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정의 세월”
기나긴 겨울이 짧기만 하는 건가.
겨울 같지 않은 겨울이 봄날처럼 가고 있다.
대한(大寒)이 소한(小寒)집에 놀러와 얼어 죽었다는 말도 있는데
올해 겨울은 이런 말이 무색하게 한다
.
그래서 겨울 축제를 기대했던 강원도에서는 연이어 축제를 취소하고 있다.
하지만 소한이 시샘 했을 때 갑자기 온도가
뚝 떨어져 어제와 오늘 겨울 맛을 제대로 느끼게 한다.
요즘 난 어머니와 함께 지내고 있다.
지난 주일에 우리 집에 방이 없어서인지 불편을 느껴 서울로 가신 어머니를
다시 우리 집으로 지난 수요일에 모시고 왔다. 하지만 우리 집에는 방이 하나다.
부엌 겸 작은 방이 있는데 방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여기에 간이침대를 놓고 두 아들이 잠을 잔다.
개척교회 하는 목사는 돈을 벌지 못해? 여러 가지로 행동에 부자연스러움을 피부로
느끼며 살고 있다.
어머니 연세는 2016년 들어 89세다. 어릴 적 칠남매를 가난한 가정에서 키워 내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 오래오래 사세요. 편히 한 번 모시고 싶다.
하지만 방은 하나.
그것도 학원 자리에 교회를 개척하고 한 쪽을 막아 방을 만들어 십 년 넘게 지내고 있다.
이런 환경을 볼 때마다 내가 얼마나 무능력 한가 하고 자책할 때가 있다.
굳이 이렇게 살면서 목회해야 하는가 하고 돌아볼 때도 많다.
하지만 어머니를 생각할 때, 아무리 어머니께서 늙고, 병 들고, 치매 증세도 있고,
모든 것이 부자연스럽고 부족하다 하여 어머니를 무시하거나 멀리할 수는 없다.
그것은 마치 우리들이 어렸을 때를 돌이켜 생각해 보면 충분히 입장 바꿔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우리가 제대로 걷지도, 옷을 잘 챙겨 입지도 못하고, 밥을 제대로 입에 넣지도 못하고 흘리고
모든 행동이 얼마나 서툴렀겠는가?
하지만 한 번도 버리지 않고 모든 것을 사랑으로 끌어안고,
칠남매를 논 한 마지기도 없는 살림에서 보따리 장사하며 수십 리를 그 비싼? 차비 아껴
하나라도 토끼 같은 자식들 죽자 사자 먹이고 입히고 그래도 이만큼 가르쳐 오시지 않았는가.
어머니는 어떤 때는 한 아들에게 전화를 하고 또 하고, 또 한다.
그것도 같은 내용을 그렇게 한다. 분명 치매 증세이리라.
또 어떤 것을 물어보고 조금 있다가 또 물어 보곤 한다.
귀찮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다.
하지만 난 여러 번 같은 내용을 대답해 드린다. 마치 처음 듣는 것처럼.
아마 우리들도 어렸을 때 부모님에게 사소한 것을 묻고 나서 금방 또 물었을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어린 아이들의 질문은 귀엽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하다.
하지만 늙은 어머니는 귀엽지도, 기특하지도 않다. 행동이 굼뜨고 볼품도 없고,
모양도 아름답지 않다. 그렇다고 외면하거나 버릴 수 없지 않은가.
어렸을 때 우리를 어떤 사랑과 희생으로 길러 내신 것을 기억할 때 더욱 그럴 수 없다고 본다.
어떤 형제는 노인 병원에 계시게 하는 것을 좋게 여기고 그렇게 추진하기로 했다.
아마 조금 지나면 또 그렇게 할지 모른다.
어머니께 가만히 물어본다.
“병원에 계신 것이 좋아요?”
“이렇게 우리 집에서 함께 밥도 먹고 TV도 보고,
함께 얘기도 하고 지내는 것이 좋아요?”
하고 물으면 두말 할 것도 없이 병원은 싫단다.
“병원은 저승 가는 대기실이야. 그런데 내가 왜 거기가 좋겠냐?”
하시며 펄쩍 뛴다.
