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원신부-
오늘 복음은 지난 목요일 복음 이였던 마르코 복음 6장 13절 이후에 이어지는 복음 내용으로 이해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세상에 나아가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고 회개를 선포하고 마귀를 쫒아내고 병자들을 고쳐주라고 하신 예수님의 파견 명령을 받고 곳곳으로 파견되어 떠나갔던 제자들이 주님의 사명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온 이 후의 이야기가 주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돌아온 제자들은 자신들이 사람들에게 가르친 것과 행 한 모든 활동들을 예수님께 보고합니다. 모두가 주님이 제자들에게 하도록 명령하신 일들이었습니다. 즉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들을 낫게 해주었으며, 고통 속에 있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기쁨을 전해 준 일입니다. 말하자면 주님이 사람들에게 전해 주시고자 하는 은총과 평화와 사랑을 주님을 대신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이 제자들이 파견되어 서 한 주 된 일이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아주 중요하게 묵상해야 할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주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구원 사목을 제자인 우리들과 함께 하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우리들을 당신의 벗으로, 당신의 협력자로, 당신의 파트너로 생각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이 사람들에게 전해 주시고자 하시는 은총과 사랑을 당신의 제자인 우리들 각자가 자신의 역할과 몫을 충실히 함으로써 우리 스스로가 전해 주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마태오 복음14장 13절 이하의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 안에서 분명하게 확인 할 수가 있습니다. 기적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저녁 무렵까지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고 당신을 따르는 수많은 군중들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을 하며 난색을 표현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것을 가져오게 하시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고, 제자들이 주님이 주신 그 빵을 받아서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기적의 빵과 물고기를 당신이 직접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으시고 제자들을 시켜서 제자들이 당신을 대신하여 빵과 물고기를 나누어 주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방식입니다. 당신 친히 몸소 당신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직접 전해주시면서도 동시에 그 능력과 권한을 제자들에게도 주시어 제자들이 당신과 함께 당신의 사랑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도록 하십니다. 주님은 당신과 “더불어 함께 우리가” 그 일을 하기를 바라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바라시는 사랑의 전달 방법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평화방송 애청자 여러분, 나부터 먼저 그 역할을 해야 합니다. 내가 바로 주님의 제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주님께로부터 받은 수 많은 은혜와 사랑을 이제는 내가 주님을 대신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우리 삶의 자리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기쁜 복음을 전하고 주님을 만나서 주님을 믿고 주님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고 기쁨이라는 진리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주님의 제자인 나부터 먼저 전해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외롭고 아프고 힘들어 하고 고통 중에 있는 이웃들에게 내가 주님을 대신하여 손을 잡아 주어야 되고 주님을 대신하여 어깨를 내밀어 주어야 하고 주님을 대신하여 안아 주고 함께 웃고 울어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주님의 제자인 우리들이 반드시 해야 되는 선교 사명인 것입니다.
새벽을 열며
어제 새벽, 너무나 바쁜 하루가 될 것을 미리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봉성체, 미사, 성시간, 새영세자 첫 고백…….
틈이 없어 보였습니다. 특히 봉성체를 하게 되면 많이 돌아다니기 때문에 많이 피곤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래서 저는 매일 새벽마다 하는 수영을 포기하고, 체력 보강을 위해서 그 시간에 잠을 자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저녁에 있을 성시간 자료를 살펴 본 뒤, 저는 취침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잠시 뒤, 잠들려는 순간 전화벨이 울립니다. 조금 화가 났습니다. ‘왜 이 순간에 전화가 오는 거야?’ 전화를 받아보니 별 내용의 전화도 아닙니다. 성당에서 가장 많이 받는 내용……. “오늘 미사 시간이 어떻게 되지요?”였습니다.
전화 통화 후 다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또 잠시 뒤, 이번에는 전화 인터폰 소리가 들립니다. 사무장님이십니다.
“신부님, 세콤 설치를 해야 하는데 지금 해도 되겠습니까?”
지난 번, 성당에 도둑이 들어온 뒤 며칠 전부터 성당 무인 경비 시스템을 설치하고 있었거든요. 어제가 사제관에 경비 시스템을 설치하는 날이라서 지금부터 설치를 해도 되겠냐는 것이지요. 또 화가 났습니다. 조금 쉬려고 매일 아침마다 가는 수영도 포기했는데…….
