로는 보수적이지만 사회적으로 진보적인 교황으로 평가되고 있다.
[1971년] 음반보호에 관한 제네바 협약 성립
1971년 10월 29일 제네바에서 ‘음반의 무단복제로부터 음반제작자를 보호하기 위한 협약’이 채택되었다. 제네바 협약은 복제기술의 발달로 음반의 무단복제가 증가함에 따라 저작자․실연자 및 음반제작자의 이익이 침해당하는 현실을 우려해 특별히 제정한 협약으로, 전문 13조로 되어 있다. 이 협약에서 승인된 보호의 원칙은 “각 체약국은 다른 체약국의 국민인 음반제작자를 그의 승낙을 얻지 않고 행해진 복제물의 작성 및 그의 승낙을 얻지 않고 작성된 복제물의 수입(공중에 대한 배포를 목적으로 하는 작성 또는 수입에 한함)으로부터 보호하고, 그러한 복제물의 공중에 대한 배포로부터 보호한다”고 규정했다. 보호기간은 각 체약국의 국내법이 정하는 바에 따르되, 국내법이 특정한 보호기간을 정하는 경우에는 음반에 수록된 음이 최초로 고정된 때로부터 통상 20년 이상으로 한다고 규정했다. 이 협약은 1973년 4월 18일부터 효력이 발생했으며, 한국은 1987년 7월 1일에 가입했다. 제네바 협약은 세계저작권협약(Universal Copyright Convention/UCC)과 함께 범세계적인 협약으로서 저작권 보호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브리태니커
[1969년] 발터 쉘(Scheel, Walter) 서독외상 할슈타인원칙선언 폐기
할슈타인원칙(Hallstein Doctrine)은 1955년 9월 소련과 서독간 정식국교 수립이래의 서독 외교정책의 기본원칙이다.
서독만이 자유선거에 의한 정부를 가진 유일한 독일의 합법국가이므로 서독은 동독을 승인하는 나라와는 외교관계를 단절(대독전승국인 소련만은 이 원칙에서 예외)하겠다는 것이다. 당시 외무장관 W.할슈타인이 작성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불렀다.
서독의 기독교민주동맹(CDU)이 취하던 반공외교정책의 축으로서, 이 원칙은 유고슬라비아 ·쿠바 등에 적용되었지만, 루마니아와의 국교 재개(1967), 유고슬라비아와의 외교관계 재개(1968), 그리고 브란트 정권 수립에 의한 동서독 수뇌회담의 실현(1970) 등으로, 이 원칙은 사실상 끝을 맺었다.
[1958년] 러시아 작가 파스테르나크(Boris Leonidovich Pasternak) 노벨문학상 거부
←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1958년 10월 29일, 스웨덴 한림원에 전보 한 통이 날아들었다. 일주일 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발표된 ‘닥터 지바고’의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보낸 전보였다. ‘수상(受賞)을 거부합니다.’ 노벨상 창설 이래 처음 일어난 수상 거부에 한림원도 당혹스러웠지만 무엇보다 작가 자신의 심경은 절망적이었다.
체제와의 불화로 긴 침묵에 들어갔던 파스테르나크가 ‘닥터 지바고’를 탈고한 것은 1956년이었다. 소련 내 출판사들이 “러시아혁명을 비방했다”며 출판을 거부하자 파스테르나크는 이듬해 11월 소설을 이탈리아에서 출판했다. 소설은 1년 만에 세계 18개국에서 번역되었고 그는 소련 작가로는 두번째로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되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뿐 곧 ‘매국노’라는 비난이 쏟아지고 작가동맹이 그를 제명하는 등 수난의 연속이었다. “국외로 추방하라”는 목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흐루시초프에게 탄원서를 보내 결국 추방만은 면했지만 이때 받은 상처는 그의 죽음을 재촉했다. 이후 1년 반 만인 1960년 5월 30일 그는 눈을 감았다./조선
[1956년] 제2차 중동전쟁 발발
제1차 중동전쟁의 휴전 후에도 아랍 제국(諸國)과 이스라엘의 대립상황은 악화를 거듭하여 쌍방은 군사력 증강에 광분했다. 1956년 이집트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G.A.나세르는 그해 7월 수에즈운하(사진)의 국유화를 단행하여 이스라엘로 향하는 선박의 통항을 거부하고 티란해협을 봉쇄했다.
