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맥문학 10월호에 수필[세 總務]가 게재되었기에
보내드리오니 일독하신 뒤에 의견이 있으시면 개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一 松 韓 吉 洙
수필
세 總務
우리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달아 일제의 발악이 극에 달했던 1943년에 병아리 떼들이 종종거리며 모이는 초등학교에 입문하려고 많은 응시자 중에서 입학시험이라는 과정을 거쳐 익산시 웅포 초등학교( 그 당시 국민학교) 에 입학 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3학년 여름방학 중에 해방이 되어 침략자 왜군의 굴레에서 벗어나 내나라, 내 글, 내 말, 내 이름 등을 되찾는 換局(환국)으로 큰 기쁨을 맛보았다.
우리들은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하고 얼렁뚱땅 처삼촌의 묘 벌초하듯 하다가 1949년 7월 21일. 제29회로 졸업을 했으니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 여름이었다.
졸업 후 7년만인 1956년 8월 4일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고찰 숭림사에서 초등학교 29회 동문회를 조직하였다. 이는 우리들의 젊은 기백과 용기로 세상을 흔들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찬 날개를 만든 모임이었다.
다음해에는 모교의 교실을 빌려서 다짐을 하는 2회 모임을 가졌더니 선배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어 눈에 가시처럼 보이기도 했었다. 그 당시에는 지방행정에 자치바람이 불어 면장, 면 의원을 직선으로 선출했던 시기와 맞물렸었다. 조그마한 면 단위 고장에 80여명의 조직이 똘똘 뭉쳐 힘이 날로 달로 무럭무럭 자라는 것을 지켜보던 기성세대들이 우리들을 잠용으로 여겨 기득권을 넘볼까 봐서 그랬는지 미리 겁을 먹고 주시하고 있었다.
결국에는 기성세대들이 우리 조직을 이용하려고 기회만 있으면 사탕발림을 하면서 검은 손을 내밀기도 하고 어느 때는 추파를 던지며 괴롭히기에 우리 동문회 조직은 아예 문을 닫고 휴면기에 돌입하였다.
한해 두해가 지날수록 동문회원 중에는 군에 입대를 하였거나 취업차 여기저기로 흩어지다 보니 깊은 잠을 자지 아니할 수 없는 잠복 기간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다 보니 잠을 너무 많이 잤다. 43년을 늘어지게 잠을 잤더니 게을러지고 멍 충이가 되고 잠 충이가 되었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아니했다. 로마 사람들은 知力으로는 그리스 사람만 못하고 체력으로는 게르마니아 사람만 못하고 상업수완으로는 페니키아 사람만 못하지만 1.000년 로마를 건설한 위대한 사람들이다>라는 말을 상기 할 때에 우리들도 늦잠을 잤지만 분발을 해야 한다는 채찍이 있어서 새 1000년이라는 2000년 10월 10일, 재건 동문회의 깃발을 높이 올렸다.
1학년에서 6학년까지의 역대 우리담임선생님 중 생존하셔서 연락이 닿는 분이 세분이라기에 그날 세분을 모시기로 했으나 한분만 오셨기에 동문 모두는 선생님께 큰 절을 올리고 감사의 송시를 낭송하고 만수무강을 기원했다. 그리고 그날 참석한 27명의 동문들에게서 갹출한 회비로 금반지 3돈짜리 3개를 마련하여 세분 선생님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는 정표로 드리기로 결정하였다.
그날 임원선출을 했는데 선출된 회장 부회장이 식대를 전담키로 하고 총무는 발발이 같이 부지런한 J를 선출하여 동문회의 살림살이를 맡기기로 하였다.
그 뒤로 매년 모임을 갖되 한해는 서울에서 갖고 다음해에는 고향에서 모이는 식으로 서울과 지방을 번갈아 가면서 모이기로 하여 단 한 번도 거르지 아니하고 매년 시행 하다 보니 덧없는 세월은 빠르게 잘도 흘러갔다.
2005년 11월 5-6일은 忠州에서 시인이요, 수필가이며 서예가인 안병헌 동문이 서예작품 전시회를 갖는다기에 충주 관아공원 앞 음식점에서 모임을 갖은 뒤 안 동문의 작품전시장에 갔더니 6학년 담임을 하셨던 안병선 선생님이 오셨기에 선생님을 모시고 개막 테이프를 끊고 병풍 족자 등 정성을 기우린 작품을 감상하고 안 동문을 축하 격려하였다.
