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시122:1-9)-2020.7.19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도시가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관심은 예루살렘에 있고 하나님은 그 예루살렘을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때문에 예루살렘은 믿는 자들의 영적인 고향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신앙의 중심지요, 하나님의 복을 받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예루살렘을 자기 백성들에게 사랑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예루살렘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라는 말은 성전을 사랑하라는 말과 같고, 교회를 사랑하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본시는 다윗이 지은 시로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입니다.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말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고향을 사랑합니다. 고향은 어머니의 품과 같아 포근함과 아늑함이 있습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품같은 예루살렘은 믿는 자들의 영적인 고향과 같습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시선이 머물고, 하나님의 마음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여러분은 예루살렘을 사랑하십니까? 다른 말로 바꾸어 물어볼까요? 성전을 사랑하십니까? 혹은 교회를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성전,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어쩌면 교회를 사랑하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의 신앙의 깊이를 알 수 있지요. 교회는 머리되신 주님의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가시적인 교회도 있고, 불가시적인 교회도 있습니다. 그러나 불가시적인 교회를 사랑하는 자는 가시적인 교회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말하는 가시적인 교회라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교회를 사랑함이 옳습니다. 말하기를 좋아하는 어떤 사람들같이 가시적인 교회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폄하하거나 비평하는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 오늘날 영웅적인 시각으로 교회를 공격하는 세력들이 너무 많습니다.
물론 지상에 세워진 모든 교회는 죄인들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불완전합니다. 교회의 기능도 불완전합니다. 교회는 기능적인 면으로 볼 때 순기능도 있고, 역기능도 있습니다. 역기능은 반드시 우리가 뜯어 고쳐야 하지만, 그래도 교회는 순기능이 훨씬 더 많은 곳입니다. 순기능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기능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순기능을 보아야 합니다. 세상은 역기능만 골라서 공격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이 보시는 순기능을 보고 교회를 더욱 사랑하고 기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대부분의 하나님 백성들은 가시적인 교회를 통해서 불가시적인 교회의 일원으로 편입이 됩니다. 교회의 순기능 중에서 이보다 더 귀한 기능이 있겠습니까? 한 영혼이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배우는 교회의 기능보다 더 소중한 기능이 있겠습니까? 있을 수 없습니다. 천하보다 귀한 영혼이 주님께 돌아와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배우며, 주님 안에서 살아가도록 양육 받고 훈련되는 기능이 최고의 기능입니다. 비록 교회가 다른 것은 부족할지라도 이 기능만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면 비난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교회의 이 한 가지 기능만 보더라도 우리는 가시적인 교회를 사랑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비록 이 땅에 세워진 가시적인 교회가 완전하지는 못할지라도 여전히 교회는 우리가 사랑해야 할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교회는 우리의 믿음을 가르치고 양육하는 최적의 훈련소요, 신령한 공동체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믿음을 배우고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가는 영적인 도를 배우며, 하늘나라에 합당한 자질과 시민의식을 배웁니다. 그런 교회를 사랑함이 어찌 마땅치 않겠습니까? 바로 그것이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의 도리입니다.
다윗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를 통해 자기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예루살렘을 사랑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는 하나님의 처소, 성전을 사랑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과연 어떤 마음으로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갈까요? 이것은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의 마음이요, 교회를 사랑하는 성도들의 믿음의 자세입니다.
(1) 기쁨으로 올라갑니다(1-2절)
하나님의 마음은 이스라엘에 있고, 그중에서도 예루살렘에 있으며, 그중에서도 성전에 있고, 지성소에 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법궤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기쁨은 성도의 기쁨입니다. 다윗은 고백합니다. 누군가 자기에게 여호와의 집 성전에 올라가자고 할 때에 자신이 기뻤다고 말입니다(1절).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이 누군가로부터 교회가자는 말을 들을 때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하신가요? 정말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시던가요? 아니면 불편한 소리를 들었다고 짜증이 내거나, 혹은 듣지 못할 소리를 들은 것처럼 부담스러워 한 적은 없으셨던가요?