이에 이스라엘군이 1956년 10월 29일 밤 이집트 국경 부근에 있던 3만명을 동원해 이집트 영내의 시나이 반도에 침입했다. 이에 대해 이집트군은 격렬하게 응전했다. 이튿날 나세르 대통령은 총동원령을 포고해 국민의 궐기를 촉구했다. 각국 반응은 이스라엘에 비난을 퍼부었고 미국도 이스라엘에 대해 즉시 철수를 요청했다. 한편 소련은 이스라엘의 이집트 침공이 수에즈운하를 이집트로부터 서방국가 손에 넘기기 위한 작전의 일환이라고 주장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30일 양국에 24시간이내에 정전하지 않으면 '수에즈운하를 지키기 위해' 수에즈지대로 상륙하겠다고 통고했다.
그러나 31일 철수시한이 끝나기 4시간 전에 운하지대에 맹폭격을 개시했다. 전세는 3국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었으나 미국의 압력, 소련의 위협, 국제여론의 악화 등으로 영국 ․프랑스는 정치적으로 매우 불리하게 됐다. 국제연합은 긴급특별총회를 소집해 11월 14일 즉시 철수와 유엔군 파견 결의를 채택, 정전(停戰)과 감시를 위한 유엔긴급군을 편성 ․파견했다. 이에 따라 사태는 진정됐고, 영국 ․프랑스는 연내에, 이스라엘은 1957년 3월에 점령지로부터 철수했다.
[1956년] 반도호텔서 국내 첫 패션쇼
1956년 10월 29일, 우리나라 최초의 패션쇼가 서울 반도호텔에서 열렸다. 물들인 미군복이 최고의 생활복으로 팔리던 때에 영화배우 최은희조미령 등까지 모델로 등장해 당시로서는 최고의 이벤트였다. 모델들도 아직 양장에 익숙하지 않았던 터라 뒷단추 옷이나 스커트의 앞뒤를 바꿔입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패션쇼의 숨은 주역은 노라노(노명자:사진)였다. 그는 1948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디자인을 배워 ‘노라노 꾸뜨리에’(1950년)와 ‘노라노의 집’(1952년)이란 양장점을 열어 고급의상실 붐을 일으켰던 제1세대 패션디자이너다.
주한 외교관 부인들과 미군 장교 부인들이 단골 손님이었지만 문화연예계 인사들도 그의 옷을 찾았다. 이해랑김동원황정순 등이 활약하던 극단 신협의 전속 디자이너로도 일했고, 1950년대 ‘저고리 시스터즈’부터 1970년대 ‘펄시스터즈’에 이르기까지 가수들의 의상도 만들어 유행을 불러일으켰다. 윤복희에게 미니스커트를, ‘펄시스터즈’에게 판탈롱을 입힌 것도 노라노였다. 이때문에 그의 이름을 무단으로 도용한 ‘노라노 양재학원’이 한때 번창하기도 했다.
[1950년] 이승만 평양 방문
1950년 9월 16일의 인천상륙작전을 전환점으로 하여 전세를 반전시킨 유엔군은 패주하는 북한군을 추격, 10월에는 평양을 수복하고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12월에는 북한지역에서 철수하게 되었고, 38선이 돌파된 후인 1951년 1월 4일 대한민국 정부는 다시 서울을 철수하게 되어 전선은 현재의 휴전선 일대로 고착되었다.
