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기억을 잃었다면 그 ‘나’는 ‘나’입니까? 참 오래 전에 생각해보았던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한 주간 거의 멘붕 상태로 지내며 이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나의 이야기들을 잃었습니다. 어쩌면 회복 불능이 될 수도 있다는데 만약 그렇게 되면 어찌 될까, 아직도 생각 중입니다. 여태 살아온 이야기들, 그 모든 것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면 지금 나는 무엇이 되는 건가? 컴퓨터가 바이러스 해킹을 당하여 그 안의 ‘내’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과거뿐 아니라 앞으로 사용할 모든 자료가 사라진 것입니다. 돈이 날아가 빈털터리가 되었다면 다시 벌면 됩니다. 그런데 삶의 자료는 어쩌지요? 다시 살아볼 수도 없고, 그 때의 기억을 되살릴 수도 없으니 말입니다. 가슴이 콱 막히는 기분입니다.
흘러간 과거는 그냥 땅에다 묻어둘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인생 70이라는데 다시 사는 것으로 할까? 이제 다시 시작이다, 그게 가능한 이야기일까요? 일단은 기다려봅니다. 시간도 돈도 얼마를 요구할지, 그것도 걱정이기는 합니다. 그래도 ‘나’를 되찾을 수만 있다면 아마도 감당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가 들어서기 전에는 일일이 손으로 글을 써서 보관을 하였습니다. 컴퓨터를 사용하고부터는 얼마나 편해졌는지 모릅니다. 쓰고 고치고 저장하고, 만사가 편리합니다. 편리한 만큼 사고에 대비하지 아니하면 한꺼번에 날릴 수도 있구나, 깨닫습니다.
영화 이야기는 그나마 다행스럽게 CGV 개인 저장 공간이 있어서 그곳에 함께 보관하고 있었기에 이렇게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집에서 케이블로 관람한 것에 대한 이야기는 사라졌습니다. 그 동안 보낸 이메일을 뒤져 도로 찾아 와야 하겠지요. 보낸 적이 없다면 그냥 날아간 것입니다. 이 충격을 이겨내려면 시간 좀 걸리겠습니다. 아무튼 당분간 설교는 보내지 못합니다. 마음이 참 아픕니다.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니, 이 나이에 그게 쉬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쌓인 과거가 많은 만큼 짐이 무겁기는 하군요. 맞습니다. 심플하게 사는 것이 행복입니다. 5월도 그렇게 가네요. 더 좋은 한 달, 6월을 기대합니다. 건강하게 행복하게!!^&^
2020년 5월 30일 김종우 목사 드림
<톰보이>
음식을 맛있게 아주 잘 먹었는데 먹고 나서 그 음식이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그런데 자기가 혐오하는 동물을 잡아서 만든 음식입니다. 이 사실을 알면 어떤 반응이 나옵니까? 얼마 전 비슷한 경우를 당한 연예인의 모습이 화면에 나타났습니다. 그 표정을 흉내 낼 수 있겠습니까? 이미 뱃속으로 들어간 것을 뱉어낸다고 나오겠습니까? 먹기는 잘 먹었는데 기분은 그야말로 짜증 급상승입니다.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지 정말 생각이 안 납니다. 배신감이라고 하기에는 불합리하기도 합니다. 누가 억지로 먹으라 한 것도 아닙니다. 먹어보라기에 먹어본 것뿐입니다. 그런데 맛이 꽤 괜찮았거든요. 그러니 좀 더 신나게 먹었습니다. 잘 먹고 나서 배신감이라니요?
혹 여자로 알고 사귀며 가끔 입맞춤도 했습니다. 나중에 여자가 아니라 남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분이 어떨까요? 구역질나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한쪽은 알고 한 것이고 다른 한쪽은 전혀 모르고 한 것입니다. 속였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알고 나면 기분은 된장 씹은 맛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동안 입맞춤한 것 모두 뱉어내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기분이 돌아오는 것도 아닙니다. 상처로 그냥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알아서 해결해야 하지요. 그 기분, 그 마음은 아마도 오래도록 남아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후로는 매우 조심스러워질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상대방을 일일이 확인할지도 모릅니다.