앞으로 어머니의 몸 상태가 더 나빠지면 그렇게 병원으로 모실 수밖에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 맘은 어머니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세상을 떠나 저 천국으로 가기까지
자녀들 집에 돌아다니면서 어머니로서 행복을 맛보도록 함께 지냈으면 좋겠다.
어머니는 자식들 집에 계시다가 며칠만 지나면 고향인 전남 함평 집으로 보내달라고
아이들처럼 졸라댄다.
이 요구를 물리치기는 매우 어렵다.
어떤 때는 다투다가 “그러면 그렇게 하시라”고 집으로 모셔다 드리기로 한다.
그렇지만 고향에는 가까운 친척이나 형제가 없어서 따뜻이 모실 수가 없다.
지금은 식사도 홀로 지어 먹을 수 없고, 가스불도 깜빡하고 그대로 두기도 한다.
혼자 계시도록 할 수 만은 없다.
그래도 주일에는 교회도 가고 금요일에는 구역예배도 돌아가면서 참석한단다.
구십 평생 살아온 고향 땅과 집, 눈에 익은 골목길, 다정한 친구들과 이웃들을 떠나
정글 같은 대도시에 와서 사는 것이 어찌 편할 수 있겠는가.
어제는 운동 마치고 올 때 식당에서 동태 일인분을 샀다.
저녁에 어머니와 함께 먹기 위해서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끓여주신 겨울 동태국은 참 맛있고 시원했다.
집에 와서 봉지를 열어보니 끓인 것이 아니라 재료다. 끓여 먹으라는 거다.
어머니께서 칼로 파란색 쓸개를 빼는 것도 지켜보고, 굽은 허리로 이리저리 애쓰시는 것을 이 얘기, 저 얘기 하며 기쁨으로 지켜보았다.
가스 불에 펄펄 끓여 어머니와 도란도란 얘기하며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아내는 봉사활동 겸, 배우러 다닌다. 그래서 아침밥을 어머니와 둘이서 먹는다.
큰 아들은 서울에서 학교 다니고, 방학에도 알바하며 자취하고 있다.
막내아들은 청주에 있는 교원대 체육교육과 입시를 위해 지난 수요일에 내려가서
거기서 2박3일 있으면서 면접과 체력 시험을 치르고 있다.
어머니는 시골에 계실 때 월요일마다 텔레비전에서 하는 가요무대를 좋아하셨다.
그 프로는 흘러간 옛 노래를 많이 들려주어서 더욱 그러하리라 생각한다.
나도 또한 가요무대를 좋아한다. ‘타향살이, 나그네, 설움 번지 없는 주막’ 등.
그 시절 우리 민족 정서를 잘 담아낸 노래들이 심금을 울려 준다.
난 케이블 TV에서 지난 방송을 재방영해주는 채널에 맞춰 가요무대 등 노래가 계속 흘러나와
어머니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다.
어머니께서 가수 이름을 물으면 알아맞히고, 설운도의 머리 모양까지 얘기할 때는
껄껄 웃으며 맞장구 쳐준다.
아직도 어머니의 기억력이 참 좋다.
TV에서 최불암 맛 기행을 보고도 ‘최불암씨는 공짜로 좋은 음식 많이 먹더라’며 부러워한다.
나는 어머니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감동을 받는다.
기억력이 살아 있고 화면에 나오는 내용에 따라 반응하는 모습이
마치 어린 아들이 세상의 낯선 모습을 보고, 신기하게 생각하고 얘기 하는 모습과 같이
생각되기 때문이다.
“어머니, 오늘 낮에는 고구마 쩌 먹읍시다.”
지난번에 먹다 남겨둔 호박 고구마를 어머니께 씻으라고 했다.
난 압력밥솥을 준비하고 산바리?를 넣고, 씻은 고구마를 넣고 뚜껑을 닫고,
스팀 나오는 구멍을 세워 김새지 않도록 하고 가스 불을 켰다.
나는 지금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나도 열일곱 되면서 타향살이하면서 어머니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늘 그리워했었다.
그래서 공장 생활할 때 메들리로 옛날 노래 틀어주면 ‘나그네 설움, 타향살이’ 등을
따라 부르며 야간작업의 지루함과 고단함을 달래곤 했다.
