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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길
―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읽는 동화
이 문 열
옛날 옛적 어느 마을에 한 가난한 집안이 있었습니다. 어찌나 가난했던지 사는 움막은 이엉조차 제대로 올린 게 못 돼 눈비가 오면 식구대로 습기 찬 동굴이나 속 빈 고목 등걸을 찾아들어야 했습니다. 입성도 사는 집만큼이나 변변치 못해 그들이 걸친 해진 베는 겨울의 찬바람을 막아 주기는커녕 여름의 따가운 햇살조차 가려 주지 못했습니다. 먹는 것이라고 더 나을 리 있겠습니까. 때로는 개똥에 남아 있는 삭이지 못한 낟알을 씻고 일어〔淘〕 곱삶아 먹고, 부잣집 쇠여물 솥을 행궈 그 물을 국 삼아 마셔야 할 정도였습니다.
원래 가난이란 까닭이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흔히 그 까닭으로 드는 것은 게으름이고 그다음은 헤픔이지요. 그런데 이 집안의 누구도 그토록 가난해야 할 만큼 게으르지 않았고, 이미 가진 것을 쓰는 데도 남보다 헤프지는 않았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가난이 지난 잘못에 대한 벌로 온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 집안 식구들의 지난날을 돌이켜 봐도 그런 혹독한 가난을 별로 받을 만큼 몹쓸 짓을 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실로 영문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가난이 끼치는 해는 누구에게나 비슷하고 또 뚜렷합니다. 특히 그 마지막의 끔찍한 결말은 언제나 똑같습니다. 가난은 먼저 몸을 통해 영혼을 짓이기고 비틀다가, 끝내는 그 영혼이 깃들 몸마저 갈고 부수어 없애 버린다는 것이 그렇습니다. 이 집도 그러해서, 원래 아홉이나 남아 되던 식구들은 그 가난으로 걱정하고, 슬퍼하고, 앓고, 떨고, 굶주리다가 하나둘 맥없이 스러져 갔습니다. 그리고 드디어는 늙은 아버지와 어린 막내아들만 남게 되고 말았습니 다.
그러다가 그 아버지마저 여러 날을 굶고 떨던 끝에 숨이 넘어가려 하자 어린 아들이 슬픔과 성냄과 한스러워함을 섞어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아버지, 우리 식구들은 왜 모두가 이렇게 비참하게 죽어 가야 하나요?”
“가난 때문이다.”
아버지는 당연한 일을 말하듯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이제는 캐묻는 투가 되어 물었습니다.
“그럼 우리는 왜 이렇게 가난한가요?”
“받은 복이 적어서 그러하니라.”
아버지는 마지막 숨을 헐떡 이면서도 여전히 원망 없는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아들이 다시 따지듯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복은 누가 나눠 주나요?”
“옥황상제(玉皇上帝)께서 나눠 주신다.”
“어떻게 나눠 주나요?”
“착한 사람에게 많이 준다는 말도 있고, 부지런한 사람에게 많이 준다는 말도 들었다만, 질은 잘 모르겠다. 내가 평생 본 바로는 꼭 그렇지도 않았으니.”
아버지는 그러면서 숨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은 더욱 마음이 급해져 물었습니다.
“그 옥황상제님은 어디 있나요?”
“하늘에 계신다고 들었다.”
“저기, 저 하늘요? 저긴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래도 저 아득한 곳 어딘가에 하늘나라가 있고 거기에 옥황상제님이 계신다고 하더구나. 하지만 가 보았다는 사람은 아무도 보지 못했다. 어쩌면…… 사람이 갈 수 없는 곳을 그렇게 이름한지도 모르지.”
아버지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속절없이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어린 아들이 그런 아버지의 주검을 부여안고 대들듯 소리쳤습니다.
“아무도 가 보지 못했다면 옥황상제가 그 하늘에 계신 것을 어떻게 알아요? 저는 이제 하늘로 가서 그분을 만나 뵈려고 해요. 만나서 왜 우리가 이렇게 가난한지 따져 볼 거예요. 저 또한 헐벗고 굶주려 죽게 되더라도 왜 그렇게 죽어야 하는지 까닭은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아버지의 주검을 양지바른 곳에 묻은 뒤 아들은 하늘을, 옥황상제를 찾아서 떠났습니다.
참으로 멀고 막막한 길이었습니다. 땅은 땅으로 이어지고, 그 위에 길은 또 길로 이어져 끝이 없었습니다. 거기다가 어느 길이 하늘로 가는 길인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으니 오직 지쳐 떠돎만이 운명인 듯도 싶었습니다. 아이는 그래도 한번 먹은 마음을 버리지 않고 쉼 없이 걸었습니다.
어디가 어딘지도 모를 길을 끝없이 헤매는 사이에 아이는 자라 어느새 젊은이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오래고 힘든 헤맴이 온전히 헛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먼 길을 걸으면서 보고 들은 것은 그를 슬기롭게 했고, 겪은 외로움은 그 가슴에 넓이와 깊이를 더했습니다. 이겨 낸 어려움과 견뎌 낸 괴로움도 그를 또래의 누구보다 굳건하고 참을성 있게 만들었습니다.
거기다가 길이란 언젠가는 끝이 있기 마련입니다. 여남은 해 길 위를 떠돌다 보니 어느덧 저잣거리는 멀어지고 젊은이는 사람들이 흔히 그 아득한 저편 어딘가에 땅끝이 있다고 믿는 넓은 벌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 젊은이가 하늘에 닿아 있는 지평선에 이끌려 스스로 그리로 갔는지도 모르지요.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고 어디에도 그런 표지는 없었지만,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에서 멀어진다는 것은 그만큼 하늘에 가까워졌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또 한없이 펼쳐진 지평선을 보고 있으면 그 끝 어딘가에 하늘이 내려앉아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 바람에 힘을 내어 씩씩하게 발걸음을 떼어 놓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하룻길이 다하고 해가 저물어 젊은이는 그 밤을 묵을 곳을 찾게 되었습니다. 이미 세상에서 멀어져 그런지 아무리 둘러봐도 마을이 보이지 않아 은근히 마음을 졸이며 걷는데 저만치 야트막한 언덕의 숲 그늘에 기와집 추녀가 언뜻언뜻 비쳤습니다.
젊은이가 반가움으로 달려가 보니 놀람게도 그곳에는 커다란 집이 한 채 있었습니다. 외지기는 해도 좋은 한때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이른바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알 수없는 것은 그 집이 풍기는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였습니다. 썩은 곳도 허물어진 곳도 없는데 공연히 머리끝이 쭈뼛해질 만큼 어둡고 스산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세상을 떠돌며 궂은일, 험한 일을 겪을 대로 겪은 터라 젊은이는 되도록 그 집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느낌이 좋지 않은 곳을 굳이 찾아들어 좋은 일이 생기는 법은 드물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미 날이 저물어 오고 몸도 지쳐 어쩔 수 없이 그 대문을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주인 계십니까?”
젊은이가 몇 번이고 그렇게 되풀이 소리치고서야 안에서 들릴 듯 말 듯 가느다란 대답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어인 일로 주인을 찾으시는지요?”
젊은 여자의 목소리였는데 마디마디 어딘가 슬프고 한 서린 느낌이 실려 있었습니다.
“저는 지나가는 나그네이온데 날은 저물고 가까운 곳에는 찾아들만한 집이 없어 이 집 문을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처마 끝에서라도 하룻밤 묵어가게 해 주신다면 그보다 더 고마운 일이 없겠습니다.”
젊은이가 목청을 가다듬어 점잖게 인정을 빌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집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조금 기다려 주는 법도 없이 잘라 말했습니다.
“이곳은 나그네가 묵어갈 곳이 못 되옵니다. 이 등성이 너머 커다란 호랑이 굴이 하나 있는데, 이곳보다는 그곳에서 잠자리를 빌어 보는 게 차라리 나을 것입니다.”
처음 젊은이는 흔히 들어 온 대로 외딴집에 여인네가 홀로 있어 외간 남자를 꺼리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말을 다 듣고 보니 보다 별난 까닭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호랑이 굴보다 못한 사람의 집이 어디 있겠습니까? 듣자 하니 무슨 곡절이 있는 듯한데 물러가더라도 그것이나마 알고 갔으면 합니다만…….”
젊은이가 그렇게 말하자 집 안에서는 한동안 대꾸가 없었습니다. 한층 궁금해진 젊은이가 이번에는 달래듯 말했습니다.
“호랑이보다 더 모진 짐승에게 잠자리를 비는 일이 있더라도 사람의 집을 두고 그리로 가야 하는 연유는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굳이 이 몸에게 들려주어서는 안 될 일이라면 모르되, 그게 아니라면 그 연유라도 한번 들려주십시오.”
그러자 삐그덕, 대문이 열리며 한 젊은 아가씨가 너무 희어 절로 슬픔이 느껴지는 소복 차림으로 나타났습니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얼굴이었지만 젖어 있는 두 눈에는 두려움과 슬픔이 가득해 보였습니다. 그윽하게 젊은이를 바라보던 아가씨가 가벼운 한숨과 함께 말했습니다.
“소녀는 여기서 저승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만, 이는 집안의 재액이라 아무 상관없는 바깥 사람을 차마 끌어들일 수가 없습니다. 손님께서는 부디 가던 길을 내처 가시읍소서.”
그런 아가씨를 본 젊은이의 가슴이 갑자기 두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저승길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 섬뜩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한편으로는 그때껏 찾아 헤맨 하늘 한 모퉁이를 그녀에게서 본 듯한 느낌이 든 까닭이었습니다. 그만큼 그녀는 곱고 아리따웠습니다.
갑자기 그녀를 위해서라면 어떤 어려움에도 맞서 볼 용기를 품게 된 젊은이는 오히려 대문 안으로 한 걸음 발을 내디뎠습니다.
“주인에게는 주인의 도리가 있다면 손님에게는 손님의 도리가 있는 법입니다. 아씨께서는 집안의 재액이라 하나 사내 대장부가 되어 어려움을 만난 여인네를 홀로 버려두고 어찌 못 본 척 지나갈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그 재액이 어떤 것이며, 아씨께서는 어찌하여 혼자 죽음으로 그걸 맞아야 하는지나 들려주십시오.”
젊은이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자 아가씨도 더는 말리지 않고 그를 방 안으로 맞아들였습니다.
“저희 조상 중에는 일찍이 세상의 저잣거리에서 만금(萬金)을 모으신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부지런히 일하면서도 또한 참고 아껴 뭉친 것을 밑천으로 재물을 불려가기 시작하셨습니다. 하지만 만금으로 키워 나가는 동안 부러움이 변한 사람들의 시새움과 해코지에 얼마나 시달렸겠으며, 그들과의 아귀다툼인들 오죽했겠습니까. 거기다가 만금을 이룬 뒤에는 아침이면 대문께에 거지들이
줄을 서고 저물면 담장 밖에 크고 작은 도둑들이 어슬렁거리니 도무지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견디다 못한 그분은 어지러운 사람들의 세상에서 멀리 벗어난 곳을 찾으시다 아마득한 땅끝 가까운 이곳에 자리 잡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뒤 백 년, 그 자손 된 우리는 그 분이 이곳으로 옮겨 온 재물에 기대어 대대로 복되게 살았지요. 우리가 얼마나 모자라는 것 없고 마음 편하게 살았던지 어쩌다 이곳을 찾게 되는 사람들은 여기가 바로 하늘과 닿아 있는 그 땅끝이라고 여기기까지 했습니다…….”
아가씨는 아련한 그리움까지 내비치며 그렇게 말해 놓고 살며시 일어나 장롱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냈습니다. 상자 안에는 열 개씩 단을 지어 묶은 숟가락과 젓가락이 여남은 벌이나 되었습니다. 아가씨가 새삼 슬픔이 복받치는 표정으로 그 수저들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얘기를 이어 갔습니다.
“여기 이 수저들은 모두 저희 식구들이 쓰던 것입니다. 그만큼 집안이 번창했다는 뜻이지요. 그러나 이 몇 해 사이 무서운 요괴가 드나들면서 그 많던 식구들을 다 잡아가고 이제 저 혼자만 달랑 남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오늘 밤이 바로 그 요괴가 마지막으로 나를 잡으러 오겠다고 받아 둔 날이지요. 그런데 손님께서 찾아와 이 집에 묵기를 청하신 것입니다. 요괴에게 잡혀간 식구들 중에는 호랑이를 만나도 눈 한번 깜짝 않던 오라버니들도 있고 힘이 황소 같다던 머슴들도 있습니다. 그들마저 손 한번 써 보지 못하고 숨져 갔는데 하물며 먼 길에 지친 나그네이겠습니까. 손님께서도 오늘 밤 이 집에 묵으시다가 나를 잡으러 오는 그 요괴의 눈에 띄게 된다면 화를 면할 길이 없을 터이니, 주인 된 도리로 차마 그 일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집 안에 들이기를 마다한 것입니다.”
여느 젊은이였다면 아마도 그쯤에서 겁을 먹고 그 집을 떠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슬기롭고 굳센 이 젊은이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한동안 말을 멈추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그 요괴는 도대체 어떻게 생겼습니까? 그리고 사람들은 그 요괴에게서 무엇을 가장 두려워했습니까?”
“그 요괴를 만나고도 미처 숨이 끊어지지 않았던 식구들의 말에 따르면, 머리가 둘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한 것은 바로 그게 아니었을는지요?”
아가씨가 기억을 더듬어 조심스럽게 대답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젊은이는 좀 전보다 한층 골똘하게 생각에 잠겼다가 이윽고 믿음에 찬 표정이 되어 말했습니다.
“어쩌면 그 요괴를 물리칠 방도가 있을 듯도 합니다. 혹시 어디서 갓 세 개만 구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갓이라면 아버님이며 오라버니들이 쓰던 것들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럼 됐습니다. 그 갓 중에서 양태가 넓고 칠이 잘된 것 세 개와 사람의 머리통만 한 바가지 둘만 구해 주십시오.”
자신에 찬 젊은이의 말에 아가씨도 기운을 차렸는지 원하는 것을 찾아내 주었습니다. 하기는 어차피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밤이니,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에라도 매달리는 것과 같은 심사였는지도 모르지요.
원하는 것을 얻은 젊은이는 먼저 아가씨를 병풍 뒤로 숨기고 대여섯이나 되는 촛불로 방 안을 환히 밝혔습니다. 그런 다음 바가지 둘에 각기 갓을 씌운 뒤 곧추세운 자신의 무릎 위에 얹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갓 하나는 자신이 쓰니 방 안에는 마치 며리가 셋인 사람이 앉아 있는 듯 보였습니다.