[1947년]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 맺어짐
국가 간 무역에서 높은 관세와 수출입 제한을 없애고, 국제 무역과 물자 교류를 늘리기 위한 협정인 GATT가 1947년 오늘 스위스 제네바에서 미국 등 23 개 나라에 의해 맺어졌다. 우리 나라는 1973년 정 회원국이 됐다.
[1933] 조선어학회, 한글맞춤법통일안 발표
← 조선어학회 한글 학자들의 기념사진
한글학회의 전신 조선어학회가 1933년 10월 29일 한글날(당시의 한글날은 10월 29일이었음)을 기하여 총회를 열어 '한글맞춤법통일안'을 확정했다.
‘한글은 모양이 곱고, 배우기 쉽고, 쓰기 편한 훌륭한 글인데 푸대접하고 짓밟아버려 아주 볼 모양 없이 됐다.’(1932년 조선어학회 잡지 ‘한글’ 창간사)
오랫동안 한글은 일종의 발음기호와 같았다. 훈민정음이 만들어진 지 480여년이 지나도록 표기법 체계를 갖추지 못해 사람마다 소리 나는 대로 자음과 모음을 이어 붙일 뿐이었다.
일제강점기 소장 학자들은 ‘한글 바로 세우기’가 자주 국가를 준비하는 일임을 간파했다. 조선어학회를 결성한 이들은 총칼 없는 혁명을 모의했다.
1930년 이윤재 김윤경 이희승 최현배 이극로 등 12명은 혁명의 1단계로 ‘한글 마춤법 통일안’을 만들 것을 결의했다. 2단계는 표준말 제정, 3단계는 사전 편찬이었다. 문자의 규칙을 만들고, 내용을 담고, 용례(用例)를 갖추는 방대한 작업을 일개 학회가 자임하고 나선 것이다.
3년간 125차례, 총 433시간의 회의가 열렸다. 표음(表音)과 표의(表意) 중 어느 것을 택할 것인지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극로는 “의견 대립으로 의자를 던지고 퇴장하는 사람이 있으면 집에 찾아가 민족을 위해 참으시라고 설득했다”고 회고했다.
1933년 10월 29일 드디어 총 65항의 ‘한글 마춤법 통일안’이 발표됐다. 이 맞춤법은 낱말의 형태소(뜻을 가지는 최소 단위)를 훼손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확립해 연음(連音) 표기의 혼란을 극복했다.
신문과 교회는 기다렸다는 듯이 한글 강습회를 열었다. ‘한글 붐’이 심상치 않자 일제는 동아일보의 문자보급운동을 금지시키는 등 탄압에 나섰고, 이는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학회는 난관에 굴하지 않고 1936년에 ‘표준말 모음’, 광복 후인 1947년에는 ‘큰사전’을 내놨다. 나라말의 기틀을 민간 모임이 확립한 전대미문의 업적이었다.
“이는 혼란하게 써오던 우리글을 정리하는 첫 시험일 뿐… 시대의 진보에 따라 한글도 영향이 없지 않을 것이니 많은 가르침이 있기 바란다.”
맞춤법 전문(前文)에 있는 말이다. 국적 불명의 언어로 한글이 오염된 지금, 후세를 깨우치는 죽비 소리로 들리지 않는가
[1920년] 행정관료․정치가 신현확(申鉉碻) 출생
1920. 10. 29 경북 칠곡~2007. 4. 26. 서울
1943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해 관계(官界)에 입문했다. 1954년부터 상공부에서 전기․광무(鑛務)․공업 국장직에 있다가 1957년 부흥부차관과 외자청장 서리직을 맡았고, 1959~60년 부흥부장관을 지냈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 1968년 동해전력과 쌍룡양회의 사장이 되었고, 1969~73년 쌍룡산업의 사장을 지냈다. 그후 1975년 보사부장관으로 관계에 다시 진출하여 1978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국무총리로 임명되었으나 12․12사태로 인해 물러났다. 1980년 5․17비상계엄전국확대조치 이후 헌법개정심의위원장을 맡았고 1981년 국정자문위원이 되었으며 1983년 한일협력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관계에 있는 동안 2번에 걸쳐 국회에 진출했는데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군위·성주·선산·칠곡 지역에서 민주공화당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1979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역시 구미·칠곡·군위·성주 지역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정계에서 은퇴한 이후 1986년 (주)제일산업 회장과 1986~91년 삼성물산 회장 및 삼성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을 지냈다./브리태니커
[1911년] 신문 경영인 퓰리처 사망
← 현대 저널리즘의 대명사인 신문왕 퓰리처
조셉 퓰리처는 현대 저널리즘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로부터 신문들이 현대적인 틀을 갖췄기 때문이다. 만평과 사진을 화려하게 쓴 것도, 체육부를 신설해 스포츠기사를 비중있게 다룬 것도 퓰리처였다. 흥미와 오락위주의 일요판도 그가 처음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은 ‘재미없는 신문은 죄악’이라는 그의 신념에서 비롯됐다.
