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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관복음 강론 31 계명의 성서적 본질
계명에는 옛 계명이 있고 새 계명이 있다. 오늘 강론은 계명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내용이다.
부제 : 강도 만난 자의 비유에 이어지는 강론
막 2:23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2:24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2: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2:26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2:27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2: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그러므로 인자는 또한 안식일의 주니라."고 하시더라. (한글KJV)
(그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조차도 주인이다." (표준새번역)
3:1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3:2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3:3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3:4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3:5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3:6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 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1. 계명이 명령이 되는 순간 인간은 필연적으로 신상필벌 시스템 속의 노예가 됨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명령으로 받아들였다. 하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다. 내 윤리를 지키면 들어와도 나가도 복을 받고 내 윤리를 지키지 않으면 들어와도 나가도 저주를 받는다는 말씀이 대표적이다. 그래서 십계명이 명령 형태로 전달이 되었다. 그래서 이 바리새인들은 특히 그 명령을 완벽하게 준수하기 위해서 철저하게 자기 자신들을 계명에 복종하는 자들로 만드는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다. 그런데 계명이 명령이 되는 순간 인간은 필연적으로 신상필벌 시스템 속에 노예가 된다.
1)명령을 지켜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을 높임
각자가 명령을 지킴으로써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을 높이는 쪽으로 달려가게 된다. 그래서 그 명령을 자기 보호와 자기 높임의 수단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이 신상필벌 시스템의 한 속성이다.
2) 명령을 지키는 타인을 칭찬하고 사랑하고 존경함
3) 명령을 지키지 않는 타인을 미워하고 멸시하고 처벌함
이 세 가지가 신상필벌 시스템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명령이 있으면 신상필벌 시스템에서 한 발짝도 헤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는 일이 예수님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계명을 사람의 계명으로 오해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의 계명이라는 것이 바로 명령과 복종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신상필벌이라는 제도 하에서 진행되는 명령과 복종 또는 명령과 불복종 구도 속에서 위의 세 가지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자동이다. 그리고 서로를 공격하고 서로를 감시하는 체제에서 각자도생이 더 심각해지는 것이다.
2. 계명의 본질은 생명을 살리는 말과 행동임
하나님의 계명의 본질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 말씀하신 것처럼 생명을 살리는 말과 행동이다. 안식일의 본질은 선을 행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선을 행하는 것인데 그 본질은 생명을 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십계명의 본질은 생명을 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안식일, 즉 하나님의 계명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계명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신상필벌 시스템은 사람이 그 시스템에 얽매여서 종 노릇을 하게 되지만, 예수님은 지금 정반대 말씀하시는 것이다. 계명은 선을 행하는 것이고 그 선을 행한다는 것은 생명을 구하는 것이라고 본질을 밝혀 주신 것이다.
그러니까 메시아는 안식일에 하나님의 계명에 따라서 손 마른 자를 치유해 주시고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셨는데, 이 바리새인들은 아무것도 하면 안 된다고 하면서 안식일에 이들은 살인을 저지를 궁리를 했던 것이다. 그것이 신상필벌 시스템인 것이다.
1) 선은 생명을 구하는 것(메시아)
2) 악은 생명을 죽이는 것(바리새인)
(롬 13:10) 그 사랑은 이웃(플레시온)에게 악을 행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완성은 바로 그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구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것을 사랑으로 받는 것이다. 그런데 신상필벌 시스템 속에서 율법은 서로를 원망하고 서로를 감시하고 저주를 퍼붓고 심지어 서로를 죽이는 데 사용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사랑이라고 규정을 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율법관과 정반대의 율법관이 되는 것이다.