젊은이는 누구도 범할 수 없는 위엄이 서린 표정에 태산같이 흔들림 없는 자세로 앉아 요괴가 나타나기로 되어 있는 삼경(三更)을 기다렸습니다. 병풍 뒤에서 숨어 있던 아가씨도 병풍 너머로 한 번 흘깃 그런 젊은이를 훔쳐보고는 조금씩 믿음이 일어 그때까지도 품고 있던 가슴속의 두려움과 걱정을 가만히 털어 냈습니다.
이윽고 삼경이 되었습니다. 하마 멀리서부터 쿵쿵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나더니 장지문이 스윽 열리며 말로만 들었던 요괴가 고개를 들이밀었습니다. 과연 머리가 둘인 기괴한 요물이었습니다. 머리 하나는 한없이 넉넉하고 편안한 얼굴을 가졌는데 비해 다른 하나는 세상의 온갖 불평과 원한을 다 담고 있는 듯 일그러지고 뒤틀린 표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둘이 하나의 목 위에 나란히 붙어 낯섦이나 싫음만으로는 형언할 수 없는 괴이한 느낌을 자아냈습니다. 어쩌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무서움 중에는 그렇게 어울릴 수 없는 것이 함께 어울려 만들어 낸 괴이한 느낌도 들어갈지 모르겠습니다.
처음 그 요괴가 방 안으로 고개를 디밀었을 때는 젊은이도 가슴이 섬뜩했습니다. 하지만 그 젊은이가 누구입니까. 어려 고아가 되어 그 나이에 이르도록 세상 곳곳을 떠돌며 슬기와 담력을 길러 온 그가 아닙니까.
“네 이놈!”
젊은이는 틈을 주지 않고 요괴에게 냅다 호통부터 쳤습니다.
“너는 어떤 놈이관대, 머리가 겨우 둘뿐인 주제에 내 앞에서 이렇게 방자하게 구느냐? 이미 내가 여기 있거늘 어서 무릎을 꿇지 못할까!”
그러고는 두 무릎과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얼른 보기에는 세 개의 머리가 분노로 부르르 떨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걸 본 요괴는 그대로 장지문 밖 대청 마룻바닥에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어이쿠 잘못했습니다. 저보다 더한 분이 여기 와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이제 알았으면 됐다. 그럼 썩 물러나고 두 번 다시 나타나지 마라. 일후 네가 다시 이곳에 나타나 행패를 부릴 양이면 네 머리 둘을 모두 몸통에서 뜯어 놓으리라!”
젊은이는 그렇게 엄히 요괴를 꾸짖었습니다. 요괴가 연신 머리를 조아리면서도 억울한 듯 웅얼거렸습니다.
“저는 행패를 부리려고 이곳에 온 것이 아니옵니다. 하도 답답한 일이 있어…….”
요괴에게도 무언가 사정이 있어 보였지만 젊은이에게는 그것까지 들어줄 여유가 없었습니다. 밤이 길면 사나운 꿈도 긴 법이라, 공연히 요괴의 수작을 길게 듣다가 자신의 가장(假裝)이 탄로 나는게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시끄럽다. 어디서 요망한 혀를 함부로 놀리려 드느냐? 어서 썩 물러나지 못할까!”
젊은이가 더욱 소리를 높여 요괴를 내몰았습니다. 그러자 요괴는 못내 억울해하면서도 방을 나가더니 홀연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젊은이는 곧 병풍을 젖히고 그 뒤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아가씨를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부드러우면서도 믿음에 찬 어조로 그녀를 안심시켰습니다.
“사람이든 마물(魔物)이든 자신이 믿고 자랑하던 것을 잃게 되면 약해지는 법입니다. 이제 머리가 셋이나 되는 나를 본 저 요괴는 두 번 다시 여기를 오지 않을 터이니 마음 놓고 지내십시오.”
그날 밤이 이승에서의 마지막 밤이 될 줄 알았던 아가씨에게는 그런 젊은이가 고맙기 짝이 없었을 것입니다. 마음을 가다듬기 바쁘게 이마가 방바닥에 닿도록 절을 하며 수줍게 말했습니다.
“소녀,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실로 알 길이 없사옵니다. 엎드려 빌건대 무엇이든 제게 바라는 것이 있으면 말씀해 주옵소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결코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혼인해 함께 살자고 해도 어김없이 들어줄 것 같은 다소곳함이었습니다. 그녀의 아리따운 모습에 반해 있던 젊은이에게도 그러고 싶은 유혹이 얼핏 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젊은이는 모질게 마음을 다잡으며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앞세웠습니다.
“여기가 바로 땅끝은 아니라 해도 사람들의 세상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니 그만큼 하늘에는 가까운 곳일 듯합니다. 저는 일찍부터 바로 그 하늘에 이르려고 길을 떠난 사람입니다. 혹 아씨께서는 하늘로 가는 길에 대해 들으신 바가 없으신지요?”
그 말에 아가씨는 적이 실망한 눈빛으로 젊은이를 한동안이나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다가 그의 얼굴에서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을 마음을 읽었는지 가벼운 한숨과 함께 말해 주었습니다.
“여기가 땅끝이라고 잘못 알려져 그런지, 제 어린 날에도 이따금씩 하늘에 이르려는 길손들이 이 집에 묵은 적이 있었사옵니다. 그들이 하늘로 가는 길을 물을 때마다 아버님께서는 할아버님께서 들으신 대로 전해 주시곤 했사옵니다. 이 집 뒤로 펼쳐진 백 리 바람막이 숲을 지나면 다시 구만리(丸萬里)들이 나오는데, 그 들을 가로지르면 바로 땅끝이 나오고 거기에 한 선비가 살고 있다고 합니다. 열 수레 가득 책을 싣고 그 책에서 이르는 대로 하늘 길을 찾아 나선 이로, 제 할아버지가 아직 어리실 때 이 집 앞을 지나쳐 갔다고 하더군요. 그 뒤 들리는 풍문으로는 땅끝에 이른 그 선비가 거기에 자리 잡고 다시 50년 더 책을 읽었다고 하니 지금쯤은 하늘로 가는 길을 찾았을는지도 모르겠다는 말씀이셨습니다. 하지만 나그네들은 구만리 들을 다시 지나야 한다는 말에 질려 대개 여기서 발길을 돌렸고, 간혹 고집스레 떠난 사람이 있어도 만 리 길을 못 가 이리로 되돌아오고는 했지요. 길섶에서 햇볕을 쬐고 있는 백골들이 갈수록 늘어나는 것에 겁을 먹은 듯합니다.”
아가씨는 그러면서 다시 한 번 그 젊은이를 올려다보았는데 그 눈길에는, 그러니 여기서 저와 함께 머무시는 게 어떨는지요, 하는 뜻이 담겨 있었습니다. 오래 세상을 떠돌면서 이 일 저 일 다 겪은 젊은이가 어찌 그 눈치를 알아보지 못했겠습니까마는, 그는 더욱 매섭게 마음을 다져 먹고 말했습니다.
“저는 하늘에 이르러 옥황상제를 만나 뵙는 것을 평생의 소원으로 삼은 사람입니다. 이 몸 또한 하늘 길을 찾다가 이름 모를 길섶에서 흰 뼈를 햇볕에 쪼이게 되더라도 반드시 떠나야 합니다. 아가씨를 이렇게 외진 곳에 홀로 두고 떠나야 하는 게 정말로 가슴 아프지만 저는 내일 아침 날이 밝는 대로 땅끝에 사는 그 선비를 찾아 나서겠습니다. 길을 일러 주셔서 정발 고맙습니다.”
그러자 아가씨는 더 잡지 않고 젊은이에게 맛난 음식과 좋은 이부자리를 내주어 하룻밤을 편히 쉬게 해 주었습니다.
이튿날 날이 밝자 잠에서 깨난 젊은이는 봇짐을 꾸리기 시작했습니다. 아가씨는 그런 젊은이를 위해 정성들여 아침상을 차려냈습니다. 그런데 속을 든든히 채운 젊은이가 막 길을 떠나려 할 즈음이었습니다. 다소곳이 젊은이가 하는 양을 살피고만 있던 아가씨가 다시 한 번 쓸쓸한 한숨과 함께 말했습니다.
“이제 소녀는 의지가지없는 몸이 되었습니다. 하오나 만일 손님께서 옥황상제를 만나 뵈온 뒤에 이리로 되돌아오시겠다 약속해 주신다면 기다리는 보람으로 외롭지 않을 듯하읍니다. 약속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제가 감히 청하지는 못했지만 참으로 바라던 바였습니다. 아씨께서 기다려 주시겠다면 뜻을 이룬 뒤에는 반드시 이곳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젊은이는 기꺼이 그렇게 약속했습니다. 그러자 아가씨가 덧불였습니다.
“다행히 하늘에 이르시어 옥황상제를 만나 뵙게 되거든 제 것도 함께 물어 주옵소서. 먼저 그 요괴가 어디서 왔으며 왜 우리 식구들을 해쳤는지를 물어 주시고, 다음에는 소녀가 앞으로 누구와 혼인해 살아야 할지를 물어 주옵소서.”
“그러지요. 제 궁금함을 푼 뒤에는 반드시 그것도 알아 드리겠습니다.”
젊은이는 그렇게 대답하고 마음속에 괴어 오는 아쉬움을 떨쳐버리려는 듯 힘찬 걸음으로 땅끝을 향해 떠났습니다.
그 집 뒤 언덕에서 시작되는 백 리 바람막이 숲을 지나니 과연 아가씨가 말한 대로 한 넓은 들판이 나왔습니다. 이름 그대로 구만리가 될 듯 아득하게 펼쳐진 들판인데 그 저편에는 정말로 하늘이 내려앉아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제야 젊은이는 간밤 묵은 집을 세운 이가 왜 그곳에다 터를 잡았는지 알 만했습니다. 땅끝이라고 믿고 찾아온 곳에서 다시 구만리 벌이 시작되는 것을 보고 낙담해서 더 나아가기를 포기한 것이겠지요. 그리고 차라리 백 리 바람막이 숲 이쪽에다 집을 얽고 주저앉은 것임에 틀림없었습니다.
젊은이도 처음 한동안은 그 아득하게 펼쳐진 들판을 보고 망설였습니다. 자신에게 아직 그 들판을 가로지를 만한 힘과 세월이 남은 것인지, 그리고 요행 그 들판을 가로지른다 해도 그 선비가 정말로 하늘로 가는 길을 알고 있을지가 새삼 못 미더워진 까닭이었습니다. 나중에는 이제라도 돌아가 그 아가씨에게 청혼을 하고 그녀의 조상처럼 그곳에 적당히 주저앉아 버릴까 하는 마음까지 일었습니다.
하지만 오래 세상을 떠돌면서 길러진 그의 슬기는 또한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붙인 이름과 사물의 실질이 반드시 함께하지는 않음을, 이름은 종종 비유나 상징이며, 그것은 또 과장되기 십상(十常)임을. 그리하여 세상이 이름한 구만리도 실은 흔치 않게 넓다는 뜻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음을.
거기다가 오래 걷기에 단련된 두 다리와 외로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가슴도 나아가는 쪽을 편들어 마침내 젊은이는 구만리 벌로 들어서고 말았습니다. 새로운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다시 여러 번 달과 해가 흘러갔습니다. 하지만 그의 젊음이 다 가 버릴 만큼 긴 세월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진작에 알아본 것처럼 그 들을 가로지르는 거리가 정말로 구만 리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어느새 가슴속의 님처럼 된 그 아가씨가 일러 준 선비의 오두막은 젊은이가 그 들판을 다 가로질러 갈 무렵부터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젊은이가 막상 그 집 부근에 이른 것은 그다음 날 해 질 무렵이었습니다. 지평선 저 끝에 오두막 한 채가 노을에 비껴 서 있는 모습은 그 자체가 이미 땅보다는 하늘에 속한 듯 보였습니다.
젊은이는 지친 발길을 재촉해 오두막으로 달려갔습니다. 땅거미가 질 무렵 해서야 겨우 이르러 보니 돌담이 둘러쳐진 오두막 안에서는 전혀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집 안에서 나는 야릇한 냄새가 젊은이의 코를 찔러 올 뿐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것은 오래된 책에 핀 곰팡이와 더께 앉은 면지, 그리고 책장에 밴 손때가 어우러져 풍기는 냄새였습니다.
“주인 계십니까?”
집 안으로 들기 전에 젊은이는 먼저 예절을 갖춰 주인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두 번 세 번 불러도 안에서는 전혀 대답이 없었습니다. 젊은이는 집주인이 어디 나들이라도 간 것으로 알고 문 앞에서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오래잖아 날은 저물고 밖이 어두워졌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바깥이 어두워지자 창문이 점점 훤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누군가 집 안에 불을 밝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몇 시간이나 밖에서 기다린 게 짜증이 났지만 젊은이는 다시 공손하게 목소리를 가다듬어 소리쳐 보았습니다.
“주인 계십니까?”
그러나 집 안에서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습니다. 몇 번이고 되풀이 소리쳐도 대답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무언가 예사 아닌 일이 집 안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한 젊은이는 마침내 주인의 허락을 기다리지 않고 집 안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오두막 안은 바닥이고 벽이고 온통 책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책들 사이로 간신히 사람 하나가 드나들 수 있는 길이 나 있는데 불빛은 바로 그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젊은이는 그 불빛을 따라 더욱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윽고 좀 트인 곳이 나오고 천장에 매달린 등불이 보였습니다. 그 등불 아래 머리가 하얗게 센 늙은이 하나가 앉아 무릎 앞에 놓인 서안(書案) 위의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어찌나 몰두해 읽고 있는지 책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것 같았습니다. 아가씨가 일러 준 그 선비임에 틀림없었습니다.
“어리석고 배운 것 없는 것이 감히 문안드리옵니다.”
젊은이는 그런 선비의 코앞에 넙죽 엎드려 절을 올리며 짐짓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제야 선비도 읽던 책에서 눈길을 떼어 젊은이를 바라보며 성가신 듯 물었습니다.
“그대는 누구인가?”
“저는 세상 저편에서 하찮게 살던 자로서 먼 길을 걷고 걸어…….”
“말이란 뜻을 담는 연장이니, 감정을 꾸미는 데 너무 허비하지 않도록 하게. 그대는 무엇 때문에 나를 찾아왔는가?”