다윗은 성전에 올라가자는 소리를 듣고 기뻐했습니다. 성전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고, 하나님의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교회 안에 하나님의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안에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주님을 성전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성도는 이 기쁨을 맛본 자들입니다. 물론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이 주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누구보다 하나님을 통하여 주시는 기쁨을 몸소 체험하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누구보다 굴곡진 삶을 살면서 다윗은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통해 이겨낼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기쁨을 성전 안에 가득 채워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성전에는 하나님의 기쁨이 있습니다. 교회에는 하나님의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성전 안으로 들어와서 하나님의 기쁨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신령한 기쁨이 성전에 있기 때문입니다. 크게는 예루살렘에서 맛볼 수 있으며, 하나님의 처소 된 성전을 통해서 맛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식으로 말씀드리면 교회를 통해서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기쁨은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고, 빼앗길 수 없습니다.
다윗은 성전에 올라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때 다윗의 감격은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 발이 예루살렘을 밟을 때를 소회합니다(2절).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땅을 밟기만 해도 기쁘고 좋았던 것이지요. 충분히 공감이 되는 말씀이지요? 우리도 우리가 소망하는 곳을 방문하게 될 때 그 지역을 밟는 순간부터 설레고 기분 좋지 않던가요? 다윗은 예루살렘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자입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마음이 있고, 하나님의 정기가 있으며,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숨결이 있는 땅이라서 기쁘고 좋았던 것이지요.
오늘날의 교회도 그런 차원에서 접근이 가능합니다. 교회라는 이름만 들어도 좋지 않던가요? 지상에 세워진 교회도 주님이 피 흘려 세우신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대해 그리움이 없다면 심각한 것이지요. 우리가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하물며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생각만 해도 내 마음이 기쁘고 즐겁지 않던가요? 어느 순간부터 내 안에 교회에 대한 기쁨이 사라지고 시들어진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문제가 무엇일까요? 혹시 교회에 대한 기쁨도 없고, 교회 안에서 누리는 기쁨도 없다면 지금 내 심령은 병이 든 것이든지, 죽은 심령일 것입니다. 어디서 첫 사랑을 잃었는지 회복해야 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교회에 대한 그리움이 사라지고 기쁨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몸 된 성전, ‘교회에 갑시다’라는 말이 부담스러운 인사가 되어버렸고, 상당히 껄끄러운 인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요?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포로기 70년 동안 성전 없는 삶, 제사 없는 삶을 경험했습니다. 과연 그들에게 성전에 올라가지고 권면하는 사람들이 없을 때 편하고 행복했을까요? 그들의 아픔을 한눈에 보여주는 말씀이 시편137편입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1절).
실제로 그들에게는 올라갈 성전이 없었고, 제사를 드릴 자유도 없었습니다. 그 고통을 아십니까? 만일 그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계시다면 당신의 신앙을 다시 한번 점검해 보셔야 합니다. 과연 내 믿음이 온전한지를 말입니다. 바벨론 포로시절 유다백성들이 기쁠 이유가 있었겠습니까? 지금 나에게 예배드릴 성전이 있다는 것이 기쁨이요, 누군가 나에게 성전에 올라가자고 권면하는 자가 있다는 것이 기쁨이며, 성전에 올라가는 자가 기쁨입니다. 한마디로 나에게 지금 예배드릴 처소가 있고, 신앙의 자유가 있으며, 나를 오라하시는 주님이 계시다는 것이 최고의 기쁨이라는 말입니다.
(2) 감사함으로 올라갑니다(3-5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 올라갈 때 어떤 마음으로 올라갔을까요? 마지못해서 올라갔을까요? 아니면 기쁨과, 즐거움으로, 감사함으로 올라갔을까요? 당연히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감사함으로 올라가라고 권면하십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자의 자세는 감사가 생명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시100:4)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성전에 올라갈 때 기쁨으로 올라간다면 감사는 당연하겠지요?
기쁨과 감사는 성격이 같습니다. 기뻐하는 자는 감사하는 자요, 감사하는 자는 당연히 기뻐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집에 초청을 받아서 방문할지라도 인상을 쓰고서 방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주 감사하는 마음으로 방문하겠지요. 하물며 하나님의 성전을 올라가면서 감사치 못하는 것은 상상이 안 될 일입니다. 그런데 과연 여러분은 하나님의 집에 예배하러 올 때 어떤 마음으로 올라오십니까? 정말 불편하고 부담스러운 마음으로 오십니까? 아니면 불평과 불만을 가득한 채 오십니까? 아니면 감사함으로 나오십니까?