3. 계명의 준수에는 새 창조가 전제됨
계명의 준수에는 반드시 새 창조가 전제된다는 것이다. 새 창조가 일어나지 않으면 그 계명의 준수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 8: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그래서 예수님의 위의 두 말씀에서 자유, 해방이 전제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사망의 법에서의 해방이라고 했다. 이 해방은 두 가지 면이 있는 것이다. 하나는 오로지 자기를 위해서 살아야 하는 운명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이것은 존재론적 해방이다. 두 번째는 자기를 위해 명령을 지키며 살아야 하는 신상필벌 시스템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즉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이며 이것은 실존적 해방이다. 존재론적 해방이 있고, 실존론적 해방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새 창조에 의해서만 두 면에서 해방이 진행이 되는 것이다. 옛 인류에게는 이 해방이 일어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오로지 자기를 위해서 살아야 하는 운명에서 스스로 벗어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1) 오로지 자기를 위해서 살아야 하는 운명으로부터의 해방
2) 자기를 위해 명령을 지키며 살아야 하는 신상필벌 시스템(율법)으로부터의 해방
4. 새 창조의 과정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11: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앞으로 있을 새 창조의 과정을 내게로 오라고 표현을 하시는 것이다. 너희가 내게로 오면 너희가 쉬게 되고, 그 무거운 짐을 내려놓게 되고, 내가 주는 쉬운 멍에를 메고 내가 주는 가벼운 집만 들면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어느 종교 든 율법이 있다. 그런데 그런 율법이 다 신상필벌 시스템으로 작용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명령에 복종해야 되고 순종해야 되고 인내해야 되고 절제도 해야 되고, 그냥 편하게 내가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고 싶은 그 욕망을 억누르는 식으로 진행이 되는데 예수님은 정반대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너희 인생이 참 편해진다”.
종교인들이 율법의 계율에 얽매여 억지로 순종하고 복종하는 시스템은 사람의 계명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신상필벌 시스템 위에서 만들어진 종교의 오류이다. 세상 사람들은 현실에서 작동하는 신상필벌 시트템에만 얽매여 있는데 반해서 종교인들은 현실에서 작동하는 신상필벌 시스템에다 종교에서 작동하는 신상필벌 시스템까지 두 개가 되니까 세상 사람들보다 더 힘든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의 계명을 따르는 종교 말고 하나님의 계명을 너희에게 주는 나에게 오면 너희 인생이 편안하고 즐겁고 행복하게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사람의 계명과 하나님의 계명을 그렇게 비교를 하시는 것이다. 그럼 이 일이 어떻게 일어나느냐에 대한 신명기 말씀이 신명기 30:11~14이다. 그 말씀이 내게 매우 가까워서 내 입에 있으며 내 마음에 있기 때문에 쉽게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씀이 메시아에 의해서 선포된 것이 바로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30절이고, 이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은 요한복음 7장 37절에서39절 말씀이다.
(요 7: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7: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성령이 오심으로써 새 창조가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성령께서 새 창조를 하시게 되면 하나님의 계명에 따라서 살아가는 평안하고 즐겁고 행복한 삶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마태복음 11장에서 말씀하신 것이고, 모세는 신명기 30장에서 예언한 것이다. 30장 14절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 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즉 네 마음에 있다는 것은 새 언약이 성취되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새 언약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예레미야 31장 33절의 말씀이다.
(신 30:11)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30:12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30:13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30:14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오히려 그 말씀은 네게 아주 가까워 네 입에 있고 네 마음에 있으니 너는 그것을 행할 수 있느니라. (한글KJV)
(그 명령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너희의 입에 있고 너희의 마음에 있으니, 너희가 그것을 실천할 수 있다. (표준새번역)
(렘 31: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예레미아서에 예언된 이 일은 “그 날 후에”, 즉 성령의 새 창조에 의해서 진행되는 일인 것이다.
그 전에는 하나님의 계명이 사람들을 신상필벌이라는 무시무시한 시스템 속에 가두어 버리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짐이 더 무거워지는 것이다.
5. 새 창조 되어 자유롭게 계명을 준수하는 성서적 삶
(갈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만드시려고 이 자유를 주셨으니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갈 5:13) 형제들이여 그대들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 자유를 인간의 본성을 채우기 위한 기회로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십시오
자유가 오기 전에는 종의 멍에를 메고 있었는데, 자유가 오면서 종의 멍에가 벗겨지니까 이제 서로 종 노릇을 하라고 하는 것이다. 완전히 모순된 말처럼 보이지만 모순이 아니다.