그렇게 되고 보니 젊은이도 말이 간결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늘 길을 여쭤보러 왔습니다.”
“하늘 길?”
“하늘로 가는 길 말입니다. 말이 뜻을 담는 그릇이라면 뜻 안 담긴 말은 없을 것입니다. 하늘 길이란 말이 있다면 그게 뜻하는 실질도 있겠지요.”
“그렇겠지. 그런데 그 하늘 길을 어째서 내게 물으러 왔는가?”
“어르신께서는 열 수레의 책을 싣고 이곳 땅끝에 이르시어 다시 오십 년이나 그 책을 읽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많은 책들 중에는 하늘로 가는 길을 일러 주는 책도 있을 법해서…….”
그제야 그 늙은 선비는 무슨 깨우침이나 받은 듯 황급히 대답했습니다.
“암. 있지. 있고말고. 책을 읽으면 모든 걸 알 수 있지.”
그렇게 대답하는 그의 눈길에는 그때까지 보이지 않던 빛과 열기가 실리기 시작했습니다. 젊은이도 새삼 희망이 솟아 성급히 물었습니다.
“그럼 제게 그 하늘 길을 좀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자 늙은 선비는 갑자기 성난 표정으로 소리쳐 꾸짖었습니다.
“이 염치없는 젊은것아. 나는 책을 읽는 법과 여기 이 책들을 보모는 데만 30년이 걸렸다. 그다음에 이 책들을 수레에 싣고 땅끝이라는 소문이 난 이곳에 이르는 데 다시 20년이 걸렸다. 거기다가 오십 년을 더 써서 이 모든 책들을 읽고 겨우 찾아낸 하늘 길을 하룻 저녁에 모두 일러 달란 말이냐?”
그 말에 젊은이도 부끄러워졌습니다. 그 자리에 넙죽 엎드리며 간절하고 구슬프게 빌었습니다.
“한을 쌓아 딛고 하늘에 오를 수 있다면 이 한 몸이 지고 있는 한만으로도 넉넉히 하늘에 오를 수 있을 만큼 서럽고 고단하게 살아온 몸입니다. 어려서 홀몸이 되어 길을 떠난 뒤 세상을 떠돈 지 하마 10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그 모두가 제 크나큰 한을 풀어 줄 하늘에 이르기 위함이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해서 은혜를 갚을 터이니 부디 하늘 길을 좀 일러 주십시오.”
그래도 늙은 선비는 차갑게 굳은 얼굴을 풀지 않았습니다. 그 바람에 젊은이는 한동안이나 더 그 앞에 엎드려 빌기를 거듭해야 했습니다. 젊은이의 간곡한 바람과 정성이 헛되지 않아 이윽고 늙은 선비가 말했습니다.
“네 정성이 갸륵해 차마 내치지 못하겠구나. 그럼 거기 앉거라.”
그러고는 집 안 구석구석을 뒤지듯 해 한 아름의 책을 안고 다시 젊은이 앞에 앉았습니다.
“땅의 한가운데를 찾아가면 끝이 보이지 않는 기둥 하나가 서 있을 것이다. 그 기둥 곁에 하늘칡〔天葛〕 뿌리를 구해 심으면, 칡은 기둥을 따라 자라 올라가 그 순(苟)이 하늘에 닿게 된다. 그때 그 칡넝쿨을 타고 오르면 마침내 하늘에 이르리라…….”
늙은 선비가 먼저 책 한 권을 펴서 읽었습니다. 젊은이가 조심스레 물었습니다.
“땅의 한가운데는 어딥니까? 하늘칡 뿌리는 어디서 구하지요?”
그러자 늙은 선비가 왠지 성난 눈길이 되어 젊은이를 쏘아보다가 아무런 대꾸 없이 다른 책을 펼쳤습니다.
“멀리 북쪽 바닷가에 가면 한 마리 큰 봉새〔大鵬〕가 산다. 날개 길이가 수천 리, 한 번 솟으면 구만 리를 난다. 그 새를 만나 등을 빌리면 며칠 안 걸려 하늘에 이를 것이다.”
“그 바닷가는 북쪽으로 얼마를 가야 있으며, 그 새는 또 정말로 거기 살고 있습니까?”
젊은이가 다시 그렇게 묻자 늙은 선비는 버럭 화를 냈습니다.
“책이란 참된 지식이 적힌 것이다. 책에 그렇게 쓰여 있는데 왜 그리 의심이 많으냐?”
그러면서 이어 비슷한 책들을 뒤적였습니다. 늙은 선비의 기세에 놀린 젊은이는 한동안 더 그가 읽는 구절들에 귀를 기울여야 했습니다.
“서쪽 사막으로 가면 삼천 년마다 한 번씩 이는 큰 회오리가 있는데, 그때 서는 모래 기둥을 타면 하늘에 이를 수 있으리라…….”
“모든 산들의 어버이 되는 산 가장 높은 봉우리에 이르면 때로 하늘에서 동아줄이 드리워지니…….”
늙은 선비가 읽어 가는 구절들은 매양 그런 것들이었습니다. 그대로 두면 밤이라도 새울 기세였습니다. 젊은이가 참다 못해 다시 조심스레 입을 열었습니다.
“어르신, 죄스럽지만 그건 제가 찾고 있는 하늘 길이 아닌 듯합니다. 어디가 그 서쪽 사막이며 어떻게 모든 산들의 어버이 되는 산을 찾을 수 있을지도 막막하거니와, 설령 찾아간다 해도 이 짧은 목숨으로는 그 회오리와 동아줄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제가 찾는 것은 제 발로 걸어 이 목숨이 다하기 전에 하늘에 이를 수 있는 길입니다.”
그러자 늙은 선비는 못마땅한 눈길로 젊은이를 흘긴 뒤에 책을 덮고 몸을 일으켰습니다.
“네놈도 손에 쥐어 주듯 뚜렷한 형상과 헤아리고 잴 수 있는 숫자만을 높이고 섬기는 부류로구나. 하지만 그것도 있지. 책에는 없는 것이 없다.”
그리고 그때껏 읽던 책들을 한곳으로 밀쳐 놓은 뒤 다시 집 안을 뒤져 또 한 아름의 책을 안고 왔습니다. 이번 것들은 전과 달리,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장소와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조차 모르는 우연이 끼어들지 않은 길 안내였습니다.
“추분(秋分) 날 샛별이 정동(正東)으로 보이는 점에서 서쪽으로 3955리(里) 를 간 뒤에 몸을 한 바퀴 반 돌려서 다시 7242리를 더 가라. 거기서 무게 일곱 근(斤) 반 되는 쇠 신(鐵履〕을 신고 남남서(南南西)로 구 년 아홉 달 아홉 시간을 간 뒤에 북쪽과 동쪽 사이를 여덟 조각으로 내어 그 세 번째 금을 따라 6425리를 가 다시 왼편으로 돌아서면…….” 하는 식이었는데, 어떤 책은 아예 그림과 숫자로 하늘 길을 표시하고 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듣는 젊은이를 어렵게 하는 일은 그렇게 해서 하늘에 이르는 길이 하나둘이 아니라는 데 있었습니다. 늙은 선비가 한 아름 뽑아 온 책이 저마다 다른 길을 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기다가 더욱 알 수 없는 것은 저마다 자신이 말한 길이 하늘로 가는 가장 바르고 가까운 길이라고 우기는 일이었습니다.
그사이 밤은 깊어 자정이 지나고 어느덧 새벽이 가까워 왔습니다. 자신이 그토록 많은 길을 알려 줄 수 있다는 것에 취했는지 늙은 선비는 벌써 수십 가지의 길을 들려주고도 거듭거듭 새 책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젊은이는 갈수록 마음이 어둡고 무거워졌습니다. 늙은 선비가 백 가지도 넘는 하늘 길을 모두 읽어 준 것은 날이 휘붐하게 밝아 올 무렵이었습니다. 젊은이는 그토록 많은 지식을 익힐 동안에 그 늙은 선비가 바쳐야 했을 노고와 그것을 전하면서 보여 준 열정에 눌려 끝까지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늙은 선비가 마지막 책장을 덮는 결 보고서야 힘없이 물었습니다.
“너무 많은 것은 없는 것과 같고, 지나치게 아는 것은 모르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르신께서는 밤새워 제게 하늘로 가는 길을 숱하게 일러 주셨지만 제게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바와 다름이 없습니다. 결국 하늘은 어느 길로 가야 이를 수 있습니까? 제가 한없이 오래 살 수 있다면 그 여러 갈래의 길을 하나하나 걸어 보아 옳고 그름을 따져 볼 수도 있겠지만, 길어야 백 년도 안 되는 이 목숨으로는 그 여럿 중에 하나도 끝을 보기 어려울 듯합니다. 그중에서 어떤 게 참으로 하늘에 이를 수 있는 길인지요?”
그러자 그 늙은 선비가 버럭 화를 내며 소리 높여 꾸짖었습니다.
“야 이 한심하고 무지한 것아. 내가 그걸 안다면 여기서 이렇게 너를 기다리고 있었을 성싶으냐? 내가 먼저 그 하늘로 떠났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르신도 하늘 길은 전혀 모르시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제가 세상 온갖 길을 떠돌며 하늘 길을 찾는 동안 어르신은 책 속에서 헤매고 계셨을 뿐입니다.”
이번에는 젊은이도 물러나지 않고 그렇게 맞받다가 늙은 선비의 눈을 쳐다보고 흠칫했습니다. 거기서 쏟아지는 예사 아닌 빛과 열 때문이었습니다. 그게 무시무시한 창날이 되어 금세라도 젊은이의 가슴에 와 박힐 듯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습니다. 갑자기 늙은 선비의 눈길에서 빛과 열기가 스러지고 대신 쓸쓸하고 처량한 느낌이 떠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그랬을는지도 모르지. 제멋과 흥에 겨워 전해 오는 말만 믿고…….”
이윽고 쓰라린 탄식처럼 그렇게 중얼거린 늙은 선비는 다시 긴 한숨과 함께 덧붙였습니다.
“그렇지만 이토록 오래 읽고 외고 궁리한 것이 한낱 헤맴에 지나지 않았단 말이냐…….”
금세라도 흐느낌이 이어질 것 같은 목소리였습니다. 그리고 훤히 밝아 오는 창문을 망연히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그새 몇 십 년이나 더 늙어 버린 듯 보였습니다. 그 모습에 너무도 가슴 아파 젊은이가 황급히 위로했습니다.
“그렇지는 않을 것 입니다. 어르신께서는 이미 저잣거리에서 부대끼며 생각 없이 사는 사람들보다는 훨씬 더 하늘 가까이 계십니다. 아마도 곧 길을 찾아 하늘에 이르시겠지요.”
하지만 늙은 선비에게는 전혀 위로가 되지 못한 듯했습니다. 젊은이의 말이 들리지조차 않는 듯 넋을 놓고 밝아 오는 창틀만 올려볼 뿐이었습니다.
오래잖아 날이 환히 밝아 왔습니다. 더는 무어라 위로할 말을 찾지 못해 망연히 앉아 있던 젊은이가 가만히 몸을 추스리고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젊은이가 벗어 두었던 괴나리봇짐을 다시 맬 때까지도 늙은 선비는 깎은 듯 꼼짝 않고 앉아 있었습니다.
“어르신, 이제 날이 밝았으니 저는 이만 떠나 보았으면 합니다.”
젊은이가 깊숙이 머리를 조아리며 그렇게 작별 인사를 올리고 나서야 늙은 선비가 힘 없는 눈길을 그에게로 돌리며 물었습니다.
“어디로 가려는가?”
“여기까지 왔으니 내처 앞으로 더 나아가 볼 생각입니다.”
“이 문을 나가면 ‘얼마나 먼지 알지 못할[不知何遠]’ 벌판이 가로막을 텐데……. ‘알지 못할’이란 그 넓이를 알 수 없다는 뜻이고…….”
“그렇지만 어쩌겠습니까? 어르신처럼 지식을 키우지 못했다면 믿음이라도 가져야겠지요. 그 벌판의 끝이 어딘지 모른다 해도 떠나온 저잣거리에서 본다면 내가 온 만큼은 그 끝에 더 가까워지지 않았겠습니까? 그렇게 믿고 떠나 보겠습니다.”
젊은이는 그 말과 함께 결연히 돌아섰습니다. 늙은 선비의 한숨 섞인 한마디가 배웅을 대신했습니다.
“나도 함께 떠나고 싶구나. 하지만 이렇게 몸은 늙고 마음은 시들어 버렸으니……. 잘 가게.”
그런데 젊은이가 미처 오두막을 벗어나기도 전이었습니다. 갑자기 방 안에서 늙은 선비의 다급한 목소리가 그를 불러 세웠습니다.
“젊은이, 잠깐만……. 일러 줄 말이 있네.”
“무슨 말씀이신지요?”
젊은이가 걸음을 멈추고 어두운 방 안을 돌아보며 물었습니다.
“옛날에 들을 때는 비웃기만 했지만…… 어쩌면 젊은이에게는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 하나 있다네.”
“그게 무슨 일인지요?”
“이 오두막은 실은 내가 얽은 게 아니네. 50년 전 내가 이곳을 땅끝이라 믿고 열 수레의 책과 함께 이르러 보니 벌써 이 집이 지어져 있고,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지. 악사(樂士)와 환쟁이와 광대에 시인이니 뭐니 하는 시끄러운 사람들이었는데, 내가 이르렀을 무렵 그들은 짐을 싸고 있었네. 그들도 자네나 나처럼 하늘을 찾아 떠돌다가 여기가 땅끝이란 말을 듣고 구만리 들을 건너왔다고 했네. 그리고 여기까지 오는데 너무 지쳐 잠시 이 오두막을 얽고 머물렀지만 이제 넉넉히 쉬어 다시 이 앞 ‘알지 못할’ 벌을 건너 볼 작정이라는 거야. 뭐, 가슴에 바로 닿아 오는 신령스러운 느낌〔靈感〕이 그 벌만 건너면 땅이 끝나고 하늘이 열린다고 말해 주었다나. 그리고 하늘을 향한 뜨거운 정〔熱情〕 이 자신들을 그곳으로 이끌어 갈 것이라나, 어쨌다나…….”
“…….”