봉성체를 다녀왔습니다. 너무나 피곤했습니다. 쉬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다행히 사제관의 경비 시스템 공사는 어느 정도 마무리 단계였습니다. 더군다나 침실은 모두 끝났으니, 그곳에서 쉬어도 된다고 합니다. 침대에 누었습니다. 막 잠들려는 순간, 드릴로 벽을 뚫는 시끄러운 소리가 들립니다. 그 소리가 멈추고 잠들려는 순간, 다시 전화벨이 울립니다. 내용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오늘 미사 시간이 어떻게 됩니까?”입니다.
결국 잠시도 쉬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화가 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운이 없냐고…….
어제 저녁 묵상 때, 문득 하루의 일과가 떠올려 봅니다. 정말로 운이 없는 하루라고 생각했던 그 시간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생각해보니 감사하고 은혜로운 시간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잠을 잘 수 없었던 순간의 시간만을 바라보면서 하루 전체가 운이 없었다고 단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지요.
어쩌면 이런 모습이 우리들의 일반적인 모습이었던 것 같습니다. 나쁜 한 일면만을 가지고 전부가 나쁜 것으로 판단하는 것……. 반대로 좋은 한 일면만을 가지고도 전부를 좋은 것으로 판단할 수 있는데, 그런 모습보다는 부정적인 것만을 내세웠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고 하십니다. 사실 연일되는 복음전파로 인해서 많이 피곤하셨지요. 그래서 성서에서는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많은 군중을 보고서 짜증이 날만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지요. 오히려 가엾은 마음을 간직하고서 더 많은 것을 주기 위해서 애쓰십니다.
바로 한 일면을 보고서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큰 사랑을 간직하고 계셨기 때문에 이러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삶을 본받아 우리 역시 변해야 할 때입니다. 그때 우리들은 작은 것에도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목자의 동반자
-이정호신부-
수도원에 피정오시는 분들이 꽤 계십니다. 본당 단체나 신심단체의 회원들이
교육이나 영혼의 쇄신을 위해서 조용한 수도원을 찾아 피정을 하십니다.
어떤 경우에는 강의 후에 자신들의 삶을 나누기 위해 소모임으로 나누어
대화를 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 가장 어려운 것이 모임을 주재하는 분과
발표할 분을 선정하는 것입니다. 서로들 피하고 싶어하고 미루기가 다반사입니다. 그러나 정작
발표할 때 보면 너무나 조리 있게 잘 말씀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앞장서고 싶지 않고 주목받고 싶어하지 않는 모습이 어쩌면 예수님께서
안타깝게 바라보시는 목자없는 양들 같지 않은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이끌림을 받는 양이 되기는 쉽습니다. 오라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책임지고 앞장서 가는 목자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기 시작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기도와 성사생활을 통해서, 교육과 피정을 통해서
사랑의 책임을 나누어 지는 목자의 동반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쉬어라
-윤인규 신부-
제자들은 화려하고도 초라한 세상, 행복하고도 불행한 세상을 보고 돌아왔다. 스승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 눈에 세상은 예전 같지 않았다. 혼란스러웠다. 도무지 앞뒤가 맞지도 않고 끝이 보이지 않는 세상, 가난하다고 착하지도 않고, 지체가 隻鳴?거룩하지도 않은 세상이었다. 수렁에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마르 6,17-29)에 대한 보도에 이어 나오는 제자들의 활동 보고(마르 6,30), 그리고 돌보는 이 없이 굶주리는 이들(마르 6,35-44)의 이야기는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모순과 딜레마에 빠진 세상과 제자들의 처지가 어떠했는지를 말해준다. 스승께서 보시기에 제자들은 지치고 혼란에 빠져 있었다.
나무는 쉬면 나이를 먹는다. 나이테는 묵은 시간과 새로운 시간을 구분 짓는 금이다. 쉬었다는 것은 성장했음을 말해준다. 나이테가 없는 나무는 크게 자라지 못하고 켜도 무늬가 없어 아름답지 않다. 쉼은 시간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쉼은 과거를 사라지게 하지 않고 영혼에 아름다운 무늬를 만들고 삶을 하느님 것으로 숙성시킨다. 하느님께서도 6일 동안의 창조를 완성하시고 쉬셨다. 세상을 보고 혼란에 빠진 제자들에게 주님께서는 ‘깨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가서 좀 쉬라’고 말씀하신다. 끝은, 아니 완성은 외딸고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 쉬는 것이다.