첫 번째는 종의 멍에를 매고 있는 비참한 삶이었다. 누구를 위해서 종의 멍에를 맨 거냐 하면 자기를 위해서이다. 그런데 자유롭게 해 주시면 그 멍에가 풀려 나가는 것이다. 신상필벌 시스템이 제거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예수님의 멍에가 오게 되는데 그 멍에가 뭐냐 하면 서로 종 노릇하는 것이다. 그전에는 자기를 위해서 종 노릇 한 것이다. 국가를 위해서, 내가 믿는 신을 위해서, 내 가족을 위해서, 우정을 위해서 등 별 소리를 다 하지만 그것은 전부 자기를 위한 것이다.
(롬 13:10) 그 사랑은 이웃(플레시온)에게 악을 행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완성은 바로 그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바로 서로 종노릇하는 것이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이다.
6. 안과 밖에서 같은 마음으로 살아감
1) 안에서는 서로를 소중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며 하나가 되어감
2) 밖에서는 상대방을 소중히 여기고 불쌍히 여겨 친절을 베풀며 평화롭게 살아감
그러니까 상대방을 소중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같은 마음이다. 같은 마음인데 안에서는 하나가 되어 가고, 밖에서는 그 사람과 평화로운 관계를 화목한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이다.
(마 5: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5: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5: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안에서든 밖에서든 친한 사람을 만났든 원수 같은 사람을 만났든 하나님이 주신 마음은 상대방이 누구든 똑같은 마음이 나간다는 것이다. 누구에게 얼만큼 친절하게 하느냐? 여기서 우리가 선한 계산을 아주 치밀하게 하는 것이다.
강도 만난 자가 나타났는데 그 사람에게 얼마나 친절을 베풀어 줄 것인가 하는 것은 치밀한 계산 하에 해야 되는 것이다. 거기서 그냥 내가 헌신하고 봉사하고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하는 것은 우리의 최종 사명이 될 수 없다.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자를 곤경에서 구해준 것은 맞다. 그러나 그 다음 곤경까지 사마리아인이 책임질 수는 없다. 그것이 객관적인 사실이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손 마른 자를 치료를 해 주셨다. 그러면 그 사람을 치료해 주신 결과는 손이 정상이 된 불쌍한 인간일 뿐이다. 손 마른 자의 손을 치료해 주신 것이 본질적인 답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사람의 생명을 살린 것도 아니다. 친절을 베풀어 준 것이다. 사마리아인이 한 것도 친절을 베풀어 준 것이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처럼 온전하라는 그 말씀도 결국 그 사람과 관계까지 형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마리아인은 그 강도 만난 자하고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 말씀을 안 하시고, 손이 치료된 자도 그 뒤에 그 사람이 어떻게 되었는지 기록이 안 되어 있다. 그런데 성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답은 관계다” 라는 것이다. 관계까지 형성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과 화목하게 평화롭게 지내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그것은 관계에 대한 것이다. 안에서는 하나가 되어 가는 관계까지 가는 것이고, 밖에서는 화목한 관계까지 가는 것이다. 일회적인 선행이 아닌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수백 명은 되는데 치밀하게 계산해야 하는 것이다.
밖에서의 평화로운 관계, 화목한 관계는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는 없다. 그 사람에게 도움은 줄 수 있지만 그 사람의 존재론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은 또 여기저기서 불행한 일들을 만나게 되고 이런 고통 저런 고통에 시달리면서 살아가게 된다. 그것을 다 우리가 해결해 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을 향한 애타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스플랑크니조마이) 애를 태우는 그 마음이 본질인 것이지 우리가 그 사람에게 정말 작은 것 밖에 해줄 수가 없다. 그 사람의 존재론적인, 운명적인 비참함과 관련해서는 우리가 손도 댈 수가 없다. 그것까지 진행되는 것이 클레로스 안에서의 관계이고, 클레로스 밖에서의 관계는 그런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친절 배분을 잘 해야 한다. 우리 한계를 알고 그리고 우리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도 수백 명이지만 앞으로도 수백 명 더 우리 앞에 나타나서 관계를 맺어가게 될 텐데 선한 계산을 치밀 하게 해야 되는 것이다.