혼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해결해야만 합니다. 외딴 섬에 홀로 산다면 모르되 사회 속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살려면 밝혀야 합니다. 아니면 스스로 외톨이 구실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뜻하지 않게 발생할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필요합니다. 자기는 괜찮다 하더라도 상대방이 원치 않는 상처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남자라고? 여자라고? 평소 알고 있던 이성이 아니었다면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사귄 시간과 깊이만큼 상처는 깊고 오래 갈 것입니다. 양쪽 모두 불편한 일입니다. 그런 사고는 미리 피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미리 알려주어야 합니다. 웬만하면 이미 겉모습으로 드러나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 됩니다. 이사 와서 처음 만난 이웃 여학생입니다. 자기를 ‘미카엘’이라고 소개합니다. ‘리사’는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던 모양입니다. 동네 아이들에게 새로 이사 온 미카엘이라고 소개해줍니다. 그 아이들과 어울려 축구도 하고 수영도 하며 잘 어울려 놉니다. 그리고 둘은 서로 좋아합니다. 특히 리사는 보다 적극적입니다. 입맞춤도 합니다. 미카엘에게는 어리고 귀여운 여동생 ‘잔’이 있습니다. 잔이 언니의 비밀을 알게 됩니다. 언니가 잔의 입을 막습니다. 비밀을 지켜줄 것을 다짐받습니다. 하기야 잔도 언니보다 오빠를 더 좋아합니다.
어느 날 문제가 일어납니다. 동생 잔이 동네 아이에게 매를 맞고 들어옵니다. 화가 난 언니가 쫓아나가서 그 아이와 맞장 뜹니다. 그리고 두들겨 패줍니다. 그 아이가 집에 돌아가니 그 엄마가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찾아옵니다. 당신 아들 미카엘이 우리 아이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항의합니다. 미카엘? 엄마는 집을 잘못 찾아왔다고 하지요. 그런데 집안에 있던 미카엘을 지적합니다. 엄마는 일단 사과하여 돌려보냅니다. 그리고 생각해봅니다. 이게 무슨 일이지? 그러잖아도 하고 다니는 짓이 예상치 않았습니다. 니가 왜 미카엘이야? 딸을 불러 호되게 꾸짖습니다.
우리가 자라면서 흔히 경험합니다. 남자는 여자를 꿈꾸기도 합니다. 엄마의 치마를 입어보며 예쁜 모습을 그려보기도 합니다. 반대로 여자 아이는 남자를 꿈꾸기도 합니다. 근육을 세워보기도 하고 격한 운동을 해보기도 합니다. 물론 요즘은 아무리 격한 운동도 여자라고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대체로 집안에서 여자 아이는 힘든 것을 피하거나 피하게 만듭니다. 얼마나 개선(?)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의식 자체가 변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분명한 것은 신체적 차이는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개인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자랄 때 부모가 얼마나 받아주느냐에 달려있겠지요.
아이들이 축구를 하는데 리사는 껴주지 않습니다. 차별일까요? 사내아이들이 그렇게 규정짓고 있는 것이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요? 모두가 계속 노력하고 있듯이 남녀 불평등이나 차별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구분은 해야 할 것입니다. 예컨대 화장실을 공동으로 사용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글쎄 미래 시대에 그런 일이 생길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남자가 아이를 낳을 수는 없습니다. 양육은 공동 책임이어야 하지만 남자에게 아기를 낳으라고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남자와 여자를 이제는 자란 후에도 선택할 수 있을 만큼 과학과 의술이 발달하였지만 일단 하나의 성이 결정되고 나면 그에 따른 삶을 인정하고 살아야 합니다.
영화 ‘톰보이’를 보았습니다. 그만한 때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려는 혼란의 감정을 봅니다. 등장하는 아이들의 연기도 괜찮습니다.
<레이니 데이 인 뉴욕>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 맞습니다. 아무 일도, 짐작하는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자기 의지로 그렇게 된 것인가, 하는 의문은 남습니다. 그런 상황이 되었고 도망 나온 것입니다. 자칫 아무 일이 생길 뻔 하였지요. 그러니 실제 상황은 아무 일도 없었지만 그 마음까지 믿을 수 있는지 자신할 수 없습니다. 물론 남자가 그것까지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단지 그 시간까지 이른 그녀의 행동을 가지고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믿어도 되나? 믿어야 하나? 자기의 선택이지만 아마도 많은 경우 부정적인 결론을 내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얼마나 좋아하고 사랑하고 빠져있는지 그것이 판가름할 수도 있지만 판단하기 쉽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하기야 그 무렵에는 이런 사랑 저런 사랑, 여러 가지 사랑을 경험하며 지나갑니다. 꼭 결말을 보는 사랑이 아니라 맛을 보는 정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제 겨우 대학생일 뿐입니다. 그 때의 짝이 평생의 짝이 될 수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는 좀 더 경력(?)을 쌓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또한 유익하기도 합니다. 실연은 괴로운 일이지만 경험해보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 아픔을 이길 정도라면 웬만한 인생의 고난은 이겨낼 역량을 갖추게 될 테니 말입니다. 마음의 상처 중에 가장 큰 것에 해당됩니다. 지나고 나면 보다 성숙해진 자신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쓴 맛 중 일찍 경험할 수 있는 품목 중 하나입니다.