헝가리에서 유대계로 태어나 17세에 미국으로 이주한 그가 신문과 인연을 맺은 것은 24세때 독일어 일간지에 입사하면서였다. 독자투고가 계기였다. 신문 경영인으로서의 진가는 1883년에 인수한 ‘뉴욕 월드’에서 발휘돼 방송이 없던 시절, ‘뉴욕 월드’를 정보의 원천이자 오락의 도구로 만들었다. 마침 나타난 경쟁자 랜돌프 허스트도 그에게는 중요한 자극제였다. ‘황색 저널리즘’이라는 용어도 주인공이 노랑옷을 입은 선정적인 만화 ‘옐로 키드’가 ‘뉴욕 월드’ 일요판에 게재되자 허스트가 이를 흉내내면서 탄생한 것이다.
독자들도 정론과 상업성의 두마리 토끼를 쫓는 퓰리처에 성원을 보내 인수 당시 발행부수가 1만부에 불과했던 ‘뉴욕 월드’는 100만부로 급성장해 미국 최대의 신문으로 자리를 잡았다. 1911년 10월 29일, 64세를 일기로 숨졌다. 1917년에는 유언에 따라 퓰리처상이 제정되었다./조선
[1906년] 이준-이동휘 등 한북흥학회(韓北興學會) 조직
일명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라고도 한다. 1906년(광무 10)에 독립투사 이준(李儁)·오상규(吳相奎)·유진호(兪鎭浩)·이동휘(李東輝) 등이 함경도 출신의 청년들을 중심으로 조직하였으며, 국권의 회복과 민권의 신장에 목표를 두었다.
주요활동은 교육구국운동·계몽강연·토론운동·청년운동 등이었다. 교육구국운동으로 함경도에 많은 사립학교가 설립되고, 구국을 위해 투쟁하는 국권회복운동가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같은 해에 정운복(鄭雲復)·이갑(李甲)·유동열(柳東說) 등이 평안도 출신의 청년들을 중심으로 조직한 서우학회(西友學會)와 함께 1908년 1월 안창호(安昌浩)·이갑 등이 중심이 된 서북학회(西北學會)로 통합되었다.
[1905년] 영국의 소설가․실업가 그린/Henry Green 출생
본명은 Henry Vincent Yorke.
1905. 10. 29 영국 글로스터셔 튜크스베리~1973. 12. 13 런던.
세련된 풍자를 통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변화하는 영국 사회의 계급구조를 조명했다. 이튼 학교와 옥스퍼드대학에서 수학한 후 가업(家業)인 버밍엄의 엔지니어링 회사에 들어갔다. 열심히 일하여 런던에 있는 회사의 상무직까지 올라갔다. 이 기간에 함축성있는 짧은 제목의 사회희극인 〈실명 Blindness〉(1926)․〈삶 Living〉(1929)․〈파티 참석 Party Going〉(1939)․〈포착 Caught〉(1943)․〈사랑 Loving〉(1945)․〈배경 Back〉(1946)․〈결론 Concluding〉(1948)․〈무 Nothing〉(1950)․〈노망 Doting〉(1952) 등을 발표했다. 그는 겉으로는 유쾌하면서도 내면으로는 혼란스럽고 수수께끼 같은 분위기의 소설을 썼다.