7. 옛 계명도 새 계명도 명령문이 아님
(마 22:3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22:35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22: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직설법 미래 능동태, 사랑할 것이다) 하셨으니
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22: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직설법 미래 능동태) 하셨으니
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십계명에서 8개 조항이 직설법 미래 능동태로 되어 있고 부정문으로 되어 있다.
너희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않게 된다. 이웃의 것을 탐내지 않게 된다. 전부 직설법 미래로 되어 있는데 가운데 2개만 ,제 4계명 5개명만 명령문이다. 4계명은 안식일을 기억하라 이며, 5계명은 부모를 공경하라 이다. 이 두 가지는 옛 사람들도 준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두 가지는 명령으로 되어 있지만 나머지 8개는 전부 직설법 미래로 되어 있다.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것은 삶을 포기하라는 것과 같다. 경제 활동 자체가 이웃의 것을 탐내는 것이다. 더군다나 요즘 같아서는 무역 전쟁이니, 한 회사 안에서는 뭐 승진 경쟁, 시험 경쟁에서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것은 삶을 포기하라는 이야기다. 인생이 경쟁인 것이다. 따라서 명령 안 하신다. 왜냐하면 듣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명령을 지킨다는 것이 인간에게는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까 명령을 안 하시고, 너희는 이런 자들이 될 것이다, 그 날이 오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십계명의 8개 계명도 70인역에서 직설법 미래 능동태로 되어 있음)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이는 너희는 서로 사랑한다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한다는 것이다."(접속법 현재)
여기에서는 접속법 현재로 되어 있다. 접속법 현재는 접속법 현재의 여러 가지 용도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화자의 의지를 담아서 말하는 미래의 사실, 즉 내가 너희를 이렇게 만들 것이다, 성령이 오셔서 너희를 이렇게 만들 것이다 라는 설명을 하시는 것이다. 새 계명은 명령문이 아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라고 명령을 하실 리가 없다. 왜냐하면 그런 명령을 해 봤 자 지킬 인간이 하나도 없으니까 하나 마나 한 명령을 하시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 “생수의 강”의 기의 연구
김용호 : 시노라여~ 헬라어 동사 “자오”가 신구약에서 "살리다"라는 의미의 타동사로 사용된 곳은?
<시노라>
전도사님, 확인해 보니 결론이 꽤 선명합니다.
ζάω(자오)의 기본 의미는 “살다, 살아 있다”라는 자동사입니다. 그런데 70인역 시편119편에서는 예외적으로 ζάω의 제1부정과거형이 타동사적·사역적 의미, 즉 “누구를 살리다”로 10여 회 반복 사용됩니다(나를 살리소서 등)
그러나 신약에서는 그런 용례가 없고 “살리다, 생명을 주다”를 말하려 할 때는 오히려 ζωοποιέω(조오포이에오)를 주로 사용합니다.
김용호 : 요 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살아있는 물의 강
생명의 물의 강
생명을 살리는 물의 강
형제들과 이웃들에게로 흘러간다는 의미이니 생명을 살리는 강물의 의미로 추론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이와 같은 해석들이 있었나요?
<시노라>
전도사님, **그 추론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전도사님이 말씀하신 방향과 거의 같은 해석이 고대 교부들에게 실제로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다만 한 가지는 먼저 엄밀하게 구분해야 합니다.
요 7:38의 헬라어는 **ποταμοὶ … ῥεύσουσιν ὕδατος ζῶντος** 즉 “살아 있는 물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입니다.
