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쓴 시’는 쓰려는 제작의도를 가지고 쓰는 시이고, ‘쓰여진 시’는 애초에 쓰려는 의도가 없었는데, 몸과 영혼 속에 떠돌던 시적인 정서가 어느 날 밖으로 흘러나오면서 사리처럼 앙금이 져서 시로 변신되는 것이다.
가. 쓴 시
시를 처음 쓰는 젊은 시인들 가운데 좋은 낱말들, 가령 실연, 자맥질, 자폐증, 우울, 관통, 괴리, 장력, 하역작업, 오로라, 스팩트럼 따위를 골라 적어놓고, 짝사랑한 꽃이라든지, 흘러가는 비행운이라든지 하는 사안들을 적어놓고, 그것들을 서로 이미지가 통하는 것들끼리 짜 맞추어 시를 만들기도 한다고 들었다. 그렇게 제작되는 시들이 ‘쓴 시’이다.
그러다 보면 자기도 알 수 없는 시들이 탄생하게 된다. 그것을 평자들이 가끔 대단한 시라고 칭찬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렇게 칭찬받는 경우는, 바닷속의 거북이가 물 위로 솟구쳐 올라왔는데, 떠다니는 널빤지하고 머리를 부딪치는 것처럼 드문 일이다.
나 악하게 살자 했다// 해방된 이듬해 쑥밥을 먹다가 배앓이가 나서 죽어가던 누이/ 희멀건 눈같이 창백한 하늘 아래/ 배낭을 지고 구보를 하며/ 주먹밥을 한입 집어넣다 말고 동작이 늦다고/ 삽자루로 얻어맞은 엉덩이/ 나 악하게 실자 했다.
이 시는 내가 20대 중반에 쓴 〈진달래꽃〉이란 시인데, 제작의도를 가지고 쓴 시이다.
나. 쓰여진 시
대개 연륜이 많은 시인들이 ‘쓰여진 시’를 많이 쓴다.
그들은 말하듯이 쓴다. 영혼은 어린 시절부터 상처받아왔고, 그로인해 옹이와 상흔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 상처받은 영혼의 눈에는 그 상처로 인해 여러 가지 색깔의 안경알이 껴지게 마련이다. 그 안경에 비추인 풍경이 시로 쓰여진다.
김소월, 한용운, 김영랑, 정지용의 시들은 대개 쓰여진 시이다.
실버들을 천만사 늘여놓고도/ 가는 봄을 잡지도 못한단 말인가.
이 시는 김소월의 〈실버들〉의 첫 연인데 쓰여진 시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의 가슴에 다리를 놓는 일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멱감는 선녀의 날개 감추기이고/ 아기 둘을 낳은 선녀가 그것들을 안고 업고/ 하늘나라로 달아나기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학 각시가 지기 깃털을 뽑아 길쌈을 하기이고/ 그 남편이 그 베를 팔아 모은 살림을 주색잡기로 탕진하기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에게 밧줄 끝을 던져주고 그것을 끌어당기기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심연 속의 갈치들이 서로의 꼬리를 잘라먹기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허무의 바다 건너기입니다/ 한쪽은 나룻배가 되고/ 다른 한쪽은 사공이 되어.
이것은 내가 50대에 쓴 시 〈사랑한다는 것은〉 전문인데, 쓰여진 시이다. < ‘나 혼자만의 시 쓰기 비법(한승원, 도서출판 푸르메, 2014)’에서 옮겨 적음. (2019.07.24. 화룡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