“그때만 해도 나는 이 책들 속에 하늘 길이 있다고 굳게 믿고 있던 때라 그들이 하는 말이 같잖고 허황하게만 들렸네. 거기다가 그들은 무엇인가에 취해 있었어. 그들은 신령스러운 느낌이니 뜨거운 정이니, 하고 거창하게 말했지만 내가 보기에 그들을 내몰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취해 있음 같았네. 생각해 보게. 스스로를 다그치고 다그쳐 깨어 있어도 찾기 어려운 것이 하늘 길 아닌가. 그런데 그렇게 취해 비틀거리면서 하늘 길을 찾겠다고 큰소리치니……. 그래도
오두막을 비워 주는 것이 고마워 나는 건성으로 웃으며 그들을 보냈네. 뿐만 아니라 그 뒤 그들이 되돌아오지 않은 걸 보고는 당연하다고 여겼지. 헛된 꿈을 쫓다가 저 아득한 들판 어딘가에서 괴롭게 죽어 갔거니 하고. 그런데 이제 자네를 만나고 보니 문득 다른 생각이 드네. 혹시 아는가, 하늘 길을 찾는 데는 그들처럼 취해 있는 게 더 나을지. 책에서 얻은 지식보다 그들이 말한 직관과 영감이 더 쓸모 있을지, 그래서 그들이 정말로 그 길을 찾았을는지…….”
“내가 가려는 곳에 아무도 없는 것보다 누군가 앞서간 사람들이 있다는 건 반가운 일입니다. 반드시 그들의 자취를 살피며 걷도록 하겠습니다.”
젊은이는 그 말과 함께 고마움을 나타내는 뜻으로 머리를 숙였습니다. 그리고 오두막을 벗어나려는데 늙은 선비의 말이 다시 뒤따라 왔습니다.
“그리고 ― 또 하나 부탁이 있네. 그들을 만나서건 아니건…… 만약 자네가 하늘 길을 찾아 하늘에 오르거든 옥황상제께 물어 주게. 나는 왜 이토록 오래 힘들여 읽었건만 하늘에는 닿을 수 없는 것인지. 어떻게 하면 나도 하늘 길을 찾을 수 있는지.”
젊은이가 오두막을 벗어나자 늙은 선비의 말처럼 새로운 벌판이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전날 이미 땅거미가 질 때에 이르러 미처 살펴보지 못한 벌판인데, 한눈에 보기에도 구만리 들보다 훨씬 더 아득한 게 왜 ‘알지 못할’이란 이름이 붙었는지 짐작할 만했습니다.
그렇지만 헤맴도 갈수록 익숙해지는 걸까요, 젊은이는 씩씩하게 길을 떠났습니다. 전처럼 마음에 둔 아가씨가 없어 더욱 떠나기 쉬웠는지도 모르지요. 그들이 뜻을 이루었는지는 모르지만 앞서 그 길을 간 사람이 있다는 것도 적지 아니 마음에 북돋움이 되었습니다.
‘알지 못할’ 벌은 이름 그대로 알지 못할 벌판이었습니다. 넓이가 얼마인지뿐만 아니라 생김이며 성질도 그때까지의 경험으로는 전혀 가늠이 서지 않았습니다. 한없이 풀밭이 펼쳐지는가 하면 문득 우거진 숲이 다가들기도 하고 질퍽한 늪이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거친 모래와 돌밭이 있는가 하면 민둥산이 이어지고 다시 바위벽이 가로막기도 하는 게 세상 모든 길에서 만난 것들을 모두 이어둔 듯했습니다.
그런 길을 몇 날 몇 달 몇 년이나 더 갔을까요, 갑자기 젊은이 앞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광경이 떠올랐습니다. 벌판 저쪽으로 땅끝이 아니라 거대한 산이 멀리 희미하게 자태를 드러낸 것입니다.
처음 젊은이는 헛것을 본 게 아닌가 의심했습니다. 하지만 다가갈수록 산은 뚜렷해졌습니다. 흰 눈을 이고 있는 그 봉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높다는 곤륜산(崑崙山)의 그 어떤 봉우리보다 더 높이 솟아 있었는데 그나마 맨 꼭대기는 구름에 싸여 보이지 않았습니다.
땅끝만 바라고 길을 뗘난 젊은이는 갑자기 높디높은 산이 가로막자 적이 실망했습니다. 사람이란 얼마나 쉽게 근거 없는 단정에 빠져드는 것인지요. 어느새 땅끝이라는 말에 얽매이게 된 그에게 산봉우리는 땅끝이 아닌 것으로 여겨진 까닭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랜 헤맴으로 자란 슬기는 곧 젊은이를 쓸데없는 얽매임에서 풀어 주었습니다. 자신이 이르려 하는 것은 하늘이고, 그 하늘에 이르는 데는 산도 땅끝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돌이켜 보면 지난날에도 그는 몇 번인가 하늘에 닿아 있는 듯 보이는 높은 봉우리를 올랐던 적이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이제 바라보고 있는 봉우리는 그 끝이 구름에 싸여 있어 정말로 하늘에 닿아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힘을 얻은 젊은이는 이제는 그 산을 목표로 더욱 열심히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다시 몇 날 몇 달이 흘렀습니다. 가까워질수록 산봉우리는 하늘 높은 곳으로 사라지고 폭과 높이를 알 수 없는 산맥의 자락만 아뜩하게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원래가 너무 높고 큰 것은 가까이서 볼 수 없는 법이지요.
젊은이가 앞서 그리로 떠났다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된 것은 그 산맥 자락마저 사라지고 수많은 작은 골짜기와 산줄기만 눈앞에 가로놓이게 된 때였습니다. 오는 동안 내내 자취를 찾을 수 없었던 그들이 그 골짜기나 산비탈 어디에 자리 잠았을 것 같은 느낌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어디로 들었는지는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습니다.
거기서 한동안의 망설임과 두리번거림이 있었습니다. 무턱 대고 산을 오르느니보다는 누군가 먼저 온 사람에게서 듣고 길을 알아 오르는 게 나을 것 같아서였습니다. 그래서 이 골짜기 저 산비탈을 천천히 살피며 사람이 든 흔적을 찾고 있는데 갑자기 젊은이의 귓속으로 흘러드는 가락이 있었습니다.
젊은이는 이끌리듯 그 가락을 따라 걸음을 옮겼습니다. 작은 산자락을 도니 한군데 아늑한 골짜기가 열리고 대여섯 채 오두막이 나타났습니다. 가락은 그 오두막 중 한곳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오두막을 찾은 젊은이는 늘 그래 왔듯 주인을 부르려고 목청을 가다듬다가 갑자기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집 안에서 흘러나오는 그 가락 때문이었습니다. 결 바르고 울림 좋은 나무와 팽팽하게 당겨 묶은 줄이 어울려 빚어낸 듯한데 기쁨과 성냄 슬픔과 즐거움이 고루 어우러져 있으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게 도무지 이 세상의 가락 같지가 않았습니다.
자기 때문에 그 가락이 끝날까 두려워 집 앞에 멈춰 선 젊은이는 차츰 그 가락에 빠져들었습니다. 나중에는 자신이 무엇 때문에 거기 와 서 있는지조차 잊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취한 듯 어린 듯 서 있기 얼마 만이었을까요. 이윽고 가락이 끝나며 집 안에서 조용히 물어 오는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거기 누구요? 누가 오셨소?”
그제야 깊은 잠에서 깨나듯 퍼뜩 정신을 차린 젊은이가 황급히 대답했습니다.
“지나가던 나그네이옵니다. 주인어른께 여쭤볼 게 있어서…….”
“나그네라…… 이 멀고 외진 곳에 나그네라.”
그러더니 방문이 열리며 한 늙은이가 나타났습니다. 걸친 것은 낡고 해진 저잣거리 악사들의 옷이었지만 풍기는 기품은 조금 전의 가락만큼이나 이 세상 사람들의 그것과는 멀어 보였습니다.
“들어오시오. 내게 물어볼 게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내 집에 찾아온 손님이니…….”
집주인이 그렇게 권해 와 젊은이는 방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바깥에서 상상하기와는 달리 방 안은 검소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몇 가지 물건들이 없는 듯 윗목 구석으로 밀려나 있고 방 한가운데는 방금 켰던 악기만이 덩그렇게 자리 잡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휘고 깎은 나무에 홈을 파 공명통(共鳴桶)을 만들고, 짐승의 질긴 힘줄이거나 누에고치에서 뽑은 실을 꼬아 만든 줄을 드리운 악기였는데, 나무로 된 부분은 주인의 손때로 검게 번들거리고 있었습니다.
“워낙 외진 곳에 가진 것 없이 사는 몸이라 손님이 와도 변변히 대접할 게 없구려. 그래, 이 늙은이에게 물으시려는 게 무엇이오?”
“하늘 길을 묻고 싶어서 왔습니다.”
젊은이가 바로 알고 싶은 것을 밝혔습니다.
“하늘 길이라…….”
그렇게 중얼거리며 젊은이를 바라보는 늙은 집주인의 눈길에는 왠지 빈정거리는 듯한 기색이 비쳤습니다. 젊은이가 얼른 덧붙였습니다.
“혹시 어르신께서는 50년 전 하늘 길을 찾아 저기 알지 못할 벌판을 건너신 분들 중에 한 분이 아니신지요?”
“그랬지. 그런 일이 있소. 하지만 아직도 그때 우리들처럼 하늘 길을 찾아 떠도는 이가 있단 말이오?”
늙은이가 힘없이 웃으며 그렇게 받았습니다. 하지만 젊은이는 그 웃음이 무엇인가를 찾아낸 사람의 여유 같아서 조바심치며 물었습니다.
“그럼 어르신께서는 하늘 길을 찾으셨습니까? 벌써 하늘을 다녀오신 것입니까?”
그러자 늙은이의 눈길이 더욱 심술궂게 변하더니 자르듯 말했습니다.
“하늘 길 같은 것은 없소.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났을 때 이미 하늘 길은 막혀버린 거요.”
“그럼 하늘 길이란 말은 왜 있고, 옥황상제라든가 하늘에 관한 이야기는 왜 사람들 사이를 떠도는 겁니까? 아무도 가 보지 않았다면 어째서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다 지어낸 이야기요. 없기 때문에 더 찾고 싶어 하고, 모르기 때문에 더 얘기하고 싶어지는 인간의 습성이 꾸며 낸…….”
“그럼 어르신은 하늘에 이를 꿈을 그예 버리신 겁니까?”
“그렇지는 않소. 다만 우리가 이르는 대신 하늘을 이 땅 위로 불러내리기로 했을 뿐이오.”
“네? 무어라구요? 하늘을 땅 위로 불러 내리타니요?”
젊은이가 놀란 얼굴로 그렇게 묻자 늙은 집주인은 언뜻 회상에 젖는 낯빛이더니 이내 무엇이든 다 털어놓겠다는 투가 되어 대답했습니다.
“젊은 손님이 여기까지 온 걸 보니 알지 못할 들판 저쪽 우리가 버리고 온 오두막과 거기 자리 잡은 서생(書生)을 거친 듯하오. 돌이켜 보면 그때가 그립기도 하구려. 그때 우리는 이번에는 문제없이 하늘 길을 찾으리라는 믿음으로 길을 떠났소. 알지 못할 벌판을 가로지르다가 처음 이 산을 보았을 때도 실망하지 않았지. 구름에 싸여 있기는 해도 그 봉우리를 가늠할 수는 있었기 때문이오.
하지만 가까워지면서 우리는 점점 혼란스러워졌고, 여기 이르고 나서는 그저 막막한 느낌뿐이었소. 젊은 손님은 이 산 이름이 무엇인지 아시오? 산새도 구름도 그 꼭대기를 보지 못해 이름조차 높이 모를〔不知何高〕 산이라 불린다 하오. 우리도 이름이 종종 과장된 실질임은 알고 있었고, 또 거기에 홀리지 않았기에 여기까지 이르렀을 것이오. 그런데 이 높이 모를 산에 이르고부터는 어찌 된 셈인지 더 나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소. 여기까지는 용케 왔지만 그동안 거리와 싸우느라 너무 많은 것을 써 버려 다시 높이와 싸울 힘이 남지 않은 탓인지도 모르겠소.
거기다가 더욱 고약한 일은 우리에게 돌아갈 힘도 남아 있지 않다는 거였소. 젊은 손님도 여기까지 온 걸로 미루어 아시리라 믿지만, 우리가 떠나온 사람들의 저잣거리 또한 얼마나 먼 곳이오? 그래서 우리는 이 골짜기에 자리 잡고 우리가 하늘로 오르는 대신 하늘을 이곳으로 불러 내리기로 했소. 처음에는 좀 억지스럽다 싶었는데 우리 모두 각자가 평생 닦은 재주에 정성을 더하니 아니 되는 일도 아니었소. 신기하게도 우리가 온 힘을 들여 애타게 하늘을 부르면 어김없이 그 한 자락은 이 골짜기에 드리워지는 거요. 요즘은 우리가 하늘로 오르겠다는 어림없는 꿈을 꾸던 시절을 돌아보며 스스로를 비웃을 때도 있다오.”
“그럼 정말로 하늘을 이리로 불러 내릴 수 있단 말입니까? 그 하늘은 어떻던가요?”
젊은이가 화들짝 놀라며 다급히 물었습니다. 늙은 집주인은 오히려 느긋해져 대답했습니다.
“젊은 손님께서는 이미 그 하늘을 들었소.”
“하늘을 듣는다구요? 그럼, 조금 전 제가 들은 그 가락……?”
“그렇소. 그게 바로 내가 가진 연장으로 불러 내릴 수 있는 하늘이오.”
그 말에 젊은이의 가슴에도 빠르고 세찬 빛처럼 스쳐 가는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늙은 집주인의 말을 그대로 기꺼이 받아들일 만한 깨달음은 아니었습니다.
“조금 전 어르신께서 켜신 가락에서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그 무엇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게 바로 하늘인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건 내가 아직 인간의 다섯 가지 욕심과 일곱 가지 정(情)이 닿아 있는 야트막한 하늘 자락을 불러 내렸기 때문이었을 것이오. 손님이 원한다면 보다 더 높이 있는 하늘을 들려줄 수도 있소.”