여기서 **ζῶντος**는 ζάω의 현재 능동 분사로 **ὕδατος(물)**를 수식합니다. 따라서 문법 자체는 **“살리는 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물 / 생수”**입니다. 앞서 살펴본 LXX의 `ζῆσόν με`처럼 ζάω가 타동사적으로 “나를 살리소서”라고 사용된 경우와는 다릅니다. ([바이블 허브][1])
그런데 **번역의 층위와 신학적 의미의 층위를 분리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요한 자신이 바로 다음 절에서 이 물을 **성령**이라고 해설합니다. 그리고 요 4:14에서는 그 물이 “영원한 생명으로 솟아나는 샘”이 됩니다. 따라서 **생수 → 성령 → 생명 → 흘러나감**이라는 연결은 요한복음 안에서 자연스럽습니다.
더욱 강력한 배경은 **에스겔 47장**입니다. 성전에서 물이 흘러나와 죽은 바다로 들어가고, 그 강물이 가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게 됩니다.”** 그래서 요 7:38의 구약 배경 후보 가운데 겔 47장이 오래전부터 중요하게 거론되어 왔습니다. ([BibleGateway][2])
따라서 저는 이렇게 확정도를 나누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번역:**
“그의 배에서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
**클레로스 신학적 독해:**
“그에게 주어진 성령의 생명이 그 안에 머물러 있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흘러가 다른 사람들을 살리는 생명의 강이 된다.”
즉 **“생명을 살리는 강물”은 직역은 아니지만 상당히 강한 본문적·정경적 추론**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전도사님, 역사적으로는 놀라울 정도로 가까운 해석들이 있습니다.
가장 강력한 사례가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Cyril of Alexandria)**입니다. 그는 요 7:38을 해설하면서, 성령의 은사가 믿는 사람 안에 가득 차서 **자기 자신만 풍성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마음으로 넘쳐흐르고, 그 강물이 이웃에게 하나님의 선을 흘려보낸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바울의 “너희에게 어떤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기를 원한다”는 말을 그 사례로 연결합니다. 전도사님의 “형제들과 이웃들에게 흘러가 그들을 살리는 강”과 구조가 거의 같습니다. ([터툴리안 프로젝트][3])
더 놀라운 것은 **어거스틴**입니다. 요한복음 강해에서 그는 이 물을 마신 사람이 스스로 **샘이 된다**고 말하면서,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강을 **이웃의 유익을 구하는 사랑(benevolence)**과 연결합니다. 자기 자신만 만족시키려 한다면 강물이 흐르지 않는 것이며, 이웃의 유익을 위해 흘러갈 때 비로소 생수의 강이 흐른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모험][4])
이것은 클레로스의 언어로 번역하면 거의 이렇게 됩니다.
**성령을 받았다 → 내가 행복해졌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았다 → 하나님의 마음이 생겼다 → 이웃에게 흘러간다**
그리고 현대 주석에서도 이것은 변두리 해석이 아닙니다. NET의 상세 주석은 **믿는 사람이 생수의 발원점이 된다는 독법을 ‘동방 교회의 전통적 해석(Eastern interpretation)’**이라고 소개하며 오리게네스·아타나시우스와 헬라 교부들, 그리고 여러 현대 요한복음 학자들이 이 계열에 속한다고 정리합니다.
다만 반대편에는 “그 배”를 그리스도의 것으로 읽어 **그리스도 자신이 강의 근원**이라는 서방적/그리스도론적 해석도 오래 존재합니다. ([Bible Gateway][7])
① 전통적 동방 독법:
**믿는 자의 배 → 생수가 밖으로 흘러감**
② 다른 오래된 독법:
**그리스도의 배 → 그리스도에게서 성령이 흘러나옴**
그래서 저는 확정도상 이렇게 제안합니다.
> **“생수의 강” [번역]**
> ζῶντος는 “살아있는”이라는 뜻이므로 직역에서는 “생수/살아있는 물”로 둔다.
