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근[indriya]과 6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석가세존께서
12입처[ayatana]를 고안하여 가르친 이유가 무엇일까?.
그 둘을 같은 것으로 이해해도 괜찮은 건지..
불교는 무엇을 가르치는가?.
무상과 무아를 가르친다.
무상은 알겠는데 무아란 무엇인가?.
무아란 행위가 있지만, 행위의 주체인 나가 없다는 것이다.
이해가 쉽지 않은데.. 무아를 깨치면 어떤 좋은 점이 있는가?.
무아를 깨치면 일체 괴로움이 사라진다고 했다.
괴로움이 사라지면 굉장할 것 같은데..
깨친 이에게 물어보았나.. 괴로움이 정말 사라졌는지?.
석가모니와 아라한이라 불리는 그의 제자들은 괴로움이 사라진 것으로 가르치는데..
그 이후에 완전히 괴로움이 사라진 이들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괴로움이 완전히 사라졌지만, 그의 제자들은 완전히 그리되지 못한 것으로 보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서는 바로 그 이유를 밝혀, 무아를 깨치려는 이들에게 도움을 주려 한다.
21세기에 들어 세상은 기후 변화, 전쟁, 질병으로 인류와 생명을 당황시키고,
AI가 인간의 손발은 물론 두뇌마저 빼앗아가는 마당에..
자라는 이들은 게임에 빠져 늙어가는 줄도 모르고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는 요지음..
보는 자[안입처]와 보이는 것[색입처]이 무엇이고,
듣는 자[이], 느끼는 자[비,설,신], 생각하는 자[의]에 대한 관찰이 중요한가?..
하는 의심이 생길 것 같다.
세상에는 주인과 종이 있어..
주인으로 사는 삶과 종으로 사는 삶이 있다.
무아를 깨치려는 자는 주인으로 살려는 자라면,
무아를 모르거나 관심없어 중생들이, 선배들이 그랬듯 자기 나름 목표를 세우고 사는 자는 종살이를 벗어나지 못한다.
생명의 본질은 이기적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외부에서 생에너지 living-energe를 계속 흡수하고 있는 것으로..
살기 위해서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외부로 부터 생에너지를 취해야만 한다.
생에너지를 취하는 행위와 그 행위를 하고 있는 자를 우리는 주체라 하고, 주체를 '나'라고 한다.
고로 나는 선험적인 이기적 존재다.
나는 살기 위해 먹는 행위가 있고, 살아 있기에 생각하는 행위가 있으니..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 하듯.. 살아 있는 동안 생각을 한다.
'내가 있다', '나 없음을 깨치겠다' 하는 행위는 생각에서 나온다.
소크라테스 선생은 '나 자신을 알라'고 했는데.. 만물의 영장이요, 생각하는 동물인 '나'..
흔히 일체는 나와 세계라 하듯.. 나는 설령 피조물이라 해도 세상의 주인으로.. 창조주마저 내가 품으려 한다.
세상의 주인이 나이므로.. 그런 나는 분명히 있으련만.. 막상 나는 누구인가 하면 답이 궁해진다.
해서 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알려고.. 나는 누가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을 찾아 다닌다.
그 가운데 유명한 게 라마나 마하리쉬의 "나는 누군인가" 이다.
마하리쉬는 말한다.
모든 현상계를 접하는 감각기관이나 말하고 움직이고 생각하는 행위하는 자, 의식하는자는 물론 잠재의식도 내가 아니다.
나는 (수행을 통해) 현상계가 실재한다는 모든 인식을 부정하고 내려놓아 더 이상 부정할 것이 없어졌을 때..
그것을 지켜보는 순수한 앎이 있으니..
그것이 '참나(Atman, True Self)' 라고 했다.
마하리쉬의 참나는
'나는 마하리쉬님이 말하는 참나가 무엇인지를 보고 알았다고 하는 자'.. 라고
보고 있는 자가 참나라 한다.
마하리쉬님이 말하는 참나가 무엇인지 이해로 짐작은 할 수 있지만..
그것을 수행 실천하여 깨치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작업임을 직감하고 있으리라.
자기 스스로 그것을 수행하여 깨치는 것은 쉽지 않지만..
그 나를 발견하고 그 자리에 설 수 있다면..
현상계에서 일어나는 괴로움에 끄달리지 않을 것이니..
그 이상의 행복을 찾는 자는 사라지지 않을까..
이렇게 알면 마하리쉬처럼 현상계는 무상한 것으로 그대로 흘러가는 것으로 여기고,
수행으로 참나를 깨쳐 해탈에 이르는 게 된다.
