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거리 / 김잠출
너무 더운 여름 날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기후변화 탓인가. 올해는 여엉 감이 적게 달렸다. 가지는 저마다 실팍한데 잎만 무성하고 감은 듬성듬성 달렸다. 아예 하나도 안 달린 가지도 더러 보인다. 애써 가지들 틈새로 하늘을 쳐다보니 마음이 좀 평안해진다. 줄줄이 사탕처럼 올망졸망 연년생 자식 낳듯이 무지하게 감을 달아 가지가 찢어질 듯 힘겨워하더니 저 나무도 36년을 살다 보니 많이 내려놓고 싶은가 보다. 그리 생각하자 가을 하늘 양털 구름이 무척 가벼워 보인다.
김밥 한 줄. 한 조각 먹고 또 한 조각 입에 넣으니 검은 줄이 점점 줄어 굴속으로 들어가는 기차 꽁무니 같다. 칸칸이 차례로 사라지고 꼬랑지 몇 개만 남았다. 새소리가 지나간 하늘은 푸르다. 나무 사이로 허리 굽혀 오가며 하나하나 감을 딴다.
우람한 나무도 해거리를 한다. 꽃은 피워도 열매 맺기를 멈추고 비워버리니 ‘나무멍’이라 해야겠다. 겸허한 나무가 재충전한다고 믿어본다. 겨울엔 더 의연한 나목으로 서 있다가 봄이 오면 수천 개를 달아 올릴 것이라 기대한다, 오늘보다 내일을, 이 칸보다 다음 칸을 기다리는 것이 희망이라면 해거리는 번-아웃을 예방하는 나무의 지혜가 아니겠는가. 사람도 가끔 해거리가 필요하다. 계획대로 모든 게 안되어도 그만, 결과가 적어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고 지금 빈손일지언정 때가 되면 또다시 수확의 기쁨이 커질 것이라고 믿으며 지냈다.
어릴 적, 형은 정월 대보름 전후에 감나무를 시집보냈다. 가랑이를 쩌억 벌리고 하늘 향해 물구나무를 선 감나무 가지 사이로 큰 돌을 꼭 끼우는 작업이다. 벌어진 틈은 음(陰)이니 여성을 상징하고 돌은 길쭉하고 강하니 양(陽)인 남자의 물건이다. 다산을 위한 주술적 의미가 있는지 모르지만, 대추나 감나무는 시집 보내고 나서야 다음 해에 꼭 과일이 많이 달렸다. 희한한 일이었다. 농촌에서 자라 매일 감나무를 바라보며 살던 나는 경험칙상 다 안다. 거기에다 중학교 때 농업 과목을 마스터했으니 비교적 이해가 빠르다.
어찌 보면 해거리는 늙어가는 주인을 닮았나 보다. 좀 쉬어가고 싶은 것이 주인과 나무가 같은 마음이다. 달도 차면 기울고 산에 오르면 반드시 내려와야 한다. 감이 많이 열릴수록 좋지만 그만큼 크기가 작고, 적게 열린 해의 감은 굵기가 더 크다. 한 해에 많이 먹었으니 다음 해엔 좀 적게 먹어도 불평하지 말라는 뜻인가 보다. 그게 해거리다.
감나무는 내게 가장 친숙한 유실수이다. 고향엔 집집이 감나무 한 그루씩 있었다. 아무리 가난한 집에도 봄날이면 수천 개 감꽃이 등불처럼 집안을 밝히고 가을엔 울긋불긋한 핏빛 단풍이 팔랑거리고 겨울이 오기 전에 주렁주렁 달린 홍시가 새를 불러와 노래를 들려준다. 여름엔 푸른 잎 그늘을 만들어 주니 감나무 하나로 삼간 초옥이 사시사철 절로 풍요로왔다. 감 이래야 대부분 참감 아니면 따배이감(납작감)이었고 가끔 고목이 된 도오감이나 대봉감, 뾰족감과 돌감이 더러 있었다. 성급한 아이들은 풋감을 소금물에 담근 침시를 귀한 간식으로 때웠고 감 삐때기나 빠물래기, 곶감으로도 즐겨 먹었다. 담장 대신 조성한 대밭에도 감나무가 서 있고 장독대 옆에도 감나무가 지키고 있었다. 들판이나 비스듬한 산비알에 있는 밭둑에도 어김없이 서 있던 감나무들. 지금 나이에도 보기만 해도 고향의 정을 느끼고 편안해진다. 그때는 오다가다 아무나 한두 개 따 먹어도 나무라는 이 하나 없었다. 마치 배고픈 사람, 그냥 먹고 싶은 사람 누구나 따먹으라고 심어둔 나무 같았다. 고향 땅 홍시는 곧 보시였다.