그러면서 늙은이가 자신의 악기를 끌어당겼습니다. 두어 번 줄을 고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새 가락이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젊은이에게는 처음 들어 보는 가락이었습니다. 아름답다는 점에서는 좀 전의 가락이나 다름없었지만 마음을 움직이는 것들은 전혀 내용을 달리했습니다. 굳이 말로 드러내자면, 이 세상의 것이 아니어서 더욱 그립고, 닿을 수 없어 거룩하며, 잠을 수 없어 더욱 참되고, 맞선 것이 없어 더욱 착한 그 무엇들이었지요. 그것들이 소리의 높낮이와 길고 짧음, 그리고 울림의 빛깔이 어울려 자아내는 가락에 실려 낯설고 황홀한 세계를 펄쳐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눈감은 채 듣고 있는 젊은이는 그게 바로 하늘이라고 여겼습니다. 하늘 한 자락이 음악에 실려 이 땅으로 내려앉았다고 믿었습니다. 머지않아 옥황상제도 그곳에 이르고 시중드는 하늘의 관리들도 뒤따를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끝내 그렇지는 못했습니다. 오래잖아 가락은 끝나고 깨난 젊은이의 눈에 들어온 것은 좀 전과 다름없는 이 세상이었습니다. 여전히 초라한 오두막 방이 있었고, 늙음과 죽음의 어두움이 드리운 집주인의 헐벗은 삶이 있었습니다.
그 한 곡에 있는 힘을 다 쏟은 탓인지 땀에 젖은 집주인의 얼굴에는 탈진의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그렇지만 숨을 헐떡이면서도 그는 자랑스레 묻기를 잊지 않았습니다.
“어땠소? 방금 이 방 안으로 내려온 것은 하늘이 아니었소?”
젊은이는 그 물음에 얼른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좀 전의 감동이 되살아나 무턱대고 고개를 저을 수만은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젊은이는 곧 숨결을 골라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메아리나 그림자였을지는 몰라도 하늘은 아니었습니다. 그나마 잠시 귓전에 머물다가 사라진…….”
“그게 우리의 하늘이오. 시간에 묶여 있는 목숨과 거리에 갇혀 있는 몸을 가진 사람이 이를 수 있는 하늘 말이오.”
그 말이 너무나 절실해서인지 젊은이의 가슴에서 까닭 모를 슬픔이 일었습니다. 그러나 연약한 감상에 젖어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하늘은 제가 이르고자 하는 하늘이 아닙니다. 저는 실질이 있는 하늘, 그래서 저와 더불어 무엇인가를 주고받을 수 있는 하늘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특히 이 세상을 다스리는 옥황상제와 그를 따르는 관리들이 있는 그 하늘 말입니다.”
젊은이는 미안해하면서도 또럿하게 자신이 찾는 하늘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늙은 집주인은 젊은이의 말을 온전히 알아듣지는 못한 것 같았습니다.
“실질이 있는 하늘이라면 볼 수 있는 하늘, 만지고 살로 느낄 수 있는 하늘을 말하는 것이오? 듣는 하늘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다음 오두막으로 가 보시오. 우리가 불러 내린 하늘 중에는 보고 만질 수 있는 하늘도 있소.”
영문 모르게 자신을 되찾아 그렇게 말하고 앞장서 방을 나갔습니다. 그리고 마당에서 골짜기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저리로 가 보시오. 어쩌면 저 집주인이 불러 내린 하늘은 젊은 길손을 실망시키지 않을지도 모르겠소.”
젊은이는 집주인이 자신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음을 알면서도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다음 오두막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 오두막의 주인은 지나온 오두막의 주인만큼이나 늙은 화가였는데, 종이 위에 붓과 물감을 써서 하늘을 불러 내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색(色)과 선(線)으로 된 하늘에 대한 믿음과 자부(自負)는 저번 오두막 주인에 못지않았습니다. 젊은이도 처음 한 동안은 그 하늘이 볼 수 있고, 이내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는데 빠져들었습니다.
하지만 오래 머물 수 없기는 늙은 악사의 하늘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저 느끼고 빠져 있을 뿐 자신은 한 발짝도 다가갈 수 없고, 하늘도 그저 거기 있을 뿐 자신에게 물 한 방울 바람 한 점 보내 주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실망으로 돌아서려는데 집주인이 다시 딴 오두막을 권했습니다.
그 바람에 젊은이는 두어 곳 오두막을 더 들렀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돌이나 나무를 깎고 다듬어 하늘을 불러 내렸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표정과 몸짓으로 하늘을 불러 내린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하늘도 젊은이를 만족시키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은 의심 없이 자신들이 하늘 한 자락을 이 세상에 불러 내렸다고 믿고 있는 듯했으나, 젊은이가 보기에 그 하늘은 부질없는 메아리 또는 그림자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오직 하늘에 이르고자 하는 간절함으로 그 골짜기의 오두막들을 남김없이 하나하나 돌던 젊은이가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시인의 오두막이었습니다. 시인의 오두막은 그 터부터가 남달랐습니다. 골짜기 상류, 훨씬 깊고 그윽한 곳에 자리 잡고 있어 한결 하늘에 가까운 느낌을 주었습니다.
젊은이가 그 오두막에 이르렀을 때 시인은 집 밖 나무 그늘에 앉아 있었습니다. 작은 표주박에 담긴 술로 목을 축이며 산마루에 걸린 흰 구름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모습도 앞서 들러 본 오두막 주인들과는 달랐습니다. 그들도 무언가에 취해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한결같이 어두운 방 안에 홀로 앉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인이 불러 내리는 하늘은 다른 오두막의 주인들과는 달랐습니다. 시인의 깨달음과 느낌이 말과 가락에 어우러져 빚어내는 하늘은 앞서 본 하늘들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생생했습니다. 어떤 때는 있는 하늘을 불러 내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 지어내는 것 같기도 해서, 그런 일에 어지간히 익숙해 있는 젊은이도 정말로 하늘 한 자락을 보고 있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시인의 하늘도 끝내 젊은이를 잡고 있지는 못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난 것이고 쉬이 깰 수 없는 것이라 해도 감동은 감동일 뿐이었습니다. 시인이 읊기를 마치고 원래의 거칠고 헐벗은 삶으로 돌아오자, 젊은이에게도 진정한 하늘에 대한 갈망이 되살아났습니다.
“어르신의 하늘은 한결 하늘답습니다. 하지만 다른 오두막에서 본 메아리나 그림자는 아니라 하더라도 끌려와 갇힌 하늘, 굳고 식어 있는 하늘이란 느낌을 버릴 수 없군요.”
젊은이가 솔직히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았습니다. 읊조리는 동안에는 한편으로 밀어 두었던 호리병을 잡아 마개를 빼고 목마른 듯 술을 비우고 있던 시인이 별로 흔들리는 기색 없이 물었습니다.
“어째서 그런가?”
“사람의 정의(情意)라는 못 미더운 외길을 끊어 버리면 우리와는 아무것도 주지도 받지도 못하는 하늘이기 때문입니다.”
“속되구나. 그렇다면 네가 찾는 하늘은 이 골짜기에는 없디. 너는 길을 잘못 들었다.”
늙은 시인은 그 한마디와 함께 눈길을 돌려 산마루에 높이 걸린 흰 구름을 바라보았습니다. 조금 전 그가 불러 내렸을 때는 골짜기에 자욱한 안개로 내려앉았던 그 구름이었습니다.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제가 찾고 있는 하늘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진 듯해 헛되지는 않았습니다.”
젊은이는 이제 실망보다는 왠지 쓸쓸하고 슬픈 기분이 들어 그렇게 대답하고 가만히 몸을 일으켰습니다. 시인이 그런 젊은이에게로 눈길을 돌리며 물었습니다.
“이제 어디로. 가려는가?”
“이 산을 오르려 합니다.”
“이 산을? 이 높이 모를 산을…….”
“모른다고 없는 것은 아니겠지요. 오르다 보면 마침내는 꼭대기에 이를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네는 이미 먼 길을 오지 않았나? 거기다가 높다고 해서 반드시 하늘에 닿아 있다는 법도 없으니…….”
“실은 지금까지도 수많은 산들에 속아 왔습니다. 봉우리마다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 있는 듯해 하늘 길을 찾아 올라갔다가 얼마나 자주 실망하며 내려와야 했는지요. 그렇지만 이번에는 다를 듯 싶습니다. 어르신들이 찾아오신 땅끝이 바로 전 산꼭대기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거기다가 먼 길을 왔다 해도 아직은 견딜 만합니다. 아니, 몸이 견디지 못한다 해도 저는 떠나야 됩니다. 가다가 산자락을 베고 영영 눈감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여기서 멈출 수는 없습니다.”
그러자 시인의 얼굴에는 갖가지 표정이 스쳐 갔습니다. 놀라움과 부러움과 부끄러움과 한스러움이 뒤얽힌 것이었습니다. 다시 목마른 듯 한동안을 호리병만 찔끔찔끔 비워 대던 시인이 무슨 격려라도 받은 듯 새로운 걸 일러 주었습니다.
“자네에게 알려 줄 일이 하나 있네.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 너무 지쳐 이 골짜기에 이렇게 주저앉고 말았지만, 실은 나도 누군가 먼저 이 산꼭대기에 이르러 하늘 길을 찾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네. 내 영감(靈感)의 눈은 때로는 회오리를 타고 치솟기도 하고 때로는 흰 구름에 올라 하늘을 기웃거리기도 하는 그를 진작부터 알아보았지. 그러나 그가 진정한 하늘 길을 찾은 것인지는 알 수가 없네.”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여기보다 한 뼘이라도 높으면 올라가 봐야 하고, 한 발짝이라도 하늘에 가까이 이른 사람이 있다면 만나봐야 하지요. 하여튼 고맙습니다. 어르신의 말을 듣고 나니 좀 전보다는 한결 막막함이 가시는 듯합니다. 산꼭대기에 이르면 꼭 그 사람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젊은이가 그렇게 작별을 올리자 시인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습니다.
“어쩌면 자네는 끝내 자네가 찾는 하늘에 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 실은 내가 찾던 것도 그런 하늘이었지……. 어쨌든 자네가 하늘에 이를 것을 믿고 한 가지 당부하네. 만일 옥황상제를 뵙게 되거든 물어 주게. 정녕 하늘을 이 땅으로 불러 내릴 수는 없는 것인지. 있다면 어떻게 해야 참된 하늘을 한 자락이라도 불러 내뵐 수 있는 것인지를.”
“약속드리지요. 만일 제가 하늘에 오른다면 반드시 물어 드리겠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이 산을 오르는 가깝고 편한 길을 내가 아는 데까지는 일러 줌세.”
시인이 그 말과 함께 앞장서 휘적휘적 걷기 시작했습니다.
시인이 앞장서 걸은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가르쳐 준 길은 젊은이를 구름 덮인 산 중턱까지 빠르고 편안히 오르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구름에 가리워 위도 아래도 보이지 않는 그 산 중턱에 이르자 젊은이는 다시 혼란과 망설임에 빠졌습니다. 가늠할 수 없는 높이 때문이 아니라, 지난날에 맛본 쓰라린 실망의 기억들 때문이었습니다. 이미 말했듯 지난날에도 얼마나 많은 산봉우리를 그 높이만 우러러 올랐다가 하늘 길은 찾지 못하고 낙담과 슬픔 속에 내려와야 했던 것인지요.
이미 사람들의 세상에서 너무 멀리 떠나와 그대로는 돌아가려 해도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헤아림과 아직 남은 젊은이다운 오기가 아니었더라면 그 혼란과 망설임은 한층 오래갔을 것입니다. 거기다가 그곳까지 오는 동안에 입은 많은 사람들의 호의와 그들에게 한 약속도 젊은이의 발길을 앞으로 나아가게 했습니다. 특히 구만리 들 저편의 외진 고가(古家)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아가씨의 애처롭고도 아리따운 모습은 그 발길에 없던 힘까지 실어 주었습니다.
한차례 더 마음을 굳게 다진 젊은이는 그 뒤 두 번 다시 뒤돌아보는 법 없이 산을 올랐습니다. 위로 올라갈수록 길은 험해지고, 구름은 비바람과 눈보라가 되어 젊은이를 후려쳤습니다. 하지만 산등성이에 언 시체가 되어 버려지는 한이 있더라도 멈추지 않으리라는 결심으로 올라 못 오를 산은 없을 것입니다. 다시 몇 달인지 몇 년인지 모르게 오르다 보니 드디어 더는 오를 곳이 없는 산꼭대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젊은이의 굳건한 믿음과 뜨거운 기대에도 불구하고 그 산꼭대기의 사정은 세상 여러 곳에서 이미 겪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높이, 힘들여 올라왔건만 하늘은 여전히 그 위로 아득히 펼쳐져 있고 그리로 이어지는 길은 없었습니다. 낙담한 젊은이는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길게 한숨만 내쉬었습니다. 그때 근처 뒤틀린 나무 등걸 아래서 누군가가 빈정거리듯 말했습니다.
“두 다리만 믿고 하늘 길을 떠난 미련둥이가 기어이 예까지 왔군.”
젊은이가 풀린 눈길을 모아 그쪽을 보니 소나무 아래 작은 바위에 한 도사가 앉아 있었습니다. 하얗게 센 머리칼과 눈썹이나 허리까지 드리운 긴 수염은 한눈에 보아도 세상 사람들의 그것과는 다른 풍모였습니다. 진작에 그를 알아보지 못한 것은 너무도 그곳에 오래 앉아 있어 주위의 경물(景物)에 녹아든 듯 어울려 버린 때문이었습니다.
그 도사를 알아본 젊은이는 놀랍고도 반가웠습니다. 쓰러지듯 그 앞에 넙죽 절을 올리며 물었습니다.
“제가 하늘 길을 찾아온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나는 진작부터 너를 내려다보고 있었느니라. 그래도 두 다리에만 의지해 예까지 오른 게 장하다. 골짜기의 그 같잖은 것들보다는 윗길이구나.”
“그렇다면 그분들도 알고 계십니까?”
“모두 알고 있지. 그것들이 하는 우스운 짓거리도.”
“하지만 그분들은 저마다 하늘 한 자락씩을 불러 내릴 줄 아시던데요.”
젊은이가 짐짓 그렇게 말해 보았습니다. 도사가 비웃음을 감추지 않고 받았습니다.
“미친것들. 하늘이 무슨 노리개라서 제깟 놈들의 광대놀음에 불려 내려간단 말이냐? 취하고 홀린 것들의 속임수일 뿐이다. 저를 속이고 남을 속이는…….”
“그래도 듣고 있거나 보고 있으면 영락없이 하늘 한 자락 같았습니다.”
“그럼, 거기 머물지 이 높고 험한 곳은 왜 기어올라 왔느냐?”
그제야 젊은이는 그 아래 골짜기에서 느꼈던 것을 솔직히 털어놓았습니다. 듣고 난 도사가 비웃음을 거두며 말했습니다.