공부에는 별 관심이 없고 그렇다고 뚜렷한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저냥 지냅니다. 대학도 가고 싶어서 간 것도 아니고 어쩌면 엄마의 허영심에 맞춰진 것일 수 있습니다. 한 가지 특기는 있습니다. 도박입니다. 카드놀이로 진작 떼돈까지 법니다. 한 가지 더 있다면 억지로 배웠든 아무튼 그래도 꽤 피아노를 친다는 것입니다. 이성에게 보일 수 있는 매력 중 하나 아닙니까? 꽤나 부유한 집안에서 불편함 없이 자라고 이제 나름의 인생을 만들어가야 할 나이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냥 한량처럼 지냅니다. 장래를 걱정하지도 않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을지 모릅니다. 게다가 예쁜 부잣집 아가씨 대학생과 교제 중입니다.
‘개츠비’와 ‘애슐리’는 한 대학의 연인(?)입니다. 개츠비는 대학이라고 공부하려고 다니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다니는 거죠. 애슐리는 학교신문 기자입니다. 언제고 애슐리와 멋진 도시 뉴욕을 거닐고 싶어 합니다. 마침 애슐리에게 유명 영화감독의 인터뷰 허락이 들어왔습니다. 뉴욕으로 만나러 가야 합니다. 이야말로 신나는 기회입니다. 그깟 한 시간 인터뷰 끝나면 우리만의 시간을 누릴 수 있습니다. 두 청춘남녀는 각자의 꿈을 가지고 뉴욕으로 갑니다. 애슐리가 보다 큰 꿈을 가진 것에 비하면 개츠비는 너무 평범합니다. 비록 학교신문이지만 이번 인터뷰 기사가 자신의 경력에 대단한 힘을 발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 뉴욕의 낭만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개츠비의 기대는 그것과 전혀 다르지요. 그저 두 사람의 낭만을 만들면 족합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뉴욕에 들어옵니다.
일이 꼬이기 시작합니다. 애슐리에 대한 인상이 좋았고 대화에 빠져 감독이 제안합니다. 함께 최신작을 관람하자고. 이런 기회를 어찌 마다합니까? 작가까지 동석합니다. 금상첨화. 기사는 특종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감독이 관람 중 맘에 들지 않는다고 뛰쳐나갑니다. 작가와 함께 찾아 나섭니다. 길에서 작가의 부인이 작가 친구와 외도하는 장면을 함께 목격합니다. 떨어져 소개받은 촬영소로 먼저 갑니다. 거기서 유명 배우를 만나게 되고 사정 이야기하다 가까워집니다. 함께 저녁식사까지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집으로 이끌려 갑니다. 일이 벌어지려는 찰라 배우의 연인이 예정보다 빨리 귀가합니다. 속옷차림으로 도망(?) 쫓겨나옵니다.
이렇게 저렇게 데이트를 연기하는 애슐리를 기다리다 개츠비는 길에서 우연히 동기친구가 단편 촬영하는 것을 만납니다. 그리고는 갑자기 빈자리를 대역으로 맡아달라고 합니다. 그것도 여자와 키스하는 장면입니다. 상대는 알고 보니 전 여친의 동생 ‘챈'입니다. 어색하게 시도하다 오히려 진짜 몰입합니다. 오히려 개츠비와 챈이 뉴욕거리를 함께 걷고 박물관 관람까지 합니다. 거기서 친척에게 들켜 엄마의 파티에 마지못해 참석합니다. 애슐리 대신 거리의 여자를 돈으로 끌어들여 임시방편으로 사용합니다. 엄마는 금새 눈치를 챕니다. 발끈하지만 오히려 그것을 기회로 아들에게 엄마의 부끄러운 과거 비밀을 이야기해줍니다.
도대체 무엇을 이야기하려는지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 모두 멋대로의 연애편력을 이야기하려는 건가요? 비교가 될지는 모르지만 우리나라 홍상수 감독이 생각납니다. 좀 독특하지요. 그래도 홍 감독은 나름의 메시지는 있습니다. 그런데 이건 뭔가요? 또 영화 ‘섹스 앤 더 시티’가 생각납니다. 그러나 그 영화는 여성들의 주관 있는 삶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장면은 더욱 기찹니다. 개츠비와 챈이 비오는 거리에서 키스하는 장면으로 마칩니다. 영화 ‘레이니 데이 인 뉴욕’(a rainy day in new york)을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