연중 제4주간 토요일
- 차성현 신부-
오늘 우리 예수님의 마음은 '가엾은 마음'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 사람도 가엾고 저 사람도 가엾고 온통 그 마음 뿐입니다. 예수님의 파견 명령을 받고 복음을 전한 후 돌아온 제자들이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습니다. 여행 길의 제자들이 고생하며 힘들었을 터인데 돌아와서도 오고 가는 많은 사람들 때문에 제대로 밥 먹을 겨를 조차 없습니다. 수고한 제자들이 너무 가여워 보였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 '너희는 따로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하십니다. 하지만 사람들도 참 대단합니다. 불붙은 그 열정을 누가 감당하겠습니까? 온 동네에서 떼거리로 몰려와 먼저 와서 기다립니다. 갑자기 예수님의 마음이 또 가엾은 마음으로 가득찹니다. 그래서 직접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목자 없는 양들과 같은 사람들도 가엾고 또 그 사람들을 위해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있는 제자들도 가엾고 사람들만 보면 온통 그 가엾은 마음 뿐 입니다. 지금의 우리를 보시고도 예수님께서 그 가엾은 마음을 가져 주셨으면 좋으련만, 사람들이 가졌던 그 열정도 또 제자들이 보여주었던 그 열심도 모두가 다 부족할 뿐입니다. 부족함만으로도 부끄러운데 눈에 딱 들어오는 한 글자가 부끄러운 우리를 더 얄밉게 만들어버립니다. '가서 좀 쉬어라'
며칠 전 신문에 '휴가 위해 일하는 직원들'이란 제목의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 회사 사람들의 우선 순위는 '일' 이 아니라 '놀기' 였습니다. 무슨 회사가 일을 먼저 해야지 놀기를 어떻게 먼저 합니까? 그런데 지난 수요일에도 그 회사는 직원의 반인 12명이 말레이시아로 여행을 떠났다고 합니다. 일보다 놀기를 우선으로 하는 회사, 정말 다니고 싶은 회사이지 않습니까? 그 회사 대표는 확실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에 치이면 결코 창의력이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업무의 우선 순위는 당연히 놀기가 먼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갑자기 너무 존경스러워 보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이 너무 부러웠습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이 흐뭇했습니다. '놀기'라면 우리 신부들도 결코 빠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는 그것을 '놀기'라고 부르기 보다 오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선물로 주셨던 것처럼 '휴식'이라고 즐겨 부릅니다. 우리들처럼 자유롭게 휴식을 누리면서 사는 분들이 그렇게 많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너무 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대개 월요일에 우리 신부들은 휴식의 시간을 가집니다. 무엇이나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하루를 보냅니다. 산으로 바다로 운동이며 등산 혹은 낚시를 즐기기도 하고 다양한 문화생활도 함께 즐깁니다. 때론 쿡 쳐박혀 실컷 잠을 자기도 합니다. 누구나 자기에게 필요한 휴식을 취합니다. 이렇게 하루의 휴식을 만족하게 보내고 나면 나머지 일주일도 행복하게 지나갑니다.
지난번 언젠가 한번은 월요일 휴식을 잘 계획해서 떠났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별로 상쾌하지 못하게 보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고도 먼 길을 달려와 고속도로 통행료를 낼 때 였습니다. 아가씨 같은 아주머니가 반갑게 인사했습니다. 제 차 번호랑 자기 차 번호가 똑 같다고 했습니다. 잠깐이지만 처음으로 그런 순간에 너무도 친절한 인사를 받았습니다.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자세히 보니 얼굴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습니다. 아마도 태어나서 처음 보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느낌이 남 달랐습니다. 처음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그 말 몇 마디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보통 때와 달리 전혀 아깝지 않은 통행료를 내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말 한마디에 이렇게 마음이 평화로울 수가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세웠던 계획보다 한마디 말이 더 큰 휴식이었습니다. '가서 좀 쉬어라'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다시 떠오릅니다. 제자들도 아마 예수님의 이 말 한마디에 피로가 한꺼번에 다 풀렸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참 휴식이라는 것도 결국은 하느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보다 놀기를 우선으로 생각하는 회사가 훌륭한 회사로 성장하듯이, 휴식 가운데서도 주님의 평화를 맛볼 수 있는 우리들의 삶이 더 행복한 신앙의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소중하고 가까운 사람에게는 휴식 같은 말을 정말 더 자주 많이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처음 보는 사람이고 언제 다시 볼지도 모르는 사람에게서 한마디 말로 하느님의 평화를 느꼈는데, 하물며 소중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그것을 아낄 수가 있겠습니까? 아멘.