“그래서 미욱하게 두 다리만 믿고 예까지 왔지만, 네가 저 아래 주저앉은 것들보다는 윗길이라고 말했느니라.”
“세상을 몇 바퀴나 돌아도 찾지 못하자 저도 한때 하늘로 오르는 길은 두 다리만으로는 갈 수 없는 길이 아닌가 의심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선비의 오두막과 예인(藝人)들의 골짜기를 지난 뒤로는 다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책으로도 갈 수 없고 느낌을 갈고 닦아도 이를 수 없다면 결국 믿을 것은 두 다리뿐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도사님의 말씀을 들으니 또 다른 길이 있는 듯도 합니다. 하늘로 가기 위해 달리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늘 길은 마음 길이니라. 마음의 조화를 얻어 몸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어야 하늘 길에 오를 수가 있느니.”
도사가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답했습니다. 젊은이는 듣느니 처음이라 공손하게 물었습니다.
“마음의 조화는 어떻게 얻습니까?”
“도(道)를 통하여 얻는다. 지성으로 도를 닦으면 마음의 조화가 이뤄지는 법.”
“그 도는 무엇이며 어떻게 닦을 수 있습니까?”
“하늘과 땅 사이를 메우고 있는 것은 흐린 기운과 맑은 기운이다. 흐린 기운은 뭉치어 천한 짐승과 미물이 되고 맑은 기운은 따로 어리어 온갖 신령한 것들이 되었다. 사람은 아홉 푼의 흐린 기운에 한 푼의 밝은 기운이 섞이어 빚어진 바, 도란 그 맑은 기운이 우리와 신령한 것들을 이어 주는 끈이며, 도를 닦는다 함은 우리 마음이 그 끈을 놓지 않고 쉼 없이 신령한 것들로 다가감을 이른다.”
“저는 어리석고 배운 것 없어 무슨 말씀인지 통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알아들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젊은이가 그렇게 말하자 도사가 자못 으스대는 듯한 표정으로 받았습니다.
“그럴 테지. 원래 그런 것은 때 묻고 헐어 빠진 사람의 말로는 전할 수가 없느니. 도는 그저 도이고, 닦는 것은 그저 닦는 것일 뿐이니라.”
더욱 알쏭달쏭한 소리여서 젊은이는 잠시 말문이 막혔습니다. 하지만 그게 하늘 길을 찾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면, 도사가 말하는 도(道)라는 것 또한 그때껏 그가 지나온 수많은 산과 들처럼 넘어서고 건너야 할 그 무엇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번에는 물음을 바꾸어 다가가 보았습니다.
“도사님께서는 그 도를 닦으신 지 얼마나 되시는지요?”
“나도 너처럼 여기까지는 내 두 다리로 왔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안 돼 이 마음에 깃든 맑은 기운에 의지하기 시작했는데, 그게 하마 백 년이 넘는다. 그러니 적어도 백 년은 도를 닦은 셈이지.”
“그럼 도사님께서는 벌써 하늘 길을 찾으셨겠군요.”
백 년이란 세월의 무게에 늘려 젊은이가 도사를 우러르면서 그렇게 물어보았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도사의 얼굴에 무안한 기색이 드러났습니다.
“실은…… 나도 아직 온전히는 찾지 못했다.”
“예에? 백 년이나 도를 닦고도 아직 하늘 길을 제대로 찾지 못했다구요? 그럼 도대체 얼마나 도를 닦아야 된다는 것입니까?”
“나도 그걸 알 수 없다. 여기서 백 년의 도를 닦아 온갖 마음의 조화를 얻었으나 아직 하늘 문턱도 밟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신선이 되지 못하고 이렇게 마냥 도사로 남아 있다.”
도사는 한습까지 섞어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드디어 하늘 길을 찾았다고 믿었던 젊은이는 도사의 그 같은 말에 적이 실망했습니다. 그럼 이 도사는 무어란 말입니까 세상에 쌔고 쌘 그 ‘모든 것을 다 아는 바보’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잖겠습니까 하지만 젊은이는 그 같은 마음속의 물음을 내색하지 않고 더욱 공손하게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하늘 길은 달리 찾아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역시 두 다리로 걸어 올라갈 하늘 길이 따로 있지나 않을까요?”
그러자 도사는 벌컥 화를 냈습니다.
“말귀를 영 못 알아듣는 놈이로구나. 하늘 길을 찾는다는 게 그저 길을 알기만 한다는 뜻이라면 나는 이미 하늘 길을 찾았다. 나도 봄날 회오리에 내 마음을 실으면 멀리 하늘 문을 바라볼 수 있는 곳까지는 이른다. 다만 몸이 하늘에 들지 못하기 때문에 하늘 길을 찾지 못했다고 했을 뿐이다. 그런데 또 무슨 다른 길이 있단 말이냐?”
도사는 그렇게 젊은이를 꾸짖었습니다. 움찔하면서도 젊은이의 날카로운 눈길은 도사가 무언가 자신 없어 하는 것이 있음을 눈치 챘습니다. 젊은이는 도사의 거친 숨결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다시 공손하게 물었습니다.
“하늘 길은 그렇다 치고 오르는 방법은 다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봄날 회오리에 마음을 실어 멀리 하늘 문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이르셨을 때 혹시 하늘 문을 드는 다른 이는 보지 못하셨습니까?”
그 말에 아픈 곳을 찔린 듯한 표정이던 도사가 한참이나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가 이윽고 털어놓았습니다.
“실은 언젠가 하늘 문 언저리까지 치솟은 이무기를 본 적이 있다. 그때 여름 태풍을 빌어 탄 나보다는 분명 높이 치솟은 듯 보였지만 ― 그도 하늘 문 안으로 들지 못하기는 나와 마찬가지였다.”
그 말을 들은 젊은이는 반갑기 짝이 없었습니다. 비록 사람이 아닌 이무기지만 보다 하늘 문 가까이 이른 무엇이 있다는 것은 하늘에 이를 희망이 아직 남았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젊은이는 경망스러워 보이지 않기 위해 한동안이나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른 뒤에야 슬며시 물었습니다.
“혹시 도사님께서는 그 이무기가 어디에 사는지 아십니까?”
무엇 때문에 마음이 상했는지 도사가 낯성을 내며 소리쳤습니다.
“모른다. 내가 무엇 때문에 그따위 천한 미물(微物)이 사는 곳을 알아야 하느냐?”
젊은이가 움찔해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물었습니다.
“천한 미물이기에 더욱 그 사는 곳을 알고 싶습니다. 용도 못 된 몸으로 하늘 문까지 치솟았다면 그 뒤에는 피눈물 어린 노력과 정성이 있었을 것입니다. 백 년이나 도를 닦으신 분에게야 하찮게 보이겠지만, 저같이 어리석고 모자라는 놈에게는 배울 바가 적지 않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래서 묻사오니 부디 그 이무기가 사는 곳을 일러 주십시오. 이미 마음의 조화를 얻으신 도사님께서 그곳을 모르실 리가 없숩니다.”
젊은이는 한편으로는 간곡하게 빌고 다른 한편으로는 은근히 도사를 치켜세워 가며 그 이무기가 사는 곳을 물었습니다. 그래도 한동안이나 모른다고 우기던 도사가 마침내 젊은이의 열성을 못이겨 가르쳐 주었습니다.
“‘즈믄 해’ 내〔千年川〕가 흐르고 흘러 이른다는 곳, 사람들이 ‘돌아 못 올(不歸)’ 바다라고 이름하는 곳이다.”
“그곳은 어떻게 찾아갑니까?”
“그 ‘즈믄 해’ 내를 따라가면 되겠지. 하지만 두 다리로 걸어가야 하는 사람에게는 그곳이 하늘보다 더 멀지도 모르겠다.”
대답은 해도 도사의 목소리는 사뭇 차갑기 그지없었습니다. 그 바람에 젊은이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이제까지의 그 어느 때보다 공손하게 제안해 보았습니다.
“도사님, 차라리 저와 함께 그리로 가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도사님의 신통한 힘으로는 ‘즈믄 해’ 내건 ‘돌아 못 올’ 바다건 한나절이면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 도사님과 그 이무기가 다시 힘을 합치면 넉넉히 하늘 문 안으로 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닥쳐라! 너는 내가 그 천한 미물과 어깨를 나란히 하란 말이냐?”
도사가 다시 얼굴이 시뻘겋게 성을 내며 목청을 높였습니다. 그래도 젊은이는 움츠러들지 않고 권했습니다.
“도사님을 낮추거나 그 이무기를 높이고자 해서가 아닙니다. 하늘에 오르는 일이 너무도 크고 무거워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늘에 들 수만 있다면 이무기가 아니라 그보다 더 미천한 벌레인들 손잡지 못할 까닭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도 도사는 매몰차게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럴 수 없다. 나는 이곳을 떠나지 않겠다. 다시 백 년이 더 걸리더라도 여기서 도를 닦아 내 힘으로 신선이 되겠다.”
도사는 그렇게 잘라 말하고 자신이 앉은 바위를 덮고 있는 도포 자락을 더욱 넓게 펼쳤습니다. 그게 젊은이의 밝은 눈에는 무언가 소중한 것을 감추는 것처럼 비쳤습니다. 그러고 보니 젊은이와 그렇게 길게 얘기하는 동안에도 처음 앉아 있던 그 바위에서 한 치 움직임이 없는 것 또한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벌써부터 이무기를 찾아 떠나려고 속으로 조바심치는 젊은이에게는 그걸 이상하게 여겨 물어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어찔 수 없군요. 비록 그게 이무기일지라도 저는 보다 하늘 가까이 이른 이를 찾아가야겠습니다. 어쩌면 그가 그만큼 높이 솟을 수 있었던 것은 그곳이 하늘에 더 가까워서일지도 모르니까요. 좋은 가르침 많이 받았습니다.”
이윽고 다시 길 떠날 채비를 마친 젊은이는 그렇게 도사와 작별했습니다. 언뜻 도사의 표정에 부러움이 스쳤으나 이내 지워졌습니다. 그러다가 거침없이 돌아서는 젊은이에게서 무엇을 보았는지 옷깃을 잡듯 물었습니다.
“젊은이의 씩씩함과 참을성을 보니 어쩌면 나보다 먼저 하늘에 이를지도 모르겠네. 그 천한 미물을 믿지는 않지만, 자네가 단 한 발짝이라도 하늘에 가까워지는 데는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 그렇게 되면 그 미물이 사는 것을 일러 준 나도 자네를 도운 셈이 되니 내 청도 하나 들어주겠나?”
“무엇인지 모르지만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들어드리지요.”
되돌아선 젊은이가 그렇게 선선히 대답했습니다. 도사가 상하고 비틀어진 마음을 감추려는 듯 억지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당부했습니다.
“행여라도 하늘에 이르게 되거든 하나만 알아주게. 왜 나는 여기서 백 년이나 도를 닦아도 하늘에 이르지 못하는지, 어째서 그곳에 이르러 신선이 되지 못하는지 말일세.”
“알겠습니다. 꼭 그렇게 하지요.”
젊은이가 그렇게 다짐하자 도사의 미소가 진심 어린 것으로 변했습니다.
“고맙네. 대신 먼 길을 가는데 도움이 될 만한 것을 하나 더 가르쳐 주지. 몸이 가벼워지고 쉬이 지치지 않게 하는 마음 법[心法]이네. 내가 깨치는 데는 수십 년이 걸렸지만 자네가 배우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일세.”
그 말에 이어 자신이 힘들여 깨우친 마음 법을 많지 않은 말로 줄여서 일러 주었습니다. 하지만 젊은이가 거의 반나절이나 걸려 그 마음 법을 익히는 동안도 도사는 깔고 앉은 바위에서 몸 한번 삐끗함이 없었습니다.
다행히도 ‘즈믄 해’ 내〔千年川〕는 ‘높이 모를’ 산에서 흐름이 시작되고 있어 찾기가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젊은이는 그 내를.따라 ‘돌아 못 올〔不歸〕’ 바다를 향해 걸었습니다.
이번에도 아주 먼 길이기는 했지만, 따라 내려가기에 그 이름처럼 오래 걸리는 내는 아니었습니다. 천년은커녕 ‘높이 모를’ 산을 오를 때보다 오히려 더 적은 세월을 들여 젊은이는 ‘돌아 못 올’ 바다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내의 흐름이 빠른 구비에서는 내의 흐름을 타고, 느린 곳에서는 도사에게서 배운 마음 법을 써서 지치지 않고 달린 덕분이었습니다.
막상 ‘돌아 못 올’ 바닷가에 서게 되어서야 젊은이는 잠시 걱정에 빠졌습니다. 아득한 수평선을 보자 지난날 세상의 여러 바닷가에서 겪은 실망이 다시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수평선이 하늘에 닿아 있으니 하늘 길이 바다 끝에 있으리란 믿음으로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헛되이 바닷가를 헤맸던 것입니까.
그렇지만 오래 걱정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갑자기 바다 한가운데가 갈라지더니 한 마리 커다란 이무기가 몸을 드러낸 것이었습니다. 뿔과 비늘은 돋았지만 아직 다리가 나지 않아 흉측하게만 보이는 괴물이었습니다.
“너는 무엇하는 놈인데 여기까지 와서 얼찐거리느냐?”
젊은이를 본 이무기가 금세라도 삼켜 버릴 듯 거칠게 물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도사에게서 들어 그를 알고 있는 젊은이는 별로 겁먹은 기색 없이 대답했습니다.
“저는 하늘로 오르는 길을 찾아 헤매는 나그네입니다. 여기 오면 하늘 길이 열릴까 해서…….”
“잘못 알았다.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이 자칫 그렇게 속아 넘어가지. 수평선이 하늘과 닿아 있다고 해서 하늘이 바다 위로 내려앉은 것은 아니다.”
“오래 세상을 돌아다니다 보니 저도 그만한 일은 알게 되었습니다. 실은 제가 이곳을 찾아온 것은 그런 수평선에 속아서가 아니라 바로 당신 때문입니다.”
“나 때문이라고?”
“그렇습니다. 당신은 하늘 문 언저리까지 날아오르실 수 있다고 하니 어쩌면 여기 하늘 길이 있을지 모른다 싶어…….”
“그 덜떨어진 도사 놈한테 듣고 왔구나. 제 앞가림도 못 하는 주제에 입은 가벼워서…….”