[1901년] 시인․소설가․문학평론가 박종화/朴鍾和 출생
1901. 10. 29 서울 ~ 1981. 1. 31 서울.
호는 월탄(月灘). 서울 출생. 소년시절 사숙(私塾)에서 12년간 한학을 수업한 뒤 1920년 휘문의숙(徽文義塾)을 졸업하였다. 같은 해 문학동인지 《문우(文友)》를 발간하면서 문학수업을 시작하였으며, 그 뒤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47년에는 성균관대학교 교수와 서울시예술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고,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우익진영의 대표자로서 49년에 발족한 한국문학가협회 초대 회장이 되었다. 서울신문사 사장, 예술원 회장 등에 취임하였고, 제1회예술원상, 제1회 5․16민족상 등을 수상하였다. 1920년 9월 〈서광〉에 시 〈쫓긴 이의 노래〉를 발표했고, 1921년 〈장미촌〉 창간호에 시 〈오뇌의 청춘〉·〈우유빛 거리〉 2편을 발표해 문단에 등단했다. 1922년 〈백조〉 창간호에 시 〈밀실로 돌아가다〉·〈만가 挽歌〉, 평론 〈오호아문단 嗚呼我文壇〉을 발표해 대표적인 낭만주의 작가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그가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은 〈백조〉 제3호에 단편 〈목 매이는 여자〉를 발표하면서인데, 이 작품은 근대문학 이후 한국 최초의 역사소설로 손꼽히고 있다. 이어 1924년 처녀시집 〈흑방비곡 黑房秘曲〉을 펴냈다. 그뒤 소설을 쓰는 데 주력해 미술을 공부하고 싶어하는 아들과 의업(醫業)을 이어주려는 아버지와의 갈등을 그린 〈아버지와 아들〉(개벽, 1924. 9), 서민들이 먹는 순대국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하는 작가를 풍자하는 〈순대국〉을 비롯해, 〈여명〉(개벽, 1925. 1)·〈시인〉(조선문단, 1925.2) 등의 단편을 발표하면서 소설가로서 기반을 닦았다. 본격적으로 역사소설을 쓰기 시작한 때는 1936년 〈매일신보〉에 연산군의 내면심리를 다룬 〈금삼(錦杉)의 피〉(1936. 3. 20~12. 29)를 발표하면서부터이다. 그뒤 단편 〈전야 前夜〉(조광, 1940. 7~1941. 10)·〈아랑의 정조〉(문장, 1940. 12) 등과 〈대춘부 待春賦〉(1939)·〈다정불심 多情佛心〉(1942) 등의 장편 역사소설을 발표했다. 해방 이후 앞서 발표한 〈여명〉·〈전야〉와 함께 3부작을 이루는 〈민족〉(1947)을 발표했고, 〈홍경래〉(1954)·〈청춘승리〉(자유신문, 1947. 6~12)를 비롯해, 민족수난을 다룬 대서사시라 할 수 있는 〈임진왜란〉(1955) 등을 통해 민족의 울분을 나타냈다. 이렇듯 그의 중심적인 창작활동은 역사소설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대부분의 역사소설은 신문에 연재된 통속적인 차원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특히 〈금삼의 피〉·〈다정불심〉에서는 궁중의 비화를 다룬 선정적이고 통속적인 재미만 그렸을 뿐, 당대 일상생활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그리지 못했다. 그러나 민족의 대사건을 다룬 〈전야〉·〈여명〉·〈민족〉 등에서는 조선 말기 양반 및 중인 생활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그의 작품을 전반적으로 보면 역사의식에 있어서 민족주의적이기보다는 복고주의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으며, 6·25전쟁 이후에 쓴 역사소설은 통속적인 흥미 위주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시집으로 〈청자부 靑磁賦〉(1946)·〈월탄시선〉(1961) 등과 소설집으로 〈여인천하〉(1959)·〈자고 가는 저 구름아〉(1965) 등이 있고 수필집으로 〈청태집 靑苔集〉(1942)·〈달과 구름과 사상과〉(1965)·〈한 자락 세월을 열고〉(1970) 등 여러 편을 펴냈다. 1954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1962년 문화훈장 대통령장과 5·16민족상, 1970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등을 받았다. 5·16민족상을 수상한 상금으로 1966년부터 '월탄문학상'을 시상하고 있다.