그런데 말입니다.
석가세존은 라마나 마하리쉬와 같은 방향을 보고 있지만..
다른 차원을 본다.
<금강경>에 나오는 육안, 혜안, 법안, 불안의 차이는 같은 것을 보지만 각기 다른 차원에서 보는 것이다.
안(眼)과 색(色)을 인연하여 안식(眼識)이 생기니,
그것은 무상하고 유위(有為)이며 마음을 연해 생긴 것이다[心緣生].
여기에 나오는 마음을 연해 생긴 것[심연생]이 나에겐 '삼'인데..
불자이지만 동의하지 않는 이들이 많다. 왜?
<잡.214경>과 같은 내용으로 전하는 상좌부의 <쌍윳타 니까야, S35:93 쌍경>에는
2. “비구들이여, 쌍을 조건하여 의식이 발생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쌍을 조건하여 의식이 발생하는가?”
3. “안과 색을 조건으로 안식이 일어난다.
안은 무상하고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간다.
색은 무상하고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간다.
이처럼 이 (안과 색) 쌍은 움직이고 흔들리고 무상하고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간다.
라고 하여
안과 색은 무상하고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간다 고 할 뿐.. 마음을 연해 생긴 것[심연생]이라는 내용이 없다.
그러기에 안처와 색처는 안근, 색경으로 이해해도 별 문제가 되지 않으니..
마음에서 생기는 것은 3사에서 오직 6식으로..
보는 자인 안처와 보이는 대상인 색처는 물질의 화합으로 생긴 것이고,
안식을 포함한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인 6식만이 마음에서 생긴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생물 시간에 배운 보는 작용이란
외부에 존재하는 색[색경]이 존재인 눈의 망막[안근]에 사진이 찍히듯 맺히고,
맺힌 상이 신경 세포인 뉴런을 통해 뇌에 전달되면
그것을 과거 경험인 안식[심연생]이 분별 인식한다.
상좌부 설명은 현대 과학인 생물 시간에 배운 내용과 다르지 않아..
불교는 과학이라고 결론을 서슴없이 내릴 수 있다.
더불어 <214경>안에 나오는
'그것'은 '안(眼)과 색(色)'은 아니고, 오로지 '안식(眼識)' 만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고,
12처는 6근6경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을 경우 당연히 그리 해석하게 된다.
심지어 <잡아함경>의 다른 곳에서 의처와 법처를 제외한 10처는 4대 화합으로 생겨 있는 것을 전제로 설하는 경이 나온다.
그러기에 종종 상좌부에서는 적극적으로 '심연생'에 안과 색을 포함하는 것은 잘못일 뿐 아니라 어리석은 견해로 후세에 삽인한 것이라고 무시한다.
임진왜란 때 조선의 임금은 왜군에 거의 잡힐 뻔 했고, 병자호란 때에 조선의 임금은 청에 항복을 해.. 국권이 바닥을 쳤지만..
조선이 사라진 것이 아니듯..
상좌부를 포함해 온 세상이 '그것'은 6식만 가리키는 것이지, 12처 모두는 아니다 라고 아무리 윽박을 질러도..
12처와 6식인 3사 모두 마음을 연해 생긴 심연생임은 변함이 없다.
6근6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12처를 고안해야만 한 것처럼..
참고로 3사화합은
12처가 작용하는 게 아니라 12계로 바뀌어
주체인 안계와 대상인 색계와 과거 식인 6식계인 안식계의 화합작용[3사화합]이라 해야 한다.
3사화합할 때 12처는 18계의 12계가 되어 작용하고 있다.
므로 12처의 안과 색은 18계의 안과 색과 그 의미가 다르다.
18계의 안과 색은 안근과 색경과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계는 존재화 된 것이라 할 수 있기에.
만일 상좌부 주장처럼 심연생은 6식만을 의미하고, 의처와 법처를 제외한 10처가 존재라면..
극단적으로 말해그런 불교는 힌두교나 과학과 별 차이가 없는데.. 굳이 이 세상에 있을 필요가 있을까?.
있기는 해야겠다.
무엇이든 누구든 독점이 되면 문제를 일으킨다. 종교든 무엇이든 하나만 남게 되면 마찬가지로 횡포를 일으킨다.
일론 머스크를 조심해야 하는 것 처럼..
그러나 '그것'이 6식 뿐 아니라 12처 모두 심연생이어야 하는 이유는 명상과 6년 고행을 멈춘 이유이고,
보리수 아래에서 부처를 성취한 핵심으로.. 석가세존의 정통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계속)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
돌마을님의 메아리 울림에
늘 감사드립니다🙏😊