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ventional Truth Is Relative and Arbitrary
(관습적 진리는 상대적이고 임의적이다.)
Concepts (paññatti) are conventional truth. Paññatti is rather arbitrary and relative, and it cannot be true at all times and in every place.
개념(빤냣띠)은 관습적 진리입니다. 빤냣띠는 다소 임의적이고 상대적이며, 항상 모든 곳에서 진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It does not really matter whether we call the sun ‘sun’ and the moon ‘moon’ or vice versa, provided there is consistency of usage and the possibility of common understanding.
우리가 태양을 ‘태양’으로 달을 ‘달’로 부르든, 아니면 거꾸로 부르든 간에, 만약 사용하는 데에 일관성이 있고 공통적으로 이해할 가능성이 있다면 어떻게 부르든 실제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The name given to an object is arbitrary. We are able to convey meaning by using words in this way due to common agreement.
대상에 주어진 이름은 임의적입니다. 우리는 공통의 합의에 의한 방법으로 말을 사용함으로써 의미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While it may be true to say ‘This is a tree’ or ‘That is a dog’, the truth value of such statements is solely due to consensus. It is conventional truth, not universal or absolute truth.
‘이것은 나무야’ ‘저건 개야’라고 말하는 것이 사실일 수도 있는 반면에, 그러한 표현의 진실성의 가치는 오로지 합의에 의하게 됩니다. 그것은 관습적 진리이지, 보편적이거나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지요.
The relative and arbitrary nature of conventional designations is further illustrated by the fact that the designation of a thing changes when the form of the thing itself changes.
관습적 명칭들의 상대적이고 임의적인 본질은 더 나아가서, 하나의 물체에 있어서 그 자체의 형태가 변화할 때 그 물체의 명칭도 바뀐다는 사실에서 명확해집니다.
For instance, the form of a tree changes when cut it down and saw it up into pieces of a certain shape.
예를 들어, 나무를 베어서 톱으로 잘라 특정한 모양으로 조각을 냈을 때 그 나무의 형태는 달라집니다.
Then we can no longer call it a tree but we call it ‘boards’, even though the boards are made up of the same combination of elements as the tree, because these elements are no longer in the form of a tree but in the form of boards.
그러면 우리는 그것을 더 이상 나무라고 부를 수 없고 ‘판자’라고 부르게 되는데, 그 이유는 비록 그 판자가 나무와 같은 요소들의 조합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이 요소들이 더 이상 나무의 형태로 있지 않고 판자의 형태로 있기 때문입니다.
Then if we fashion the boards into the shape of a table, we call the new form ‘table’ and not ‘tree’ or ‘boards’.
그 다음에 우리가 그 판자를 가지고 다시 탁자의 모양으로 만들어낸다면, 우리는 그 새로운 형태를 ‘탁자’라고 부르지 ‘나무’나 ‘판자’로 부르지 않습니다.
Thus, when a thing changes from one form to another, we can no longer call it by its previous name.
그러므로 물체가 하나의 모양에서 다른 모양으로 바뀔 때,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이전의 이름으로 부를 수 없습니다.
‘The original perception (labelling or naming) of an object is no longer applicable when it is broken, or when it is analysed by knowledge and divided into its constituent parts.’ - (quote from Subcommentary to Dīgha Nikāya 9)
‘대상에 대한 원래의 인식 (명칭이나 명명)은 그 대상이 부수어지거나, 지식으로 분석될 때, 그리고 그것을 구성하는 부분들이 분리될 때에는 더 이상 적용이 되지 않는다.’
(디가 니까야 제9경의 복주서에서 인용함)
The same principle holds true not only when there is a change in external shape but also when something is deconstructed into its constituent parts.
이는 외부의 형태에 변화가 있을 때만이 아니라 그 자체의 구성하는 부분들이 해체될 때에도 같은 원리가 적용될 수 있음을 말합니다.
Consider that the human body is made up of many parts. Suppose a medical student or a coroner were to dissect a human body and lay out all its various parts on a table.
인간의 몸이 많은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의과 대학생이나 검시관이 인간의 몸을 해부하여 탁자 위에 그 모든 다양한 부분들을 펼쳐놓는다고 가정해 봅시다.
There we would see head-hair, eyes, teeth, lungs, liver, stomach, kidneys, and so forth. Would we call these parts a man, or a woman, or a human body?
그러면 우리는 머리카락이나, 눈, 이빨, 허파, 간, 위장, 콩팥 등등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이러한 부분들을 남자나, 여자, 또는 인간의 몸이라고 부를까요?
No, it is no longer any of these things. We now see just parts of the body - head-hair, eyes, teeth, lungs, liver, stomach, kidneys, and so forth.
아닙니다. 더 이상 그렇게 부를 수가 없겠지요. 우리는 그냥 신체의 부분들, 즉 머리카락, 눈, 이빨, 허파, 간, 위장, 콩팥 등등을 지금 보고 있을 뿐이니까요.
If we disassemble a car into its constituent parts – engine, steering wheel, brakes, chassis, and so on - we can no longer apply the name ‘car’ to these disconnected parts.
만약 우리가 자동차를 그것이 구성하는 부품들로, 즉 엔진이나, 핸들, 브레이크, 섀시 등등으로 분해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이 분리된 부품들을 가지고 ‘자동차’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없게 됩니다.
So again, when a thing changes from one form to another, it can no longer be called by the previous name.
그래서 다시 말씀드리지만, 물체가 하나의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바뀔 때, 그것은 더 이상 이전의 이름으로 불릴 수가 없게 됩니다.
What was true before - ‘This is a body’, ‘This is a car’ - is no longer true; the prior assertion is therefore merely conventional truth.
이전에는 사실이었던 ‘이것은 몸이다’, ‘이것은 자동차다’는 더 이상 사실이 아니며, 고로 이전의 주장은 단순히 관습적 진리일 뿐인 것입니다.
In the very same way, if we analyse with Insight Knowledge, we see that conventional truth does not really exist. How this happens will be explained later in the book.
이와 아주 같은 방식으로, 만약 우리가 통찰지를 분석한다면, 관습적 진리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는 나중에 설명할 것입니다.
우 레와따 사야도 'The Truth Taught by All the Buddhas'
첫댓글 매일 올려주시는 법공양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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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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