우리는 수안보로 이동하여 온천욕을 하고 저녁식사 후 오랜만에 학창시절의 철부지 때 이야기를 하다가 잠 들었다. 다음날에는 미륵사 터와 송계계곡내의 빈신사 터, 덕주사 등을 관람하고 충주호반에 있는 청풍문화재 단지를 해설사의 해설을 들으며 둘러보고 충주로 돌아왔다. 충주에서 청국장백반으로 점심식사를 하였다. 바로 이어서 임진왜란 때 신립대장이 배수진을 치다가 최후를 마친 탄금대를 둘러보고 신라 중앙 탑과 충주 박물관, 그리고 중원고구려비까지 답사 한 뒤 충주로 돌아와서 막걸리 한잔씩 나누는 석별의 모임을 가졌다.
1박2일 끝에 나누는 막걸리 한잔은 도타운 정과 그리움으로 가득 채운 한 잔의 술이었다. 이 속에는 아픔도 서려있고 희로애락이 가득 들어 있는 잔이었다. 일제강점기 조선말을 한다고 친구의 카드를 빼앗는 극악한 짓을 하고 고자질을 시키는 휘어지고 굽어진 교육을 받고 자란 우리들이 아닌가. 이런 사연을 가슴속에 묻고 지내야 할 우리들이기에 석별의 아쉬움은 남달랐다.
2008년 4월 24일. 고향에서의 모임에서 필자가 붙박이로 장기간 맡았던 회장직을 완주군 봉동읍 내에서 가축병원을 하고 있는 이희권 동문에게 넘기는 임원 개선이 있었다.
따라서 지금까지 수고했던 J가 맡았던 총무 직을 서울에 거주하는 R에게 넘겼다. 그래서 회장은 고향에, 총무는 서울에 거주함으로서 연락의 신속성과 책임의 안배를 기했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우리 동문모임은 다른 동문들과 다르게 동문들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깊고 모임에 대한 애틋한 정이 충만한 조직이라고 자부하고 싶다. 국내도 아니고 물 건너 머나먼 미국에서 동문들에 대한 정이 그리워서 거의 매년 참석하는 이점순 동문, 충주애서 몇 번씩 대중교통을 바꿔 타고 참석하는 안병헌 동문, 멀리 부산에서 개근하는 임채규 동문, 바쁜 농사철 부지깽이도 도와야 한다는 봄이나 가을철에도 일거리를 덮어놓고 열심히 참여하는 김길녀와 김진옥 동문, 이 분들에게 감사의 박수를 보내야 한다. 이런 회원이 있기에 동문회에 활기가 돌고 힘이 있는 것이다.
더구나 이 열성회원들은 거액의 특별회비도 매번 내주었는데 많은 교통비를 지불하며 참석 해 준 것 만도 고마운 일인데 巨金까지 보태는 것은 천사표가 아니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 동문들의 많은 협찬이 동문회 운영에 큰 도움을 주고 있었기에 다른 동문들한테서는 적은 회비를 받는 등 운영의 묘를 기함으로서 동문회의 기틀이 탄탄하게 다져졌다.
그런데 회장의 인수인계는 제대로 잘 끝났는데 총무의 인수, 인계에 문제가 있었다. 총무를 맡았던 J가 회비를 결산하여 장부와 함께 통장을 신임 총무에게 넘겨주어야 하는데 차일피일 미루더니 결국에는 회비 보유액의 1/2만 넘겨주고 모임에 일체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畵虎畵皮難畵骨이요 知人知面不知心이라(호랑이를 그리는데 겉모양은 그릴 수 있으나 그 안에 있는 뼈는 그릴 수가 없고, 사람을 아는데 그 얼굴은 알 수 있으나 그 마음은 알 수가 없다)는 글이 명심보감 성심편에 있다. 그 오랜 동안 친구로 지냈으나 어찌 그 마음속을 알 수가 있었으랴.
친구 간에 금전거래를 하면 결국에는 돈 잃고 사람 잃는다고 하더니 옛말 그른 게 하나도 없다.
새로 총무를 맡은 R는 함열 읍내 만석꾼의 손자로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일제 말에 미군기의 공습이 심해지자 주민을 疏開(소개)시키는 정책에 따라 농장이 있는 우리 마을로 내려와서 큰 기와집을 짓고 잘 살았는데 해방 후 농지개혁으로 소작제도가 없어지자 들어오던 도조 수입이 끊기니 삶이 하향곡선을 긋는 상태에 있었다. 그래서 일직이 경찰에 투신하여 전북도내 무주, 순창 등지를 전전 근무하면서 취미로 서예를 익히더니 대가가 되었다.