비록 좋은 집은 아닐지라도 어머니와 함께 고구마를 찌고
함께 상을 차려 밥 먹는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솥에서 반응한다. 치지직, 칙칙칙…….
“어머니 끌까요?”
“좀 더 둬라.”
조금 있다가 고구마 냄새난다며 어머니께서 가스 불을 껐다.
난 전기밥솥에 보온 상태로 넣어둔 밥을 꺼내 왔다.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 왔다. 어머니께 따뜻한 고구마를 먼저 드시도록 권했다.
포기김치 썰지 않고 그대로 두고, 내가 가위로 밑동을 자르고 한 잎 한 잎 젓가락으로 찢어 놓았다.
“칼로 자르는 것보다 이렇게 찢어 먹으니 훨씬 더 맛있는 것 같아요.”
“김치가 익어서 짜지도 않고 맛있네요.”
옛날 같으면 어머니께서 육남매 집마다 김장김치 해주셨는데 그 일도 그만 둔지 여러 해가 지났다.(누나는 천국이 좋아 결혼 십년 만에 먼저 하늘나라에 갔다.)
어머니 솜씨는 탁월했다. 이제는 추억 속에서만 맛볼 수 있지만 그 실력 어디 가랴.
솜씨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고구마를 김치랑 드신 후에 난 그릇에 담아둔 뜨끈한 찌개도 내어왔다.
또 누룽지를 국자모양의 손잡이 있는 그릇에 넣고 끓였다.
어머니 식사하시는 동안 나는 대여섯 번이나 앉았다 일어섰다 하며
부엌에 가서 필요한 것이 있으면 즉시 가져 왔다. 어머니는 “그냥 먹어라.” 하시는데
어머니에게 조금이라도 필요한 것이 있으면 곧 챙겨드릴 수 있는 것이 내겐 기쁨이다.
아마도 칠남매 기르실 때 시골집 부엌 높은 문이 닳도록 이 보다 훨씬 여러 번 드나 드셨을 것이다.
난 밥 먹다 말고 부엌에 갔다. 가스불이 꺼져 있다.
살펴보니 이미 누룽지가 펄펄 끓어 물이 약간 넘쳐서 불이 꺼지고 말았다.
하지만 따끈한 누룽지와 숭늉을 빨리 식지 않도록 쇠그릇에 담아 가지고 왔다.
“어머니 누룽지 드세요.”
“구수하죠. 물도 마시면서 드세요.”
“모자라면 누룽지에 밥을 더 말아 드셔도 되요.”
난 할 수만 있으면 입안의 혀처럼 어머니께 해 드리고 싶다.
꼭 그렇게 어머니 맘에 맞춰드릴 수 없을지라도 마음만은 그렇게 해드리고 싶다.
몸은 늙고 병들어 힘이 없지만, 마음만은 청춘이 아니겠는가.
옛 생각하면 지난날이 무수히 주마등처럼 스칠 텐데…….
우리가 얼마 남지 않은 어머니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시원케 해드리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
드실 때 맛이
‘어떠냐?’ ‘맛있느냐’ ‘짜지 않냐?’
이것저것 묻고 답하는 시간에 한 그릇 맛있게 드시는 모습을 볼 때면 기분 좋다.기쁘다.
식사 중에 KBS 인간극장 스페셜 「You are my Sunshine」프로를 보는데 마음이 찡해 왔다.
충북 단양에 사는 조용창(55세)씨가 어린 두 딸 조현미(3세), 조현정(8세)과 함께 어려움 중에도
웃음을 잃지 않고 사는 모습이 가슴을 뭉클하게 하고 뜨겁게 했다.
조 씨는 나면서부터 신체장애가 있어서 정상적으로 걷지도 말하지도 못하고 어눌하지만
어린 두 딸을 지극히 사랑했다.
더 잘해 주지 못해 미안해하는 아빠와 달리 어린 두 딸은 집에서나 학교에서도
아빠를 자랑스러워했다.
모처럼 학교에 양복을 입고 찾아온 아빠를 보고, 다른 친구들이
약간 이상한 눈으로 할아버지 보듯 하는데도, 전혀 부끄러워하거나 기죽지 않고,
친구들에게
“우리 아빠야.” 하고 자랑스럽게 소리쳤다.