하나님은 감사하는 자를 받으십니다. 감사로 제사 드리는 자를 받으십니다. 다윗의 고백은 이러합니다(4절). 이스라엘의 각 지파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성전에 올라온다고 표현합니다. 사실 이스라엘의 각 지파들이 하나 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12지파는 네 명의 배다른 형제들이기 때문입니다. 한 배에서 나온 형제들도 의견이 맞지 않아서 티격태격하는데 하물며 야곱이 4명의 다른 배를 통해 태어난 형제들이 아닙니까? 쉽겠습니까? 그러나 4절의 고백은 너무나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온 지파 족속들이 한 마음이 된다는 것이 감사할 일이지요. 그들은 전례대로 성전에 올라가야 했습니다. 그들의 규례는 1년에 세 번 모든 이스라엘 남성들이 성전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유월절과 오순절과 초막절을 지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전례대로 성전에 올라가는 목적은 하나였습니다. 여호와 이름에 감사함입니다(4절). 그들이 감사함으로 예루살렘 성을 올라간 것은 그곳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정해진 장소요, 다윗의 보좌가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5절).
다윗의 가문은 하나님으로부터 왕의 보좌로서 모든 심판권과 재판권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위임을 받았습니다. 다윗의 가문에서 그리스도 예수님이 나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곳으로 올라가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요, 감사할 수밖에 없었던 일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아우르는 왕이요, 예루살렘은 다윗의 보좌가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예루살렘을 단순한 도시처럼 여기지 아니했고, 하나님의 도성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은 지파를 초월해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감사할 장소입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감사함으로 교회를 찾아오는 원리와 같은 것입니다.
(3) 기도함으로 올라갑니다(6-9절)
또한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예루살렘의 평안을 구해야 합니다(6절). 그러면 형통의 복을 받습니다. 이 말의 현대적인 의미는 교회의 평안을 구하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형통의 복을 받는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성 예루살렘에는 평강이 있고 형통이 있습니다(7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루살렘의 평안과 안녕을 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교회의 안정과 평안을 쉬지 말고 구하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평안을 무너뜨리려 합니다. 교회의 평강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습니다. 문제는 교회 밖으로부터 당하는 공격도 엄청나지만,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시비와 논쟁으로 교회의 평안을 깨뜨리는 세력들도 많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것으로부터 공격을 받을지라도 교회의 평안이 사라질 수는 없습니다. 교회의 평안은 주님으로부터 공급되는 평안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교회의 평안을 구해야 합니다.
교회가 평안하면 가정이 평안하고, 각 심령이 평안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평안하지 못하면 가정의 평안도 무너지고 각 심령의 평안도 사라지고 맙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요, 예루살렘의 성의 평안을 구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의 평안을 사모하는 자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이기 때문입니다(롬14:17).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평안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또한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성전의 평안만 구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와 붕우를 위한 평강도 구해야 합니다(8절). 이른바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 하라’는 말씀을 기억하십니까?(롬12:18).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평안해야 하고, 모든 인간관계속에서도 화평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정신입니다. 수직적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수평적으로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지요. 바로 이것이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의 책임이요, 사명입니다.
우리가 예루살렘의 평안을 구하면 반드시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루살렘의 평강의 복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너희는 내가 사로 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렘29:7). 다윗이 그 사실을 분명히 알고 믿는 자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의 평안을 구하라고 당부하면서 자기는 자기 백성들의 복을 구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9절).
다윗의 기도는 자신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자기 백성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는 그것이 하나님의 집을 위한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9절). 하나님은 자기 집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즉,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이른바 교회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신다는 말입니다. 오직 그런 믿음은 내안에 나를 성전 삼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마음으로 살 때 가능한 일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 그런 믿음이 있는지를 점검해 보십시다. 정말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지의 여부를 점검해 보자는 것입니다.
우리 함께 고린도후서 13장5절을 찾아 읽어보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할렐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