중학교 때 고욤나무를 캐와 이웃집 참감 가지를 꺾어 접을 붙였다. 한그루만 있어 아쉽고 더 갖고 싶었던 나는 성인이 된 후 작심하고 감나무를 심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끝난 뒤 아들의 삼 칠을 기념해 고향 텃밭과 둑에다 단감나무 10그루를 심었다. 4년 뒤 둘째가 태어났을 때도 10그루를 더 심었다. 벌써 36년의 세월이 흘렀다. 제각기 모양을 갖추며 문실문실 잘도 자라 해마다 수많은 홍시를 안겼다. 겨울이면 냉장고에 뒀다가 이듬해 여름에 샤벳트처럼 껍질째 먹어 치운다. 여름날 냉장고에서 감을 꺼내 먹으면 나는 환한 터널 끝을 보듯이 마음이 활짝 열린다. 고향과 어린 시절을 떠올리고 돌보지 않아도 절로 자라는 나무들, 제 홀로 열매 맺는 감나무를 생각하면 절로 배가 부르다. 어떤 때는 옥희 집 대문 옆 감나무도 보이고 숙자네 뒤안간에 늘어진 도오감 나무도 눈앞에 나타난다.
감나무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다. 어느 집이나 그냥 내버려 두고 거름 한번 주는 일이 없었다. 그래도 몸피 불리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달아 스스로 존재의 가치를 증명했다. 감을 따다 문득 지나온 세월 돌아보니 내가 살아온 과정도 그랬다. 오직 혼자 마음먹고 홀로 결정하고 단독으로 실행해 업에 매진했다. 감 팔아 돈을 만들 일도 없었거니와 그냥 군것질로 쓰는 것이라 애써 신경 쓸 필요도 없었던 그때의 감나무와 똑같이 닮았다.
해거리한 감나무를 앞에 두고 서 있자니 별별 번뇌와 잡념이 교차한다. 잊고 싶은 건 씨줄로 교직하고 행복했던 기억은 날줄로 교차한다. 고향은 그냥 생각만 해도 절로 마음의 안식을 얻고 추억을 더듬으면 굳어가는 입술에도 미소가 되살아나니 신기한 일이다.
해거리한 감나무를 보고 있노라니 나도 이제는 놀멍쉬멍하고픈 마음 간절하다. 겨울엔 불멍 여름엔 물멍 가을엔 산멍 봄엔 바다멍에 또 책멍도 하고 싶다. 까치밥 남기고 이 가을을 보내면 겨울 나목을 맞을 것이고 한두 번 이슬과 서리 덤터기 쓰다 보면 한해가 또 저문다. 중년이 지나면서 밥벌이 그 자체가 얼마나 지겨운 일이었던가. 그럴수록 해거리하는 나무가 부러운 것이고 때때로 그저 그런 마음이 일어난다.
나이 들면서 깨달은 건 또 있다. 세상에 감은 ‘떫은 감’과 ‘떫지 않은 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반시도 있고 홍시도 있고 둥근 감도 있는가 하면 불룩한 팽이 같은 감도 있었다. 주먹만 한 크기도 있고 동전만 한 것도 있었다. 세상은 빛과 어둠, 눈물과 웃음 같이 이분법적으로 정리할 수가 없는 곳이었다. 어떤 때는 행복에 겨워 환했고 어느 순간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둠에 포위당하기도 했다. 고진감래만 알았지 흥진비래는 잊은 적이 더 많았다. 운무가 걷히고 푸른 물결을 본 날이 더 많았을지라도 홍진에 썩은 명리를 쫓다가 벼락에 맞은 듯 각성하고 돌아서기도 한 인생이었다. 생각해보면 해거리하는 감나무보다 나는 더 못난 세월을 보낸 셈이다.
하늬바람 맞으며 마지막 남은 김밥 한 조각을 먹는다. 감을 다 털고나니 가지마다 텅 비었다. 지금부터 좀 더 많은 쉼표와 해거리를 하며 살아야겠다. 감나무가 가르쳐 준 오늘의 철학이다. 이미 지나간 것은 돌이킬 방법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