[1898년]만민공동회 ‘헌의6조’ 결의
← 독립협회가 주최한 강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모여드는 군중들의 모습
1898년 10월 29일 구한말 민주집회인 만민공동회는 ‘헌의6조’를 결의하고 그 시행을 정부에 강력히 요구했다. 만민공동회는 제국주의 침략에 반대하는 시민, 소상인, 지식인들이 주도한 대중집회로서, 1898년 3월 10일 독립협회 주최로 종로에서 처음 개최되었다. 독립협회는 10월 29일 집회에서 채택한 헌의6조를 통해 대외적으로 자주성을 가진 군주주권국가를 확립하되, 서구의 상원의회와 같은 기구로 중추원을 설립해 왕권의 자의적 사용을 견제하고자 했다. 또한 갑오개혁 때 추진된 바 있는, 재정기관을 탁지부로 일원화하고 재판제도를 확립하는 등의 개혁조항을 전면적으로 실시할 것을 요구했다. 정부도 헌의6조를 받아들여 유명무실했던 중추원을 의회의 기능을 갖춘 기구로 개편하고, 중추원 의관의 반수를 차지하는 민선의관 전원을 독립협회에서 선출하도록 했다. 그러나 독립협회의 세력이 강성해지는 것을 두려워한 국왕의 측근세력이 독립협회가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제를 실시하려 한다고 모함했다. 이에 고종은 독립협회의 주요 간부 체포 및 해산을 명령했다. 또한 정부는 황국협회를 동원해 만민공동회를 폭력으로 저지했으며, 12월에는 독립협회를 강제해산시켰다. 이로써 헌의6조의 실현은 완전 무산되었다./브리태니커
[1897년]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 출생
1897년 10월 29일 태어남 / 1945년 5월 1일 죽음
← 괴벨스(1935경)
‘우리는 가장 위대한 정치가로서 혹은 가장 위대한 범죄자로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 파울 요제프 괴벨스, 1945
괴벨스는 독일의 제3제국 선전장관으로 독일 국민들에게 나치 정권을 헌신적으로 선전했다. 1922년 하이델베르크대학교에서 독일문헌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문학·연극·언론계에서 활동했다. 이 당시 그는 유대인에 대해 전혀 적대적이지 않았으며, 유대인 스승에게서 배웠고 유대혈통의 소녀와 약혼한 바 있다. 그러나 1924년 국가사회주의자들과 사귀면서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NSDAP:일명 나치당)에 입당하고 1926년 베를린 지구당 위원장이 되었다. 1928년 나치당의 선전감독관이 된 후, 당의 행사 및 시위의식을 제정하고 정력적인 연설을 행함으로써 독일 대중을 나치즘으로 끌어들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와 아프리카에서 패배했을 때 괴벨스는 절정기를 맞게 된다. 그는 패배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버티는 선전의 대가로서 진면목을 보였다. 1944년 7월 20일 7월 암살음모사건 이후 히틀러에게 큰 신임을 얻었고, 8월 25일 '총력전을 위한 제3제국 전권위원'이 되었다. 이어 히틀러에 의해 제국의 총리로 임명되기까지 했으나, 바로 그 다음날인 1945년 5월 1일 가족과 동반자살로 생을 마쳤다./브리태니커
[1869년] 한말의 의병장 민용호(閔龍鎬) 출생
1869. 10. 29 ~ 1922. 8. 23