“그분은 그곳에서 백 년이나 도를 닦았고, 마음의 조화를 얻으셨다 했습니다.”
“너희의 말과 뜻으로 비틀어 놓은 우주의 섭리와 너희 나름의 틀로 짠 깨달음을 말하는 것이냐? 그런 도와 그런 틀을 통해 얻은 깨달음이 무슨 쓸모가 있겠느냐?”
이무기가 드러내 놓고 비웃음 치며 말했습니다. 그래도 적지 아니 자신을 도와준 도사를 너무 심하게 깎아내리는 것이 못마땅해 젊은이가 우겨 보았습니 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이미 하늘 길을 알고 계셨습니다. 다만 몸이 이르지 못할 뿐입니다.”
“그럴 수밖에. 몸은 그놈의 바윗덩이에 붙박힌 듯 앉아 마음만 가지고 잔재주를 피우니 백 년이 걸린들 제가 어떻게 하늘에 들어? 마음만이라도 그만 거리에서 하늘 문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게 용한 일이지.”
그래 놓고는 다시 심술궂은 목소리가 되어 젊은이에게 물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네놈도 용하다. 그 짧고 약한 두 다리로 ‘즈믄 해’ 내를 따라 내려올 엄두는 어찌 내었느냐?”
“이름이란 실질을 드러내는 것이지만, 흔히 과장되게 드러낸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기다가 제게는 이미 돌아갈 일이 나아가기보다 더 막막해져, 설령 이 길이 정말로 천 년이 걸린다 해도 떠나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바다 이름도 들었으렷다?”
“‘돌아 못 올’ 바다라 들었습니다만…….”
“그것은 이곳에서 아무도 돌아간 사람이 없었다는 뜻인데, 그 이름에는 과장이 없다. 내가 모두 잡아먹었기 때문이지. 그래도 너는 두렵지 않느냐?”
그 말과 함께 이무기가 겁을 주듯 시커먼 콧김을 뿜으며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 보였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하늘 길을 찾아 나선 나그네입니다. 하늘에 이르는 게 제 평생의 소원이니, 설령 당신의 배 속에 든다 할지라도 하늘 가까이 이를 수 있다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젊은이는 그렇게 대꾸하면서 조금도 겁내지 않고 그 이무기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런 젊은이에게서 무엇을 느꼈는지 이무기가 위협하는 기색을 슬며시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깊은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문득 부드러운 눈길이 되어 젊은이를 바라보며 물었습니다.
“하늘에 오르고자 하는 네 정성과 각오가 나를 감동시키는구나. 그래, 너는 무엇 때문에 그토록 간절하게 하늘로 가려는 것이냐?”
그 물음에 젊은이는 자신의 기구한 이력을 남김없이 털어놓았습니다. 슬프게 하면 한없이 슬프게 들릴 이야기였습니다. 다 듣고 난 이무기가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한숨과 함께 말했습니다.
“너를 보니 처음 하늘에 이르고자 하는 염원을 세우던 때의 내가 떠오르는구나. 나도 그랬다. 세상에는 하고많은 좋은 인연이 있는데, 우리는 어찌 천한 뱀으로 태어나 대대로 땅을 기며 온갖 업신여김을 받다가 끔찍하게 죽어야 했는지. 내 할아버지는 솔개의 밥이 되었고, 내 아버지는 등을 밟는 사람의 발뒤축을 얼결에 물었다가 돌에 치여 죽었다. 들짐승이건 날짐승이건 힘만 있으면 모두 우리를 먹이로 삼았고, 사람들은 하나같이 우리를 원수로 여겨 돌로 내려쳤다. 스물이 넘던 내 형제자매들이 하나하나 짐승의 밥이 되거나 사람들의 돌팔매질에 죽어 가는 걸 보며 나는 하늘에 올라 용이 되는 것을 내 일생의 염원으로 세웠다. 비록 한 마리 흉측한 벰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때 나도 지금의 너처럼 용(龍)이 되어 하늘에 오를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열정과 각오가 있었다. 하지만 이게 무슨 꼴이냐…….”
이무기는 거기서 한차례 더욱 깊고 긴 한숨을 내쉰 뒤에 이었습니다.
“나는 용이 되어 하늘로 오르기 위해 천 년을 공들였다. 너희 인간들과는 달리 나는 떠도는 말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고, 그걸 글로 갈무리해 놓은 책도 없었다. 하늘 그림자라도 불러 내릴 가락과 선과 색도 없었으며, 무리한 대로 앞뒤를 맞춰 짜 둔 도(道)라는 것에 기댈 수도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여느 뱀들로서는 꿈도 못 꿀 참을성으로 긴 세월을 바쳐 나의 길을 더듬어 나아갔다. 이 세상 모든 목숨붙이들이 겪어야 할 괴로움과 외로움에 지지 않고 몸과 마음을 다그쳐 바로 하늘과 땅이 얽힌 이치로 다가갔다. 정성과 노력이 그치지 않으면 길은 열리기 마련. 천 년이 차기 훨씬 전에 나는 이미 하늘과 땅을 잇는 감추어진 길을 찾아냈다. 우리 같은 미물들도 몸을 뜻대로 부릴 수 있게 해 주는 여의주(如意珠)도 얻었다. 자랑 같지만, 지금 하늘을 날고 있는 어떤 용도 나만 한 여의주는 가지고 있지 못할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걸 갖춘 나는 하늘 길을 더듬기 시작했고, 마침내는 하늘 문 몇 길 아래까지 치솟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뿐이다. 잡으면 닿을 듯한 곳까지 이르렀건만 그 문 안으로 들어 용이 되지는 못하고, 다시 떨어지면 여전히 배와 꼬리로 땅바닥을 기어야 하는 천한 이무기일 뿐이다.”
“아득히 하늘 문조차 바라보지 못한 저도 하늘에 이르는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천 년을 공들여 이미 하늘 문턱에 이르신 분이 아니십니까. 이제 머지않아 오랜 염원을 이루시게 될 것입니다.”
젊은이가 그렇게 이무기를 위로했습니다. 그런 젊은이를 그윽하게 바라보던 이무기가 갑자기 두 눈을 번쩍이며 말했습니다.
“너는 정성과 각오가 남다를 뿐만 아니라 왠지 믿을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너와 한 가지 거래를 하고 싶은데 들어 보겠느냐?”
“그게 무엇인지요?”
“요즘 들어 문득 깨닫게 된 것이 있다. 내가 천 년을 공들여도 하늘에 올라 용이 되지 못한 데에는 정녕 내가 알지 못하는 까닭이 있을 것이다. 내 너를 하늘에 이르게 해 줄 터이니 너는 나를 위해 그 까닭을 알아 줄 수 있겠느냐?”
그 말에 젊은이의 가슴은 세차게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걸 억누르느라 자신도 모르게 떨려 오는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저를 하늘에 오르게만 해 주신다면 반드시 그 까닭을 알아 드리겠습니다. 하오나 어떻게 그리하실 수 있을는지요?”
“여름 먹구름이 두터워 하늘 밑까지 이르기를 기다렸다가 그 위로 날아오른 뒤 거기서 오르락내리락하는 번들개 중에서도 가장 세차고 눈부신 놈의 꼬리를 잡고 솟구치면, 이미 말했듯 나는 하늘 문 몇 길 아래까지 이를 수 있다. 너는 내 머리에 올라타 뿔을 잡고 있다가 내가 세차게 도리질을 칠 때 그 뿔을 놓으면 하늘 문 앞에 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 뒤에 하늘 문에 들고 말고는 네 재주에 달려 있거니와, 만약 그 안으로 들게 되거든 먼저 네가 궁금해하는 것을 알아낸 뒤에 반드시 내 것도 알아 오너라.”
“그렇게 하지요. 반드시 옥황상제께 여쭤보겠습니다.”
“좋다. 그럼 됐다. 마침 여름이니 먹구름을 만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무기는 그래 놓고 기다림의 눈길로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오래 기다릴 것도 없이 먹구름이 사방에서 몰려들더니 그 위에서 우릉우릉 천둥이 울기 시작했습니다.
“자, 올라타라.”
먹구름이 두텁게 하늘을 뒤덮은 걸 보고 이무기가 젊은이에게 고개를 내밀며 말했습니다. 젊은이는 그 이무기의 집채만 한 머리에 올라 여러 갈래로 솟은 뿔을 단단히 잡았습니다.
이무기는 먹구름이 장맛비로 변해 쏟아질 무렵 젊은이를 머리에 태운 채 힘차게 솟아올랐습니다. 두터운 먹구름을 뚫고 치솟아 보니 여러 갈래의 번들개가 귀청이 찢어질 듯한 우레를 내지르며 하늘을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습니다. 이무기는 그중에서도 가장 세차고 눈부신 번들개를 골라 다시 억센 턱으로 그 꼬리를 물었습니다. 꼬리를 물린 번들개가 놀라 솟구치는 바람에 젊은이를 태운 이무기는 순식간에 하늘 문이 저만치 올려 보이는 곳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제 뿔을 놓아라.”
이무기가 그 말과 함께 세차게 도리질을 쳤고 젊은이의 몸은 그대로 몇 길을 더 치솟아 마침내 하늘 문 앞에 떨어졌습니다.
젊은이가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하늘 문지기의 엄한 꾸지람을 듣고 나서 였습니다.
“이놈, 너는 누구냐? 어떤 놈이기에 그 천한 몸을 끌고 감히 여기까지 이르렀느냐?”
“저는 옥황상제님을 뵈올 일이 있어 먼 길을 돈 끝에 간신히 이곳에 이르렀습니다.”
젊은이가 한껏 목소리를 공손하게 하여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돌아가라. 운 좋게 여기까지는 왔다만 옥황상제님은 너같이 천한 몸을 이끌고는 만날 수 없는 분이시다.”
세상에서와 마찬가지로 힘이 있는 관청일수록 아랫자리 사람들이 더 딱딱거리는 법입니다. 하늘 문지기도 그렇게 턱 없는 위세로 젊은이를 가로막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젊은이 또한 그리 만만치는 않았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힘들여 이른 하늘입니까. 그렇다 보니 둘은 절로 옥신각신하게 되었습니다.
“부디 옥황상제님을 한 번만 뵙게 해 주십시오. 설령 이 몸이 천길 유황불 속에 내던져진다 해도 여기서 이대로 되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젊은이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하늘 문지기의 호령에 그렇게 맞서고 있을 때였습니다. 한 온화한 목소리가 하늘 문 안에서 들려왔습니다.
“무슨 일로 문밖이 그리 소란한고?”
그러자 문지기가 소리 나는 쪽으로 공손하게 허리를 굽히며 말했습니다.
“아직 더러운 세상 때가 낀 살에 깃들인 목숨 하나가 감히 여기까지 와서 상제(上帝)님을 뵈옵겠다고 떼를 쓰기에 내쫓고 있는 중입니다.”
그 말에 한동안 대답이 없던 그 목소리가 다시 부드러운 웃음기를 띠고 돌아왔습니다.
“허엇, 그 참. 괴이한 일이다. 사람 세상과 우리 하늘이 각기 길이 다른데, 어떻게 저 몸을 이끌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단 말이냐?”
“저는 하늘에 이르고자 하는 세상의 뭇 염원들을 하나로 아울러 그 힘으로 이곳까지 올라왔습니다. 저를 티끌 같은 목숨 하나로 보지마시고, 이 세상 뭇 생명붙이들의 염원으로 받아들여 주시읍소서.”
이번에는 젊은이가 문지기를 대신해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한참 뒤에 그 목소리가 뜻 모를 너털웃음과 함께 말했습니다.
“그 말이 너무도 간절하구나. 안으로 들게 하여라.”
이에 젊은이는 하늘 문 안으로 들어 옥황상제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하늘 문을 들어선 젊은이가 궁궐 뜰을 가로질러 옥황상제가 계신 대전으로 나아갈 때까지 그가 보고 들은 것을 어떻게 사람의 말로 다 형용해 내겠습니까. 아름답고 눈부신 빛이 있었지만 사람의 말로는 다 그려 낼 수 없고, 곱고 그윽한 소리가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세상의 소리로는 흉내 낼 수가 없었습니다. 젊은이는 그제야 지난날 ‘높이 모를’ 산자락의 오두막들에서 본 하늘이 모두 참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늘 뜰 안에 뒹구는 작은 돌멩이 하난들 사람이 무슨 재주로 불러 내릴 수 있겠습니까.
“그래, 너는 그리 많지 않은 나이에 무슨 일로 이 멀고 힘든 길을 찾아왔느냐?”
“제가 이 길을 떠난 것은 옥황상제님께 꼭 알아볼 일이 있어서였습니다. 저의 집은 대대로 가난하여 할아버지도 굶어 죽고 아버지도 굶어 죽고 형제 자매들도 모두 굶어 죽었습니다. 들으니 우리가 가난한 까닭은 하늘로부터 받은 복이 적어서라고 하는데, 왜 우리가 받은 복은 그리 적은지요?”
“네가 말하는 복은 복 중에서도 가장 하찮은 복이로구나. 길어야 한 백 년 갈 몸을 기르는 데 쓰는 재물을 두고 하는 말 같은데. 그 하찮은 것 때문에 이렇게 멀고 힘든 길을 찾아왔단 말이냐?”
옥황상제가 약간은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습니다. 그 말에 젊은이가 저도 몰래 결기가 올라 대답했습니다.
“상제님께서 조금이라도 피와 살을 가진 목숨붙이의 괴로움과 고단함을 아신다면 차마 그리 말씀하시지는 못할 것입니다. 비록 백 년도 못 견뎌 스러질 몸이라 하나, 그 한 몸에 실린 한이 어떤 것인지 아시는지요? 길이 스러지지 않는다는 영혼이 그 깃들일 집을 지켜 내기 위해 얼마나 괴롭고 수고로워야 하는지를 잊으셨는지요? 그리하여 때로는 백 년도 못 가는 몸을 위해 길이 산다는 그 영혼이 뒤틀리고 부스러져 먼저 스러질 수도 있음을 말입니다. 그런데 그 몸을 기르고 지켜 나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것이 바로 재물입니다. 어찌 그런 재물이 있고 없음을 가르는 복을 하찮다 이를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가? 어허, 내가 너무 오래 너희 몸을 잊고 있었던가.”
옥황상제는 그렇게 말해 놓고 무언가 잊고 있던 것을 잠시 되살려 보는 듯하다가 다시 이었습니다.