>
> **“생명을 살리는 강” [강한 본문적 추론 또는 신학적 구성]**
> 요 7:39의 성령 해설, 요 4:14의 영원한 생명, 겔 47:9의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산다”, 그리고 믿는 자에게서 밖으로 흘러간다는 고대 교부적 독해를 종합하면, 생수의 강은 단지 자신을 살리는 물이 아니라 **다른 생명을 살리며 흘러가는 성령의 생명**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을 최근 전도사님의 **활용의 현장**과 연결하면 상당히 아름다운 구조가 만들어집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마신다 → 성령의 생명을 받는다 → 하나님의 마음이 내 안에 생긴다 → “그대도 나와 같은 주인공입니다”라고 타자를 본다 → 그 사람에게 생명의 강이 흘러간다 → “그대도 우리와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생수는 **개인의 영적 만족을 위한 우물물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기 위해 주어진 강물**이 됩니다.
특히 어거스틴과 키릴로스의 해석은 이 점에서 전도사님의 오늘 추론과 아주 가까워서, 클레로스 사전에 외부 검증 각주로 넣어도 가치가 높다고 판단합니다. -끝-
예수 천당 불신지옥도 신종 율법이다. 그래서 명령과 복종이라는 신상필벌 시스템에서 유대교만 벗어나지 못한 게 아니고 기독교도 똑같이 그 안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멍에를 줄여 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짐이 바뀌는 거고 멍에가 바뀌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생명을 살리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이 진리의 빛과 평화의 빛이고 이중 사명, 이중 윤리로 정리가 되는 것이다.
그 가장 핵심 키 포인트는 뭐냐 하면 상대방이 소중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상대방이 소중하게 보이니까 소중한 사람한테 하는 자연스러운 행동이 되는 것이다. 어디서 꼬이냐 하면 상대방이 소중하지 않기 때문에 꼬이는 것이다. 왜 상대방이 소중하지 않으냐? 나만 제일 소중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소중하게 보이지 않는 것이다. 소중하게 보일 때도 있다. 조건이 맞았을 때는 소중하게 보이지만 금방 바닥이 나는 것이다. 그래서 소중하게 느껴지는 그 마음도 인간이 인간을 소중하게 느끼는 마음하고 하나님의 마음이 왔기 때문에 상대방이 누구든 소중하게 여겨지는 마음하고 사실은 모습도 다르고 질도 다른 것이다. 소중하게 여기다라는 기표만 동일한 것이지 속성은 전혀 다른 것이다.
사도 바울이 새로운 피조물의 특징으로 시각이 바뀐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누구를 향해서든 이제는 과거처럼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을 더 정밀하게 표현하자면 다른 사람들에 대한 느낌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이성적으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마음은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님의 멍에가 가벼운 멍에가 되는 것이고 예수님이 들려주신 그 진보따리가 가벼운 진보따리가 되는 이유는 내 느낌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느낌이 온 것이기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말하고,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것을 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게 되는 것이다. 단 전제가 있다. 깨어 있어야 하는 전제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은 명령일 수 없다. 너의 눈을 바꿔주고 너의 느낌을 바꿔주고 내 마음을 네 속에 심어주고 하는 그것에 대한 약속인 것이지 명령일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평화의 빛을 비추는 현장에서 그 사람과 화목한 관계를 맺게 되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그 사람의 해결되지 못하는 존재론적인 비참함이 점점 우리를 더 마음 아프게 만들게 된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평화의 빛을 비추는 것으로 우리의 사명을 다 했다는 쪽으로 갈 수가 없고 어떻게 하든 진리의 빚까지 비춰야 하는데… 하는 애타는 마음으로 연결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화목한 관계가 되면 될수록 그 사람이 더 불쌍해지니까, 그리고 우리가 비추는 평화의 빛으로는 저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더 절박하게 우리를 괴롭히고 그 사람의 신음과 그 사람의 고통과 그 사람의 운명적인 쇠사슬을 우리 눈으로 보면서 그 사람과 관계가 가까워졌는데 나는 여기까지만. 이렇게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평화의 빛은 반드시 진리의 빛으로 발전하고 진리의 빛을 비출 수 있느냐 없느냐는 상황에 따라서 결정되겠지만 그 사람에게 진리의 빚까지 비추고 싶은 간절한 마음은 당연히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저 사람과는 평화의 빛을 비추는 것으로 끝, 이렇게 마감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2.공지사항
다음 주 기도는 정진호 집사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