본관은 여주. 일명 진호(晋鎬). 호는 복제(復齊). 제1차 의병전쟁 때 경기도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켜 강릉을 중심으로 한 관동구군 도창의소(關東九郡都倡義所) 의병대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경기도 여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뒤 원주·평창·진부를 거쳐 1896년 1월 강릉으로 이동했다. 강릉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영동 방면의 의병들과 세력을 합하고 포수들을 모아 관동구군 도창의소를 설치하고, 이병채(李秉採)·최중봉(崔重峰) 등과 함께 포고문을 각 지방에 보냈다. 이들은 해변을 따라 관북 방면으로 진출하려고 3월 개항장인 원산을 공격하려 했으나, 일본헌병에게 기밀이 누설되어 실패했다. 이후 다시 강릉으로 돌아가 전력을 정비한 뒤 6월 고성·양양 등지를 점령했다. 7월 함경도 의병대와 함께 제2차 원산공격을 계획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8월초 500여 명의 부대를 이끌고 강릉을 떠나 회양·금성 방면에서 전투를 벌이고, 평강·이천의 산악지대를 따라 황해도와 평안도로 북진했다. 이때 곡산과 문성에서 경군과 격전해 큰 손실을 보았지만, 평안도 일대에서 다시 세력을 모아 함경도 함흥부를 점령하기도 했다. 이후 병력을 보충해 만주로 들어갔다. 저서로는 〈복제집〉·〈병신일기 丙申日記〉 등이 있다.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873년] 콜롬비아의 시인․정치가 발렌시아(Guillermo Valencia) 출생
1873. 10. 29 콜롬비아 포파얀~1943. 7. 8 포파얀.
기교있는 운문 구사와 뛰어난 번역솜씨로 유명하다.
저명한 가문에서 태어나 인문주의적 고전교육을 받고 몇 개국의 언어로 다양한 독서를 하여 세계주의적인 안목과 조화로운 성격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점은 정치와 문학생활에 모두 반영되었다. 첫 시집 〈의식(儀式) Ritos〉(1898, 개정판 1914)에는 창작시 외에 프랑스․이탈리아․포르투갈의 시들이 번역되어 실려 있는데, 이 작품의 이국적 이미지는 실험적인 모더니즘 운동의 선두주자로서의 그의 명성을 국내외적으로 확립시켰다. 그러나 다른 많은 모더니즘 작가들과는 달리 그는 작품세계에서만 도피주의자였을 뿐 실제생활에서는 정치가와 외교관으로서 활동적인 경력을 쌓았고, 1918년과 1930년 2차례에 걸쳐 콜롬비아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기도 했다.
[1682년] 프랑스의 예수회 회원 샤를부아(Pierre-Francois-Xavier de Charlevoix) 출생
1682. 10. 29 프랑스 생캉탱~1761. 2. 1 라플레슈.
가장 먼저 북아메리카에 대한 보고서를 썼다. 과학적인 탐험 임무를 띠고 프랑스로부터 전에 머문 적이 있던 캐나다로 파송되었다. 1720년 세인트로렌스 강을 따라 여행하면서, 오대호를 건넜으며, 미시시피 강으로 연결되는 육로를 개척했다. 멕시코 만에서 난파당했으나 살아 남아 산토도밍고 섬을 방문하기도 했다. 프랑스에 돌아온 뒤 〈산토도밍고의 역사 Histoire de Saint-Domingue〉․〈신(新)프랑스의 개설 Histoire et description generale de la Nouvelle-France〉을 썼는데, 특히 후자는 영구적인 가치를 지닌 뛰어난 저서이다.
[1504년] 신사임당(申師任堂),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남
← 신사임당 묘, 경기도 기념물 제14호,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1504(연산군 10) ~ 1551(명종 6).