그때 아빠는 눈물을 흘린다. 아이들은 ‘울지 말라’ 하며 웃었다.
어리지만 아빠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집에 오는 길에 두 딸에게
드레스를 사 주었을 때 아이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아빠는 끌어안고 한없이 사랑스러워했다.
그 애들의 엄마는 월남사람인데 도망갔다고 소개되었다.
하지만 아이들의 얼굴에 그늘이 조금도 없다.
아빠가 ‘엄마 필요하지 않느냐’고 대해 조심스럽게 물으니
처음엔 엄마 없어도 괜찮다고 하더니 좀 더 물으니
“엄마랑, 아빠랑 같이 살고 싶어요.”
하며 두 딸이 얘기하자, 아빠는 두 딸을 끌어안고 울고 말았다.
“아빠 괜찮아요, 울지 말아요.”
밥을 먹다가 목이 메었다. 어머니도 영상의 내용을 다 알아차리고 계셨다.
내용에 따라 적절히 반응하는 어머니 모습에 나는 마냥 좋다.
언제까지 이런 모습을 계속 볼 수 있을 것인가?
어머니 살아계실 때, 부자처럼 풍족하게는 못해드려도, 아주 사소하면서도
평범한 행복을 누리는 이 시간이 참으로 좋다. 점심 식사 후 김치랑, 찌개 남은 것 등을
냉장고에 도로 갖다 넣고 설거지 하려는데 어머니께서 하시겠다고 하시기에
“그러세요.” 하고 양보했다.
작은 소일거리라도 하시면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난 아까 데워 두었던 따뜻한 물을 갖다드리며
“이 물로 씻으세요. 손 시리니까.”
조금 휴식한 후에 한 생각이 떠올라 일어섰다.
오늘 금요일이니 병원에 오후에 다녀와야 했다.
오른쪽 눈 속에 다래끼가 나서 눈뜨기가 불편하기 때문이다.
“어머니 눈 때문에 병원에 다녀올게요.”
“언제 올래?”
“금방와요.”
그러면서 나는 탁구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병원에 갔다가 얼른 탁구장에 가서 잠깐이라도 운동하고 오려고 맘먹었다.
병원에서 의사는 눈을 약간 째고 심하게 짰다. 신음이 절로난다.
눈 찔끔 감고 참았다. 피가 나온다.
짠 곳에서 피가 계속 조금씩 나오고 눈이 부어올랐다.
거울을 보니 탁구장에 갈 수 없겠다.
오는 길에 보니 장갑이 눈에 띄었다.
어머니 털장갑 손가락 부분이 약간 떨어졌다.
어머니 위해 장갑 두 켤레를 샀다. 두툼한 양말도 다섯 켤레에 삼천 원 했다.
기분 좋게 사들고 왔다.
생각보다 빨리 집에 오니 어머니는
“벌써 오냐?” 하신다.
어머니는 한 시간도 혼자 있기 힘들어 하신다.
고향 집이 아니어서 그러실 거다.
낯선 곳에 혼자계시면 ‘얼마나 힘 드실까?’ 싶어 가능하면 빨리 오려고 했다.
저녁을 먹어야지. 6시 반쯤에 밥과 반찬을 내어왔다.
어머니께서 음식을 잘 드셔서 좋다.
“어머니 양치하고 오세요.”
화장실에 양치하러 아장 걸음으로 가신다.
내 눈에는 다섯 살 난 아이같이 보이기도 한다.
‘잘 해드려야지.’ 마음만이라도.
저녁 먹은 후에 나는 어머니께 아까 사 온 카키색 털장갑을 선물로 드렸다.
어머니는 끼워 보고
“두툼하니 아주 좋다.”
하시며 즐거워하신다. 누워 계시다가 도 일어나 끼워 보시고
“나는 밖에 나갈 일도 없는데, 안 끼워도 되는데…….”
“아니에요. 한 번을 끼워도 어머니께서 써야죠.”
“색깔도 예쁘네요.”
벗었다가 잠시 후에 또 일어나 장갑을 끼워 보신다.
어머니께서 다정하게 한 마디 하신다.
“선물 고맙다.”
2016년 1월 8일 넷째 아들 영배
|
첫댓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한 명절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