“세상 모든 일이 한결같고 가지런하다면 어떻게 서로 미치고 어우러지는 조화(造化)가 생겨날 수 있겠는가? 많고 적고, 길고 짧고, 밝고 어두운 것이 서로 분간되어야 오히려 그것들이 서로 미치고 어우러져 조화가 생기느니라. 너희 복도 그러하니, 너희가 똑같이 한세상을 살아야 한다면 너희 여러 목숨을 따로따로 지어 낼 까닭이 없지 않겠느냐? 하지만 그래도 대강은 비슷하게 복을 나누어 주었는데, 어째서 너희 집에만 그렇게 적게 돌아가게 된지는 알 수가 없구나. 복을 나눠 주는 관리를 불러 물어보아야겠다.”
그러고는 복을 나눠 주는 일을 맡아 보는 관리를 불러 까닭을 알아보게 하였습니다. 옥황상제의 명을 받은 관리가 어디론가 황급히 갔다가 돌아와 무안한 듯 말했습니다.
“제가 가서 복을 나눠 주는[分福] 창고를 둘러보았더니 어인 까닭인지 저 집 복 단지는 복이 전혀 들지 않은 채 봉해져 있었습니다. 복을 나누어 담을 때 누군가 잘못해서 그리된 것 같습니다.”
“일이 그렇게 되었구나. 참으로 안쓰러운 일이로다. 지금이라도 저 아이의 복 단지에 복을 좀 채워 주도록 하라.”
“하오나 저들 세상에 나눠 줄 복은 이미 다 나눠 준 뒤라 따로 남은 것이 없사읍니다.”
“그럼 이미 나눠 준 것에서 조금씩 덜어 저 아이의 복 단지를 채워 주도록 하라.”
이에 복을 나눠 주는 관리는 다시 창고로 가서 이미 다른 이들에게 나눠 준 복을 조금씩 덜어 젊은이의 복 단지를 채워 갔습니다. 관리들이 부주의하기는 하늘도 마찬가지인지, 조금씩 덜어 내도 여러 단지에서 덜어 내다 보니 이번에는 젊은이의 복 단지가 터무니없이 넘쳐 흐르게 되었습니다.
“그냥 두어라. 없어 괴로운 시절이 있었으니 넘쳐 즐거운 날도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복을 나눠 주는 관리가 죄스러운 듯 그 일을 알리고 다시 복을 덜어 내려 하자 옥황상제가 느긋한 목소리로 말렸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흐뭇해하는 미소로 젊은이를 내려다보며 물었습니다.
“그래. 이제 만족하였느냐?”
“가엾은 저의 소망을 저버리지 않으시니 그저 황송하올 따름입니다. 하오나 부끄럽게도 저는 제 힘으로 이곳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고비마다 이곳저곳에서 도움을 받았는데 이제는 그 갚음을 하고 싶사오니 그것도 들어주시겠습니 까?”
젊은이는 옥황상제의 너그러움에 감격하면서도 자신이 한 약속들을 어길 수가 없어 조심스레 물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저를 마지막으로 하늘 문 앞까지 태워 준 것은 저 아래 ‘돌아 못 올’ 바다에 사는 이무기였습니다. 그는 하늘에 올라 용이 되기 위해 천 년 동안 공을 들였다는데 아직도 그 자신은 하늘에 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까닭이 무엇인지요?”
“허영이다. 그놈은 하늘 길을 터무니없이 대단하게 꾸며 대고 믿어, 하나면 될 여의주(如:意珠)를 두 개나 가지고 있다. 하늘을 실제 보다 훨씬 높고 먼 곳으로 만들어, 이곳에 이르려는 자신을 벌써 땅에서부터 높이고 뽐내 왔다. 저를 위해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다. 진작에 여기 와서 용이 될 수 있었으나 그 허영으로 하나 더 가진 여의주의 무게 때문에 마지막 몇 길을 솟아오르지 못해 마냥 이무기로 남아 있다.”
그 대답을 듣자 내친김이라 여긴 젊은이는 이어서 물음을 쏟아놓았습니다.
“더 있습니다. 그 이무기를 찾아가기 전에 들렀던 ‘높이 모를’ 산에서는 한 도사를 만났습니다. 그 도사는 백 년이나 인간 세상을 떠나 하늘 가까운 곳에서 도를 닦았다는데 어찌해서 이곳에 이르러 신선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까?”
“욕심 때문이다. 너는 그 도사 놈이 앉은 바위를 살펴보았느냐? 그 도사 놈이 도포 자락으로 덮고 있어 그렇지 그 아래 방석으로 깔고 앉은 것이 실은 커다란 황금 덩이다. 황금에 대한 욕심으로 그 앉은자리조차 뜨지 못하는데 무슨 수로 저 아득한 허공을 솟구쳐 여기까지 올 수 있겠느냐? 평생 그 마음만 하늘 문 언저리를 맴돌 수 있을 뿐이니라.”
“그 산 발치에 있는 골짜기에서 몇 개의 오두막을 들른 적이 있사온데, 거기 사는 사람들은 저마다 하늘 한 자락을 불러내려 스스로 하늘에 오르기에 갈음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참된 하늘같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하늘을 땅 위로 불러 내리는 일이 되기는 되는 일입니까? 또 그렇다면 그들이 불러 내린 하늘이 그 모양인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몸과 마음을 다 내던져 부른다면 하늘 한 자락쯤은 불러 내릴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그들은 아니다. 취해서 헛것을 보고, 그것으로 자신과 남을 아울러 속이고 있을 뿐이다.”
“‘알지 못할‘ 벌 저편에서는 그들이 50년 전에 지나갔음을 제게 일러 준 선비가 있었습니다. 그는 하늘 길을 찾기 위해 사람들 사이에서 50년 동안이나 열심히 공부하였고, 그 뒤 열 수레의 책과 함께 세상에서 멀리 떨어진 그곳으로 물러나 다시 50년을 더 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하늘 길을 찾지 못한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바로 그 책 때문이다. 책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요긴한 것이지 하늘과의 일에는 아무 쓸모가 없다. 그가 참으로 하늘 길을 찾고자 한다면 먼저 책을 버려야 한다.”
“제게 구만리 들과 그 선비를 일러 준 아가씨가 있었습니다. 의지가지없게 된 그녀는 이제 누구와 혼인해 살아야 하겠습니까?”
“그야 홀로 되어 처음 만나게 된 남자지. 이제 다 되었느냐?”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그 아가씨의 집에는 머리가 둘 달린 요괴가 나타났는데 그건 무엇입니까?”
“재물에 사(邪)가 인 것이다. 그 아가씨의 먼 할애비는 자손이 다시 헐벗고 굶주리게 될 때를 걱정해 뒤뜰에다 적잖은 재물을 따로 묻어 두었더니라. 그러나 세월이 지나도 캐내 써 주지 않자 재물이 그런 모습으로 자신을 알리려 나온 것이다. 두 개의 머리는 쓰임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재물의 두 형상인데, 전혀 다른 것이 나란히 붙어 사람의 눈에는 괴이쩍고 흉측하게 비쳤을 것이다. 그 집 식구들은 다만 그러한 형상만 보고 그것의 하소연도 듣기 전에 제 풀에
놀라 죽었을 뿐이다.”
얻을 걸 다 얻고 들을 걸 다 들은 젊은이는 옥황상제에게 수없이 머리를 조아려 감사를 드린 뒤에 하늘 문을 나섰습니다. 무엇 때문인가 그 젊은이를 기특하게 여긴 옥황상제는 그가 힘들이지 않고 세상으로 되돌아갈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와 가장 먼저 이무기를 만난 그 젊은이는 하늘에서 들은 대로 그가 왜 용이 되지 못하는가를 알려 주었습니다. 다 듣고 난 이무기는 부끄러운 듯 가슴에서 여의주 하나를 토해 놓았습니다.
“그게 하늘을 높이는 일이 아니고 나를 높이는 허영이었단 말이지. 고맙다. 이건 네가 가져라. 하늘만이 할 수 있는 것을 빌지만 않는다면 무엇이든지 네가 원하는 것을 들어줄 것이다.”
이무기는 남는 여의주를 젊은이에게 주고 자신은 용이 되어 하늘로 솟구쳤습니다.
젊은이는 그 여의주의 힘을 빌어 순식간에 ‘높이 모를’ 산에 이르렀습니다. 다시 도사를 만나 하늘에서 들은 대로 일러 주자 도사는 크게 부끄러워하며 도포 자락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과연 그가 앉아 있던 자리에는 번쩍이는 황금 방석이 놓여 있었습니다. 힘센 어른 몇이 붙어도 들지 못할 만큼 커다란 황금덩이였습니다.
“내가 욕심에 눈이 어두워 그걸 깨닫지 못했구나. 젊은이, 정말 고맙네. 그리고 나는 이제 이걸 버리고 하늘로 가겠지만 세상에 내려가 살 자네는 필요할지 모르니 이 황금 방석은 자네가 가지고 가게.”
도사는 그 말과 함께 자리를 떨치고 떠나 보다 높은 곳으로 옮겨 앉았습니다. 오래잖아 흰 구름 한 자락이 불려 온 듯 도사의 발 앞에 펼쳐졌습니다. 도사는 미련 없이 그 구름에 올라 신선이 되어 하늘로 날아올랐습니다.
젊은이는 다시 여의주의 힘을 빌어 그 커다란 황금 방석을 몸에 지닌 채 한달음에 산을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시인의 오두막을 찾아 하늘에서 들은 대로 일러 주었습니다. 젊은이로부터 자신들이 불러 내린 것이 참된 하늘이 아니며, 어떻게 해야 작은 모퉁이라도 참된 하늘을 불러 내릴 수 있는가를 들은 시인은 한참이나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렵게 마음을 굳힌 듯 천천히 몸을 일으켰습니다.
“듣기에 괴롭지만 어김없이 하늘이 내린 말씀 같네. 한 모퉁이 하늘이라도 불러 내리려면 먼저 깨어나고 속이지 말고…… 그러고도 이 몸과 마음을 다 던져야 한다는 말이 아닌가. 그리되면 더는 취할 몸도 마음도 없어질 것이니 이건 자네가 가지게. 내 젊어 얻은 그때부터 한 번도 마른 법이 없는 술병이네. 내 시가 이제껏 의지해 왔고, 바로 이것에 취해서 헛것을 참인 양 여기고 나와 남을 아울러 속이게 되었지만, 그래도 인간 세상에서는 때로 쓸모가 있을 것이네.”
쓸쓸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허리에 차고 있던 호리병을 풀어주며 시인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시인과 헤어진 젊은이가 ‘알지 못할’ 벌을 가로질러 선비의 오두막에 이르러 보니 늙은 선비는 전과 다름없이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젊은이는 자신의 부탁마저 잊은 듯한 그 선비를 일깨워 가며 하늘에서 들은 말을 전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선비는 아무래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두 번 세 번 되풀이 물었습니다. 그러다가 겨우 믿게 되고 나서는 한나절이 넘도록 안절부절 어찌할 줄 몰라 하며 서성이었습니다.
그 늙은 선비가 겨우 하늘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것은 하룻밤이 지나서였습니다.
“참으로 두렵고 막막하지만 하늘의 깨우침을 받아들일 수밖에. 이제 나도 자네처럼 책 없이 하늘 길을 찾아보려네. 여기 이 책들은 자네가 모두 가져가게. 그래도 세상으로 나가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데는 필요할지 모르겠네.”
늙은 선비는 그 말을 남긴 뒤 작은 봇짐 하나만을 맨 채 오두막을 떠나 ‘알지 못할’ 벌판으로 사라져 갔습니다. 젊은이는 다시 여의주의 힘을 빌어 불러낸 수레에 그 모든 책을 싣고 어느새 마음속의 님처럼 된 아가씨가 기다리는 곳으로 길을 재촉했습니다.
짧지 않은 세월이었건만 아가씨는 아직도 홀로 젊은이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난 순간의 감격과 기쁨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거기다가 더욱 기막힌 것은 두 사람을 얽어 주는 하늘의 뜻이었습니다. 젊은이가 아가씨의 신랑감에 관해 하늘에서 들은 말을 전하자 아가씨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말했습니다.
“제가 홀로 남게 된 뒤로 처음 뵈온 분은…… 바로 낭군이십니다”
외롭고 힘든 길 위에서 그렇게도 자주 아가씨를 꿈꾸며 안았던 젊은이도 그 말에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그는 기꺼이 하늘의 뜻을 받들어 그 아가씨와 결혼하고, 다시 뒤뜰에 묻혀 있는 엄청난 금은 보화까지 찾아내 행복한 가정을 꾸몄습니다.
그런데 ― 이 이야기가 별나게 남다른 것은 실로 알 수 없는 그 결말 때문입니다. 그 뒤로 젊은이는 큰 부자가 되어 아들딸 많이 낳고 행복하게 잘 살았다면 그런대로 무난한 옛이야기 한바탕이 되겠지만, 그게 그렇지 못합니다. 갖가지 진기한 보물과 책에다 엄청난 재산까지 얻게 된 그가 마음으로 그리던 아가씨를 아내로 맞아 아들딸 낳고 행복하게 산 것까지는 옛이야기들과 비슷해도 그다음이 전혀 뜻밖이기 때문입니다.
젊은이가 그렇게 산 지 여섯 해 만이라던가요. 어느 날 밤 아내와 아이들 몰래 그가 갑자기 집을 나가 버렸습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채 홀로 홀훌 떠나 ㅡ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인데, 그 같은 결말로 이야기를 끌고 간 의도가 통 짐작이 안 됩니다.
그 젊은이는 다시 무언가를 묻기 위해 하늘 길을 찾아 떠난 듯싶지만, 그가 알고 싶은 게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이번에도 끝내는 하늘에 이르렀는지, 아니면 헛되이 세상을 헤매다가 낯선 길섶에 뼈를 묻게 되고 말았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습니다. 그가 다시 하늘에 이른 뒤 돌아오지 않은 것이라면 결국 살과 피와 뼈를 둘러싸고 이루어지는 이 세상의 삶은 덧없다는 가르침이 될 것이고, 그렇지 못해 외롭고 고단하게 땅 위를 떠돌다가 죽었다면 하늘 길 같은 부질없는 꿈은 함부로 꾸지 말라는 가르침이 되겠습니다. 하지만 그 어느 쪽이든 모든 일이 다 잘 풀리어 더 남은 문제가 없는 형태로 닫히기 마련인 옛이야기의 결말로는 영 엉뚱하지 않습니까.
(1997년)
2016년 12월 9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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