어느 해인가 서울로 전입하여 노량진 경찰서에서 경무계장을 하더니 경감으로 승진하여 중부 경찰서에서 과장을 하다가 정년퇴임을 하였다.
이 친구는 우리 동문회 총무를 7년을 맡아서 잘 해 왔는데 메르스 전염병으로 온 나라가 뒤끓고 난리를 치던 2015년 6월 16일 갑자기 귀천했다는 문자 메시지가 떴다. 몇몇 동문들에게 연락을 했으나 메르스 때문에 두문불출 중이라고 손 사례를 치기에 나 홀로 낙수첩 제5집 [가슴에 흐르는 江] 1권을 가지고 신대방동 근처에 있는 우신향 장례식장으로 가서 영정 앞에 책을 올려놓고 슬 한잔 헌작하며 명복을 빌어 마지막 모습을 보고 왔다. 동문회에서 공금으로 조의금을 전달하여야 하나 공금을 관리하던 총무가 작고했기에 내 개인으로 조의를 표했다.
사람의 한평생이 너무나 허무하다한들 이렇게 허무 할 수가 있는가? 일정 말기 우리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멋진 양복을 입고 앳된 얼굴로 우리 반에 혜성처럼 나타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승에서 저승으로 소속이 변경되고 호적이 바뀌었으니 너무나 애석하다.
오늘날 엎친 데 덮친다고 야속하게도 비가 오지 아니하여 천하가 매 말라 목이 타는 마당에 메르스라는 전대미문의 괴질이 판치는 때여서 그러는지 총무를 맡았던 동문의 초상마당이 허전하였다. 이 판에 동문회비 결산이나 공금이야기는 언감생심 말조차 꺼 낼 수도 없는 처지인지라 입을 봉하고 나왔다. 아무리 회비가 공금이라고 할지라도 그걸 논하는 건 결례 중의 결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먼저 간 회원보다도 생존하고 있는 우리들의 행과 복이 더 많다고 자위하면 마음이 편하리라.
동문회 총무이야기를 하던 중이니 또 하나 곁달아 새끼 총무 이야기도 한마디 하여야 하겠다.
잠적한 동문회 총무 J가 고향에 거주 할 때 서울에서는 재경 동문들만 자주 모이는 게기가 있었다. 어느 날 인지 잠실 나루역 앞의 부산횟집에서 모임이 있었는데 13명의 회원이 참여했었다. 식대를 개인이 부담하기엔 너무 많아 부담감을 준다고 기어이 더치페이로 하자고 주장하여 식대를 갹출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도리가 아닐 것 같아서 회장인 내가 식대를 지불하고 나서 그 돈은 돌려주라고 했더니 이다음에 공금으로 사용하라기에 임시 총무역할을 하던 Y동문에게 보관시켰다.
그 후 이 Y는 여자동문 Y와 개인 간의 사채 거래로 옥신각신하더니 서로 한다는 말이 “동문 모임에 저 Y가 나오면 나는 안갈 거야” 서로 떠넘기기 작전도 아니고 핑계꺼리만 만들더니 결국에는 두 사람 다 모임에서는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이것도 무슨 조화인지 맹랑하다.
공자님은 <이 세상에 한번 오고 두 번 다시 오지 않는 것은 시간, 말, 기회이다>라고 말씀 하셨는데 이 말씀은 만고의 진리이다.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데 70년이 걸렸다.” 김수환 추기경의 말씀이다. 대 성인이신 김수환 추기경도 사랑이 가슴으로 내려오는데 70년이 걸렸다는데 범부들의 모임인 우리 동문회 조직은 명년이 60년이 되는 모임이니 아직도 사랑이 가슴으로 내려오지 못하였나 보다. 그래서 이러한 엉뚱한 일들이 야기되었는지. 우리 모임의 3총무에게 3재가 끼어서 이런 아름답지 못한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3재도 다 가시었으니 우리 모두는 우리 동문조직을 새롭게 추스르고 정비하여 재출발하는 계기로 삼아야겠다.
웅포초등학교 제29회 동문들이여 자! 힘을 재충전하여 새 출발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