측은지심-김 미카엘 부제-
사람의 본성이 착하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맹자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자신만의 싹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말합니다.
무한하게 넓어지고 채워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인(仁)의 싹은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곧 측은지심입니다.
바로 예수님 마음입니다.
성서 곳곳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을 측은히 여기시어
이것저것 해주셨다는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이 깊어 상대를 보며 자신이 가슴 아파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그 마음을 닮고 싶습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바쁜 일상생활 중에 제자들에게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쉬자고 하십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하느님을 향해 정진하는 것 못지않게
휴식과 긴장 해소와 여가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바쁨과 여유가 조화를 이룰 때 우리의 삶은 풍요로워지고
인생에서 찾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여다보게 됩니다.
자연이 보이고, 주변 사람들이 보이고, 그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 보입니다.
세상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보입니다.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 안에 살아 계신 하느님이 보입니다.
휴식은 이렇게 우리를 삶에 대한 깊은 성찰과 깨달음으로 초대합니다.........
† 사단(四端)의 마음씨 †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은 파견된 제자들의 복귀와 활동 보고, 그리고 쉴 틈도 없이 바로 이어지는 예수님의 활동상을 소개하고 있다. 우리는 지난 목요일 복음으로 예수께서 12제자들을 파견한 사실을 들었고, 어제 복음으로는 세례자 요한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기록을 접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치유와 구마의 능력을 주어 마을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선포하도록 아주 엄중한 여장규칙과 함께 파견하였고, 파견된 제자들은 실제로 수많은 병자들을 치유하고 마귀들을 쫓아내며 하느님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였다.
마르코는 제자들이 마을을 돌아다니며 활동하는 동안에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과거기사를 들추어 보도하였다. 이는 제자들이 돌아올 때까지의 시간을 벌기 위한 편집상의 묘기로 볼 수도 있고, 예수의 정체에 관하여 헤로데를 포함한 사람들의 오해와 착각을 불식(拂拭)시키는데 일조(一助)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 사이에 제자들은 다시 예수께로 돌아왔고, 그들의 활동내역(6,13)은 이미 복음에 언급되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행한 활동들에 대하여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상기되었을 터이고, 더러는 꽤나 피곤했을 것이다. 이 시점에서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휴식과 재충전이다. 그런데 찾아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다는 것이 당시의 상황이다.
그러므로 재충전이란 한적한 곳으로 떠나 좀 쉬면서 음식도 먹고 편안하게 묵상하며 기도하는 것이리라. 이렇게 한편으로는 예수와 제자들이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으로 떠났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예수의 일행을 찾아 혈안이 되어 있었다. 예수의 일행이 이동의 수단으로 배를 이용했으니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군중은 영악했다. 그들은 여러 동네에서 나온 사람들과 함께 육로를 이용하여 예수의 일행을 앞질러 배가 닿을 곳에 이미 가 있었다. 이렇게 예수와 군중은 다시 만나게 된다. 이 만남은 곧 펼쳐질 '오천 명을 먹인 빵의 기적'(6,35-44)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육신의 배고픔을 위한 빵을 먹기 전에 먼저 먹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말씀의 빵이다. 무릇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하는 것"(마태 4,4)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여러 가지로 군중을 가르치셨다. 예수께서 자신은 물론이고 제자들까지 피곤해 하여 휴식을 필요로 함을 알고 계시면서도, 말씀의 빵을 내리신 이유는 군중에 대한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 말씀의 빵은 인간의 영적(靈的)인 배고픔을 충족시킬 것이다. 그러나 육신(肉身)을 위한 빵도 빼놓을 수 없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이게 직접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6,37)고 명하신 것이다. 불쌍한 군중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이 바로 이런 것이다. 이 예수님의 마음은 또한 모든 사목자가 몸에 익혀야 기본적 소양(素養)이리라.