조선시대 문인․서화가. 본관은 평산(平山). 사임당(師任堂․思任堂)은 당호(堂號)이며, 임사재(妊師齋)라고도 하였다. 감찰(監察) 이원수(李元秀)의 부인, 이이(李珥)의 어머니이다. 효성이 지극하고 지조가 높았다. 어려서부터 경문(經文)을 익혔으며, 문장․침공(針工)․자수에 이르기까지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특히 시문과 그림에 뛰어나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 《사친(思親)》 등의 한시(漢詩)는 탁월한 재능을 발휘한 것이며 안견(安堅)의 그림을 스스로 사숙(私淑)하였는데, 그의 영향을 받은 화풍에 여성의 섬세함을 더하여 후세의 시인․학자들의 절찬을 받고 있다. 그림의 주제는 풀벌레․포도․화조․어죽(魚竹)․매화․난초․산수 등으로 사실화였으며, 채색화․묵화 등 40폭 정도가 전해지고 있다. 그가 천부적 재능을 발휘할 수 있었던 동기로는 남성 우위의 유교사회에서 겪는 정신적 고통과 육체적 분주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환경을 지녔기 때문인데, 즉 출가 뒤에도 친정에서 생활함으로써, 비교적 자유롭게 일상생활과 자녀교육을 할 수 있었다. 자녀교육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 현모양처의 귀감이 되었다. 《자리도(紫鯉圖)》 《산수도(山水圖)》 《초충도(草蟲圖)》 《노안도(蘆雁圖)》 《연로도(蓮鷺圖)》 《요안조압도(蓼岸鳥鴨圖)》 등과 6폭 초서병풍이 있다.
그밖에
2005년 인도 연쇄 폭탄테러
2005년 제4회 마카오 동아시아경기대회 개막식
2004년 영국 왕실 최고령 앨리스 공주 별세
2002년 대치동 은마아파트 '재건축 불가' 판정, 부동산시장 큰파장
2002년 '청약자격 제한'시행. 5년내 아파트 분양 당첨 땐 1순위 박탈
1998년 존 글렌 상원의원 등 7명의 우주인을 태운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 21호 발사
1996년 전남 해남에서 익룡 발자국 화석 발견
1996년 막가파 생매장사건
1992년 연세대 마광수 교수, 음란문서제조혐의로 구속
1983년 리비아,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추방령
1982년 한국전자박람회 개막
1982년 77그룹, 제3세계의 경제협력회의서 이스라엘 제외키로 결정
1981년 스웨덴 하원, 대(對) 나토 가입신청안 가결
1981년 샹송가수 조르주 브라생스 사망
1981년 레이건 미국대통령, 황화 중공외상과 워싱턴서 회담
1980년 이호 입법의회 의장 피선. 정래혁-채문식 부의장 피선
1975년 유엔정치위, 한반도문제 서방안과 공산안 모두 가결
1963년 모로코- 알제리 간 사하라 전투 확대
1957년 서독 제3차 아데나워 내각 성립
192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화 판소리'심청가' 예능보유자 정권진 출생
1924년 영국 총선 보수당 대승
1923년 터키공화국 수립. 초대 대통령에 케말 파샤 선출
1922년 서울에서 자유노동조합 창립
1920년 동만주의 대한광복단 등 4개 단체 총변부(總辯部)로 통합. 임정(臨政) 휘하에 들어감
1919년 제1회 국제노동회의 워싱턴에서 개막, 주당노동시간을 48시간으로 제한하는 조약 채택
1914년 터키 대(對)소련 참전. 함대가 오데사 세바스토폴리 공격
1909년 舊 한국은행 설립
1888년 수에즈운하 자유항행권(航行權)에 관한 콘스탄티노플 조약 체결 (영국-프랑스-독일 등 9개국)
1887년 전환국인 조폐창과 기기국인 기기창 준공
1783년 프랑스의 계몽주의자 장르롱 달랑베르 사망. 디드로와 함께 '백과전서' 편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