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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실 스크랩 [경북 안동]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권오설(權五卨)
문대식 추천 0 조회 139 19.11.18 00:5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권오설(權五卨)

 

1899∼1930. 사회주의운동가. 별명 김형신(金亨信). 경상북도 안동 출신. 일본 유학생으로 1923년 7월 서울에서 결성된 사회주의사상단체인 신사상연구회(후에 화요회로 개칭)에 참여하였다.

1924년 4월 창립된 조선노농총동맹에서 화요회를 대표해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3년 6월에는 김찬(金燦)의 권유로 조선공산당의 사전조직인 코르뷰로 국내부에 참여, 조선노농총동맹의 당 야체이카(細胞)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1925년 4월 17일 국내에서 결성된 조선공산당 조직에 가담했으나, 실제로 활동한 분야는 조선공산당의 방계조직인 고려공산청년회였다. 조선공산당이 결성된 다음날 서울 박헌영(朴憲永)의 집에서 동아·조선·시대일보 대표, 서울과 지방의 각 청년회 대표, 노농총동맹 대표 등 18명이 모여 고려공산청년회를 조직했는데, 여기에서 7명의 중앙집행위원중 1명으로 선출되었다.

1925년 11월 제1차조선공산당검거사건(신의주사건)으로 책임비서 박헌영이 붙잡히자 김찬·조봉암(曺奉岩) 등이 해외로 망명, 중앙집행위원 중 유일하게 국내에 남게 되자 고려공산청년회의 재건에 착수, 12월 중순에 우선 임시중앙간부를 구성하고 제2대 책임비서에 취임하였다. 그 뒤 제2차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과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로서 강력한 실력자가 되었다.

조선공산당 간부로서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국장일에 민족적인 규모의 거사를 계획, 박내원(朴來源) 등에게 선전문 약 5만 매를 인쇄하게 하여 손재기(孫在基)의 집에 감추어 두었다가 6월 7일 130여 명의 동지들과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이 사건으로 제2차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는 해체되었다. 징역 7년형을 언도받고 복역중 옥사하였다.

 

 

묘소 입구 안내 표지석

 

권오설선생 묘

 

 

 

 

 

 

 

 

[권오설 관련 뉴스-2009.03.05 오마이뉴스 인용  ]

철관에 갇힌 78년 통한의 세월

6.10만세운동 주역 권오설 철관 공개되다

기사 관련 사진
 철관에는 납땜을 한 자욱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융희황제의 장례일인 1926년 6월 10일에 일어난 6?10만세운동은 3?1만세운동을 계승한 제2의 만세운동이었다.

이 만세운동을 기획했던 권오설은 7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 1930년 4월 17일 순국했다. 4월 18일 시신은 신간회경성지회로 옮겨졌고 4월 21일 운반용 철관에 실려 서울역을 떠나 고향땅인 안동 가일로 운구되었다. 아들 권오설의 주검을 맞은 아버지는 죽어서까지 탄압을 당하던 당시 상황을 고스란히 적고 있다.
 
"이튿날 새벽이 밝을 무렵 수의가 대략 갖추어져 장차 염한 것을 고치려고 관 뚜껑을 열어보니 단정한 모습은 변함없이 잠자는 것 같았으며, 금니도 번쩍였다. 고문한 흔적은 검은 점을 이루었으니 이 모두가 독을 쓴 자국이었다. 내 비록 목석(木石)이라 할지라도 차마 너의 시신에 손을 대고 싶었겠는가마는 내 손으로 너의 입에 구슬과 쌀을 물려주고 너의 시신을 염하였다. 다음 입관을 하려고 목수에게 관을 만들게 하려는데 이를 하지 못하게 하여 할 수가 없었다. 저들은 어찌하여 (중략) 손님의 출입을 금지하고, 예에 따라 장례를 치르지 못하게 하였을까?"

기사 관련 사진
 2008년 4월 14일, 권오설 선생 철관 발굴 장면. 권오설 부인의 유해를 합장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다. 안동시 제공

 

그는 죽어서도 일경의 감시와 강압으로 말미암아 준비한 관을 사용하지 못하고 그대로 두꺼운 철관 속에 갇힌 채 묻히게 되었다.

지난해 4월 14일, 부인의 유해를 함께 묻기 위해 봉분을 파헤치자 관이 세상에 드러났다. 순국한 지 78년 만에 드러난 관은 차디찬 철관이었다. 당시 철관은 부식이 심한 상태로 관 뚜껑은 내려앉은 상태였다.

3월 1일부터 안동독립운동기념관(관장 김희곤·안동대 사학과 교수)은 3·1만세운동  90주년을 맞아 "1926년! 6·10만세운동! 그리고 안동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특별기획전을 열고 있다.

 

항일투쟁과 6·10만세운동에 참여하다


권오설은 1897년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 가일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일생 34년은 사회운동과 계몽활동을 통한 조국 광복의 여정이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민족운동에 뛰어 든 것은 1919년 전남도청 근무 중 광주 만세운동에 참여하면서 부터였다. 이후 1920년 고향으로 돌아와 원흥학교, 풍산소작인회, 안동청년회, 조선노동공제회안동지회 등에 참여했다. 1924년 서울로 가서 화요회를 비롯해 조선노동총동맹, 신흥청년동맹, 조선공산당 등에서 조국 광복을 위해 노력하였다.

기사 관련 사진
 지역인사와 주민들이 항일운동가 권오설이 죽어 갇혀 있었던 철관을 둘러보고 있다.

 

6·10만세운동은 1926년 4월 말경부터 기획되었다. 권오설(權五卨, 1879~1930)은 6·10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조선공산당의 승인을 얻어 '6·10투쟁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3·1만세운동과 같이 전 민족이 참여하는 운동을 펼치기 위해 통일전선체 조직에 나섰다. 그 결과 천도교와 조선공산당 ? 학생층 등 다양한 주체들이 정치적 이념을 초월하여 통일전선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만세시위가 일어나기 직전인 6월 7일 권오설은 체포되고 말았다.
시위가 무산될 위기에 부딪혔다. 6월 10일 오전 8시 30분경 장례행렬이 서울 종로 3가 단성사 앞을 지나자, 안동 예안 부포출신의 이선호(李先鎬, 당시 중앙고등보통학교)가 뛰어나오며 만세를 불렀고 이는 6·10만세운동의 신호탄이 되었다. 중앙고등보통학교와 연희전문학교 학생들은 서울 곳곳에서 격문을 배포하며 만세운동을 펼쳤다.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은 일생을 민족운동에 몸 바치다 순국한 권오설의 뜻을 기리고, 한국근대사의 역사적 자료로 활용하고자 남아있는 부분을 수습하여 한국전통문화학교 보존과학연구소(충남 부여)에 보존을 의뢰하였다가 이번 3월 1일부터 이 철관을 공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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