사목자가 몸에 익혀야 할 소양에 관하여는 유교교설의 사서(四書) 중 하나인 맹자(孟子)에서도 엿볼 수 있겠다. 맹자에는 사단(四端)이라는 대목이 있다. 사단은 사람의 본성인 인(仁)·의(義)·예(禮)·지(智)에서 우러나오는 측은(惻隱)·수오(羞惡)·사양(辭讓)·시비(是非)의 네 가지 마음씨를 말한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사람의 형편을 불쌍하고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요, 수오지심(羞惡之心)은 자신의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옳지 못함을 경계하는 마음이요, 사양지심(辭讓之心)은 겸손하여 불의(不義)를 받지 않거나 이에 응하지 아니하는 마음이요, 시비지심(是非之心)은 사물의 옳고 그름을 밝히고 따지는 마음이다. 이들 마음은 예수님처럼 행동에 옮겼을 때 비로소 아름다운 것이겠지만, 중요한 것은 우선 이런 마음을 우리 가슴에 사무치도록 새겨 넣는 것이다.
좀 쉬도록 하여라(6, 30-34)
-유 광수신부-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도록 하여라."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황량한 곳으로 떠나갔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큰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불러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셨었다.(마르 6, 7 참조) 지금 사도들이 예수께 보고하는 내용은 파견되어 가서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이다. 예수님과 사도들의 관계가 원만한 상태임을 보여 주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예수님과 함께 지낸다."는 것이 어떤 모습인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아름다운 모습에서 무엇을 묵상할 수 있는가? 마치 해바라기가 태양을 향해 돌아가듯이 그리스도인의 모든 생활은 항상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아침기도를 바칠 때 우리에게 주신 하루를 어떻게 사용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될 것인가를 계획하고, 낮에는 아침에 계획한 것을 열심히 실천하고(생활하고), 저녁에는 하룻동안 아침에 예수님과 함께 살겠다고 계획했던 시간들을 되돌아보면서 자기가 지낸 하루의 시간들을 예수님께 보고드리는 저녁 기도로 하루 생활을 마무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다. 비록 각자 삶의 자리가 다르더라도 우리의 모든 생활이 이렇게 예수님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면 우리는 모두 같은 예수님의 일을 하기 때문에 서로 일치하게 되고 서로를 더욱 사랑하면서 예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게 될 것이다. 가족으로서 한 가정에 살면서 그리고 같은 공동체에 살면서 서로 일치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는 삶이 아니라 제각기 자기 나름대로의 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가정이나 공동체가 예수님을 중심으로 생활하는 가정이며 공동체인가 아니면 무엇을 중심으로 해서 모든 생활이 이루고 지고 있는지를 먼저 성찰해 보자.
예수님이 "너희는 따로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도록 하여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두 가지로 묵상할 수 있겠다. 하나는 제자들이 활동을 하고 돌아와서 육신적으로 지쳐있는 데다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기 때문이 제자들이 조용히 쉴 수 있는 곳을 찾아 떠나라는 것이다. 즉 지친 제자들을 좀 쉬게 하기 위한 배려이다.
제자들에게 휴식이 필요하듯이 우리에게도 휴식은 필요하다. 휴식은 여유 있는 사람이나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 즉 음악에 강약이 있고 높낮이가 있듯이 우리의 삶에서 일과 휴식은 삶의 한 부분이며 삶의 리듬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쉬지 않고 열심히 뛰는 것만을 성공의 비결로 생각하고 지금같이 경쟁이 치열한 시대에 살아남으려면 더욱 바쁘게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식이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다. 우리에게 쉰다는 것은 하던 일을 중단하는 것이고, 하던 일을 중단하는 것은 비생산적이라고 생각한다. 쉰다는 것은 경쟁에서 지는 것이고 경쟁에서 지는 것은 인생의 패배자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밤낮으로 뛰어야 하기 때문에 밥을 먹으면서도, 잠을 자면서도 항상 그 다음 일을 생각한다. 그래서 늘 긴장한다. 이렇게 매사에 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에 우리는 자다가도 일어나서 무엇인가를 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고 이런 생각들이 우리에게서 쉼을 앗아갔다.
