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따라 전례력 따라
쓴 나물과 누룩 없는 빵
가슴에 새기는 내용뿐 아니라 눈과 입과 손과 냄새까지
오감이 동원되는 특별활동은 어르신들이 성경 말씀을 이해
하시는 데 한결 도움이 됩니다. 쉽게 말씀의 뜻을 알아듣고
몸으로 익히며 실천할 수 있도록 북돋아 주지요.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아가던 히브리인들은 모세의 영도
로 홍해를 건넘으로써 이민족의 억압에서 벗어나 새로운 출
발을 했습니다. 그 의미를 되새기는 파스카 예절은 믿음의
여정을 상징하는 예식이기도 하고요.
예절 때 먹는 누룩 없는 빵과 쓴 나물과 포도주는 성당 형
편에 따라 노인대학에서 일체 준비하거나 학생 대표들이 마
련해요. 몇몇 사람이 한꺼번에 많은 빵을 굽기 어려우므로
성당 가까운 빵집에 발효제를 넣지 말고 빵을 만들어 달라
고 미리 주문을 하지요. 우리나라에서 잘 먹지 않는 양고기
는 닭튀김이나 달걀로도 대신하고요.
파스카 예절을 할 때마다 저는 종종 웃음 보너스를 탑니
다. 먹는 음식은 무조건 맛있어야 한다고 여기시는 어르신
들 때문이지요. 노예살이의 고통과 눈물을 상징하는 쓴 나
물, 이집트를 탈출할 때 미처 발효제를 갖고 나오지 못해 누
룩 없는 빵을 먹었던 사연을 헤아리는 대신 모든 음식을 아
주 맛있게 조리해 오십니다.
여학생들이 특히 그렇지요. 쓴맛이 나는 고사리며 도라지
나물을 택한 것까지는 좋아요. 하지만 평생 갈고 닦아온 음
식 솜씨 어디에 쓰랴 싶은지 열과 성을 다해 맛을 내세요.
쓴맛과 향이 안 나도록 데치거나 삶아 온갖 양념으로 맛
나게 버무려서 참기름까지 듬뿍 쳐 오시죠. 치커리 같은 생
야채로 샐러드를 만들 때도 식초와 소금 대신 과일과 꿀로
달달한 드레싱을 곁들이시고요.
음식을 준비할 때 남학생들은 대개 슬며시 뒤로 물러나곤
합니다. 그런데 한 성당에서는 어르신들 백 분이 드실 양고
기를 혼자 준비해 오겠다는 남학생이 계셨어요. 사양을 거
듭해도 성경학교에 기여하고 싶다면서 굳이 자청하셨지요.
정작 예식 날에는 시작 시간이 다 되도록 그분이 나타나
지 않아 애가 탔어요. 고기인 만큼 따뜻할 때 먹을 수 있도
록 정시에 딱 맞춰 오셨더라고요. 한 분 한 분 먹기 좋도록
작은 반찬그릇 백 개에 일일이 양고기를 조금씩 나눠 담아
서요. 모두 크게 감사를 드렸습니다.
준비한 음식이 식탁에 다 차려지면 미리 나눠드린 인쇄물
을 보면서 예식에 돌입합니다. 먼저 주례자가 엄숙하게 예
식의 의미를 선언하지요.
"파스카란 히브리어로서 '건너가다', '지나가다'라는 뜻입
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오랜 노예생활을 끝내고 이집트를
나올 때 천사가 문설주와 상인방에 양의 피를 칠해 놓은 히
브리인 집을 '지나갔다'라는 데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구해 주신 그날을 기억하
는 이 식사는, 옛 생활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행해 떠날 각
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나누는 식사여야 합니다."
이어 해설자가 우리 안에 있는 순수하지 않은 것들, 곧
위선 - 이기심 - 거짓 - 탐욕 등을 상징하는 누룩을 설명
합니다. 새로운 삶으로 건너가기 위해 각자 자기 안에서 제
거해야 할 누룩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살펴보도록 잠시
시간을 드리지요.
대부분의 어르신들은 파스카 예식을 처음 해보세요. 미사
를 제외하고 성당에서 경험한 예식은 성주간 목요일의 '세
족례'가 거의 전부인 것 같습니다.
그래선지 예식을 준비하는 동안 이색적인 수업을 하며 음
식을 나눈다는 기대로 자못 들뜨곤 하시지요. 하지만 주례
자와 해설자, 또 연장자와 연소자가 번갈아 가며 파스카 전
례의 의미와 과정을 설명하고 묵상할 시간도 줌에 따라 아
주 숙연해지십니다.
순서에 따라 포도주를 축복한 뒤 따라 마시고, 쓴 나물을
먹은 다음 빵을 축복하고, 탈출기 12장 독서를 들은 뒤 성
가를 부르고 나서 다 함께 식사를 할 때였습니다. 서울 어
느 성당의 한 그룹에 닭튀김에는 손도 대지 않고 빵만 자꾸
잡숫는 남학생이 있었어요. 꽤 큰 모카빵 한 덩어리를 그분
혼자 거의 다 드셨지요.
노인대학마다 여학생 수가 훨씬 많고 활동적이라서 남학
생들 행동은 어지간해서는 눈에 잘 띄지 않아요. 하지만 그
남학생은 '꾸역꾸역'이라는 말이 떠오를 정도로 빵만 잡수
셔서 집에서 식사를 거르셨나, 닭고기를 못 잡숫는 분인가
의문이 들 정도였습니다.
긴장과 호기심 속에 예식 과정이 다 끝나면 어르신들은
숙연했던 얼굴을 풀고 웃음 지으며 다양한 감상을 나누시
죠. 별걸 다 해본다, 재미있었다, 그런데 무슨 뜻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 등 여러 가지입니다.
마감 정리를 하던 저는 빵만 잡숫던 남학생이 여전히 그
자리에 계시기에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여쭤봤습니다. 할아
버지는 잠시 머뭇거리시다 속내를 보여주셨어요.
"나는 뭘 하다가도 조금만 힘이 들면 금방 그만두곤 했어.
직업도 가정도 안정을 못하고 여기저기 옮겨 다녔지. 그러
니까 요 모양으로 형편없이 사는 것겠지만---. 성당에 다
니면서도 사는 거 힘겹고 지겨울 때마다 에이, 머리 벅벅
깎고 중이나 돼버릴까 싶어 절에도 여러 번 갔었어.
아까 빵 먹을 때 말이야, 내가 그동안 살아온 것도 그렇
고 신앙도 너무 의지가 약한 거 같아서 그걸 좀 이겨보려고
일부러 빵만 먹었어. 내 힘만으로는 아무래도 못하겠으니까
하느님이 그 빵을 통해 나한테 영적인 힘을 더 주십사하고.
도와주시면 조금씩 이겨낼 수 있을 거야---."
누룩 없는 빵을 먹은 시간이 자신의 약점을 자세히 들여
다보며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은총의 시간이 되었음이
분명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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