우리가 쉬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로는 바쁘다는 구실 외에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식의 이기적인 사고도 한몫을 한다. 즉 자기가 없으면 아무 일도 안 되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사사건건 모든 일에 끼어 들어 간섭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면서 입버릇처럼 늘상 "쉬고 싶다."는 말을 되풀이한다. 그 말 이면에는 쉬지 않고 일하는 자기를 과시하고 싶은 욕망이 깔려 있기 때문이 아닐까? "쉬고 싶다."는 말은 "지쳤다."는 말이지만 막상 쉴 수 있는 기회를 주면 혹시 밀려나는 것이 아닌가 불안해하고 능력을 과소 평가받는 것이 아닌가 섭섭해한다. 쉬는 것을 말리는 사람이 없는데도 우리는 계속 바쁘게 생활한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갑자기 병이 나서 병원 신세를 지거나 아니면 과로로 쓰러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정말로 영원히 쉬게 된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수없이 경험하였고 또 보았다. 오늘도 쉰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바쁘게 생활하고 있다. 마치 "바쁘다."라는 체면에 걸린 사람처럼 바쁘지 않으면 오히려 불안하고 안절 부절하지 못한다. 그래서 또 바빠야 하고 바쁘기 위해서 왔다갔다해야 한다.
쉰다는 것은 무엇인가?
창세기 저자는 하느님의 쉼을 이렇게 표현한다.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이렛날에 마무리하셨다.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기룩하게 하셨다. 하느님게서 창조하여 만드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그날에 쉬셨기 때문이다."(창세 2,2-3) 하느님께서 손을 떼고 쉬신다는 것은 창조를 계속하신 것이 아니라 창조하신 것들에 복을 주시는 것이었다.
봄에는 꽃이 피고 여름에 잎이 무성해지고 가을에 결실을 보며, 겨울에 앙상해졌다가 다시 새봄이 오면 물이 오르고 움트는 것, 이 같은 일들이 하느님께서 창조를 멈추시고 쉬시는 가운데 진행된다. 만일 하느님께서 사사건건 간섭하시며 늦겨울에 피어나는 개나리를 일찍 핀다고 벌주시고, 초봄에 눈이 내린다고 탓하신다면 창조의 아름다움이나 신비스런 경이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하느님이 쉬시는 시간에 온 만물이 우리에게 더욱 아름답고 신비스럽게 다가온다. 하느님께서 쉬시는 동안, 아니 하느님께서 쉬시기에 피조물은 더욱 완성으로 나아가며, 우리는 대자연의 신비와 함께 하느님의 경이로움을 더욱더 찬양하게 된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창조를 멈추시고 쉬시는 동안 복을 주시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 쉼을 잃고 있다. 세상이 각박해지는 것은 바로 이런 쉼과 안식을 잃었기 때문이다. 고요가 없는 곳에 쉼이 있을 수 없고, 쉼이 없는 곳에는 "창조"가 있을 수 없다. 창조가 쉼을 위해 있고 쉼이 더 나은 창조를 위해 필요한 것이다. 쉼이 방해받는 데서는 재창조를 의미하는 레크리에이션도 그 기능을 잃고 만다. 이런 데서 사람들의 성격도 성급하게 변해가고 있다. 모든 자연들이 봄에 파릇파릇 새 싹이 나올 수 있는 것은 긴 겨울 동안 충분한 휴식을 취했기 때문이다. 봄에 개구리가 나오고 온 곤충들이 땅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은 동면을 충분히 했기 때문이다.
거울을 들여다 볼 때마다 우리는 언제나 '여유'를 찾아야겠다고 다짐해야 한다. 얼굴을 다듬는 방법은 오직 마음의 여유를 찾는 일에서 시작된다. 여유는 '쉼'에서 나온다. 찡그린 얼굴에서는 결코 창조적인 일이 나올 수 없다. 여유 있는 얼굴, 쉬는 얼굴만이 창조적인 일, 구원의 일을 할 수 있다. 우리는 내가 얼마나 잘 쉰 얼굴인지 점검하기 위하여 가끔씩 거울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얼마나 예쁜지, 화장이 잘 되었는지, 주름살이 얼마나 깊어졌는지, 그런 것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얼마나 잘 쉬는 얼굴인지, 얼마나 여유롭고 평안한 얼굴인지, 혹시나 지치고 찌그러진 얼굴은 아닌지 스스로 관찰하고 반성하기 위해서 말이다. 미켈란젤로가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 위해 선택한 예수님의 모델과 한참 후에 찾은 유다의 모델이 같은 인물이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쉴 줄 아는 얼굴과 쉴 줄 모르는 얼굴의 차이이리라.
20세기의 위대한 별이었던 슈바이처는 "현대인이 하루에 몇 분만이라도 밤하늘을 쳐다보며 우주를 생각한다면 현대 문명은 이렇게 병들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설 명절 잘 보내세요...
늘 감사합니다...새해에는 주님 축복 가득 받으시고 늘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